< 712. 중수의 자격-41- >
***
"아니 아저씨! 그걸 놓치면 어떡해요!"
뒤에 타고 있던 연두가 빼액 소릴 질렀다.
빛나의 차를 미행하던 택시기사가 난처한 듯 대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신호가 딱 걸리는 바람에···."
"그런 건 그냥 무시하고 갔어야죠!"
"신호를요? 저기 카메라 안 보여요?"
"그게 뭔데요?"
연두가 씩씩거리자 기사가 사거리 신호등 위에 설치된 과속 및 신호위반 카메라를 가리켰다.
"여기서 신호위반 하면 바로 벌금 낸다고요. 그리고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요?"
"아니 무슨!"
"연두야 그만해."
성격이 온순한 편인 나연이 연두를 만류했다.
"기사님이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
"오만 원이나 드렸다고!"
미행의 대가로 내민 돈을 거론하자 택시기사가 얼굴이 뻘게진 채 지갑에서 다시 오만 원을 꺼내 내밀었다.
"자요."
"뭔데요?"
"놓쳤으니까 다시 돌려줄게요. 이러면 상관없죠?"
"아니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되돌려준 기사는 이제 빚진 게 없어졌으므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학생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일 더 못하겠으니 저 앞 승차장에서 내려요."
"아저씨!"
"거, 젊은 아가씨들이 말이야. 몰래 사람 뒤쫓기나 하고."
"아놔, 어이없어 진짜."
"요금은 안 받을 테니 어서 내려요."
기사는 연두의 불만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두 사람을 내리고 가버렸다. 쫓겨나듯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 진짜 그걸 못 따라붙어 가지고."
연두가 여전히 씩씩거리자 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았니?"
"뭐가?"
"그 차 말이야. 계속 이상하게 운전했잖아. 마치 우리가 따라붙은 줄 아는 것처럼."
"우연이겠지."
"아니야. 잘 생각해봐. 마지막엔 갑자기 속도를 올려서 도망쳐 버렸다고."
"오빠가 우리가 미행하는 걸 어떻게 알겠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선팅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건···."
"됐어. 에이, 기분 잡쳤네. 건수 하나 올리나 싶었더니."
나연은 일이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다고 여기기로 했다.
"차라리 놓치게 잘된 일인지도 몰라. 난 도훈 오빠 협박하는 것도 영 마음에 걸렸거든."
"계집애, 너만 끝까지 착한 척이지? 난 뭐 좋아서 한 줄 아니?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오빠가 우릴 안 만나주니까 그러지."
"그래도 내일은 만나준다고 약속했잖아."
"그걸 어떻게 믿니? 상황을 모면하려고 거짓말했을 수도 있는 거지."
"설마."
"암튼, 내일도 바람맞히면 이번엔 정말 가만 안 있을 거야."
"어쩌려고?"
"어쩌긴? 의대생 사칭하고 여자 꾀려고 했다고 다 소문내 버려야지."
"연두야!"
"왜?"
"그러다 오빠가 우릴 정말로 미워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음···. 미워한다고?"
왈가닥인 연두에 비해 나연은 상대적으로 침착한 성격이었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충동적인 연두가 사고를 치려고 하면 자제시키는 쪽은 늘 나연이었다.
"난 오빠한테 미움받긴 싫어."
"아니 나는···. 그냥."
"내일은 분명 약속 지킬 거야. 그러니까 일단 기다려보자."
"알았어."
"그리고 혹시 모르니 내가 깨톡으로 물어볼게."
"그래 그게 좋겠다."
나연이 도훈에게 개인톡을 남겼다.
-나연 : 오빠, 내일 스파링 잊지 않으셨죠? ^^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타이밍에 도훈의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도훈은 무심결에 핸드폰을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아까 걔들한테 연락 왔어요."
"그 괴롭힌다는 애들 말이죠?"
"네."
"뭐라는 데요?"
도훈이 말없이 폰에 적힌 내용을 보여줬다.
-나연 : 오빠, 내일 스파링 잊지 않으셨죠? ^^
문자를 확인한 빛나가 표정을 굳혔다.
"아니, 이것들이 진짜! 스토킹도 모자라서!"
빛나는 스파링이라는 단어를 린치로 해석하고 흥분했다.
"그 폰 이리 줘봐요."
"왜, 왜요?"
"뭐라도 한소리 해야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거예요?"
"그, 그렇지만···."
"줘보라니까요? 내가 해결해 줄게요."
"아니에요. 이건 제가 알아서···."
그때 쪽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나연 : 어디서 볼까요? 저희 자취방도 괜찮은데.
"자취방? 무슨 스파링을 자취방에서 해요?"
도훈이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그걸 거에요."
"뭔데요?"
"동아리 연습하는 도장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대놓고 괴롭히진 못하거든요. 그래서 저번에도 자기 원룸으로 부른 적이 있어요."
"원룸요?"
"네···. 거기서 레슬링이나 하자고."
"레슬링?"
"말이 레슬링이지 일방적으로 조르고 팔 꺾고···."
"그건 완벽한 폭행이잖아요!"
"게다가 저번에 한 번은 제 거기까지···."
"거, 거기라고요?"
도훈이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네."
"거기가 설마···."
빛나가 자기도 모르게 도훈의 사타구니로 시선을 내렸다.
왠지 바지춤이 유난히 부풀어 보였다.
‘세상에, 내일 동정을 빼앗으려는 거구나!’
그때 뒤에 서 있던 차에서 길게 클랙슨을 울렸다.
빠아아아아앙!!!
빛나는 그제야 자신이 신호가 바뀌는지도 모르고 도훈의 바지춤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이런."
빛나가 비상깜빡이를 켜고는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은 채 도훈에게 말했다.
"가지 마요."
"네?"
"그 스파링이라는 거, 가지 말라고요."
"그럼 더 괴롭힐 텐데요."
"신고해요."
"신고요?"
"지금껏 말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해요. 협박에 폭행에 성추행까지."
"증거가 없는데요?"
"음···."
"내일 진짜로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당하다뇨?"
도훈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물었다.
"계속 따먹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면서요?"
"네."
"저번에는 중요 부위까지 더듬었고."
"더듬은 정도가 아니라 막 주물러 댔어요."
"세상에!"
빛나는 도훈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바보 같은 의대생 훈남이라니.
‘이대로라면 분명 그 계집애들이 도훈의 동정을 빼앗고 말 거야.’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엄연한 범죄였다. 드물긴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는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가지 마요. 증거는 천천히 모으면 되니까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네."
"나 참. 덩치는 산만해서 왜 그렇게 여자한테 당하고 살아요."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땐 안 그랬는데 남중 남고를 나오고 나니까 더 불편하고 어색해졌어요."
"제가 볼 땐 도훈 씨의 문제는 그거에요."
"뭔데요?"
"여자를 너무 모른다는 거."
"···모르면 안 되나요?"
"그리고 너무 순진해요."
"제가요?"
도훈이 웃음을 참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제가 순진하다고요?"
"그러니까 한참 어린 후배 여자애들에게 휘둘리는 거잖아요."
"아니 그건···."
"도훈 씨는 다른 걸 떠나 여자 공포증부터 고쳐야 해요."
"그러고 싶긴 한데···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빛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네? 왜 저를···."
"보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그리고 잊고 있나 본데 저 경찰이에요. 시민이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 지켜볼 경찰이 어딨어요?"
"아···. 가, 감사합니다."
다시 차가 정지선에 서자 빛나가 도훈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훈훈한 얼굴, 운동을 오래 한 것처럼 탄탄한 근육, 무엇보다 의대생이라는 검증된 지적능력까지.
누가 봐도 완벽한 이 남자가 웬일인지 만만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부끄러워 쳐다도 못 볼 것 같은 사람일 텐데, 성격을 알고 나자 너무나도 쉬워 보였다.
‘호구 자식.’
도훈에 대한 빛나의 평가는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탐이 났다.
‘저런 애를 가만 놔두자니 너무 아까운데···.’
빛나는 점점 도훈에게 욕심이 생겼다.
잘만 꼬드기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순진한 사내였다. 어차피 저대로 두면 어떤 여자에게든 휘둘리고 살 타입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나마 양심적인 자신이 거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확 내가 따먹어버려?’
빛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자신이 너무 도훈을 성적으로 의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아냐 아냐. 이럼 안 되지. 나는 그래도 경찰인데···.’
하지만 한 번 든 삿된 생각은 쉽게 떨쳐 지지 않았다. 그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처럼 허술해 보였다.
‘가만. 내가 직업이 경찰인 거지 연애는 내 자유잖아?’
빛나가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경찰 일을 하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을 다 보았다.
그중엔 신도와 간음한 목사도 있었고, 고등학생밖에 안 된 제자를 자빠뜨린 선생도 있었다. 그뿐인가? 성매매 단속에 걸리거나 강간이나 도촬로 끌려온 범죄자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나쁜 사람들에 비교하면 자신은 죄를 짓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담당 일진에게 붙잡혀 쩔쩔매고 있는 순진한 의대생을 구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맞아. 괜한 직업윤리 때문에 괜찮은 남자를 놓칠 순 없지.’
마음을 먹은 빛나가 도훈을 향해 물었다.
"과외 스케쥴 사라졌으니 잠깐 시간 되죠?"
"네?"
"제가 도와준다고 그랬잖아요."
"아···. 근데 출근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여유 있어요."
"네."
"잠깐 차 좀 세우고 얘기하죠."
빛나가 인근 공원 주차장 쪽으로 차를 이동시켰다.
주차를 마친 빛나가 시동을 끄며 도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가슴의 볼륨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한껏 내민 자세였다.
"아까 그 얘기 자세히 좀 말해봐요."
"어떤···."
"그 성추행 건이요."
"아···."
도훈이 얼굴을 붉혔다.
"그게···."
"괜찮아요. 증거 수집 차원에서 물어보는 거니까. 대신 솔직하게 대답해 줘야 해요."
"네."
도훈이 꿀꺽 침을 삼키더니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게··· 한번은 자기 자취방으로 부르더라고요."
"누가요?"
"둘 다요."
"둘이서요?"
"네. 자취방에 가니까 둘 다 있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없고, 그 여자 후배라는 두 사람만 집에 있었다는 거네요?"
"네."
"계속 말해봐요."
"처음엔 별다른 낌새가 없었는데 갑자기 스파링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스파링···. 도훈 씨는 하고 싶지 않았고요?"
"당연하죠."
"암튼 그래서요?"
빛나가 점점 도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벨트가 죄이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골 사이를 파고들자 두 개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튀어나왔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보라는 것처럼 의도성을 띤 행동이었다.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힐끔거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갑자기 뒤에서 제 목을 조르더라고요."
"목을요?"
"네. 리어 네이키드 초크라던가?"
"그게 뭔데요?"
"그··· 격투기 기술 같은 거예요."
"그렇군요. 한 사람이 목을 졸라서 도훈 씨를 결박했다는 거군요."
"네."
"그리고?"
"그리고는···."
도훈이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마치 수치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빛나가 도훈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줘야 해요. 그래야 정확하게 증거를 수집할 수 있으니까."
"네."
"한 명이 뒤에서 목을 조르고 그다음에는요?"
"제가 숨이 막혀서 컥컥대는데 나머지 한명이 갑자기···."
"갑자기?"
"제 거길···."
"거기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추상적인 단어는 오히려 진술에 방해가 되니까요."
빛나는 마치 도훈을 유도 신문하듯 계속 추궁했다.
결국, 도훈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제 성기를···."
"성기를, 음."
"네. 제 성기를 막···."
"어떻게 하던가요?"
"막 만지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요. 어떻게 만졌다는 거죠? 콱 붙잡던가요?"
"아, 아뇨."
"그럼 잡고 흔들던가요?"
"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도훈 씨. 성추행이 입증되려면 부끄러워도 정확하게 진술해야 해요. 우연히 스쳤다던가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오히려 불리할 수 있어요."
"음···. 그러니까 처음에 바지 위에서 만지다가."
"만지다가?"
"지, 지퍼를!"
"지퍼를 내렸군요!"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요?"
"다, 다행히 팬티가 있어서."
"그럼 팬티 위로 붙잡았나요?"
"···네."
"얼마나 세게 잡았죠?"
"네?"
"그것도 중요해요. 어느 정도 강도였나요?"
"그, 그게···."
도훈이 허벅지를 만지던 빛나의 손이 슬금슬금 사타구니 쪽으로 움직였다. 도훈은 그녀의 요망한 손짓에 당황한 것처럼 다리를 오므렸다.
"와, 왕 순경님, 소, 손이."
"아차.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러나 빛나는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도훈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중요한 부분이니까 확실히 해 둬야겠어요. 혹시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제가 확인해 볼 수 있나요?"
"네, 네?"
빛나가 다시 또렷하게 말했다.
"무척 중요한 부분이에요."
"네, 네."
빛나의 손이 도훈의 바지춤 위에 얹어졌다.
살짝 발기된 그의 물건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빛나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바보 같다니···. 진짜 확 따먹어 버리고 싶네.’
빛나가 불쑥 바지 위로 도훈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였나요?"
< 712. 중수의 자격-4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