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7. 중수의 자격-26- >
물은 엎질러 졌다.
아니 정액은 싸질러 졌다.
순간 뒤통수를 1톤짜리 해머를 두들겨 맞는 충격이 밀려왔다.
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해버렸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로시에게 빼액 소릴 질렀다.
"너는 대체 그런 것도 경고 안하고 뭐했어!"
[···죄송합니다. 경황 중이라.]
로시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공지능 주제에 감정이 있는 것처럼 의기소침해지자 괜스레 미안해 진다. 사실 이건 로시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아무 생각 없이 질싸를 싸질러버린 나에게 있었다.
정확히는 미션을 달성했다는 도취감에 방심한 좆대가리에 있었다.
그저 박고 싸는 것만 할 줄 아는 병신같은 녀석 말이다
‘···아니다. 너에게 화낼 일은 아닌데.’
[주인님. 모든 질내 사정이 임신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더구나 아직 몇 시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되돌릴 방법이 있기도 하구요.]
‘되돌린다고?’
[바로 사후피임약입니다.]
사후피임약이라는 게 있다.
성관계 후 복용하면, 정자와 결합해서 수정된 난자가 자궁에 착상해서 태아가 되는 것을 막는 약이다.
‘그렇지. 아직 늦은 건 아니구나.’
어찌 됐건 그르친 일을 되돌릴 방법은 있었다.
문제는 지연과 연락할 수단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아아, 젠장! 연락할 핸드폰이 없잖아.’
지연은 경호팀의 보안 검열을 이유로 폰을 없애 버렸다.
이따금 연락하는 수단은 대포폰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빠르게 연락한 뒤 없애버리는 방법을 취해왔다. 한마디로 그녀가 먼저 접촉하기 전까진 내가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어장관리 어플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어장관리 어플의 충돌방지 기능은 관리하는 여자들의 동선을 대략적으로 제공한다. 정확한 위치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평소의 동선을 알고 있다면 실마리를 잡을 순 있을 것이다.
[한지연] - 고회장의 자택.
‘윽!!! 왜 하필 저기인 거야?’
생각해보니 한지연은 상주 경호원이었다. 오늘의 외출도 반 차를 내서 가능했을 뿐, 생각해보니 결국 돌아갈 숙소 역시 고회장의 저택이다.
담벼락을 넘어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품었으나 저택의 삼엄한 경계수준으로 볼 때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아무리 나라도 안되는 건 있는 법이다. 나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니니.
‘젠장. 이젠 어쩌지? 꼼짝없이 임신 공격을 당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원치 않은 임신. 불가피한 결혼.
대학도 제대로 졸업 못 하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하는 젊은 애 아빠···.
"아니야. 이건 너무 끔찍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한 번의 실수로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도 막심하다고!"
사실 지연에게 잘못을 따질 순 없었다.
그녀는 나를 무정자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질싸의 순간에도 다른 여자보다 경계가 낮춰져 있었을 것이다.
‘은근히 임신해 버리길 바란 것 같기도.’
심지어 지연은 은성과 나 사이를 질투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군소리 없이 질싸를 받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내가 임신한 여자를 버리지 못할 거라는 믿음을 있었을 테니까.
‘아! 젠장! 23살 새파란 청춘에 애아빠라니! 이건 진짜 아닌데···.’
이제 겨우 중수다.
앞으로 해치워야 할 업적과 미션이 산더미다.
그것 때문에 미안해 정음이랑 사귀자는 얘기도 못 했는데, 덜컥 임신으로 예상도 못했던 여자에게 발목이 잡혀버리면 내 모든 플랜이 망가지게 된다. 아니 더이상 플레이어로서 살아가는 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카사노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수심이 깊어지자 로시가 나를 위로했다.
[주인님. 걱정이 지나치신 걸지도 모릅니다. 물론 임신 가능성이 높기야 하겠지만, 모든 질내 사정이 임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질싸 한 번 했다고 임신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저출산 국가일 리가 없다. 배란기를 잘 맞추고 질내사정을 수없이 반복해도 임신이 잘 안되는 부부들도 허다하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문제는 이도훈의 몸뚱이가 너무나도 튼튼하다는 점이다. 또한 한지연도 어리고 건강했다. 여성의 임신 확률은 20대 초중반이 절정. 그땐 과장되어 말하면 질외 사정한 정액이 우연히 튀어 들어가도 임신이 가능할 정도다.
‘만에 하나라도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야?’
[흠, 그건···.]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정말 지연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그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나몰라라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사에게 손잡고 가서 낙태를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선 임신을 시켰으면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꿈틀거렸다. 그것은 내 평생 친자식으로 믿어왔던 전생의 딸이 알고 보니 혈연이 아니란 점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실제로 자식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아빠 노릇은 했지만, 진정한 혈육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날 닮은 아이가 탄생한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 기적 같은 일처럼 느껴졌다.
난 이미 한 번 죽었던 몸.
원래대로라면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는 영혼이다.
하지만 신께서 인과율을 깨뜨리고 이 세상에 나를 다시 내려보냈다.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었고, 이번에는 나의 혈육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지연이 만약 정말로 임신한다면 이 땅 위에 기적이 탄생하는 것이다.
정말 이건 정말로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한지연이 만약 내 애를 뱄다고 나타나면 나는 애를 지울 자신이 없다.
그 애는 필시 내 첫 혈육일 것이기 때문이다.
애를 지운다면 사람을 죽이는 느낌일 것이다.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아냐, 이건 절대 안 돼. 방법을 찾아야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감당 못할 거야. 어떻게든 사후피임약을···.’
[조급해 마십시오. 사후피임약은 72시간 이내에만 복용하면 효과가 발휘됩니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확률이 떨어지는 지상의 제품과 달리 저희 천상계 아이템을 이용하면 신체에 무해한 상태로 임신을 중단시킵니다.]
‘그것도 제한이 72시간인가?’
[네. 착상이 되기 전까지면 무조건 효과를 발휘합니다. 수정이 끝나 버리면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지만요.]
‘음···.’
생각에 잠겼다.
주어진 시간은 72시간.
아니 관계 후 시간이 지났으니 68시간 남짓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다.
나에겐 한 번 가본 곳이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마법의 문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충전만 채워지면 나는 경계가 삼엄한 저택을 얼마든지 들락거릴 수 있다.
우리집 현관문을 통해서도 말이다.
‘로시. 현재 비밀의 문고리 충전량은?’
[총 2/8입니다. 앞으로 6번의 관계를 더 성공하셔야 SP가 충전됩니다.]
‘좋아. 그 정도는 내일 안에 충분히 해치울 수 있겠군.’
하루 6번.
남들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나에겐 식은 죽 먹기다.
섹스할 여자는 차고 넘친다.
당장 내일 아침 희주와 만나기로 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갑작스러운 임신공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현재까지 크리티컬 판정이 내려진 것은 아니다. 설사 당했다 하더라도 만회할 시간도 남아있다.
아직은 애아빠가 될 순 없다.
언제간 하고 싶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나는 굳은 각오를 품고 잠을 청했다.
혹시 모를 임신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하루 6연섹을 성공시켜야 했다.
***
"괜찮으십니까? 피부에 상처가···."
빨간약을 발라주던 부하의 손길을 민수가 거칠게 쳐냈다.
"그만 치워. 그냥 등에 박힌 유리조각 좀 빼달라니까."
"아아···, 붕대라도 감으시는 게."
"붕대? 븅신 같은 소리하고 있네. 조폭이 가오 떨어지게···."
부하를 물리친 민수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아으, 이도훈인가 뭔가 하는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대낮부터 활극을 펼친 민수는 겨우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본거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모텔에서 탈출을 감행하느라 온몸이 상처 투성이었다. 특히 3층 창문을 깨고 지상으로 뛰어내렸을 때 입은 찰과상으로 온 몸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 상처로는 눈 하나 꿈쩍 않는 강한 멘탈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칼침도 여러번 맞았지만 그때에도 비명 한 번 지른 적 없는 독종이었다. 얼굴에 큰 흉터를 남긴 세력 간 싸움에서 내장이 튀어나오려는 찢어진 복부를 끌어안고 상대를 여럿 고
꾸라뜨린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전설적인 일화였다.
그랬다.
그는 보기드믄 싸움의 천재였다.
근성이면 근성, 반사신경이면 신경. 무엇하나 나무랄데가 없는 완벽한 싸움꾼이었다.
그런 그를 도훈이 열받게 했다.
성미가 급한 민수가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내일 두고 보자. 아주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 먹어 줄 테니."
괜히 도훈에게 열이 받은 민수는 그를 가만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큰형님의 부탁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
다음날.
도훈은 일찍부터 눈을 떴다.
아침 7시였다.
시간을 확인한 도훈이 희주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도훈 : 7시 반에 보는 거 맞지?
-희주 : 네. 왠일로 이렇게 적극적이세요?
-도훈 : 아침부터 풀발기 했어.
-희주 : 어제 못 싸셨구나. ㅎㅎ 걱정마요. 제가 시원하게 뽑아드릴 테니까.
이른 시간 학교에서 보는 이유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생은 빨라야 9시부터 수업을 시작한다. 7시 30분 경이면 인적이 없다시피 할 것이다.
-도훈 : 각오하고 있어. 나 지금 무척 굶주렸으니까.
-희주 : 아잉, 좋아라♥
도훈은 그저 비밀의 문고리를 충전하려는 생각 뿐이었다.
평소라면 빻녀 희주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6번의 섹스를 성공시키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할 수 있어. 시간은 아직 내편이야.’
샤워를 마친 도훈이 어제 벗어놓은 바지를 입었다.
그때 뒷주머니에서 뭉특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 이게 뭐지? 아아, 그 지갑."
지갑은 어제 왕빛나 순경이 흘리고 간 것이었다.
돌려주려고 챙겼다가 깜빡하고 잊어버린 것이다.
‘귀찮게 됐군. 학교 우체통 아무대나 처박아 버려야지.’
지갑을 챙기던 도훈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가만, 이거 잘하면···.’
특수 직종이 더 맛있어란 업적.
모두 5개의 직업을 공략하는 미션으로 그중에 여경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었다.
‘왕빛나 순경도 여경이잖아?’
지금껏 왁싱전문가, 아이돌 두 직업을 공략했다.
여의사는 폭유 간호가 박지애를 통해 미리 접점을 깔아 두었다.
유일하게 남은 직업이 여경과 치어리더였는데 그중 하나와 연결될 구실이 생긴 것이었다.
‘위기 속에 기회가 온다더니 잘하면 SP도 채우고 업적도 가능하겠는데?’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빛나 순경의 지갑을 가방에 챙겼다.
경황 중에 맞딱뜨리는 바람에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가슴이 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름표가 볼록하게 골곡이 질만큼 말이다.
‘음, 왕빛나가 아니라 왕가슴이라고 불러야 겠군.’
차를 끌고 학교에 도착하니 1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이었다.
도훈은 사람도 보이지 않는 교정을 거닐며 사범대 2관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섹스하려고 일찍 등교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한지연에게 접근하기 위해 SP포인트를 충전해야 하는 도훈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금은 빻녀 희주가 아니라 육덕녀와 육떡치기도 하라면 해야할 상황이었으니까.
‘가만 육떡이면 딱 SP 달성인가···. 아, 아니야, 아무리 급해도 그건 아니지.’
사실 희주는 얼굴이 좀 못났을 뿐 피부결도 부드럽고 특히 몸매는 압권인 수준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뒤치기나, 불 꺼놓고 하는 암전 섹스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족감을 선사했다.
특히 약간의 M 성향도 갖추고 있어 멋대로 굴어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가학성을 불러일으키는 타입이랄까?
희주가 알려준 체육과 비품창고에 도착하자 희주는 벌써 츄리닝을 입고 도착해 있었다. 몸에 착 붙는 7부 트레이닝 펜츠에 얇은 바람막이를 걸친 모습이 집에는 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나온 모양이었다.
"왔어? 치마 입고 온다더니."
"엄마가 아침도 안 먹고 일찍 나간다니 꼬치꼬치 캐물어서요. 그냥 마라톤 대회 연습한다고 핑계댔어요."
"그렇구나."
"물론 팬티는 안입었지만요. 호호."
희주가 발랄하게 웃었다.
못생긴 얼굴은 확실하지만 자꾸 보다보니 은근히 정이 드는 타입이었다.
희주가 체육관 창고의 비번키를 여는 사이 도훈은 찰싹 달라붙은 그녀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탄성이 대단한 엉덩이가 얇은 팬츠를 뚫고 쫀득한 촉감을 그대로 전달했다.
"아잉, 아직 문 따지도 않았는데 성급하게 왜 그러실까."
"문보다 너부터 따고 싶어서."
희주가 애교를 담아 몸을 비틀었다.
"조금만 있어봐요. 금방 열어 드릴테니까."
"어딜? 문을 봊이를?"
"당연히 둘 다죠."
희주가 색기넘치게 웃었다.
< 697. 중수의 자격-2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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