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5. 중수의 자격-14- >
중독의 정액은 도훈의 정액에 담긴 여러 기능 중 하나였다.
그의 정액을 섭취할 경우, 일정 기간 다른 이성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매료의 효과가 발휘된다.
‘이제 은성이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주기적으로 정액을 먹이기만 한다면 말이지.’
남녀 사이에 떡정 만큼 강렬한 게 없다.
토라져 화난 여친도 순한 양으로 만들어 주는 게 떡정이고, 바람난 마누라도 잊지 못해 돌아오게 하는 게 떡정이다. 중독의 정액은 일시에 그 떡정의 효과를 폭발시키는 스킬.
더욱이 해당 스킬은 상대를 구속하는 효과까지 있었다. 깊은 사랑에 빠진 남녀가 다른 이성에 한눈을 팔지 않는 것처럼, 소위 화학적 정조대를 채워버리는 셈이다.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도훈은 슬슬 출구 전략을 모색했다.
어쨌든 이곳은 적진.
그것도 심장 깊숙한 곳에 침투해 있는 상태다. 아무리 지연이 망을 봐준다고 한들 언제든 발각될 위험이 존재했다.
"먼저 씻을래?"
"하아- 오, 오빠 먼저 씻으세요···. 전 다리가 풀려서 못 걷겠어요."
오랜만에 무리를 한 탓인지 은성이 일어나려다 주저앉았다. 마지막 피니쉬 자세에서 거친 삽입을 받아내느라 무리해버린 것이었다.
"그럴까?"
도훈이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
"···응? 한지연?"
어느새 별채에 도착한 문수가 문 앞에 주저앉은 지연을 발견했다. 도훈의 배신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지연은,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어깨가 축 처진 채 고개를 떨군 자세였다.
그 때문에 뒤늦게 문수를 발견한 지연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거기서 뭐하고 있나?"
"아···!"
어떻게든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했던 그녀였지만, 막상 문수를 맞닥뜨리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안에는 도훈과 은성이 발가벗은 채 뒹굴고 있다. 만에 하나 문수가 그 광경을 보게 된다면 도훈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문수는 실제로 사람을 죽여본 사내.
또한 장차 그룹의 후계자가 될 은성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그만한 능력과 이유가 있었다.
지연은 도훈에게 배신을 당한 순간마저도 본능적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도, 도훈이가 걸리면 끝장이야.’
"팀장님!"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천만다행인 것은 문수가 지연에게 이성적으로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잔뜩 우울해 있는 지연을 보는 순간, 그녀가 어딘가 아픈 것이라고 착각했다. 늘 씩씩한 지연이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지연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VIP를 방치시켰다고 문책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문수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다. 하긴, 어차피 저택 안에 있는 마당에 밀착 경호가 늘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전 전문가 그룹의 과외때도 그녀는 별도의 사무실
에 대기했다.
"갑자기 배가 좀···."
"배? 배가 왜?"
문수는 수행하는 직원이 울타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지연을 걱정했다.
중도하차 했지만, 지연은 장교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생도 출신.
어지간한 일론 아프다는 내색 한번 한 적 없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문수의 입장에선 지연이 배를 잡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당연히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연모하는 대상이니까.
지연은 어떤 핑계를 댈지 고민하다 남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냈다.
"새, 생리통이···."
"아!"
직설적인 대답에 오히려 문수가 난처해졌다.
위계를 이용해 부하에게 사적인 비밀을 발설시킨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연이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그런 얘기를 꺼낸다는 점에 살짝 흥분했다. 마치 그녀의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가만. 지금이 생리 기간이란 걸 굳이 알려주는 것은···.’
문수는 점점 오해했다.
생리 주기를 근거로 배란일을 추측하는 것은 고등학교 생물 수업만 잘 들었어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문수는 지연의 메시지를 곡해해서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아전인수격 해석이었다.
‘설마 흘리긴가?’
노총각 특유의 병신같은 착각.
그는 연애를 안 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못 하는 것이었고 여자와 말을 섞을 기회보다 사선에서 적과 총을 겨누는 일이 더 잦았던 사람이다.
평소 냉철하고 빠릿빠릿한 두뇌 회전도 좋아하는 여자앞에선 먹통이 되는 전형적인 호구였다.
"큼, 큼···. 그, 그런가."
지연은 생리통이란 말에 민망해하는 문수의 모습에 시간을 끌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시간을 벌어줘야만 했다.
"아, 아···. 다시 통증이···."
허리를 세우고 꼿꼿이 서 있던 지연이 갑자기 문수의 품으로 쓰러졌다. 문수는 지연의 육탄공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기에 코가 벌렁거렸다.
‘아, 여자 냄새.’
지연이 평소 쓰는 샴푸 냄새였지만, 그는 그것이 지연의 체취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여자에 대해 무지한 사내였다.
"마, 많이 아픈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흐트러진 모습 보여선 안 되는데···."
지연이 문수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최소한 자신을 부축한 상태로는 집안으로 못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여자들은 남자처럼 늘 똑같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는데 말이야."
"제가 그날만 되면 유난히 컨디션이···."
지연이 또 한번 자신의 비밀을 언급하자 문수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왜 자꾸 생리 주기를 언급하지? 피임 기간을 알려주는 것인가?’
문수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지연의 모습에 점점 오해가 깊어졌다.
‘그래. 생리 때만 되면 유난히 성욕이 폭발한다는 여자들이 있다던 데 어쩜 지연이 그런 과였나? 물오른 처녀만큼 호기심 많은 여자가 드물다더니··· 이런 이런.’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연은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평소에 자신과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육체적인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늘 절도있게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다녔고, 자신의 영역 안으론 한 발자국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아픈 기색으로 자신의 품에 기대 안기자, 문수로서는 당연히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떡하지? 별채 밖에 수행 직원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문수도 슬슬 타인의 시선이 우려되었다. 실상은 지연이 쓰러지듯 품에 안긴 것이지만, 남들이 볼 땐 남녀 둘이 서로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저택의 경호를 책임지는 담당자로서 업무 중에 이성을 껴안고 있는 모습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없었다.
"일단 의무실로···."
문수가 지연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지연은 한사코 달라붙었다. 이제는 아예 문수의 허리를 껴안으며 가슴을 바짝 밀착시켰다.
물컹-!
지연의 보드라운 가슴살이 몸에 닿자 문수는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자의 가슴 촉감은 남자로선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말랑말랑하면서 탱탱한 지연의 가슴이 문수의 순정에 불을 질렀다.
그의 양물이 점점 동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잠시만 부축 좀."
"아, 아니야.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군."
문수는 지연의 가슴이 작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닿는 촉감에 무척 놀랐다.
‘오, 나이스 바디. 지연이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였다니, 설마 처녀 빗치는 아니겠지?’
문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너무 정숙한 스타일보단, 낮져밤이처럼 밤에는 발랑 까진 스타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긴 여자가 저 나이까지 양기를 받지 못하면 음기가 더욱 강해지는 법이니···.’
문수가 지연을 부축하며 해벌레하고 있을 즈음.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던 은성에게 두 사람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도훈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서 집안이 조용해지자 문밖의 대화가 들려온 것이었다.
‘서, 설마?’
은성이 깜짝 놀라며 재빨리 현관문 구멍으로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헉! 경호팀장님이 여길 왜?!’
경호팀장 김문수는 원리원칙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도훈을 불러들인 걸 들켰다간, 아무리 자신이 커버를 해준다 한들 지연과 도훈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은성이 다급하게 가운만 걸치고는 도훈이 샤워하는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오, 오빠!"
"응?"
"크, 큰일 났어요! 집 밖에 기, 김문수씨가 아니 경호팀장이!"
뜨거운 물로 샤워를 즐기던 도훈은 등줄기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헉, 뭐야? 하필 이 타이밍에!’
[그러게 제가 조심하라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렇게 불쑥 쳐들어올 줄 몰랐지! 밖에서 지연이는 뭘 하고 있었던거야?’
[원망할 시간도 아깝습니다. 얼른 대책을!]
‘알았어.’
서둘러 물기를 닦은 도훈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어, 어떡하지?"
"2층으로 올라가 숨으세요. 일단 제가 돌려보내 볼게요."
"알았어. 가만, 노트북은?"
"노트북요?"
"공식적으로 난 노트북 수리하러 온 기사로 되어 있어. 노트북이라도 손에 들고 있어야 의심을 덜 받지."
"아, 네."
은성이 거실에 있던 노트북을 접어 손에 쥐어주었다.
도훈은 2층으로 오르며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출입구는 문수가 틀어막고 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
어떻게든 2층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도훈이 2층 창문을 찾았다. 창문 사이로 밑을 슬쩍 내려보니 곰같은 덩치의 김문수가 한지연을 부축하고 있었다.
‘뭐야 저 어이없는 모습은? 아, 지연이가 나름 시간을 벌고 있었구나.’
도훈은 대충 상황을 파악한 뒤 집 반대편으로 난 창문을 찾아 열었다. 2층 정도의 높이라면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지연을 부축하던 문수는 그제야 은성을 만나러 왔다는 목적이 떠올랐다. 부하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그대로 돌아갔다간 수상한 소문이 돌것이 우려되었다.
‘전할 말도 있으니 안부를 물어야겠지.’
"근데 은성 아가씨는 뭐하고 계시지?"
"네, 네?"
지연이 말을 더듬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았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그게···. 아까까진 수리기사가 방문했는데···."
"방문했는데?"
문수는 아까 전 브리핑 때 들은 일이 떠올랐다.
컴퓨터 수리기사가 저택을 방문해 지연의 컴퓨터를 고친 뒤 은성의 노트북을 손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만. 그럼 은성 아가씨가 그 노트북 수리기산가 뭔가랑 단 둘이 있다는 거야?’
시중들기를 꺼리는 은성의 취향 덕에 별채에는 따로 메이드를 두지 않았다. 사실상 별도의 독립된 건물인 셈이었다.
"지금 VIP를 수리기사랑 단둘이 두었다는 소리야?"
"아, 아니 그게··· 갑자기 복통이 시작 되가지고··· 죄송합니다."
"음!"
문수가 지연을 단호히 떨쳐냈다. 지연은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걸을 수 있지? 아가씨 경호는 내가 맡을 테니 잠시 쉬고 오도록."
"네···."
지연을 밀쳐낸 문수가 은성의 별채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문수는 다시 거칠게 문을 두들겼다.
"아가씨, 결례를 용서하시길."
기다리다 못한 문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프라이버시는 후 순위였다.
거실에서 목욕가운을 걸친 은성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물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문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아, 샤워 중이라 못 들었어요. 근데 언··· 한 대리님은 어디 가고 팀장님께서?"
"한대리는 잠시 의무실에 갔습니다. 혹시 컴퓨터 기사가 방문했다지 않으셨나요?"
은성이 슬쩍 2층 계단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네, 잠깐 들렀다가···."
"그리고요?"
"돌아갔어요."
"확실합니까?"
문수는 예리한 사내였다.
은성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가늘게 떨리는 것과, 순간적으로 2층을 쳐다본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죄송합니다만, 2층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2층은 왜요?"
"현재 경호단계가 강화된 상태라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건 아시죠?"
"네."
"기사의 방문은 예정되어 있던 일이지만, 이곳까지 들어온 것은 계획에 없던 상황입니다. 저택의 경호 책임자로서 미연의 사태를 예방해야 하니만큼 협조해 주십시오."
"아, 아니 그래도···."
은성이 막아보려 했지만 문수의 행동이 한 발 빨랐다.
그는 은성을 지나쳐 가로지르더니 재빨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문수가 확신했다.
‘아가씨가 뭔가를 숨기고 있구나.’
잘은 모르지만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태도가 아니었다.
늘 상냥하고 여유가 넘치는 것에 비해, 지금은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이었다. 특히 말을 나눌 때 시선을 전혀 마주치지 못하는 게 뭔가를 숨기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문수는 아마도 그것이 컴퓨터 수리기사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층에 재빨리 뛰어 올라봤지만 인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주섬주섬 가운을 동여맨 은성이 뒤따랐다.
"왜, 왜그러세요?"
"아, 혹시나 해서 둘러보았습니다. 기사가 2층을 방문한 적은 없었습니까?"
"네. 노트북은 1층에 있었고···."
은성도 도훈이 사라진 것을 파악하고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현장 수리가 불가하대서 가지고 가라고 일렀어요."
"음."
문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전기를 들었다.
< 685. 중수의 자격-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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