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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724화 (697/2,000)

< 706. 중수의 자격-35- >

그러나 지갑에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을 리가 없었다.

투명한 속 지갑 안에 공무원증이 들어있는 것이 다였다. 혹시나 해 안쪽을 열어보니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 장, 그리고 어딘가 음식점에서 받은 게 분명한 10회 이용 시 1회 무료 쿠폰 하나가 전부였다.

"아-.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지갑에 연락처가 있을 리가 없잖아?"

도훈은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지갑을 돌려줄 생각만 했기 때문에 우체통에 넣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안에 신분증이 들어있으니 우체국에서 알아서 해당 지구대로 가져다주면 끝날 일이기 때문이다.

‘아, 어쩌면?’

도훈이 머리를 굴렸다.

경찰들은 대체로 관할 구역 내에서만 활동한다.

광역수사대니 뭐니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형사들도 있지만, 대체로 신고지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착안한 도훈은 그때 들렀던 모텔을 핸드폰 지도 어플로 검색했다. 반경에서 가장 가까운 지구대를 검색하자 딱 하나가 나왔다.

‘옳거니. 여기 소속이겠네.’

도훈은 곧바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이 들리기 전에 곧바로 통화를 중단했다.

‘이런 멍청이! 112는 전국구잖아!’

생각해보니 해당 지구대로 직통으로 연결할 방법이 마뜩치않았다. 112에 전화를 한다고 한들, 개인적인 용무로 왕순경을 찾는다는 이유를 대기 어려울 것이다.

설사 지구대 직통 번호를 알아낸다고 한들, 통화가 걸리면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왕순경의 지갑을 갖고 있으니 한 번 만나달라고?

시작도 전에 음흉한 의도를 들키고 말 것이다.

‘젠장. 성급했군. 이 방법은 아닌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왕 순경 개인 번호를 알아내고 싶었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네.’

[거참. 주인님은 하루빨리 지능 열매부터 먹어야겠군요.]

‘뭐라고?’

[스킬이 있는 데도 활용할 생각을 못 하시니 말입니다.]

‘무슨 스킬? 나한테 핸드폰 번호 따내는 스킬도 있었나?’

[그게 아니라 싸이코 메트리 스킬 말입니다.]

‘아! 맞다!’

도훈은 한동안 안 쓰다 보니 자신에게 있는 스킬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도훈이 겸연쩍어 하며 대답했다.

‘인마.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쯧쯧. 어서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뭔가 단서가 있을 겁니다.]

‘오케이. 싸이코 메트리 가동!’

[···굳이 그렇게 외치시지 않아도 됩니다.]

도훈이 지갑을 만지고 스킬을 발휘하자 순간적으로 지갑에 얽힌 왕순경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

"우리 딸 축하해!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구나!"

"남들은 한방에 되는 거 3년이나 걸렸는데요, 뭘."

"그래도 이제 평생 공무원이잖니. 자 이건 선물."

"뭐예요?"

"지갑이야. 예쁜 장지갑으로 사주고 싶었는데, 가지고 다니기 불편할까 봐 작은 걸로 샀어."

"뭘 이런 것 까지···. 고마워요, 엄마."

왕순경이 투명한 속지갑 안에 경찰 신분증을 꽂아 넣었다.

환하게 웃는 미소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이건 너무 초창기 기억 같은데···.’

[시간의 흐름을 빨리 돌려 보시죠.]

‘알았어.’

도훈은 불필요한 장면들을 스킵하며 영상을 건너뛰었다.

허공에 떠오른 클립 영상들을 손으로 터치하며 넘기는 모습은 SF영화인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영상을 건너뛰던 도훈이 정복을 입고 강연대 앞에선 왕순경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가만, 여기서 느리게 재생.’

[넵.]

"자, 여러분. 힘든 일이 있을 땐 주저하지 말고 곧바로 117 학교폭력 상담 센터로 전화하거나 전담 경찰관인 저 왕빛나 순경을 찾아 주세요!"

"혹시 톡으로도 되나요?"

머리가 굵은 남 중학생 하나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놈의 시선은 정복을 뚫을 것처럼 튀어나온 왕빛나의 커다란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질문을 받은 빛나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음, 중요한 내용이라면 톡도 뭐···."

"너희들 혹시라도 전담 경찰관님 귀찮게 하면 혼난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생 하나가 곤경에 처한 빛나를 구했다. 강연을 마친 빛나가 인사를 하며 나가려고 하자 그 선생이 다시 말했다.

"아이고, 급하셨나보네. 가방은 챙겨가셔야죠."

"앗! 감사합니다. 제가 좀 덜렁대서."

빛나가 가방을 열어보며 지갑부터 확인했다.

영상은 거기서 멈추었다.

‘오호라. 이거네.’

[네? 전 무슨 의민지 모르겠는데요.]

‘보면 모르겠어? 빛나가 학교 전담경찰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이잖아?’

[그게 뭔데요?]

‘학교마다 담당 경찰관을 지정해서 학교폭력 예방 활동을 하는 건데 대체로 초임 순경들이 하는 역할이야.’

[신기하군요. 그런데 그게 빛나양의 연락처를 찾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참나, 봐도 모르겠어? 잘 보라고.’

도훈은 강연을 하고 있는 빛나의 장면으로 영상을 다시 돌렸다. 그녀의 옆으로 거대한 PPT가 스크린 위에 펼쳐져 있었다.

‘저기 보여? 왕곡 중학교 학교전담 경찰관 왕빛나. 그 밑에 연락처.’

[오! 어떻게 저런 것을!]

‘내 관찰력 봤지? 지능 열매 같은 소리하네.’

[그냥 운이 좋으셨던 것 아닌가요?]

‘엣헴. 운도 실력이지. 아무튼 이걸로 연락처는 알아냈으니 이제 만나기만 하면 되겠군.’

도훈은 사이코메트리 스킬을 끄고 빛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왕곡지구대 소속 왕빛나 순경입니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저기, 지갑을 하나 주웠는데···."

"지갑요? 분실 신고보단 가까운 지구대로 가져다주시는 게 주인분 찾기 수월하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 지갑에 왕빛나 순경님 이름이 적혀 있어서요."

"네?"

빛나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지갑을 주우셨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걸 어디서 찾으셨어요?"

"그게···."

도훈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모텔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모텔요? 아아! 그때 출동할 때구나."

빛나는 자신이 어디서 지갑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튼 이거 순경님 거 맞으시죠?"

"네, 맞아요. 가만, 근데 어떻게 제 번호를?"

도훈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둘러댔다.

"안에 명함이 들어있더라고요. 학교전담경찰관이라고."

"아! 다행이다. 고마워요. 혹시 카드 같은 것도 다 들어 있나요?"

도훈이 지갑을 들추며 말했다.

"네. 뭐, 줍고 나선 따로 건드리진 않았는데. 현금도 만삼천원인가 그대로 있네요."

"아! 다행이다. 혹시나 서에서 흘린 줄 알고 아직 분실 신고도 안해놓고 있었거든요. 고마워요. 혹시 근처시면 지구대로 좀···."

"아, 전 그쪽이 아니라."

"그럼 어디세요?"

"음, 국성대 사거리에요."

"국성 대학교요?"

"네."

빛나가 속한 지구대와 국성대까지는 지하철로 20정거장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음, 어쩌지. 잠시만요. 제가 오늘 비번이라 마침 쉬는 날인데 3~40분 안에 찾으러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도훈은 빛나에게 미안함을 안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제가 지금 알바 중이긴 한데···."

"알바 장소가 어딘데요? 제가 그리로 가서 받을게요."

"아니에요. 오늘은 좀 일찍 끝내죠, 뭐."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괜찮아요. 좋은 일 하는 건데요. 국성대 사거리 지나면 별다방 하나 있어요. 거기서 30분 뒤에 봐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도착해서 연락드릴게요."

"네."

전화를 끊은 도훈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들킬 뻔 했네."

그러다 문득 속 지갑 안쪽을 보니 명함 하나가 보였다.

꺼내놓고 보니 정말로 그가 말했던 빛나의 학교전담경찰관 명함이었다.

"얼레? 진짜 있었잖아? 괜히 스킬만 썼네."

[그러게 꼼꼼히 좀 살펴보시지.]

‘남의 지갑을 무슨···. 가만있자. 근데 어떻게 빛나를 하루 만에 꼬신다.’

[가능하겠습니까?]

‘스킬을 쏟아부어서라도 무조건 꼬실거야. 어쨌거나 업적이 걸린 일인데.’

도훈이 빛나를 타겟으로 정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특수 직종이 더 맛있어.’ 업적에 바로 여경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왁싱전문가, 아이돌을 해치운 만큼 여경과 여의사, 치어리더만 더 공략하면 해당 업적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잠시 계획을 짜던 도훈이 말했다.

‘일단 도서관부터 들러야겠군.’

[도서관은 또 왜요?]

‘그녀가 살아온 이력을 쭉 훑어보니 왠지 공략할 포인트를 알 것도 같거든.’

[공략할 포인트 라구요?]

도훈은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 뒤 대학 도서관에 들러 책을 대출했다.

[인체 골격구조? 생리학의 기초? 이런 서적을 왜 빌리는 겁니까? 이건 의대생들이나 빌려 볼 법한 책인데.]

‘맞아. 바로 그거야.’

[설마 의대생 행세를 하시겠다고요?]

‘안될 게 뭐 있어? 꼬시면 장땡이지.’

[허! 이젠 사기까지.]

‘이리 꼬시나 저리 꼬시나 자빠뜨리면 장땡이지.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느냐 라고.’

의학 전공 서적을 대출한 도훈이 까페로 이동해 책상 위로 책을 펼쳐 놓았다. 평소 열심히 필기를 한 공책도 함께 펼쳐놓자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좋아, 이 정도면 세팅은 끝났고."

[참나···. 아니 무슨···.]

‘그냥 지켜만 보라니까. 저번에 샀던 신분증 위조 아이템 있지?’

[네.]

‘그걸로 의대생 신분증 하나만 위조하자.’

[정말 진심이신가 보군요.]

도훈은 신분증을 스캔해 본인의 학과를 국성대 의예과로 고쳤다. 너무나 완벽한 도용이었기 때문에 학생증만 봐선 누가 봐도 어엿한 의대생이었다.

‘슬슬 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로시. 쓰리 싸이즈 안경 좀. 가능하면 검은색 뿔테로 바꿔서.’

[검은 뿔테요?]

‘왠지 그게 더 똑똑해 보이잖아.’

[음, 알겠습니다.]

도훈은 이제 뿔테 안경까지 착용한 채 책을 뒤적이는 척했다. 어차피 각잡고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하얀 건 여백이요 검은 건 글씨라는 것만 식별하는 수준이었다.

잠시 후 빛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훈은 한참 신호가 가길 기다리다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아, 죄송합니다. 공부 중이라 폰을 무음 모드로 해놓는 바람에."

"공부요? 암튼 저 도착했는데 지금 어디계세요?"

"2층이요."

"네, 금방 올라갈게요."

전화를 끊은 도훈은 다시 책을 보며 집중하는 척했다.

근육 신경 다발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지갑 주우신 분 맞나요?"

도훈이 고개를 들어 빛나를 보았다.

"아, 왕빛나 순경님?"

"네. 제가 왕빛나에요."

도훈을 마주한 빛나는 잘생기고 깔끔한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였다.

‘흠, 보는 책을 보니 의대생인 건가? 얼굴도 생각보다 잘생겼네.’

빛나는 일전에 한번 모텔에서 도훈을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뿔테 안경을 쓴 이지적인 모습 때문에 그를 분간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현장에 출동해 도망치는 용의자를 잡는 와중이었으므로 상대의 용모 같은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만 했다.

한편 빛나를 무심하게 올려 본 도훈의 안경 위에는 그녀의 쓰리 싸이즈가 떠오르고 있었다.

<38-25-37

수치를 본 도훈이 흥분으로 들떴다.

‘이얼, 고져스!’

[네?]

‘미쳤네, 미드 진짜. 봤어? 38인거?’

[저는 주인님이 더 미친놈 같은데요?]

‘인마. 처음 보는 여순경 따먹으려면 원래 맨정신으론 힘든 법이라고.’

도훈은 지갑을 건네던 척 하다 테이블 구석에 아슬아슬 걸쳐 놓았던 커피잔을 밀어 떨어뜨렸다.

툭-.

다행히 종이로 된 컵이었기 때문에 깨지진 않았지만, 반쯤 남아있던 커피가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앗."

"어머, 어떻게···!"

빛나가 황급히 자세를 낮추며 쓰러진 컵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흘러내린 커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중이었다.

"아이참, 죄송해요 저 때문에···."

빛나가 황망해 하는 사이 도훈은 매의 눈으로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깊숙이 형성된 골짜기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으음, 가운데로 꽉 찬 게 모양도 좋군.’

그러나 빛나가 다시 쳐다보자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아이고 아니에요. 제가 실수로 넘어뜨린 건데요. 괜찮아요. 놔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도훈이 한사코 만류했지만, 빛나는 옆에서 휴지를 가져와 바닥을 직접 닦으며 대답했다.

"저 때문인 것 같아 죄송해요. 커피는 제가 새걸로 한 잔 사드릴게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지갑도 찾아 주셨는데···. 뭐라도 대접해 드려야죠. 안그럼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도훈은 치마를 입고 나온 빛나의 다리를 음흉하게 쳐다보다가 빛나가 몸을 일으키자 다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혹시 커피 뭐 드세요? 같은 걸로 주문해 드릴까요?"

"네. 아메리카노면 전 괜찮습니다."

"네. 금방 가져올게요."

바닥을 깨끗이 닦은 빛나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더니 1층으로 주문하러 내려갔다. 도훈은 빛나의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박. 투박한 경찰복 안에 저런 핫바디를 숨겨 놓았을 줄이야.’

[어마무시하긴 하네요. 근데 방금 일부러 커피 흘리신 거죠?]

‘당연하지. 특히 지갑을 주는 척 하다 흘려야 자기가 미안해서 한 잔 사줄 거 아니야?’

[정말 교활한 술책이군요.]

‘이 의대생 코스프레 역시 마찬가지야.’

[그게 뭐가요?]

< 706. 중수의 자격-3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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