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8. 중수의 자격-7- >
지연의 도움으로 완벽한 AS기사로 변신한 도훈은 긴장한 표정으로 저택을 향해 걸었다. 인근 야산이 통째로 포함되어 있는 대저택은, 밖에서 볼 땐 웅장한 성처럼 느껴졌다. 담벼락을 따라 이동하는데 그 높이가 3M에 달해 절로 위엄을 느끼게 했다.
‘서울 도심에 아주 아방궁을 짓고 살고 있구나. 대체 얼마나 돈이 많은 거람?’
일전에 가정교사의 자격으로 애자매의 집을 방문한 것은 새발의 피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가 집이라면 거긴 개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정말 으리으리 하군요.]
‘그러게.’
[혹시 쪼신 건 아니겠죠?]
‘설마. 그래 봐야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도훈이 저택의 입구에 서자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원이 마중을 나왔다. 말이 경비원이지 사실상 경호원급의 인력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경비원은 젊고 단단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눈빛이 살아 있는 게, 군인이 아닌가 착각될 만큼 절도가 있었다.
‘일개 문지기조차 저렇게 규율이 잡혀 있구나.’
"컴퓨터 AS요청으로 왔습니다."
도훈이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연기했다.
"AS요? 잠시만요."
사내는 들고 있던 무전기로 어디론가 연락했다.
"혹시 오늘 AS기사 방문 접수 들어온 게 있습니까? ···네. 한지연 대리님요? 네, 확인 후 들여보내겠습니다."
말단이던 한지연이 어느새 대리가 되어 있었다.
재벌가의 직계인 고은성을 직접 마크하면 승진한 결과였다.
"잠시 신분증 좀 확인하겠습니다."
"넵."
도훈이 순순히 협조했다. 사내는 도훈의 얼굴과 목에 건 패용증을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미간을 좁히며 꼼꼼히 살피는 눈치가, 공항 검색대를 지키는 마약 단속반보다 깐깐해 보였다.
"···흠, 저택에서 엄수해야 할 사항은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사진 촬영 금지, 개인 통화 금지. 또 지정된 장소 이외의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 귀하 업체에 불이익이 가구요."
"네. 알고 있습니다."
지연이 미리 조치한 덕분에 저택으로의 입장은 수월히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신분증 확인을 마친 경비가 도훈을 들여보내려고 할 차례였다.
그때 불쑥 경비가 물었다.
"아, 컴퓨터 기사라고 하셨던가요?"
"네."
"혹시 저희 컴퓨터도 잠깐 봐주실 수 있을까요?"
"네?"
"CCTV용 컴퓨터가 이상해서요."
도훈은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했다.
‘어라,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
"그, 그런가요?"
"잠깐이면 됩니다. 고장으로 판명되면 저희도 기사 요청을 하려고요. 어차피 같은 업체잖아요."
"알겠습니다."
도훈은 경비를 따라 입구 근처의 보안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왠지 일이 꼬이는 느낌이었지만, 여기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들킬 것이 우려되었다.
자기만 들키는 것이면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까딱하다 자신을 들여보낸 한지연까지 위험해 질 수 있었다. 그건 지연에게 굉장히 민폐가 될 것이다.
‘제기랄. 근데 내가 무슨 컴퓨터 기사라고···.’
도훈은 땀이 나기 시작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경비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실은 5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 안에서 근무하는 인원이 2명 정도 있었고, 벽에는 모니터 8대가 설치되어 담장 경계를 비추고 있었다.
"누구?"
안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다른 직원이 도훈이 따라들어온 것을 보고 물었다.
"컴퓨터 AS 기사님이래. 3번 컴퓨터 좀 봐달라고 부탁했어."
"어, 그래. 그거 좀 문제 있던데."
도훈은 점점 많아지는 경비들 숫자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세 남자 모두 젊고 강해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감시 카메라를 확인하는 자리면 딴짓을 하고 놀아도 상관 없을 텐데, 그들은 눈을 치켜뜨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생각보다 삼엄한 분위기에 도훈도 슬슬 걱
정이 들었다.
‘일개 문지기에 불과한 이들이 이 정도로 빡세게 근무하면 내부는 대체 어느 정도란 거야?’
새삼 도훈은 자신이 어느 곳에 들어와 있는지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재벌가의 저택이었다. 그것도 회장이 병환으로 쓰러져 오늘내일하는 와중의.
[정신 바짝 차리셔야 겠습니다.]
‘물론이지.’
"이 컴퓨텁니다."
"네."
"며칠 전부터 계속 블루스크린이 뜨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요. 완전히 안켜지면 모르겠는데, 재부팅을 시키면 또 한동안은 되더란 말이죠."
"음, 일단 내부를 뜯어봐야 알겠는데요."
"그런가요?"
경비는 알겠다는 듯 연결선을 해제한 뒤 컴퓨터 본체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자 해당 컴퓨터가 관할중이던 모니터 화면 두 개의 송출이 중단되었다.
사내가 무전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후문 담장이랑, 차고지 부근 CCTV 점검 중. 외부 순찰 요망."
-라져, 뎃.
아마도 감시용 카메라가 기능을 잃자, 인편으로 경계를 강화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대낮인데도 이 정도로 삼엄하게 경계를 펼치는 모습에 도훈도 뜨악했다.
‘미쳤네. 군사 시설 저리 가라 할 정도야. 그나저나 내가 무슨 수로 이 컴퓨터를 수리한담?’
도훈은 컴퓨터 쪽으로 관심이 많았지만, 일반인 중에서 조금 뛰어난 정도였다. 저택에 출장 수리를 올만큼의 지식이 없었던 만큼 경비원 셋이 지키고 있는 이곳에서 바짝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장비 좀 꺼내겠습니다."
도훈은 한지연이 의복과 함께 챙겨준 조그만 가방을 열었다.
거기엔 전동드라이버 같은 수리용 도구가 담겨 있었다. 제법 구색을 갖췄는지 휴대용 먼지 제거제나 교체 부품도 보였다.
‘일단 대충 고치는 시늉만 하자.’
도훈은 케이스 옆면을 뜯어낸 후 수리하는 척 일을 했다. 도훈이 말없이 수리에 들어가자 경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야간조 한창식이 오늘 비번이라지?"
"걔 여자친구 생긴 것 같던데?"
"진짜?"
그래도 젊은 사내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라 남들의 연애사가 화제로 오르자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그 얼굴에 무슨 재주로 여자를 꼬셨을까?"
"크크. 니보단 낫지 인마."
"뭐?"
"창식이가 얼굴은 좀 그래도, 옷걸이는 썩 괜찮잖아."
"헬스 오지게 하더만, 결국 몸으로 여잘 꼬시는 구만."
"은근히 등빨 좋아하는 취향이 있더란 말이지."
도훈은 그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며 분해된 본체를 쓱 훓어 보았다. 사실 블루스크린이 뜨는 것은 내부 소프트웨어 충돌이나 오류의 가능성이 더 컸지만 일단 되는 데로 분해 부터하고 보는 도훈이었다.
‘씨발, 이걸 대체 어떻게 한다?’
"좀 문제가 있나요?"
다시 경비가 다가와 도훈에게 물었다. 그들은 대부분 무도 유단자나 경호학과 출신이 많았기에 기계치에 가까웠다. 도훈이 열어본 본체를 쓱 한번 보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근데 기사님 되게 동안이시네요."
"아, 그런가요?"
도훈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제 겨우 대학교 2학년인 도훈으로선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빨리 취직을 했다고 해도 군대를 다녀오면 26살 전후 일 텐데, 도훈은 암만 봐도 두세살은 어려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네. 기사님 하기엔 너무 잘생기신 거 같은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하필 다른 직원 여자친구 사귄 이야기를 하고 있던 터라 갑자기 도훈의 훈훈한 외모에 관심이 쏠렸다. 컴퓨터 기사 치곤 너무 잘생긴 얼굴이 문제였다.
"몸도 엄청 좋으시고."
경비 하나가 도훈의 몸을 만지더니 다부진 근육에 깜짝 놀랐다.
"혹시 운동하시나요?"
"헤, 헬스를 좀···."
도훈은 갑자기 이목이 집중되자 더욱 당황하여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필 지연이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패찰에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정체를 숨기는 모자 아이템으로 다른 사람처럼 위장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온전히 그의 얼굴로 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AS방문하시다 보면 혼자 사는 여자들도 부르는 경우가 있나요?"
"아, 네 뭐···."
도훈은 애꿎은 램을 뽑았다 끼우거나, 내부의 선들을 하나 씩 점검하는 척하며 대답했다.
"방문 출장가면 인기 많으시겠는데."
"하하, 새끼 야동을 너무 봤네. 인마 여기가 무슨 미국인 줄 알아? 배관공 판타지 있냐?"
"왜요? 여자들이 은근히 유혹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혹시 그런 적 없으세요?"
도훈이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컴퓨터 문제로 부르시는 분들은 대부분 남자 고객들이라."
"그래도 여자도 있을 거 아니에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쩝. AS기사님 하기엔 얼굴이 아까운데."
"이게 직업인걸요."
‘로시, 어떻게 하지? 여기서 못 고치면 걸리는 거 아니냐?’
[음, 아이템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뭐라도 좀 줘봐. 도저히 방법을 못 찾겠어.’
도훈이 한참을 끙끙대자 기사가 다시 다가와 물었다.
"아무래도 입고를 넣어야 할까요?"
"일단 봐보겠습니다."
"괜히 시간 뺏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한지연 대리님 기다리실 텐데."
"어? 대리님이 불렀어?"
"네. 자기 컴퓨터가 안 된다고."
"어째 대리님은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 거 같더라."
"솔직히 우리 경호팀에선 제일 미인 아닙니까?"
"미인은 미인이지."
도훈은 지연의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했다. 직장 내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도훈이 지연과 연이 닿았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근데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너무 사람이 딱딱한게 흠이야."
"대리님이 군인이었어요? 헐."
"몰랐냐? 육사 출신이잖아. 소문에는 엄청 엘리트였다던데."
"하여간 경호팀 쪽은 다들 스펙 장난 아니라니까. 그 왜 팀장님도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활동했다잖아."
"김문수 팀장님 말이죠?"
"어. 사람도 여럿 죽여봤다는 소문이 있어."
"캬-. 대박이네. 거기 외인부대 있으면 프랑스 시민권 나온다던데, 맞죠?"
"한마디로 삼현 경호팀 팀장 자리가 프랑스 시민권보다 낫다는 거지."
"근데···. 팀장님이 대리님 좀 편애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때 잠자코 감시화면을 모니터링하던 한 직원이 말했다. 지연의 이야기에 도훈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 곰 같은 새끼가 한지연을?’
[김문수 팀장이면 그때 경찰서에서 만났던 사람 맞죠?]
‘응. 깡패같이 생긴 사람.’
"에이, 설마."
"아니에요. 그때 뭔 작전 실패했는데도 책임도 안 묻고 승진까지 시켜줬잖아요. 솔직히 대리님이 남자였어봐. 이미 쪼인트 까고 난리 났지."
"그건 좀 수상하긴 하네."
"근데 딱히 사적으로 친해보이진 않던데."
"말단이 우리가 뭘 알겠어. 남녀 사이는 절대 모르는 법이거든."
"크크, 그럼 그 목석같은 대리님이 침대에선 야들야들해진다는 거야?"
"어어. 농담이 과한데."
"아,아 팀장님, 팀장님!"
직원 하나가 한지연 흉내를 내며 신음을 내뱉었다.
지켜보던 도훈은 지연이 놀림감이 되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부품에 힘을 주고 말았다.
뚝-
"어? 뭔 소리지?"
도훈은 자기 손으로 뽑아낸 램을 분질렀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감추었다.
"아닙니다. 여기 좀 먼지가 있네요."
"네."
‘씨발, 좃됐다. 램 부러먹었는데.’
[어, 어떡합니까?]
‘일단 램이 두 개니 하나로 부팅 시켜야지. 이건 몰래 숨겨야 겠다.’
도훈의 실수로 16g 듀얼채널이던 램이 8기가 단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도훈은 그들이 컴맹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부러진 부품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근데 아이템은 아직 못 찾았어?’
[일단 한 개 발견을 했습니다. 만능 수리킷 이라는 세튼덴 구식 전자 제품의 고장원인을 진단해 주는 장칩니다.]
‘구식이라니? 이건 최신 제품인데.’
[천상계 입장에서 21세기 지구의 부품들은 골동품 수준이거든요.]
‘건방지긴. 아무튼 구입해.’
[네. 외형은 현재의 테스터기처럼 생겼습니다. 부품에 대보시면, 전자 제품의 고장 부위가 표시되는 식입니다.]
‘오케이.’
잠시 후 구매한 수리킷이 도착했다.
전송위치를 가방으로 돌린 도훈은 만능 수리킷을 들고 다시 컴퓨터를 살폈다.
지켜보던 경비가 물었다.
"그건 뭔가요?"
"아, 테스터 기에요."
"테스터기요?"
"전류량이나 전압을 체크하는 건데 혹시나 드물게 전압이 튀면서 블루스크린을 만드는 경우가 있거든요. 부품을 점검해 보려고요."
"오, 역시."
"전문 기사는 다르네."
"그러게 B팀 영섭이가 나름 컴퓨터 좀 다룬다더니 원인도 못 찾고 빈손으로 갔잖아."
"걔는 그냥 조립이나 좀 해봤지, 전문 수리기사님이랑 같냐?"
"역시 사람이 배우고 볼일이야."
도훈은 자신을 수리기사로 오해하는 경비들의 말에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애써 모른 척 했다. 만능킷을 가지고 컴퓨터 메인보드를 접촉하자 디스플레이에 곧바로 고장원인이 떠올랐다.
<메인보드, 캐패시터 불량
‘아아! 이거구나.’
[이게 뭡니까?]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는 콘덴서 부품인데 가끔 고장나는 경우가 있거든. 아마 부풀어 있는 부품이 있을 거야.’
고장 원인을 찾아낸 도훈이 핸드폰 카메라 플레쉬를 비추어 메인보드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자 메인보드 전원부에 달린 원기둥 모양의 캐패시터 하나가 볼록 부풀어 있었다.
‘이거군.’
"찾았어요."
"네?"
"전원부 콘덴서 하나가 말썽이네요. 아마 전압 출렁임 때문에 오류가 떴을 거에요."
"와, 전문가는 다르네."
"역시 이런건 전문가 불러야 된다니까."
쏟아지는 칭찬에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 678. 중수의 자격-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