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8. 중수의 자격-37- >
***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처음 보는 여자, 그것도 여경을 상대로 이렇게 순조롭게 공략해낼 줄이야. 역시 사람은 똑똑하고 볼 일이다.
[이젠 완전히 사기꾼 같습니다, 주인님.]
‘사기라니?’
[어림없는 모쏠에 의대생 행세라니요. 그건 주인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사범대생 이도훈은 진짜 나야?’
[네?]
‘네가 까먹었나 본데 내 실체는 불혹이 넘은 아저씨라고. 심지어 애 아빠이기도 했던. 이도훈은 그저 빌린 몸뚱이일 뿐이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본질은 결국 똑같다는 소리야. 내가 체육교육과 이도훈이건, 의대생 이도훈이건 어차피 그건 내 가면일 뿐이라고. 어느 모습이건 진짜가 아닐바에야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투영해 주는 편이 낫지 않겠어?’
[완벽한 궤변입니다.]
‘어쨌든 빛나 입장에선 손해 볼 거 하나도 없잖아. 자신은 풋풋한 의대생과 데이트를 즐긴다는 착각에 행복할 테니. 똑똑하고 순진한 의대생과의 하룻밤. 평생 기억에 남을 걸?’
[옛말에 한 사람을 오래 속일 순 있어도, 동시에 여러 사람을 속일 순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짓말은 필시 들통나는 법입니다.]
‘굳이 여러 명을 속일 필요가 있나? 어차피 한 명만 속이면 끝나는 문젠데 말이야.’
그러나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갑자기 충돌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보! 경보! 어장관리에 포함된 인원들이 근접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장난하지 마.’
[농담 아닙니다. 어서 어플을 확인해 보십시오.]
‘이런 젠장!’
재빨리 스크린을 터치해 어장관리 어플을 확인했다.
<이나연, 이연두 까페로 접근 중
‘아니! 하필 쌍나연두라니!’
[그러게 제가 조심하라고 했잖습니까. 어서 대피하십시오.]
‘어디로!’
대학에서 가까운 커피숍을 고른 것이 화근이었다.
생각해보니 별다방은 평소에도 학생들이 많이 찾기로 유명한 곳이다. 게다가 국성대 학생들을 위해 특별 할인 행사까지 상시로 하다 보니 유난히 국성대 학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나연과 연두가 이곳으로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아 2층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퇴로라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뿐이었다. 1층으로 후다닥 뛰어나갈까 생각했으나, 그 사이 경보음은 더욱 크게 울려왔다.
<이나연, 이연두 현재 2층 계단 오르는 중
"흐억! 안 돼!"
최악의 위기다.
질투의 화신인 두 사람 앞에서 처음 보는 여자랑 단둘이 커피를 마시는 것도 모자라, 의대생 행세까지 했다는 걸 들키는 날에 동네방네 창피는 물론 대학 생활에 길이 남을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당황한 나는 계단에서 안 보이도록 등을 돌려 앉으며 고개를 바짝 숙였다. 이젠 나연과 연두가 나를 못 보고 지나치길 바라는 수밖에.
그 사이 화장실을 다녀온 빛나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응? 자리 바꿔 앉으셨나요?"
빛나는 갑자기 자리를 바꿔 앉은 내가 이상했는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을 했다간 혹여 2층으로 올라온 나연과 연두가 눈치챌까 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왜요? 그 자리가 더 편하세요?"
끄덕끄덕.
대답을 않고, 고개만 끄덕이자 빛나도 살짝 골이 난 모양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저랑 더 얘기하기 싫다는 뜻인가요?"
빛나가 갑자기 허리에 두 팔을 얹으며 언성을 높였다.
딴에는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갑자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거리자 무척이나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도리도리.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봐요 이도훈씨, 사람이 얘길 하면···."
"응? 도훈 오빠?"
"갑자기 왠 도훈 오빠?"
"방금 도훈 오빠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어? 저기 저 사람 도훈 오빠 아니야?"
하필 근처에 있던 나연과 연두가 내 이름을 듣고 말았다.
두 사람은 등 돌린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맞네. 뒷모습이 딱 도훈 오빠네."
"오빠, 거기서 뭐하세요?"
‘씨발, 좆됐다!’
[하여간 조심하라고 했잖습니까. 일이 잘 풀릴수록 더 긴장하셔야죠.]
‘그게 지금 상황에서 할 소리야?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지?’
[저도 그게 궁금하군요. 무슨 감언이설을 모면하실지.]
뒤에서 나연과 연두가 내 이름을 부르자 빛나도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등 뒤를 가리키며 눈짓을 보냈다.
‘···안 되겠다. 이렇게 된 거 정면돌파하는 수밖에.’
나는 그제야 두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어, 나연이랑 연두구나. 여긴 어쩐 일로?"
동시에 빛나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저희 후배들이에요."
"아, 후배. 그럼 의대···."
나는 빛나의 말이 채 나오기 전에 재빨리 나연과 연두에게 소리쳤다.
"너희들도 인사드려. 이쪽은 왕빛나 순경님이셔."
갑작스러운 4자 대면에 여자 셋이 뻘쭘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나눴다.
"근데 순경님이라고요?"
"두분은 무슨 사이···."
"아, 그게 아니라 내가 지갑을 찾아 드린다고···."
"지갑요? 오빠 지갑 잃어버렸어요?"
"와, 요샌 경찰이 잃어버린 지갑 배달도 해주나 보네?"
연두가 유난히 까칠하게 굴었다.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인 연두는 당황하는 나의 표정을 읽고, 나와 빛나의 관계를 대충 눈치챈 느낌이었다.
"아니 내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쪽 순경님 지갑을 찾아드렸다고."
"아아, 그말이구나."
"전 또 여자친구라고, 호호."
나연이 흘리듯 내뱉은 말에 빛나가 얼굴을 붉혔다.
"아,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나연은 빛나의 커다란 가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더니 나를 향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니. 이 오빠 조심하세요. 완전 바람둥이니까."
"뭐, 뭔 소리야?"
"예? 저한텐 모쏠이시라고···."
"네? 모쏠요?"
"푸흡!"
[벌써 좆된 거 같은데요.]
‘아, 안돼. 이럴 순 없어!’
나는 빛나를 돌아보며 강하게 부정했다.
"하하! 후배들이 저랑 친해서 장난이 좀 심하니 이해하세요."
그와 동시에 몰래 발바닥으로 두 사람의 발을 꾹 눌러 밟았다. 나의 시그널을 확인한 나연과 연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갑작스레 변명을 늘어놓았다.
"호호, 맞아요, 농담이에요 농담."
"도훈 오빠 모쏠 맞고요. "
"아이참,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농담이 과했네."
"근데 오빠. 저희 자리도 없어서 그런데 같이 합석해도 돼요?"
"아니 저기 자리···."
"오랜만인데 같이 얘기도 하구요. 네? 모쏠 오빠."
연두의 얄궂은 눈매를 보고 깨달았다.
이들은 나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으으! 이것들 진짜!’
[참으셔야 합니다. 어떻게든 이번 위기를 넘기셔야 다시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다 된 밥에 뜸만 들이면 끝날 일인데 거기다 똥을 뿌리네 이것들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잘 달래서 빛나의 의구심을 지우는 수밖에.
"그, 그래. 같이 앉자. 괜찮으시죠?"
"네, 뭐···."
빛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연과 연두는 기다렸다는 듯 내 양옆으로 둘러 앉았다.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라 좌웬수, 우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빛나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은 편에 합석했다.
"후배님들하곤 많이 친하신가 봐요. 공부만 열심히 했다더니···."
빛나는 마치 지금껏 했던 말을 부정하는 뉘앙스로 중얼거렸다. 남녀 후배가 찰싹 붙어 앉는 모습을 봤으니 누구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 애들은 그러니까···. 그, 그렇죠 동아리를 같이 하고 있어서···."
연두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저흰 같은 동아리거든요."
"무슨 동아린데요?"
"음, 무도 동아린데 각종 무술 유단자끼리 모여서 교류하는 모임이에요. SP라고."
빛나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 에스··· 피요?"
"네, 스파링 파트너의 약자요."
"아, 스파링 파트너구나. 도훈씨는 의대 공부도 힘든데 운동도 하시나 봐요."
"풉-! 의대요?"
커피를 마시던 나연이 갑자기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이 쌍으로 미친년들은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이 지랄을 떠는 걸까?
"의대생이시잖아요. 두 분도 도훈씨 후배니까 같은 전공 아니세요?"
나연은 나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학과마저 속인 것이 경멸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아으! 제발 쫌!’
동시에 의자 밑에서 몰래 나연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얏!"
"왜 그래 나연아?"
"아니 벌써 모기가 있나. 암튼 맞아요 저희도 의예과 다니고 있어요. 그치 연두야."
"응. 그렇지. 우리가 좀 공부를 잘하는 편이잖니? 호호!"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자 빛나도 점점 뭔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연과 연두를 천천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근데 요샌 공부 잘하는 분들이 예쁘기까지 하는 구나."
"호호, 저희가요?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더 예쁘세요. 몸매도 훌륭하시고."
나는 빈정거리는 연두의 옆구리를 티나지 않게 쿡- 찔렀다.
‘제발 눈치껏 좀 행동해!’
"윽!"
"왜 그래 연두야?"
"그 모기가 이제 나한테 왔나봐."
연두가 나를 한 번 째려보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오빠 요새 너무 동아리 안 나오시는 거 아니에요? 공부 하시느라 바쁘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쁜 여경님하고 데이트를 할 줄은 몰랐네."
"데이트라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아, 도훈씨가 제 지갑을 찾아주셔서 잠시 뵌 거예요. 오늘 처음 만났구요."
"아항, 그러시구나. 전 또 이것 때문에 SP 안 나오신다고. 그치 나연아?"
"그러니까요. 저희들하고 같이 스파링도 안 뛰어주시고. 섭섭해요, 선배."
눈치를 보아하니 두 사람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섹파와 비슷한 약자인 SP를 써가며, 스파링을 해주는 전제로 나에게 협조해 주겠다는 일종의 거래 제안이었다.
의도를 파악한 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동아리 다시 나가려고 했어. 요새 시험이 바빴잖아. 너희들은 아직 예과라 모르겠지만 본과생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시험이거든."
"아항, 그렇죠. 저흰 예과니까."
"맞아요. 본과부턴 학고 안 맞으려면 진짜 피똥싸게 공부한다면서요."
모처럼 나연과 연두가 죽을 맞추며 지원 사격했다.
내가 정확히 의도를 읽은 게 맞나보다.
"암튼 원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스파링 떠 줄게."
"정말요?"
"약속한 거죠?"
"이야, 역시! 오빠 화끈하다니까."
빛나는 우리 셋의 대화에서 살짝 소외감을 느끼는 듯 말없이 차만 홀짝거렸다.
사실 소개팅도 아니고, 간신히 호감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낯선 여자들과 합석이 되었으니 몹시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할 말이 없었다.
"참, 너희들 바쁜 일 있는 거 아니니?"
"바쁜 일요?"
"어. 아까 과톡방 보니 오늘 1학년들 모임있다는 거 같던데?"
‘제발 좀 가라, 가!’
나연과 연두는 서로를 쳐다보며 씩 웃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우리 모임이 있었지?"
"아이참, 예과도 너무 바쁘단 말이지. 의대생들이란."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서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방해해서 죄송했어요."
"즐겁게 노세요."
"그래. 잘 가."
"오빠 내일 스파링 잊지 말구요."
"2:1로 덤빌테니 각오하세요!"
두 사람은 끝까지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기며 퇴장했다.
간신히 두 사람을 떼어 놓고 나니 빛나가 뚱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지는 표정. 그러나 워낙에 큰 가슴에 팔짱을 끼우자 오히려 가슴을 밑에서 받쳐 올린 형국이 되어 커다란 가슴이 터질 듯이 앞으로 돌출되었다. 이건 뭐 양쪽에 미사일을 장착한 느낌이군.
‘흐억. 대꼴이네. 왜 저렇게 있는 거야?’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요. 빛나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공부만 열심히 하는 타입은 아니신 거 같네요."
"아, 저 후배들이요? 애들이 워낙에 털털해서 하하."
"흠. 아무튼 전 이만 일어나 볼게요."
"네? 가시려고요?"
"예, 뭐. 오전에 비번이라 저녁엔 교대 근무라서요. 이제 집에서 쉬다가 출근준비나 하려고요."
‘아뿔싸. 완전히 튼 것 같은데···.’
빛나는 뭔가 속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재빨리 그녀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럼 그렇지. 잘생긴 남자들은 하나같이 얼굴값 한다니까? 아까 그 두 명도 바짝 옆에 붙어 앉는 거 보니까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더만. 바람둥이가 확실해.}
[주인님을 정확히 간파한 것 같은데요?]
‘안 돼. 여기까지와서 미션을 포기할 수 없어.’
[그럼 어쩌시게요? 버스는 지나갔습니다.]
‘어떻게든 들이대야지.’
"혹시 집이 어디 방향이세요?"
"왜요? 태워주시려고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도 차 가지고 왔거든요."
{흥. 수작 부리긴 웃기고 있으셔.}
"아, 그게 아니라 같은 방향이면 저를 좀 태워달라고 부탁드리려고."
"네?"
"전 아직 차가 없어서···."
"아, 학생이시랬지, 참."
"부탁 좀 드릴게요. 빛나 순경님."
{흠. 그래도 지갑을 찾아준 사람인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고. 지원동 가는 방향이면 태워다 주지 뭐.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어느 쪽으로 가시는데요?"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저 지원동이요."
< 708. 중수의 자격-3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