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1. 중수의 자격-40- >
[아니 이런 참신한 개소리를!]
‘쉿-. 매소드 연기에 방해되니까 닥치고 있어.’
"도, 동정을!"
도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본 빛나는 완전히 착각하고 말았다.
‘그 여자 후배라는 아이들이 설마 담당 일진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거였나?’
이는 학교 폭력 관련 사안을 다루며 알게 된 용어였다.
왕따 대상자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담당일진.
놀랍게도 여학생이 남자를 괴롭히는 경우는 의외로 흔했다. 인천의 모 왕따 사건에선 불량한 여학생들의 지속적인 폭행과 갈취로 남학생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 관계가 꼭 물리적인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셈이다.
"세상에!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대학교에 와서까지 그렇다고요?"
하지만 들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허우대 멀쩡한 키 180 넘는 근육남이 자기 덩치의 반도 안 되는 여학생에게 두들겨 맞으며 동정을 위협받고 있다니··· 그것도 대학생이나 되가지고!
빛나가 혼란스러워하자 도훈이 증거를 제시하듯 덧붙였다.
"···지금도 이 순간에도 스토킹을 당하고 있어요."
"스토킹이라뇨?"
"뒤에 택시 따라오는 거 보이시나요?"
도훈의 말에 빛나가 힐끔 룸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아까부터 한 대가 계속 붙어 오고 있긴 한데···."
"저도 설마설마 했거든요. 그래서 아까 뒤를 확인해 본 거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뒤쫓아 오는 거 같아요."
스토킹은 명백한 범죄다.
아니 스파링을 가장한 2:1 겨루기는 집단 린치며, 동정을 빼앗겠노라고 엄포를 놓은 것 또한 협박과 강간모의에 준한다.
경찰인 빛나는 도저히 이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다.
"도훈씨. 잠자코 듣고 있으려고 했는데 경찰의 양심상 도저히···."
"제발요."
"네?"
도훈이 간절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그냥···. 모른 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어떻게 이걸."
"어차피 증거도 없잖아요. 만약 걔들이 잡아떼면 누가 제 말을 믿어 주겠어요?"
빛나는 도훈이 말을 이해했다.
180이 넘는 근육남이 160 조금 넘는 깜찍한 여대생 둘에게 폭행과 강간 협박을 당한다고 하면 어느 누가 믿어 주겠는가? 빛나는 경찰이었고, 때문에 메스컴에 가끔 나오는 역고소나 무고에 대한 부분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 나라의 법은 여성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남성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형편이다.
자칫 어설픈 저항은 도훈을 가해자로 둔갑시킬 가능성이 컸다. 도움을 주려고 했다가 피해만 입히고만 꼴이다.
학교 폭력 징계 위원회를 주관하면서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가해자들을 여럿 봐왔다. 누구도 잘못을 쉽게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사실 관계가 명백한 경우조차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충동적인 청소년기라, 자라나는 새싹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따위의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때린 놈은 떵떵거리며 학교생활을 하고있고, 맞은 놈은 두려움에 떨며 전학을 가야 했다. 도훈의 경우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빛나가 씁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정말이지."
그러면서 앞차와의 간격이 벌어지자 갑자기 엑셀을 세게 밟았다.
부아앙!!
차가 순간적으로 가속이 붙으며 빨라졌다.
도훈이 머리위로 손을 뻗어 안전고리를 붙잡았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미행당하는 것 같다면서요?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야죠."
빛나의 차가 속도를 올리며 질주하자 뒤따르던 택시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녀가 급격히 차선 두 개를 질러 우회전을 하면 똑같이 우회전을, 신호가 간당간당할 타이밍에 좌회전을 돌면 미친 듯이 따라붙어 좌회전을 했다.
몇 번의 실험 끝에 빛나는 택시에 도훈의 담당 일진이 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정말 스토킹을 당하고 있잖아?’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남자라고 모두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은 아니다.
특히 공부만 열심히 한 범생 일수록 의외로 남성성이 결여 된 경우가 많다. 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다 보면 점점 폭력의 강도는 짙어진다. 한마디로 호구 잡히는 것이다.
빛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는 도훈의 태도를 보며 그의 말이 진짜라고 믿고 말았다.
‘분명해. 고등학교 때 양아치처럼 굴던 여자애들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거야.’
빛나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의대생 선배.
훤칠하고 잘생기기까지한 도훈을 처음엔 여자애들이 무척이나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도훈은 여자를 대하는 데 서툴렀고, 고백하는 여자애들을 피하며 거부했을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여학생들은 도훈에 대한 애증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런데 도훈의 대처가 미온적이고, 방어적이다.
공격을 당하면 응당 화를 내거나 싫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병신같이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
모욕은, 상대가 감내할수록 격해진다.
두 사람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지고 도훈이 자기방어를 목적으로 시작한 운동써클까지 따라와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때리고 윽박지르고, 창피를 주며 도훈을 모욕한다.
따먹어 버릴 거라고.
동정을 빼앗겠다는 협박까지 한다.
그런데도 도훈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나이도 한참 어린, 그것도 여학생에게 당한다는 사실이 창피해 어디가서 하소연하지도 못한다. 급기야는 스토킹을 당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빛나의 머릿속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저런 머저리 같은···.’
빛나는 경찰이기에 앞서 여성의 한 명으로서 도훈을 평가했다.
이 녀석은 덩치만 큰 순둥이다.
공부만 잘했지, 인간관계에 서투른 바보다.
강간 협박을 당하면서도 쩔쩔매기에 급급한 멍청이다.
심지어 경찰인 자신의 옆에 있음에도, 스토킹하는 여자애들에게 겁먹고 부들부들 떠는 머저리다.
‘하아. 어떻게 저런···.’
그러나 놀랍게도 그 모든 단점들이 빛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바보같은 행동이 동정심을 유발했고, 그녀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여자애들이 그의 동정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하긴 나라도 저런 애면···.’
빛나는 도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그러다 퍼뜩 택시가 뒤따라 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갓길에 차 세울게요."
"네?"
도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왜, 왜요?"
"저 경찰이에요. 스토킹은 명백한 범죄고요. 이 상황을 그냥 묵과하고만 있으란 말이에요?"
"아, 안돼요. 그러면 저는 정말 보복당할 거예요."
"보복이라뇨?"
"쟤들은 악마예요. 집요할 정도로 사람을 괴롭힌다고요. 제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걸 알면 대학 생활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요. 저··· 의대 무사히 졸업하고 싶어요."
도훈이 겁먹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빛나가 빼액 소리쳤다.
"그럼 계속 병신같이 당하고만 있을 거예요!"
"그, 그럼 어떻게···."
도훈이 놀란 듯 입만 뻥긋거렸다.
"맞서야죠! 왕따 당하는 애들 특징이 뭔 줄 알아요? 화를 내야 할 때 낼 줄 모른다는 거예요! 경찰로서 하면 안 되는 얘긴거 아는데 가해자만 나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라고요!"
"······."
도훈이 심하게 꾸중들은 아이처럼 고개를 떨궜다.
지켜보던 빛나는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하-. 정말···."
"무슨 말씀이신 줄은 알겠어요. 하, 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도훈이 간곡히 사정하자 빛나도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 상태라면 앞으로 괴롭힘을 더 심해지는 결과만 나을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지 않는 한 어설픈 저항은 안하니만 못하다.
"···알겠어요."
빛나가 속도를 올리더니 무리해 차선을 바꾸어 나갔다.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에 인접 차량에서 클락션을 빵빵 울려댔다.
"하지만 내 차를 뒤쫓는 건, 내가 못 참겠어요."
빛나는 곡예 운전을 하듯 차선을 넘나들더니 교차로에 이르러 급격히 가속하며 노란불이 바뀌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버렸다.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정지선에 걸려선 택시를 보고 조소했다.
"흥, 감히 어딜···."
빛나의 박력 있는 운전에 도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따돌렸어요. 아마 이젠 못 쫓아 올 거예요."
"휴우-."
도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 빛나가 네비를 보고는 아차했다.
"앗, 이런. 택시를 따돌린다고 너무 돌아 와버렸네요. 원래 저기서 대교 방면으로 빠졌어야 했는데···. 과외를 좀 늦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도훈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는 척하더니 갑자기 메시지를 읽는 시늉을 했다.
"어?"
"왜요?"
"몰랐는데 문자가 왔었네요. 오늘 과외 못 할 것 같다고."
"뭐라고요?"
"아이참, 안될 거면 미리미리 연락 주지···. 죄송해요. 기껏 태워다 주셨는데."
"아니에요. 전 어차피 가는 방향이었으니까."
"저 때문에 출근 늦으시는 거 아니죠?"
빛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2시간 남았어요."
"네?"
"교대 그렇게 일찍 안 한다고요. 그냥 먼저 나온 거예요."
"아···."
빛나가 도훈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전 그쪽이 바람둥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도훈이 격렬히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건 그냥 걔들이 저를 괴롭히려고···."
"알아요. 이젠 알 것 같아요."
도훈이 자괴감에 빠진 듯 고개를 떨구었다.
"···저 진짜 바보 같죠?"
빛나가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으며 넌지시 도훈의 손등에 손을 포겠다.
"그런 생각 말아요. 괴롭히는 사람이 나쁜 거지,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잘못한 게 없어요. 자책하지 마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전 왜 이러는 걸까요?"
도훈은 그녀의 손길에서 끈적한 기운을 느꼈다.
위로를 하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스킨쉽을 한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후후. 동정심 자극 작전은 성공한 것 같은데?’
[정말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개소리가 통할 수 있죠?]
‘그녀가 학교폭력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이용한 거야. 왕따 사건이라면 숱하게 봐왔을 테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나연두 이 잡것들이 나를 미행한 게 결정적이었지.’
[스토킹 말이군요.]
‘그래. 걔들은 내가 다른 여자랑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 궁금해서 뒤쫓은 걸 거야. 대체 어딜 가나 싶어서. 괴씸한 것들 같으니.’
[두 사람은 이제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감히 내 업적 활동을 훼방 놓다니. 가만두면 안 되겠어. 나중에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지. 하여간 여자애들은 지속적으로 눌러주질 않으면 한번씩 기어오른단 말이야?’
[주인님이 방치한 책임도 없지 않습니다.]
‘여자가 너무 많아서 그래. 관리하는 여자들 모두 챙긴답시고 로테이션 돌렸다간 미션이나 업적에 도전할 시간도 없을 걸?’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하실 겁니까? 빛나양의 호기심을 끄는덴 성공하신 것 같은데···.]
‘일단 경찰복 입을 때까진 붙어 있어야지. 2시간 뒤에 출근한다니까 그 전까지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군.’
"제 생각엔 도훈씨가 너무 공부만 하면서 세상을 살아서 그래요."
"공부요?"
"그렇죠. 가끔 주변을 돌아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고, 사람도 두루두루 만나면서 인간관계도 배워야 하는 거거든요."
"아···."
"책으로는 그런 걸 배울 수 없잖아요."
빛나의 말에 도훈이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 같아요. 제가 너무 책으로 세상을 배웠나 봐요."
"그러니까요. 공부 머리 좋다고 사람 사귀는 걸 잘하진 않는건데 말이에요."
빛나가 도훈의 손을 계속 붙잡은 채 말했다.
"그리고 도훈씨는 여자 관계도 문제에요."
"네? 그게 무슨···."
"여자를 사겨보질 않아서, 여자들에게 쩔쩔매는 거라고요."
"그,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서."
"그럼 계속 그런 식으로 살 거예요? 쥐톨만한 후배들한테 괴롭힘 당하면서?"
도훈은 빛나가 넌지시 시그널을 보내는 것을 눈치챘다.
‘이때다. 추천 멘트 한 번 쏴줄때가.’
"···제, 제가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라."
도훈이 내뱉은 추천 멘트가 빛나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도훈은 그녀가 원하는 완벽한 남자였다.
"내성적이면··· 바꾸려고 노력해야죠!"
"어, 어떻게요?"
"아무 여자라도 만나요."
"그, 그게···."
빛나가 눈을 반짝였다. 어느새 도훈의 손을 잡은 손은 허벅지를 함께 쓰다듬고 있었다. 도훈에 대한 호감이 올라가면서 자신이 가진 지배적인 성향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만나보면 알 거예요! 여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 그럴까요?"
"당연하죠! 왜 그렇게 여자를 겁내는데요? 힘 없어요?"
빛나가 정지선에 걸린 차 안에서 도훈의 이두박근을 더듬었다.
"근육도 이렇게 단단한데!"
"무, 물살이에요."
"거짓말. 가슴도 이렇게 탄탄한데도요?"
그녀의 손이 허락도 없이 도훈의 가슴을 쓸어 담았다.
마치 도훈을 희롱하는 모양새였다.
"저, 그, 그게···."
"혹시 고자에요?"
"네?!"
도훈이 놀란 나머지 펄쩍 몸을 들썩였다.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대체 뭐가 문젠데요? 말해봐요. 나도 여자니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왜 그렇게 여자를 무서워해요?"
도훈은 자신을 먹잇감처럼 노리고 들이대는 빛나의 모습에 속으로 겨우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 그게 말이죠···."
< 711. 중수의 자격-4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