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1. 중수의 자격-10- >
"진심?"
"단, 위험한 짓은 여기서 멈춰줘."
지연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알다시피 널 부른 사람은 은성 아가씨야. 아가씨가 오죽 답답했으면 너를 집으로 데려와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했겠어?"
"흠."
"네가 이렇게 멋대로 굴면 나도 아가씨를 볼 면목이 없단 말이야."
도훈은 지연과 은성이 생각 이상으로 깊은 사이인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가 아는 바로는 외국에 있던 은성은 비교적 최근 한국에 재입국했고, 그 바람에 여자 경호원이던 지연이 그녀를 전담하게 된 것이 전부였다.
끽해야 한 달 남짓?
하지만 은성을 위하는 마음은 마치 친언니가 여동생을 아끼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지연이랑 은성의 관계가 돈독한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오붓한 친자매 사이 같달까요?]
‘그럼 둘이 같이 먹으면 자매 덮밥 하는 기분이겠는걸?’
[아니, 주인님 인성···.]
‘물론 농담이야. 나라고 그런 생각밖에 안 할까 봐?’
[아닙니다. 진심으로 보입니다. 순도 100%.]
‘뭐, 그렇게 생각하던가.’
도훈은 사실 로시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번에 무리를 해서 은성을 다시 만나는 배경에 전처에 대한 복수의 플랜이 깔려있다는 사실이었다.
‘지연이 말대로라면 장차 은성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재력가가 될 거야. 플레이어의 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걸린 나에겐 그녀의 도움이 분명 필요할 거야.’
물론 도훈은 그런 내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은성이는 잘 지내고?"
도훈이 은성에 대해 묻자 지연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마치 몰래 짝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친한 친구의 근황을 물었을 때의 표정 같았다.
"···뭐. 그럭저럭."
"아까 물었지? 나랑 은성이랑은 어떤 관계냐고?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야. 고성민이랑 연이 닿는 바람에."
"고성민?"
"응. 내 동생이 한국에 잠시 놀러 왔을 때 일인데···."
지연도 도훈을 감시하기 전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였다.
"그럼 같이 별장을 갔다는 얘기야?"
"응. 내 동생이랑, 동생 친구들. 그리고 고은성까지."
"설마 거기서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지연이 의심했다.
만나자마자 드라이버를 가지고 자신을 농락하던 남자다.
연예인 뺨치게 예쁜 은성을 가만 둘리 없다고 생각했다. 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도훈이 겉보기에도 굉장히 매력적인 사내라는 점이었다.
얼굴도 훈훈하게 잘생기고, 무엇보다 몸매가 끝내줬다. 그뿐인가?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완벽한 남자친구였다.
결정적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대물과 섹스킬. 오랜만에 다시 만났지만, 여전히 명불 허전이다. 그와 보냈던 하룻밤은 평생을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이상한 짓이라니?"
"네가 은성 아가씨를 보고 참았을 리가 없잖아?"
"에이, 아니야. 친동생도 같이 있었고, 또 그땐 고성민도 옆에 있었다고. 그 개차반 같은 성격에 나를 제 여동생 곁에 가만두었을까 봐?"
사실 고은성 뿐만 아니라, 의붓 여동생 이혜은부터 미국인인 사라와 스테파니까지 닥치는 데로 따먹은 그였지만 굳이 지연에게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알아봐야 좋을 것도 없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판단했다.
도훈이 대답에 지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스콤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고성민이 함께 있었다면···.’
고성민의 여동생 사랑은 지극한 편이었다.
집에 오래 있던 시종들 말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여동생을 끔찍히 아꼈다고 했다. 외출할 때도 늘 손을 잡고 다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한 침대에서 잤다나? 은성이 악몽을 꾸면 무서워 한다는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은성 아가씨가 도훈일 보고 반할 만도 했겠는데.’
고성민이 아닌 다른 남자.
재벌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다른 남자를 제대로 만나본 적 없던 은성에게 도훈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남자를 많이 만나본 여자도 흔들릴 텐데, 하물며 숫처녀나 다를 바 없는 고은성이라면야.
"흠흠! 암튼 잠시 뒤 아가씨 과외가 끝날 거야. 그럼 넌 나랑 같이 아가씨 방으로 가서 노트북을 고치는 거야."
"이해했어."
"난 잠시 핑계 대고 밖에 나가 있을 게."
"웬일로?"
"오랜만에 만났으니 둘이서 회포 풀 시간을 줘야지. 은성 아가씨가 널 엄청 보고 싶어했으니까."
"아."
"대신."
지연이 도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가씨에게 허튼짓 하기만 해.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테니까."
"에이, 나를 뭘로 보고."
"널 아니까 하는 말이야. 이 짐승같은 놈아."
"훗-. 내가 짐승이면 짐승 밑에서 헐떡인 너는 뭔데?"
"닥쳐."
"근데 거기도 CCTV가 있는 건 아니지?"
"없어. 사생활 때문에 감청 장비고 CCTV도 없는 몇 안 되는 청정지대거든."
"오호."
도훈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한마디로 은성의 방은 이 저택의 밀실이나 마찬가지란 소리였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 없어. 내가 문밖을 꼭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무 짓도 안 한데도 그래."
"말은 진짜."
도훈이 몇 번을 약속했지만, 지연의 염려는 가시질 않았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차라리 아까 물을 다 빼버렸어야 되는 건데."
"뭐라고?"
"아, 아니야."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네가 잘못 들었겠지."
"아닌데? 똑똑히 들었는데? 나 물 빼주고 싶어?"
"누, 누가 그렇데? 그나마 한 번 싸고 나면 이상한 생각은 못 할 거 아니야!"
도훈이 생각했다.
‘내 정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싸도 끄떡없는 걸 모르나? 그나저나 지연이도 마저 하고 싶을 텐데···. 감시하는 눈이 너무 많으니, 원.’
도훈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척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감시 카메라의 위치를 찾는 것이었다.
‘조명등 위에 하나, 건물 처마 쪽에도 하나. 그리고 나무 위인가?’
[김문수 팀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정말로 철통같은 경계로군요.]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얘기가 있어.’
[무슨 뜻입니까?]
‘저런 경계는 밖에서 침투하는 사람을 막는 데나 효과적이라는 거야. 안에서 이렇게 활개 치고 다닐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로시가 우려하듯 대답했다.
***
"다들 별일 없지?"
"넵."
경호1팀 사무실.
셔츠에 멜빵을 걸친 김문수 팀장이 오후 브리핑을 받았다. 터질 것 같은 가슴근육에 유난히 셔츠가 작아 보였다.
"보고 드립니다."
"회장님 병세부터."
서류철 들춰보던 문수가 가장 먼저 회장의 몸상태를 점검했다.
"여전히 차도가 없으십니다. 차트에 보시면···."
문수가 페이지를 넘겨 상주 주치의가 요약한 차트를 빠르게 훑었다.
‘모든 지표가 최악이군. 슬슬 장례식을 준비할 차례인가.’
문수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아직 후계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
지금 고회장이 타계한다면, 그룹 전체에 어마어마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것이다.
자신의 임무는 고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것. 그 때문에 마음에는 썩 들지 않지만, 고성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거참···. 까라면 까야하는 입장이니.’
"고 이사님 현 위치는?"
"이사님께선 현재 거제도 공장을 시찰을 마치고 거가대교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중입니다. 그쪽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신 다음 서울로 복귀할 예정입니다."
"따라다니는 수행팀에 기별을 넣어둬.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곧바로 비행기 띄울 수 있게 준비하라고."
"네."
대답하는 부하직원도 바짝 긴장했다.
회사의 명운이 달린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은성 아가씨는 잘 계시나?"
"네. 별일 없습니다. 방금전 수업을 마치고 휴식 중으로 알려졌습니다. 한데···."
동향을 파악하던 직원이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왜? 더 보고할게 있나?"
"아, 아닙니다. 브리핑 직전 최신화된 내용이 있는데 딱히 신경쓰실 내용은 아닙니다."
"야. 김우영이. 보고 똑바로 못 해?"
"네, 넵."
"신경을 쓰고 말고는 내가 결정한다. 넌 그냥 보고만 똑바로 하면 돼."
문수가 목소리를 낮추고 으르렁거리자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평소엔 장난도 잘 걸고 농담도 곧잘 하지만, 일에 있어서만큼은 한치도 양보가 없는 상관이었다. 확실히 외국에서 용병 생활을 했다더니, 이럴 때마다 뿜어대는 기도가 감히 버티지 못
할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 넘었습니다."
"말해."
"은성 아가씨의 노트북에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해서, 오후에 컴퓨터 수리를 하러 들어온 기사가 잠깐 봐준다고 합니다."
"수리?"
"네. 한지연 대리님의 컴퓨터 고장으로 부른 기삽니다."
"흠···."
문수가 턱에 난 수염의 손톱으로 긁었다.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뭐, 별일은 아니군. 아무튼 오늘부턴 바짝 긴장해. 회장님 병세가 심상치 않으니 말이야."
"넵!"
경호팀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
"이쪽으로."
"아···."
지연의 에스코트에 따라 저택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건물이 큰지 건물이 몇 동씩 나뉘어 있었는데, 그녀의 말로는 별채라 불리는 공간이었다.
"이야, 대체 집이 얼마나 큰···."
"쉿-. 입조심 해. 어느 곳에 있든, 항상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예압."
그나저나 영화에서나 보던 이런 집이 서울 한복판에 떡하니 존재할 줄이야. 세상은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안쪽에 아가씨가 계실 거예요. 기사님 방문한다고 말씀드려 놨으니 노트북 좀 한 번 봐주시면 돼요."
지연이 사무적으로 말투를 바꾼 것으로 보아 여기서부터 감청 구간인 것 같다.
"네. 혹시나 운영체제를 다시 깔아야 하는 거면 시간이 제법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운영체제를?"
"원래 윈도우라는 게 쓰면 쓸수록 느려지는 특성이 있거든요. 가장 빠른 해결책은 완전히 밀어버리고 새로 드라이버를 잡아주는 게 낫죠."
"암튼, 잘 부탁드릴게요."
"네."
지연이 밖에서 대기하는 사이 나는 별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난히 창이 큰 커다란 방에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등을 돌려 서 있었다.
‘은성인가?’
그녀는 나의 입장을 의식한 듯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쉬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노트북 AS로 왔습니다."
"도훈··· 오빠?"
은성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와···.’
예전에도 느꼈지만, 은성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귀족 같은 기품이 온몸에서 흘러 넘치는 여자였다.
"저, 노트북을···."
왠지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부끄러워 시선을 돌리는 데 은성이 다다다 내 쪽으로 달려왔다.
"어, 어!"
은성이 변장한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맹렬하게 포옹했다.
"오빠!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그, 그러니까."
"걱정마세요. 이 방에서 나누는 대화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까요."
은성은 조심스러워 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제야 내 품에 안긴 조그만 아가씨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아하다. 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곱게 자란 부잣집 딸.
은성은 나와 재회한 순간이 감격스러운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아··· 다시 만나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그러게. 한지연씨가 고생을 많이 했어."
"네. 들었어요. 아, 내 정신 좀 봐. 출출하실 까봐 다과 좀 준비해 놨어요."
은성이 내 손을 잡고 응접테이블로 이끌었다.
최고급 가죽 소파가 거실 한 가운데 자릴잡고 있었다. 50평도 넘어 보이는 2층 주택을 혼자 오롯이 쓰고 있는 듯 했다.
"죄송해요.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괜히 눈치가 보여서···."
"와, 뭘 이렇게나 많이···."
은성이 겸양을 떨었지만, 척 보기에도 미슐랭 쓰리 스타에서나 볼법한 값비싼 디저트들 뿐이었다.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 같은 알록달록한 마카롱, 일본의 제빵 장인이 직접 만든 듯한 도지마롤, 그밖에도 생과일을 통째로 갈아 놓은 각종 쥬스들까지. 이
런 음식을 아무렇게나 먹을 수 있는 재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간시이 너무 예뻐서 먹기도 부담스럽다야."
"뭘 또 부담까지."
은성이 생글생글 웃었다.
"언니는 어딨어요?"
"응, 둘이서 얘기 나누라고 밖에서 대기하는 중이야."
"아···. 같이 들면 좋을 텐데."
"불러도 안 들어 올 거야. 밖에서 감시한다고 했거든."
"감시라뇨?"
"음, 누가 불시에 들이 닥칠지도 모르니까."
"아···."
나는 지연을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래, 잘 살았어? 그때 잠깐 통화 한번 하고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저보다는 오빠 소식이 더 궁금해요. 혜은이는 잘 있어요?"
은성이 여동생 소식부터 물었다. 사실 한국에 다녀간 뒤로 혜은이의 연락이 뜸한 상태였다. 아마 출생의 비밀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모양이라 먼저 연락을 하진 않았다.
"그냥 뭐 그렇지. 그날 이후로 미국 돌아가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오빠는요?"
"나도 뭐 학교 잘 다니고 있지. 와, 근데 이거 엄청 맛있네?"
한입 베어 문 마카롱이 입에서 바스러지며 살살 녹았다. 쫀득하면서도 달달한 식감이 태어나 먹어 본 디저트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 같았다.
"많이 드셔요. 오빠가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가져와 달라고 했거든요."
"고마워."
간식으로 허기를 채우는데 은성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응?"
"혹시 여자 친구는···."
< 681. 중수의 자격-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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