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725화 (698/2,000)

< 707. 중수의 자격-36- >

도훈이 설명했다.

‘처음 보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무엇을 먼저 볼 것 같아?’

[얼굴이나 외모 뭐 그런 거 아닌가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직장인일 경우는?’

[음, 직업이나 연봉? 현실적으로 따진다면요.]

‘맞아. 그렇지만 딱 봐도 나이가 대학생 정도면 직장도 없고 연봉은 제로일 거 아냐.’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자, 그러면 어떤 전공이 여자들에게 가장 전망있어 보일까?’

[그게 의대생이라는 건가요?]

‘그렇지. 의대라는 것 만큼 확실하게 직업을 보장해 주는 대학은 없거든.’

[왜요?]

‘생각해 보라고. 예를 들어 행정학과 학생이야. 그럼 공무원 시험에 다 합격한다는 보장이 있어?’

[글쎄요, 경쟁률이 워낙···.]

‘그치? 사범대 생은 어떻고? 교직 임용시험은 뭐 쉽나?’

[쉽지야 않죠.]

‘법대 다니면 다 판검사, 변호사 돼?’

[그것도 좀···.]

‘하지만 의대는 다르다 이거야. 의대나와서 의사 못 된 사람이 지금까지 있을 것 같아?’

[그정도 입니까?]

‘의사 자격 시험이라 불리는 국시 합격률이 90%가 넘어. 의대는 들어가기가 힘들고, 학점 따기가 토 나올 정도라 그렇지 의대를 가면 의사와 동급 취급을 해준다는 말씀이야.’

[그러니까 의대생 행세를 하셨다? 전도유망한 학생인 걸 보여주려고요?]

‘또 하나 있어.’

[뭔데요?]

‘한 사람의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 수 있다는 점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가령 누군가 의대를 다닌다고 해. 당연히 학창시절 수재소리 들을 만큼 공부를 잘했을 거 아니야. 공부를 잘하려면 딱 두가지 밖에 없거든.’

[과거의 주인님처럼 천재던가···.]

‘아니면 노력을 천재적으로 하던가.’

[오호라.]

‘그치? 뭐가 됐던 좋은 쪽이잖아. 보통 의대생을 보면 둘 중 하나는 확실하단 말이야. 얘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머리가 좋거나, 아니면 노력을 정말 열심히 했거나.’

[학과 간판만으로 따고 들어가는 셈이군요.]

‘그렇지. 다른 전공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증명하지 못하잖아. 사범대생이지만 의대생보다 머리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평범한 대학을 나왔지만 돈 버는 재주가 뛰언서 의사보다 많이 벌 수도 있을 거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건 증명하기 어

렵다는 거야. 사람은 앞으로의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높이 평가받는 게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발자취로 인정받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의대생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높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훌륭한 타이틀이란 셈이지.’

[흐음, 그런데 왜 하필 그 부분을 어필하신 겁니까? 주인님은 그런 간판 없이도 훈훈하고 잘생긴 미남이신데요.]

‘싸이코 메트리 첫 장면 기억나?’

[지갑을 사주던 장면이요?]

‘그래. 거기서 보면 빛나가 3년만에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나오잖아.’

[그렇죠.]

‘그걸로 미루어 볼 때 빛나는 결코 뛰어난 인재는 아닐거라고 생각했어. 나중에라도 붙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공시 낭인으로 낙오되기 딱 좋은 케이스잖아.’

[흠.]

‘그럼 그런 빛나에게 공부를 아주 잘하는 의대생은 어떻게 보일까?’

[···글쎄요.]

‘신이지.’

[에이, 무슨 그 정도로 고평가를.]

‘아니야. 공부를 잘못하는 사람에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어. 즉, 빛나에게 외적인 매력보단 내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를 단박에 어필할 수 있는 간판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야.’

[주인님의 의도는 알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까요?]

‘후후. 두고 봐. 이제 곧 빛나가 커피를 들고 올테니까. 커피 잔이 한 잔이면 내가 잘못 짚은 거고, 커피 잔이 두잔이면 내 말이 맞을 걸.’

[그건 또 무슨 의밉니까?]

‘커피가 한 잔이면 지갑을 찾아준 나에게 보답만 하고 간다는 의미일테니 이미 텄다고 봐야지. 하지만 커피가 두잔이라면 나에게 호감이 생겨서 같이 앉아서 얘기하자는 뜻일 테니까.’

잠시 후 빛나가 트레이에 커피를 들고 올라왔다.

놀랍게도 도훈의 말처럼 두 잔이었다.

"커피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지갑까지 찾아주셨는데요."

"그런데 그건···."

도훈이 나머지 잔을 가리켰다.

"아, 바로 가면 좀 뻘쭘할 것 같아서 차 한잔 하고 가려고요. 괜찮으시죠?"

"네, 뭐."

[오오. 과연 의대생 사칭이 통했을까요?]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아마 탐색전을 하지 않을까?’

[탐색전이요?]

"근데··· 제 지갑을 모텔에서 주으셨다고요?"

"네."

"아···. 그러셨구나."

빛나가 살짝 표정을 굳혔다.

도훈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짐작했다.

‘내가 모텔에 있다는 것에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긴.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가 내키진 않겠지.’

"가끔 가요."

"네?"

"모텔요."

"아, 예 뭐···. 그런 얘기는 굳이···."

"그게 아니라 날밤 새서 공부할 때요."

"···공부요?"

"저희가 중간시험이 제법 빡센 편이거든요. 교수님이 원서를 막 두세 권씩 던져 주는데 벼락치기 할땐 모텔이 최고더라구요."

"아···. 모텔에서 시험 공부를 하신 거에요?"

"네. 처음에는 독서실을 끊고도 해봤거든요. 근데 저는 피곤하면 한시간이라도 누워서 자는 스타일인데 독서실에선 누울수가 없잖아요."

"음, 근데 좀 비싸지 않나요? 모텔은 아무래도···."

"그래서 보통은 팀을 짜서 가죠."

"팀이요?"

"남자 셋이 돈 모아서 가면 트윈배드가 있는 룸으로 2만원이면 빌릴 수 있거든요. 독서실 이틀 끊고 다니는 거랑 별 차이가 없으니까."

"아···. 그런 방법도 있군요."

"게다가 여름엔 엄청 덥잖아요."

"그죠."

"모텔에선 에어컨도 제 맘대로 켤 수 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독서실보다 이득이기도 해요."

"아···. 저는 그런 곳에서 시험 공부 한다는 소린 처음 들어봐요."

"하하, 아무래도 그렇죠. 남들은 자러 가는 곳인데 날밤새러 들어간다니."

"그러니까요."

도훈의 능수능란한 거짓말에 빛나도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못 미더운 듯 연신 공부하고 있던 책을 힐끔거렸다.

"혹시 의대 다니시는 거에요?"

"예 뭐···. 네."

"와, 공부 엄청 잘하셨나보다."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데 그냥 운이 좋았어요."

"의대 정도나 되는 대학을 운으로 가기도 하나요?"

"그거야 뭐 수능만 잘 보면 되는 거잖아요. 거기서 운 좋게 한 두 개 더 맞으면 가는 거고, 한 두 개 더 틀리면 못 가는 거고. 하하."

"그래도 대단하세요."

"참, 아무튼 그래서 밖이 시끄러워서 잠시 나와서 두리번 거리는데 계단에 그쪽분 지갑이 떨어져 있더라고요."

"아! 그때 계단에서 흘렸나보구나. 제가 원래 좀 자주 덤벙대는 편이라 뭘 자꾸 잊어버려요."

"앗. 저도 그런데."

"정말요?"

"네. 우산 들고나가면 맨날 잊어 먹고 돌아오고 그래요."

"어머! 진짜요? 저랑 비슷하네요?"

"지갑도 몇 번이나 잊어버렸다구요."

도훈은 그 말을 하면서 품속을 뒤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뭔가를 잊어버린 듯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라? 내 지갑이 어디갔지?"

"왜요? 혹시 잊어버리셨어요?"

"아···네. 분명히 아까 커피값 계산하고 여기 어디 뒀는데···."

"잘 찾아 보세요. 방금 전에 흘리신 거면 이 근처에 있겠죠."

도훈이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빛나도 덩달아 같이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꺼운 원서 사이에 끼어 있는 검은 색 지갑을 발견 했다.

"아, 이거 아니세요?"

"앗! 맞아요."

빛나가 지갑을 건내려는데 안에서 카드가 한 장 툭- 떨어졌다. 그것은 바로 의대생으로 위조한 도훈의 신분증이었다.

"엇, 여기 학생증이···."

"아, 아, 이 까페가 국성대학교 학생들에게 10% 상시 할인을 해주고 있거든요. 그것 때문에 꺼냈다가 제대로 안 꽂혀 있었나봐요."

물론 이는 도훈의 철저한 연출이었다.

처음부터 지갑을 교재 밑에 숨겨놓고 빛나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가까이 놓아둔 것이다. 게다가 치밀하게도 지갑을 들춰보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지갑 사이에 학생증을 두어 지갑을 들어올리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유도했다.

[와, 연기력 진짜···.]

‘봤지? 이젠 안 믿고는 배길 수 없을걸. 의대생이 적힌 학생증까지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과연 도훈의 학생증을 확인한 빛나는 도훈이 의대생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직업이 경찰인 만큼 빠른 눈썰미로 신분증을 스캔하는 게 특기였고, 짧은 사이에 도훈의 학번과 학과 등을 체크한 것이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다니까요."

"호호. 저만 덜렁대는 줄 알았더니, 도훈씨도 똑같네요."

"근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 죄송해요. 학생증에 이름이 적혀 있길래 우연히···."

"그렇구나. 하긴 제가 소개가 늦었네요. 올해 스물 네살이구요.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개팅 분위기에 빛나의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지갑을 받으러 왔다가 훈남 의대생을 만났으니, 마치 운명의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어머. 왜 나한테 소개를 하는 거지? 혹시 나한테 관심있나?’

빛나는 도훈의 관심이 기쁘면서도 애써 내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저는 왕빛나라고 해요. 올해 스물 일곱이구요. 제가 누나네요."

"정말요? 전 동갑으로 봤는데···."

"어머, 무슨 말씀을···."

"아니에요. 정말 어려 보이세요. 그런데 명함을 보니 경찰이신 것 같던데. 학교 전담하시는."

"아, 그건 작년에 맡은 보직이었어요. 지금은 외근직으로 뛰고 있어요."

"외근이요?"

"제가 좀 현장 출동을 좋아해서···."

"진짜요? 그럼 막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기도 하세요?"

"네. 그때 모텔에 간 것도 폭행 사건으로 신고 받고 나건 거거든요."

"폭행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막 사람들 웅성거리긴 하던데. 그럼 범인은 잡으셨어요?"

빛나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엄청 날쌔더라고요. 입구를 봉쇄하고 포위했는데 3층에서 뛰어내리는 거 있죠?"

"아! 그 소리였구나!"

"혹시 기억나세요?"

"네. 갑자기 쨍그랑 소리가 크게 났거든요. 그게 유리창 깨지는 소리였나 보네요."

"맞아요. 저희도 엄청 당황했잖아요. 설마 3층에서 밑으로 뛰어내릴 줄은 몰랐거든요."

"근데 그 사람 많이 다쳤겠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그래도 나쁜 사람인데."

"아니에요. 그러실 수 있죠. 가끔 범죄자들도 병원으로 호송해 가는 경우도 있어요. 죄는 지었지만 어쨌든 아픈 건 치료를 받아야 하니까요."

"그렇죠. 어쨌든 의사는 사람을 치료해야지요. 그 사람이 누군가는 둘째치고."

"도훈씨는 왠지 멋진 의사가 될 것 같아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커피도 사주시고."

"아니에요. 인기도 많을 것 같은데 여자친구는 당연히 있죠?"

빛나는 자기가 묻고도 왠지 너무 노골적인 물음인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명색이 의대생인데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훤칠한 도훈이라면 당연히 애인이 있겠거니 싶어 묻는 것이엇다.

‘없을 리가 없지. 저런 남자라면 여자들이 환장하고 달려들텐데.’

빛나의 물음에 도훈이 쑥스러운 듯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좀 숫기가 없어서···."

"네?"

"모쏠이거든요."

"진짜요? 말도 안 돼."

"그게···. 저는 정말 공부만 하거든요.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학교랑 학원 갔다가 집. 대학교 와서도 학교, 도서관, 집. 이렇게 살다보니 여자 만날 시간이 없었어요."

"어쩜 좋아. 공부만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요샌 알바도 하고 있어요."

"참, 근데 무슨 알바를···."

"과외요."

"아···. 과외."

"저희가 좀 학비가 쎈편이라서 부모님께 죄송하더라고요. 생활비는 스스로 벌려고 없는 시간 쪼개서 고등학생들 수학 가르치고 있어요."

"그렇구나. 혹시 공부하시는 데 저 때문에 괜히 시간 뺏기시는 건 아니죠?"

빛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도훈을 보니 여자로서 욕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런 얼굴에 모쏠이라니···. 하긴 의대 가려고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 여자에 빠졌다간 절대 못 갔지. 암.’

빛나 역시 3년간 공시족이었을 때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멘탈이 워낙 약한 편이라 괜히 남자친구를 사귀면 사소한 것도 의지하게 되고 공부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청춘에서 가장 빛나는 3년을 날린 기억이 있는 빛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도훈의 처지를 잘 이해했다.

‘아쉽네. 저런 애가 내 애인이라면 좋을텐데···. 근데 의대생이면 주변에 꼬리치는 여자들도 많을 텐데 3살이나 많은 나에겐 관심도 없겠지?’

"시간 뺏기다뇨. 제가 괜히 책을 펼쳐놓는 바람에 불편하셨겠네요. 엊그제 시험 끝나서 지금은 별로 공부할 거 없어요. 그냥 책보는 게 습관이라서···."

도훈이 펼쳐놓은 책을 접더니 주섬주섬 챙겼다.

"굳이 그러실 것 까지는···."

"아니에요. 제가 사람 앞에 두고 너무 예의 없이 굴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쩜. 예의까지 바르네. 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남자애가 있다니···. 가만 있어 봐, 내가 너무 화장을 대충하고 나왔나?’

점점 도훈이 마음에 든 빛나는 갑자기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이렇게 훈남 의대생을 만날 줄 알았으면 대충 오지 말고 한껏 꾸미고 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 것이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네."

빛나가 백을 챙겨들고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다.

< 707. 중수의 자격-36-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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