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1. 아이돌 vs 돌아이-54- >
"그, 글쎄. 변빌지도?"
린다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링링은 그녀를 더욱 골탕 먹이고 싶었다. 평소에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은 비단 미소만은 아니었던 것.
"아닌데.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더 수상해. 혹시 딴 마음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따, 딴 맘이라니?"
린다의 목 뒤가 서늘해졌다.
"이곳엔 여자뿐이잖아. 아까 보니 헬멧도 꾹 눌러쓰고 있었더라고. 얼굴 식별 못 하게. 당장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닐까?"
"겨, 경찰!"
린다가 기겁하는 모습에 링링이 더욱 몰아붙였다.
"혹시 알아? 몰래 흉기라도 들고 있을지? 가만있으면 안 되겠어."
링링이 핸드폰을 잡고 신고를 하는 척하자 린다가 대경하며 폰을 빼앗았다.
"자, 잠깐."
"왜?"
"괜히 오인 신고하면 더 골치 아파. 아까 대표님도 그랬잖아. 데스패치 애들이 우릴 주시하고 있다고. 걔네 한번 물면 24시간 주야로 밀착 감시하는 거 알지? 밤늦게 아이돌 숙소에 경찰이 들이닥치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그런가?"
"정말 화장실이 급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직접 물어볼게."
"그래, 그럼."
린다는 떠밀리듯 화장실로 다가갔다. 링링이 쪼르르 뒤를 따랐다. 린다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링링이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오늘따라 링링이 왜 이러지? 나 피 말려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했나?’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링링의 의심부터 불식시켜야 했다.
똑똑-
린다가 화장실 문을 노크하며 물었다.
"저기요. 좀 오래 걸리시는데 괜찮은가요?"
"···네, 죄송합니다. 금방 끝낼게요."
도훈이 대답에 린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봤지? 이상한 사람 아니라니까."
"그거야 모르지. 그리고 나 안에 면 생리대 불려놨단 말이야."
"아니 그걸 왜 거기다가!"
"그럼 손빨래를 어디서 해?"
여자들끼리 사는 집이라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린다는 모든 게 못마땅했다.
"민망해도 어쩔 수 없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래."
링링이 팔짱을 끼며 화장실 문 앞을 지켰다.
"여기서 기다리게?"
"그럼?"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 가서 족발이나 먹고 있자."
"알았어."
겨우 링링을 돌려세운 린다가 다급히 도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린다 :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링링이 찰거머리처럼 꼭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도훈 : 밖에 같이 있던 게 링링이야? 그 중국인?
-린다 : 응. 얘가 원래 남 일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치근덕거리네.
-도훈 : 흠,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긴 그런데.
-린다 : 나도 답답해 미치겠어.
-도훈 : 혹시 네 방이 어디야? 들어올 때 보니까 복층으로 되어 있던데.
-린다 : 2층 제일 끝방.
-도훈 : 그럼 어떻게든 링링의 시선을 돌려봐. 내가 밖으로 나가는 척하면서 2층으로 올라갈 게. 방문 열려 있지?
-린다 : 가능하겠어?
-도훈 : 네가 하는 거에 따라 달렸지.
-린다 : 알았어.
린다가 깨톡을 마치자 링링이 기다렸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언니는 무슨 톡을 그렇게 자주해?"
"어, 어? 아니 자꾸 오빠가 귀찮게 해서."
"오빠랑 사이 별로라지 않았어?"
린다는 평소에도 가족에 대한 불만을 자주 토로하는 편이었다. 사업가 아버지라는 든든한 빽을 가진 린다의 오빠는 실컷 유흥 생활을 즐기며, 질 나쁜 주먹패들과도 어울리는 건달. 린다는 오빠 얘기를 할 때면 늘 양아치 같은 자식이라며 흉을 봤다. 집안을 말
아먹을 녀석이라면서.
평소 한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린다가 허둥대며 둘러댔다.
"아, 아니 뭐···.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지. 원래 남매사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난 그런 거 몰라. 혼자라서."
린다는 링링의 주의를 끌기 위해 관심도 없던 그녀의 가족 얘기를 화제로 돌렸다.
"맞다. 중국은 원래 자녀를 한 명씩만 낳는다며? 대부분 독자라는 게 사실이야?"
"거의 그렇지."
"그러고 보니 링링 가족이 뭐하는 지도 몰랐네."
"우리 가족?"
"응. 중국에 계시는 부모님 말이야. 안 보고 싶어?"
뜬금없이 개인사를 물어오는 린다의 모습에 링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흥! 순 자기밖에 몰랐던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까 별소릴 다하는구나.’
"딱히? 그리고 우리 집 얘기는 저번에 매니저님도 한 번 얘기 했던 것 같은데?"
링링을 섭외해온 프로덕션의 스카우터는 그녀의 가정 배경을 조작했다. 부모님은 중국에서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고, 그녀는 K-pop문화를 동경해 중국에서 홀로 건너온 것이라며. KTV 윤락녀 출신이라 밝힐 순 없었기 때문에 급조해 짜낸 스토리였
다.
"그랬나? 하하. 오래전이라 내가 까먹었나 봐. 그러고 보니 우리 만난지 반년도 넘었구나."
린다가 멋쩍게 웃으며 족발을 입에 물었다.
시선은 링링을 향해 있지만, 온 신경이 등 뒤의 화장실에 쏠려 있었다.
‘아으, 어떻게 시선을 끌지?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급한 마음에 린다가 입에 담고 있던 음식을 뿜었다.
"켁!"
그녀가 가슴을 두들기며 링링에게 소리쳤다.
"무, 물 좀! 사레들렸어!"
"감사합니다! 화장실 잘 쓰고 가요!"
화장실을 나온 도훈은 하이바를 눌러 쓴 채 빠르게 현관쪽으로 사라졌다. 링링은 도훈 쪽을 힐끔 쳐다보다 린다에게 음료수를 따라 주었다.
"괜찮아?"
"끄윽-. 미안. 갑자기 목이 메서. 너무 급하게 먹었나."
"그러게. 그 남자 방금 나갔어."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링링이 말했다.
"거봐. 내가 별일 아닐거라 했잖아."
린다는 도훈이 과연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갈지 궁금했지만, 일부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눈치 빠른 링링이 낌새를 챌 가봐 두려웠다.
"나 음료수 좀 더 줘. 아직도 목 막히네."
"응."
링링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
‘이러면 분명 나간 줄 알겠지?’
[주인님. 자세가 좀 추한데요.]
‘어쩔 수 없어. 안 들키려면 바짝 엎드려 복지부동하는 수밖에.’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일부러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곤 바닥에 바짝 엎으려 포복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거실에선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그나저나 2층까지 어떻게 이동한다?’
링링의 시선을 피해 집안에 잠복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여전히 난관이 남아 있었다. 복층 계단으로 오르기 위해선 거실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 참. 안 보이는 투명츄로 변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혹시 적당한 아이템이 없을까?’
[투명인간으로 변신하는 망토가 있긴 합니다만···.]
‘정말? 투명츄가 실존했어?’
[근데 아까부터 대체 뭔 소립니까?]
‘아니. 투명인간이 되면 고추도 투명해질 것 아냐.’
[엄밀히 말하면 망토를 이용해 가시대역의 파장을 지우는 첨단 기술입니다. 그리고 굳이 옷을 벗을 필요도 없구요.]
‘그렇군. 하지만 늘 그렇듯 가격이 문제겠지?’
[가격이 ···없습니다.]
‘뭐?’
[해당 아이템은 경매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워낙에 쓸모가 많은 아이템이라···.]
쓸모?
하긴 여탕 구경도 마음껏 할 수 있겠군. 내가 므흣한 표정을 짓자, 로시가 속마음을 간파하고 쯧쯧 혀를 찼다.
[방금 이상한 상상하셨죠?]
‘아냐. 남자라면 당연한 생각이었어.’
[투명망토는 현 시스템보다는 타 차원에서 많이 활용됩니다. 암살자 클래스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서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수 있죠.]
‘으음. 누굴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투명망토는 포기해야 겠군. 다른 건?’
[기척을 죽이거나 빠르게 움직이는 기술은 어떻습니까?]
‘둘 다 애매하겠는데. 만에 하나 들키는 날엔 완전 강도로 오인 받는 다고.’
나는 하이바의 선바이져를 꾹 눌러썼다. 아무리 미션을 위해서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무슨 섹스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숨죽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린다가 꾀를 냈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요샌 밤에도 덥구나. 우리 창문 좀 열까?"
"차라리 에어컨을 켜."
"거실에 둘밖에 없는 데 좀 그렇잖아."
잠시 후 발소리가 들리더니 베란다 창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엇, 링링 잠시만 와봐. 저게 뭐지?"
"뭔데?"
"저기 저기 골목길! 저거 변태 아니야?"
"변태라고?"
린다의 기지를 발휘해 링링을 베란다로 끌어들였다.
마침내 사각지대가 만들어졌다.
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빠르게 2층 계단으로 달렸다.
‘됐어! 성공이다!’
하지만 승부의 신은 절대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2층 계단 위에서 잠옷을 입은 여자를 맞딱뜨린 것이다.
"꺄-!"
나는 비명이 터지기 직전 가까스로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
"까-!"
"쉿-. 조용히."
"읍읍-!!"
"제희야, 나야. 이도훈이라고."
"···?"
잔뜩 겁먹어 있던 제희가 겨우 도훈을 쳐다보았다.
도훈이 선바이저를 올리며 얼굴을 확인시켰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오, 오빠가 여길 어떻게?"
"쉿-. 밑에 사람 있어.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어딜요?"
"네 방으로."
제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더니 계단 바로 앞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훈은 방문을 닫고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좆 될뻔 했네.’
[천만 다행입니다. 그래도 안면이 익은 사람을 마주쳐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제희가 혹시라도 옆방에 들릴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많이 놀랬지?"
"당연하죠. 전 치한인줄 알았잖아요."
"이렇게 잘생긴 치한 봤어?"
도훈이 헬멧을 벗으며 농을 건넸다.
"참나. 근데 진짜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그 헬멧은 뭐구요?"
"린다가 불렀어."
"언니가요?"
제희는 단박에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외출금지에 발목이 잡힌 린다가 도훈을 숙소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미친. 아무리 그래도 여기가 어디라고.’
막 나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개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경우였다. 아이돌이 아니라 일반인도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따지고보면 도훈의 철저한 계획이었지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안 들킬 줄 알았어. 린다가 다들 잘 거라고 했거든."
도훈이 잠옷을 입은 제희를 보고 답했다. 제희는 파자마 차림이었는데, 여름 잠옷이라 그런지 속이 살짝 비치는 얇은 재질이었다.
도훈의 빤한 시선에 제희가 부끄러워졌는지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 어딜 봐요."
"너 보고 있는데."
"암튼 오빠도 너무 무모하네요. 큐티 멤버가 모두 여덞명인 건 알죠? 오빨 모르는 사람에게 들켰으면 도둑인 줄 알고 난리 났을 거에요."
"그러게. 그래도 널 만나서 다행이야."
"참나···."
"근데 넌 왜 안자고 있었어?"
"이제 자려고 했죠. 미소랑 얘기 좀 한다고요."
"미소?"
"요 건넛방이 미소 방이에요."
도훈이 위치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맨 끝방이 린다. 그리고 맞은편은 미소. 링링의 방은 어디지?’
"링링은 어디서 자?"
"그건 왜요?"
"요 밑에 린다랑 링링이 같이 있거든. 사실 걔 피해서 2층으로 도망친거야."
"아. 링링은 1층 이에요. 베란다 옆 방."
"그렇구나. 그럼 위로 올라올 일은 없겠네."
"근데 언니가 오빨 왜 불렀데요?"
목적이야 뻔했지만 제희가 모르는 척 물었다.
"글쎄. 방이라도 구경시켜 주고 싶었나 보지."
"방을요?"
"여자 아이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잖아."
도훈이 자연스럽게 제희의 방을 둘러보았다.
"아, 안 치웠는데···."
"왜? 방 깔끔한데. 근데 아이돌이라고 별반 다른 건 없구나."
"당연하죠. 그래도 저희는 사정이 나은 편이에요."
"무슨 소리야?"
"원래 우리 같은 신인은 이렇게 각방 못 써요."
"그럼?"
"대게는 2~3명씩 같이 자죠. 프라이버시도 없고."
"맞다. 나도 여기 들어오면서 궁금했는데, 너희들 어떻게 이렇게 큰 집에 사는 거야? 그것도 복층으로?"
"원래 여긴 저희 소속사 간판인 소녀전선 언니들이 쓰던 숙소에요."
"소녀전선?"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이름이었다.
걸그룹에 영 관심이 없는 그조차도 들어봤으니, 굉장히 오래되고 유명한 그룹인 것 같았다.
"지금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에선 좀 시들하지만 한류 열풍덕에 외국에선 여전히 잘나가거든요."
"아, 그럼 그 사람들 숙소를 물려받은 거야?"
"넓은 집인데 비워두기 그랬나 보죠. 어차피 1년간은 중국 활동에 매진한다고 하니까. 아마 귀국하면 저희가 방 빼야 할 걸요."
"그렇구나. 아쉽네. 숙소 좋아 보이는데."
도훈이 슬쩍 일어나더니 침대에 앉아 통통 튕기며 말했다.
"침대 쿠션도 좋고."
"뭐에요, 갑자기."
제희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안 그래도 그 일이 있고 나서 한참 남자가 당기는 타이밍이었다. 그 와중에 도훈이 제 발로 침대까지 찾아왔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처럼 방방 뛰며 침대 쿠션을 확인하던 도훈은 메트리스와 침대프레임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어랍쇼? 저런게 있네?’
그것은 제희가 애용하던 딜도였다.
자위를 즐기는 제희가 남들 몰래 수음을 즐기고 나서 딜도를 프레임 사이에 짱 박아 두었던 것이다.
도훈이 손을 집어 넣어 딜도를 꺼냈다.
"이건 뭐야?"
"악!"
제희가 까무러치게 놀라며 딜도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도훈이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나는데 발이 엉킨 제희가 도훈의 위를 덮쳤다.
< 661. 아이돌 vs 돌아이-5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