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9. 중수의 자격-8- >
"그럼 바로 수리 가능한가요?"
도훈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부품을 구해 납땜해야 합니다."
"납땜요?"
"하지만 더 좋은 건 다른 제품으로 무상 교환을 받는 거죠."
"교환도 돼요?"
"네. 보통 컴퓨터 부품은 3년 무상AS가 기본이거든요. 혹시 구매하신 지 얼마나 된 컴퓨터죠?"
"글쎄···, 우리 여기 컴퓨터 언제 교체했지?"
"그건 시설과에 물어봐야 하는데···."
"잠시만요. 보통 시리얼 넘버에 생산 년도가 표기 되어 있거든요. 영수증 없어도 3년이 지났지 않았으면 무상 교체 대상입니다."
도훈이 메인보드에 붙은 바코드를 확인했다.
"다행히 2년 전 제품이네요. 보드만 따로 교체 가능하겠어요."
"와, 역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켜고 끄는 법만 알지, 이런 쪽으론 완전 문외한이라···."
"우선 이 컴퓨터가 담당하는 CCTV가 있으니 당분간 쓰시다 여력이 생기면 교체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아직까지 사용은 가능하니까요."
"그래야겠네. 시설과에 청구 넣어야지."
도훈이 다시 케이스를 닫고 컴퓨터를 조립하며 넌지시 물었다.
"근데 무슨 집에 이렇게 CCTV가 많아요?"
"아, 이건 일부예요."
"일부라구요?"
눈에 보이는 모니터만 모두 8개.
설치된 카메라만 최소 8대 이상이라는 말이고, 시간차로 전환되는 화면을 고려할 때 실제 대수는 그 두 배가 족히 넘는다는 의미였다. 도훈은 저택의 감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재차 질문했다.
"혹시 내부에도 더 있는 건가요?"
"음, 은밀한 곳까지 모두 다 있는 건 아니지만···."
"야. 너 지금 뭔 소리해?"
그때 다른 직원이 급히 말렸다. 지금 언급하는 내용은 내부기밀을 발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차. 말실수 할 뻔했네. 죄송해요. 이건 기밀 사항이라."
"아, 아니에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도훈이 머쓱해하며 컴퓨터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선을 다시 연결하고 부팅 시키자, 컴퓨터가 잘 작동되었다.
"일단 원인 파악은 됐으니, 나중에 시간 날 때 교환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괜히···."
"아니에요. 잠깐 들른 건데요. 그럼 전 이만."
"대리님은 저택 안쪽 들어가시면 다른 직원이 안내해 주실 거예요."
"네."
도훈이 꾸벅 인사하며 경비실을 빠져나왔다.
"휴-. 하마터면 입구에서 컷 당할 뻔했네."
도훈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저택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거대한지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길을 따라가는데 3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했다. 차로 들어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본인 개인 소유차는 들킬 가능성이 컸다.
[신기하네요. 컴퓨터 쪽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겁니까?]
‘응, 취미 생활이었으니까.’
[취미요?]
‘이정우로 살 때 말이야. 딱히 즐길만한 취미가 없어서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거든. 조립도 자주 하고.’
[이야, 뭐든 배우면 써먹을 때가 있다더니···.]
‘그래도 아이템 덕에 고장진단을 빨리해서 다행이야. 원래 수리할 때 제일 어려운 일이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찾는 거거든. 한 번에 못 찾으면 다 분해해서 예비 부품으로 일일이 테스트해봐야 해. 재수가 좋으면 바로 찾고, 운 없으면 시간싸움이고.’
[아하.]
저택의 입구에 도착하자 미리 기별이 있었는지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세련된 메이드 복을 입은 여직원이었다.
"AS 때문에 오셨죠? 이쪽으로."
도훈은 하녀 복을 입은 여직원의 모습에 뜨악했다.
‘캬, 재벌들 취향하곤. 고성민이 그 자식이 왜 그렇게 변태가 됐는지 알 것 같군.’
[왜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 저렇게 예쁜 여자들이 시녀복을 입고 돌아다녔을 거 아냐. 도련님 도련님 모시면서.’
[그렇다고 다 변태가 되진 않죠.]
‘쯧쯧. 남자를 모르네. 한국에서 재벌 3세가 어떤 건지 몰라?’
[어떤 건데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다 눕힐 수 있다고 생각할걸? 한창 왕성한 나이에 저렇게 성숙하고 예쁜 누나들이 집안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해 보라고. 팬티만 빨아줬을지 알게 뭐야?’
[주인님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게 문젭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변태새끼는 잘 알지.’
도훈은 일전에 만난 고성민을 떠올렸다.
의붓동생에게 약을 타 강간을 모의했던 재벌가의 삼남.
어째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성격이 정 반대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오만하고, 안하무인에,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고성민과 상냥하고 배려심 많고, 천사같은 고은성은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이것도 나름 신의 균형인가?’
[네?]
‘아니. 한 명이 너무 모나니, 나머지 한 명은 착하게 만들어 준 게 아니냐는 거지. 왜, 선이 있으면 반드시 악이 있듯이 말이야. 선악 총량의 법칙이랄까?’
[그럼 주인님은 지금 어느 쪽에 서 계십니까?]
로시가 던진 질문에 도훈이 순간 발걸음 멈추었다.
인공지능이 물었다기엔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글쎄··· 나는.’
과거의 이정우도 결코 착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를 악하다고 하기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환생 이후 도훈의 삶은 솔직히 말해 발정난 개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여자를 꼬시고, 따먹고, 또 꼬시고, 또 따먹고. 위업과 미션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여자들을 건드리고 책임지지 않고 방생해 왔다.
누가 자신을 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도훈은 고심 끝에 대답했다.
‘난 그냥 대물.’
[네?]
‘대물이라고. 선과 악의 구분 따윈 대물 앞에 무의미해.’
[궤변입니다.]
"어째 그러세요?"
도훈이 갑자기 멈춰서자 길을 안내하던 메이드가 물었다.
"아, 저기 제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런데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네. 저쪽이에요."
도훈은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화장실은 왜요?]
‘저번에 한지연이 그랬잖아. 저택에 그 곰같은 자식이 있을 거라고.’
[김문수 팀장요?]
‘어. 그 사람은 내 얼굴을 알잖아. 만약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어떻게 해? 대책을 마련해야 해.’
[어쩌시려고요? 호빠 면접 때 썼던 페이스오프 마사지 팩이라도 쓰시게요?]
‘야! 다신 그거 안 써. 내가 그거 쓰다가 추남 되가지고 얼마나 굴욕을 당했는데.’
[그러게 누가 역용중에 통화를 하랍니까? 안면근육이 뒤틀린 건 순전히 주인님 잘못입니다.]
‘아무튼. 지연이나 은성이가 내 얼굴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다른 얼굴로 고치겠어?’
[그럼요?]
‘변장을 해야지.’
[변장요?]
‘살짝만 바꾸면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도훈이 거울을 쳐다보고 말했다. 언제봐도 잘생기고 훈훈한 얼굴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캬, 내 얼굴이지만 정말 고놈 자알 생겼네."
[자화자찬하는 취미가 생기셨나요?]
‘그나저나 마켓에 변장 용품 같은 건 없나?’
[당연히 있습니다.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래.’
잠시 후 로시가 변장 세트를 보여주었다.
[이게 가장 좋겠네요. 머리색, 콧수염, 안경. 변장 3종 세트입니다. 일반적인 시제품과는 달리 5시간 동안 진짜 자신의 것처럼 꾸며줍니다.]
‘콧수염까지?’
[물론 형태도 고를 수 있습니다.]
‘흠.’
디스플레이엔 도훈의 얼굴이 3D로 리모델링 되더니 변장 세트를 착용한 모습이 시뮬레이션 되었다. 머리색을 갈색으로 바꾸고 검은 뿔 태 안경에 콧수염까지 붙이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건 진짜 못 알아 보겠는데?’
[구매를 할까요? 소모용 아이템으로 400포인트가 지출됩니다.]
‘구매해.’
잠시 후 도훈이 화장실에서 변장을 하고 나왔다.
밖에서 도훈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던 메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방금···."
분명 멀끔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어딘가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원래 안경 쓰셨었나요?"
"네."
"콧수염도?"
"네."
"이상하다··· 분명히···."
메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본인의 기억이 잘 못 되었다고 착각했다. 이는 도훈이 미리 ‘오빠 믿지’ 립밤을 바른 결과였다. 말하는 이에게 신뢰감을 심겨주는 아이템으로 바르고 난 뒤 하는 말에 자연스럽게 설득력이 올라갔다. 호감도가 높은 경우 상대
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믿게될 정도였다.
"못 믿겠음 신분증 보세요."
도훈이 목에 걸린 패찰을 내밀었다. 일전에 구매한 신분증 위조기로 즉석에서 바꾼 사진은, 변장한 그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출입용 패찰 사진과도 일치하자, 메이드는 자신이 정말로 착각했다고 오해하고 말았다.
"제가 좀 눈썰미가 없는 편이라···.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럼 어디로?"
"아네, 저기에요."
도훈이 메이드를 따라 방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을 입은 한지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AS 기사님 방문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이만."
메이드가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도훈이 긴장한 표정으로 선 지연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컴퓨터 어디가 고장이실까요?"
지연은 말없이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뭔가를 의식하는 것처럼 입술 위로 손가락을 세워 ‘쉿-’하고 말했다.
‘뭐야? 왜 저래?’
[말조심하라는 뜻 같은데요?]
‘설마 여기도 카메라가 설치된 건가? 로시, 보이는 거 있어?’
[육안상 보이는 건 없습니다. 어쩌면 대화가 어딘가로 감청되지 않나 의심되는군요.]
눈치가 빠른 도훈은 지연의 말귀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점검했다. 그 사이 메모지와 펜을 가져온 지연이 종이에 육필로 뭔가를 써서 내보였다.
-이 방에 설치된 수신기로 대화가 감청되고 있어.
도훈이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재벌가 영애의 근접 경호원이라지만 사생활 따위는 없는 건가?
"증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냥 안 켜져요."
"한 번 열어 봐야겠는데요?"
"네."
도훈은 컴퓨터를 분해하며 지연에게 메모장을 받아 똑같이 필담을 나누었다.
-뭐야? 대체 여긴 뭐가 이렇게 감시가 삼엄해?
-회장님 병세 때문에. 근데 너 얼굴꼴이 그게 뭐야?
-내 얼굴이 어때서?
-그 안경 완전 웃긴 거 알지? 콧수염은 또 뭔데?
-여기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잖아.
-팀장님?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휴, 상태가 정상처럼 안 보이는데요?"
"그래요? 어디가 문제일까요?"
"진단에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은성 아가씨는 지금 과외 중이야.
-과외라니? 혹시 재수하니?
-무슨 소리야. 그룹 승계 때문에 전문가 그룹에게 매일 특강을 받고 있거든.
-은성이 그룹을 승계한다고?
도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장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에 어렴풋 짐작하긴 했으나, 삼현 그룹을 물려받다니. 그럼 재벌가 막내딸이 아니라, 재벌 그 자체가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경영 전면에 나서는 건 아니야. 하지만 보유지분이 엄청나니 자기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아하.
-근데 너 은성 아가씨랑은 구체적으로 무슨 관계야?
지연의 질투 섞인 반응에 도훈이 대답을 피했다.
"이거 부품을 교체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떤 부품이요?"
"아직은 알 수 없고 전체적으로 분해를 해서 누드테스트를 해봐야 할것 같아요."
"으음···, 누, 누드 테스트."
"네."
-왜? 너도 같이 벗게?
-무슨 헛소리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어차피 소리만 녹음된다며? 여긴 감시카메라 없지?
지연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케이스부터 열게요."
도훈은 케이스를 여는 척하며 지연의 정장 단추 하나를 풀었다. 원 버튼의 단추가 열리자 앞섶이 벌어지며 블라우스에 감추어져 있던 가슴이 튀어나왔다.
"아!"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지연이 놀란 얼굴로 도훈의 손목을 잡아챘다.
입술을 꽉 다물고 고개를 가로젓는 게, 더는 허튼짓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도훈이 케이스를 열더니 혼잣말 중얼거렸다.
"혹시 드라이버 같은 거 없을까요?"
"드라이버요?"
"네. 케이스는 핸드스크류 방식이라 손으로 풀 수 있는데 안쪽은 드라이버로 열어야 해서요."
"잠시만요."
지연이 서랍장을 열더니 물었다.
"십자요 일자요?"
"대자요."
"네?"
"크고 긴 걸로 주세요."
지연의 인상이 구겨졌다.
안 그래도 대화가 감청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도훈은 장난을 그치질 않았다.
"본체가 깊어서 긴 게 필요하거든요."
"여깄어요."
지연이 화내듯 드라이버를 탁 건넸다.
"근데 기사님도 드라이버 가지고 다니지 않으세요?"
지연은 분명 도훈의 가방에 장비를 챙겨 놓은 것으로 기억했다.
"아, 제건 전동이라서요."
"전동이 왜요?"
"이게 떨림이 너무 세서, 주요 부품을 건드릴 수도 있거든요. 혹시 전동 좋아하세요?"
도훈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들더니 드라이버를 안으로 박아 넣는 시늉을 했다. 누가봐도 음란한 손동작에 지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 전동은 저도 잘 안 써봐서."
"그럼 전동으로 해드릴까요?"
"아, 아니요. 전 그냥 드라이버로 할 게요."
"네."
도훈이 씩 웃더니 드라이버 뒤의 손잡이를 지연의 정장 치마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헛!"
"왜요?"
"그, 그걸 왜 거기 박아요?"
지연은 치마 속으로 드라이버가 들어오자 어쩔 줄 모르고 소리쳤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원래 용도가 거기에요. 여기서 이렇게 힘을 주어 돌리면···."
손잡이가 뭉특한 드라이버는 끝머리가 귀두처럼 반질반질했다. 그 부분으로 팬티에 대고 빙글 돌리자 지연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나 신음이 새어 들어갈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였다.
"흡!"
< 679. 중수의 자격-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