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1. 아이돌 vs 돌아이-64- >
***
다음날.
핸드폰을 받기 위해 시내 까페로 향했다.
흘린 핸드폰을 주운 사람이 제희라 천만다행이다.
선글라스를 쓰고 나온 그녀가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새벽에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대표님 찾아오고, 매니저들 소집되고···. 어휴."
"왜?"
"린다···. 아무튼 그 똘아이가 숙소에 남자가 숨어들어왔다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정말?"
"네. 진짜 애들 다 깨고."
"이상하다? 난 너랑 있다가 바로 집으로 갔는데?"
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니까요! 정말 잘하셨어요. 혹시나 숙소에 계속 남아계셨다면, 정말 못 볼 꼴 보셨을 거예요. 대표님이 경찰 안부르고 신중하게 판단해서 다행이지."
제희가 요약해준 뒷이야기의 전모는 이랬다.
아이돌에서 돌아이로 변신한 린다는 대표가 도착하자 링링의 방문을 부숴서라도 들어가겠다며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광기에 어린 눈빛으로 미친년처럼 날뛰는 게 귀신이 들른 줄 알았다며.
"대표님이 진정시키느라 혼났어요. 여자 매니저가 숙소 열쇠를 가져오고, 문 따고···."
"근데 린다는 대체 왜 그런 거야?"
"오빠가 링링이랑 같이 있는 줄 알았데요."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난 너랑 있다가 바로 나갔는데."
"근데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응?"
"한참 만에 문을 여는데, 링링이랑 미소가 거기서 같이 나왔거든요."
"미소? 종현이 사촌 동생?"
"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흠···."
"대표님한테는 자다가 악몽을 꿔서 링링이랑 같이 자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특유의 느낌이 있잖아요."
"느낌이라니?"
"왜, 방안도 어지러져 있고···. 살짝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무래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인 것 같았어요."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레즈비언이요."
"헉. 미소랑 링링이?"
나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속으로 웃음을 겨우 참아야 했다. 물론 그렇게 의도한 것은 나였지만 말이다.
새벽 간.
대표가 문 앞에 도착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내가 말했다.
"벽장 안으로 숨을 게."
"네?"
"아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벽장 안에 숨는 거라고요?"
링링이 기가차다는 식으로 따졌다.
하긴 나라도, 10분 동안 세 번을 싸지르면서 끝내 한다는 소리가 벽장 속에 숨는 거라면 빡칠만 했을 것이다.
"나만 믿어. 내가 어렸을 때 마술을 좀 배웠거든."
"대표님, 여기 열쇠."
그때 여자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모든 짐을 챙긴 뒤 커다란 벽장의 문 앞에 비밀의 문고리를 붙였다. 그리곤 우리 집 현관문을 상상했다.
놀랍게도 벽장 문을 닫고 나니 내 원룸 안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 뒤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핸드폰을 흘리고 왔다는 것을 떠올려 아침부터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제희를 불렀고, 제희와 약속을 맞춰 접선했다.
한참 어젯밤 일을 설명하던 제희가 흥분한 채 말을이었다.
"저도 두 사람이 그런 사인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평소엔 티를 전혀 안냈으니까요."
"충격적이긴 하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뭐, 본인들은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들 하는데···. 대표님도 긴가민가한 눈치고. 아, 그래 정 매니저가 옆에서 엄청 두둔하더라고요."
"정 매니저?"
"저희 소속사 해외 스카우터 하셨던 분 있거든요. 링링을 중국에서 데려오신 분이요."
"아하."
"지금은 총괄 매니저로 소속사에 계신데, 어제 대표님이랑 같이 술 마시다 따라오셨거든요. 암튼 그분이 링링이 동성애자 일리가 없다고 완전히 흥분하셔가지고···."
"자기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요. 사실 그게 더 수상하긴 했어요. 근데 더 웃긴게 뭔줄 아세요?"
"뭐?"
"린다 언니···. 아니지. 걔는 완전 똘아이에요. 분명 방 안에 숨어 있을 거라면서 사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는데···."
"뒤져?"
"막 커튼을 뜯어내고 방범창 잡고 흔들고, 침대 메트리스 벌리고, 나중엔 옷장까지 싹 다 뒤집었다니까요?"
"옷장?"
"아, 링링 방이 좀 특이해요. 중국에서 쓰던 가구랑 조명같은 걸 싹 가져와서 다시 인테리어했거든요. 거기 중국풍 자개로 만들어진 엄청 큰 옷장이 있어요.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내가 거기 숨은 줄 알고 거길 뒤졌다고?"
"네. 대표가 그만 하라는 데도, 여기 숨은 게 분명하다면서···. 막 링링 옷을 옷걸이째 빼서 싹 다 내던지는데. 어휴, 진짜 옆에서 말려도 막무가네고···. 난 진짜 린다 언니가 똘아인줄은 알았는데, 그 정돈 줄은 몰랐어요."
"정말 엄청난 일이 있었구나. 링링이랑 미소도 많이 당황했겠네?"
"네. 일단 대표님이 린다랑 그 둘을 떼어 놓어야겠다고 린다 언니를 당분간 숙소에서 내보내기로 했어요. 솔직히 다른 애들도 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데뷔 스트레스로 히스테리가 온 것 같다고. 오빠도 보셨어야 해요. 링링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면
서 길길이 날뛰는데 정말 미친 여자 같더라고요."
"와우."
"링링이랑 미소도 충격이 컸는지 한동안은 자숙하며 지내기로 했어요. 괜히 그룹 내 불화로 스캔들나면 안된다면서 대표님이 입단속을 시켰거든요. 아, 참. 오빠 이것도 두고 가셨더라고요."
제희가 아까부터 옆에 두고 있던 커다란 백팩을 내밀었다. 등산용 가방처럼 보이는 그 속엔 어젯밤 급히 사용했던 소품이 담겨 있었다.
"하이바."
"2층 복도에서 굴러다니는 거 보고 제가 몰래 챙겼어요. 하마터면 이것 때문에 진짜로 들킬 뻔."
"하하. 너 때문에 살았구나."
"저 잘했죠?"
"응. 잘했어. 근데 이건 너 가져."
"헤, 헬멧을요? 전 오토바이도 안 타는데."
"나도 안 타거든. 그래, 이거 쓰고 무대 올라봐. 왠지 웃길 것 같은데···."
"이걸요? 여자 걸그룹이 헬멧을 쓴다고요?"
제희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한참 깔깔거리더니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어, 그러고 보니 뭔가 웃길 것 같기도 한데요? 나중에 안무 선생님한테 물어봐야겠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방송을 보니 큐티는 하이바를 머리 쓰고 점핑하는 안무로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어찌 됐던, 임기응변으로 구매한 하이바가 톡톡히 제 몫을 한 셈이다.
"오빠. 저 급한 일 때문에 잠시 나온 거라 이제 들어가 봐야 겠어요. 숙소 분위기도 뒤숭숭하고···."
"그래. 아무튼 고마워. 나 때문에 괜히 팀 내 불화가 생긴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게 왜 오빠 때문이에요? 자기랑 안 놀아줬다고 린다 혼자 미쳐 날뛴 건데.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잘 수습 될 거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암튼,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응."
제희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나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승부의 신과의 대결을 이겼으나 여러모로 많은 교훈을 남긴 해프닝이었다.
‘어휴, 다시는 그런 미친 짓은 안 해야겠어. 하마터면 쇠고랑 찰 뻔했잖아.’
[그러게요.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비밀의 문고리가 때 마침 활성화되길 망정이지···. 그나저나 다른 사람을 그렇다 치고, 미소양과 링링은 어떻게 설득하실 겁니까?]
‘뭘?’
[주인님의 직접 능력을 보았으니까요. 플레이어가 능력을 들키는 건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야. 옷장 속에 숨었다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나중에 몰래 한 번 다시 가볼까 해.’
[거길 다시요?]
‘별수 없잖아. 안 그럼 초능력이 있다는 걸 빼박 들키고 말테니.’
결국 나는 링링이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을 틈타 다시 되돌아 갔다. 비밀의 문고리가 가진 귀환 기능 덕분이었다. 비밀의 문고리는 딱 한 번 시작점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
벽장 속에서 튀어나온 나를 링링이 귀신 보듯 놀라서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부, 분명!"
"안에서 15시간 동안 꼼짝없이 갇혀 있었잖아."
"마, 말도 안 돼. 린다가 거길 샅샅이 뒤졌었는데···."
"그때가 제일 위험한 순간이었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데 눈까지 마주쳤다니까? 다행히 흥분한 상태라 나를 제대로 못 봤나 봐."
"아···. 진짜. 얼마나 놀랐다구요? 그땐 정말 끝장나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랬지? 다 방법이 있다고. 그나저나 어젯밤에 제대로 못 해서 어쩌지?"
"저도 아쉬워요.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아요. 다들 어젯밤 일로 예민해져 있거든요. 일단 몰래 나가는 것만 생각하세요. 제가 망봐드릴게요."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당분간은 힘들 거 같아요. 오빠 때문에 저랑 미소가 동성애자로 의심받고 있거든요."
링링이 투덜거렸다.
나는 하루종일 시달렸을 링링을 위로했다.
"미안해. 이번 일은 다음에 꼭 보답할게."
"정말이죠? 그땐 정말 단 둘이 만나는 거죠?"
"당연하지."
링링의 도움으로 숙소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나는, 마침내 이번 미션이 종료되었음을 실감했다. 신과의 대결이라는 거창한 타이틀 만큼이나 위험천만한 미션이었다.
주차 시켰던 차에 올라 다시 집으로 향하며 로시에게 말했다.
‘차 타고 문고리를 넘어갈 수 있으면 기름값도 아끼고 얼마나 좋아?’
[차가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있다면 말이죠.]
‘흠, 그나저나 승부의 신이라는 녀석. 정말이지 지독하더만. 몇 번이나 위기를 겪었는지 모르겠어. 미션 하나에 이렇게 살 떨려서야.’
[말했잖습니까. 승부의 신은 지는 내기에 돈을 걸지 않는다고요. 아마 이번에 주인님이 한 방 먹였으니, 벼르고 있을 겁니다.]
‘쳇. 무서워서 살겠냐. 어쨌든 위험수당은 많이 챙겼어. 특수직종 업적 하나 해결하고 만 포인트까지 챙겼으니 말이야.’
로시와 한참 대화를 나누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응? 모르는 번혼데?"
핸드폰에 뜬 번호는 생전 처음보는 번호였다.
혹시나 나에게 빡 친 린다인가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차량의 블루투스로 연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훈 오빠. 저에요."
***
"이도훈, 이 개자식!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팀 내 불화로 당분간 집에서 출퇴근 하게 된 린다는 하루 종일 씩씩거렸다. 특히 대표가 스트레스가 심해 보이니 정신과 진단이라도 받아보는 게 어쩌냐면서 권유할 땐 정말 미친년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왜 그 새끼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해?"
린다는 자신이 이렇게 된 게 모두 도훈의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녀가 종일 짜증을 부리며 집안을 배회하자, 오랜만에 얼굴을 본 그녀의 오빠가 물었다.
"린다 킴. 아이돌 한다고 난다 긴다 설치더니,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가?"
"되지도 않은 라임 지껄일 거면 좀 닥치지 그래?"
"오우, 이 구역의 미친년 등장인가? 오빠한테 닥쳐가 뭐야?"
"그만 시비걸라고. 어떤 새끼 때문에 짜증나 죽겠으니까 지금."
린다의 오빠, 미국식 이름 제임스 킴이 정색하며 물었다.
"뭐? 남자? 어떤 새끼가 내 동생을 짜증나게 해?"
린다와 그녀의 오빠는 평소에도 서로 으르릉거리는 앙숙이었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안 좋은 것과 별개로 여동생이 누군가에게 당하고 왔다는데 가만있을 오빠는 없었다.
"누군지 말만 하라고. 내가 동생들 풀어서 묵사발을 내 줄테니까. 맞는 순간 악시발 하고 비명을 내지를걸?"
그는 여전히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쏟아냈다.
스스로는 그것을 대단한 언어유희라고 착각하는 제임스였다.
그러나 린다는 제임의 말에 귀가 쫑긋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오빠들 아는 어깨들 많다고 했었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한 제임스는 평소 유흥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클럽 운영 쪽으로 관심이 많아, 강남의 모 클럽에 자금을 댄 적도 있었다. 그렇게 어울리게 된 뒷골목 건달들과 호형호제를 하면서 양아치처럼 살고 있었다.
"오빠. 진짜 내가 누군지 말하면 혼내 줄 수 있어?"
오랜만에 찾아온 린다가 부탁을 하자 제임스도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 ‘양아치’라고 부르며 자신을 인간말종처럼 취급하던 여동생이 모처럼 자신을 대접해 주는 기분이었다.
그가 으스대며 말했다.
"당연하지. 말만 하라고. 확 담가 버릴라니까."
"담그긴 뭘 담가? 김장하니?"
"김장은 아니고 긴장해서 말이 헛 나왔네. 핫!"
"아씨, 말장난하지 말고. 내가 진짜 거슬리는 남자애가 하나 있거든?"
"누군데? 너 먹튀 당했냐?
"쫌! 말 좀 좆같이 안 하면 안 돼?"
"설마 질싸 당한 건 아니지?"
"야이, 개새끼야!"
"암소 쏘리. 농담인 거 알지?"
"어휴, 내가 진짜 저 인간한테 무슨···."
한창 이죽거리던 제임스가 모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름하고 사는 곳만 말해. 내 동생 눈에 눈물 나게 한 새끼는 아주 피눈물을 뽑아 버릴 테니까."
린다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은 이도훈. 대학생이야. 국성대 다니고···."
"국성대? 와, 그런 대학도 있어?"
"야. 너는 돈주고 유학."
"스탑. 거기까지. 오케이. 접수했어. 동생은 이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 내가 조만간 그 자식 무릎 꿇고 비는 영상 하나 보내 줄테니까."
린다는 말을 내뱉자 마자 살짝 후회되었다.
"아, 아니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다룰 것까진···."
"그냥 나한테 맡겨만 둬."
제임스가 오랜만에 유희거릴 찾은 것처럼 이죽거렸다.
린다 못지않은 또 다른 또라이가 이곳에 있었다.
< 671. 아이돌 vs 돌아이-6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