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78화 (651/2,000)

< 660. 아이돌 vs 돌아이-53- >

미소가 대번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제 회식 이후 팀 분위기를 위해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는데, 또다시 린다가 시비를 걸자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니, 지금 대표님이···."

"자자, 우리 내일 스케쥴 있으니까 얼른 씻고 잘 준비나 하자."

상황이 더 악화 되는 걸 막기 위해 제희가 나섰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며 미소를 물러세웠다.

"언니 놔."

"미소야."

제희가 진중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리더는 묵직해야지."

"······."

"안 그래?"

제희가 한 마디가 미소를 잠재웠다.

그러잖아도 데뷔 직후 오픈빨(?)을 받은터라, 이곳저곳 섭외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끼니를 때워야 할 만큼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 다들 예민해진 상태.

이 와중에 팀원끼리 분란이 일어난다면 그룹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생계형 아이돌인 미소에겐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미소가 질끈 입술을 깨물더니 제희의 손에 이끌려 린다에게서 멀어졌다. 린다는 물러서는 미소를 향해 혀를 빼꼼 내밀며 끝까지 그녀를 희롱했다.

‘흥. 네까짓 게 어쩔 거야? 리더면 다야? 나이도 어린 게 싸가지가 없어 가지고. 나야 수틀리면 이딴 걸그룹 관두면 그만이라고.’

젖먹이 아이를 둔 미소와 달리 린다는 거리낄 게 없었다. 재미로 시작한 아이돌 생활,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소가 사라지자 링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린다에게 말했다.

"이번엔 언니가 좀 심했어요."

"내가 뭐?"

린다가 겸연쩍은지 어깨를 으쓱였다. 링링이 고개를 절래 저으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나머지 멤버들은 각자 방으로 흩어져 취침 준비에 들어갔다.

그제야 밖에서 기다리던 도훈을 떠올린 린다가 그에게 깨톡을 남겼다.

-린다 : 미안, 대표가 시간을 너무 끌어서. 지금 어디야?

-도훈 : 근처 까페에 왔어.

-린다 : 애들 다 잠들 때까지 기다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린다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 링링을 쳐다보았다. 평소 자기 방에 틀어박혀 헤드셋을 끼고 음악감상 하는게 취미인 링링은, 오늘따라 시덥잖은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린다가 넌지히 물었다.

"링링은 잘 준비 안해?"

"응. TV좀 보다 자려고."

"늦게 자면 내일 피곤할 텐데···."

린다가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링링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아까 대표님이 그러셨잖아. 나중에 예능프로에 섭외될지 모른다고.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면 나중에 곤란할 수 있으니까."

"아···."

나중을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모니터링 한다는 링링을,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린다 : 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는데 한 명이 말썽인데.

-도훈 : 그래? 흠, 더 기다리기 힘든데.

-린다 : 미안. 이럴 게 아니었는데···. 하필 대표가 깜짝 방문하는 바람에.

린다는 자칫하면 오늘 도훈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도훈에게서 답장이 왔다.

-도훈 : 이러면 어떨까?

-린다 : 뭐? 좋은 수가 있어?

-도훈 : 너네들 배달 음식 시켜먹지?

-린다 : 배달 음식? 그건 왜?

-도훈 : 묻는 말에만 대답해줘.

아이돌은 삼시 세끼 챙겨 먹기 힘들다. 몸매 관리를 위해 철저하게 식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대로 된 식사는 아침이 전부고, 이동 중에는 샐러드로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그렇다고 한창 식욕이 왕성한 20 초반의 아가씨들이, 매니저의 요구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매니저가 퇴근하고 나면 몰래 야식을 시켜먹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린다 :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씩만. 너무 배고플 때.

-도훈 : 있기는 있다는 거네. 그럼 지금 배달 시켜봐.

-린다 : 지금? 어디로?

-도훈 : 어디긴. 너네 숙소로 말이야. 내가 밑에서 대신 받아서 올라갈게.

그제야 린다는 도훈의 작전을 깨달았다.

배달 음식을 가져오는 척 하면서 집으로 잠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린다 : 근데 애들이 네 얼굴 알아보면 어쩌려고?

-도훈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게. 주문부터 시켜. 난 숙소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무턱댄 도훈의 요구에 린다가 난감해 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지?’

하지만 그녀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훈의 말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유일한 훼방꾼은 거실 소파에 기대 TV를 시청 중인 링링.

그녀만 없다면 몰래 도훈을 방안으로 끌어들인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쟤를 어떻게 치운다?’

린다가 링링에게 다가가 물었다.

"링링. 혹시 배고프지 않아?"

"살짝?"

"몰래 족발이나 시켜 먹을래?"

"족발을?"

링링은 한국 음식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족발이나 보쌈류를 즐겼다.

린다의 유혹에 링링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대표님이 아시면 혼나지 않을까?"

"무슨 CCTV라도 설치했을까? 여자 아이돌 숙소에?"

"하긴···."

최근 들어 연예계에 불어닥친 미투 운동의 영향 탓인지 대표도 그런 문제에 있어선 조심하는 편이었다. 매니저가 상주해 있을 때야 감시를 한다지만, 모두가 퇴근하고 잠잘 시간이 되었을 땐 그야말로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쏠 게. 어때?"

"괜찮으려나? 미소가 혹시 일러바치면···."

"그러니까 둘이 있을 때 몰래 먹어야지."

"흠."

링링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린다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족발에 약이라도 타서 재울 셈인가?’

그녀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중국에서 KTV 생활을 할 때 별의별 꼴을 다 겪었다. 10대 때 이미 부자의 첩으로 팔려간 전적이 있었으니 만큼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어쨌든 지금은 속아 넘어가는 척 해주지.’

링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소자 하나만···."

"그래. 내가 주문 할게."

린다가 신이 나서 족발집에 주문을 넣었다. 그녀는 말미에 특별 사항을 덧붙였다.

"1층에서 남자 매니저가 대신 받을 거예요. 계산은 계좌이체로 해드릴게요."

***

까페를 나선 도훈은 숙소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배달 오토바이를 기다렸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자연스럽게 잠입해야지.’

[주인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그건 다 생각이 있어.’

도훈이 보조석 대쉬보드를 열더니 밑에 깔아둔 현금다발을 꺼냈다. 중고차를 구매하고 남은 현금을 비상금 목적으로 숨겨둔 것이었다.

[돈은 왜요?]

‘세상엔 그런 말이 있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요.]

‘일단 지켜봐.’

20여 분쯤 기다리자 숙소 앞으로 배달로 보이는 오토바이가 한 대 섰다. 도훈이 곧바로 차에서 뛰쳐 나갔다.

"여기요."

"족발 시키신 분이세요? 남자 매니저한테 대신 전해달라던데."

"아···. 제가 매니저에요. 얼마죠?"

"계산은 미리 끝내셨어요."

"아뇨. 지금 쓰고 계신 그거 물어본 거예요."

"네?"

배달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매니저라고 하기엔 너무 옛 된 얼굴.

로드매니저가 대부분 20대라곤 하지만, 대학생에 가까운 도훈이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모습에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저 장난할 시간 없어요. 배달 밀려서 바쁩니다."

직원이 다시 오토바이에 오르려고 하자 도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장난 아닌데요."

"왜 그래요 대체?"

"그 하이바 말이에요."

"네?"

"제가 정말 갖고 싶었던 모델이거든요."

"네에?"

배달 직원은 무슨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도훈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뭔 미친 소릴 하는 거야? 저번에 쓰던 게 깨져서 중고나라서 4만원에 엎어 온 건데.’

"그거 스즈키 한정판 맞죠?"

"그, 그랬던가?"

배달 직원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절대 유명한 메이커 제품은 아니었다.

"혹시 저한테 파실 생각 있으세요?"

"이걸요?"

"네."

"제가 쓰던 건데요?"

"상관없어요."

도훈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기에 배달 직원도 슬슬 장난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진심인가?’

"이십만원 드릴게요."

"이, 이십요?"

"부족하신가요?"

"아, 아니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긴 한정판이라 좀 아까울 수 있겠네요. 그럼 이십오 어때요?"

"이, 이십오···."

배달 직원이 횡재했다는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중고로 싸게 구한 제품이 그렇게 비싼 물건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아싸, 차익만 해도 20만원이 넘네.’

"알겠어요. 근데 진짜 계속 쓰고 다니던 거라 냄새 심할 텐데 괜찮겠어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배달 직원이 헬멧을 벗어 건내자 도훈이 미리 준비한 오만원권 다섯 장을 내주었다.

"여기요.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네, 그럼 잘 쓰세요!"

배달 직원은 혹시라도 도훈이 다시 무를까 걱정됐는지 엑셀을 당기며 손쌀같이 사라졌다.

도훈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순 날강도 새끼네. 이런 거 10만원도 안하겠구만."

[어쩌자고 그러셨습니까?]

‘미션이 더 급하니 어쩔 수 없잖아. 쓰고 다니던 하이바를 갑자기 팔라고 하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그냥 딴생각 못 하게 처음부터 확 질러버려야 욕심을 부리는 법이거든.’

[그래도 중고 헬멧을 이십오만원 씩이나 주고 사는 건 좀···.]

‘투자라고 생각해야지.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도훈에겐 1억이라는 거금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허투루 낭비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잠입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그게 제일 쉬운 길이라고.’

헬멧을 머리에 쓴 도훈이 족발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맨션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띵동-

"어, 왔나 보다. 내가 나갈게."

아까부터 초조한 표정으로 티비를 보고 있던 린다가 후다닥 인터폰으로 뛰어갔다. 카메라에 잡힌 화면에 헬멧을 눌러 쓴 배달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어라? 도훈이 대신 받아 온다고 했는데.’

-족발 시키셨죠?

목소리를 들은 린다는 그제야 도훈이 변장을 한 것을 깨달았다.

"네, 맞아요. 문 열어 드릴게요."

‘저건 또 어디서 구했데? 하여간 재주도 좋아.’

문 열림 버튼을 누른 린다가 쪼르르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척 린다의 행동을 주시하던 링링은, 평소와 다른 수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린다가 버선발로 막 뛰어나가는 스타일은 아닌데···.’

린다는 그룹 내에서 맡 언니 격이었다.

동생들이 밑에 가득하다 보니 뭔가를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더구나 부잣집의 부족할 것 없는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떠받들여 지고 시키는 데 익숙한 편이었다.

링링이 의구심을 품고 린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다.

잠시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네, 나가요."

린다가 곧바로 문을 열었다. 링링이 힐끔 고개를 돌려보니 헬맷 선바이져를 끝까지 눌러쓴 배달 직원이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음? 설마?’

배달 직원의 체형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키는 180도 넘어 보였고, 겉으로 드러난 몸매가 무척 탄탄했다. 특히 늦은 저녁에 썬팅이 진한 선바이저를 눌러 쓴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이도훈이구나!’

배달 직원의 정체를 깨달은 링링은 린다와 도훈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여자 아이돌 숙소로 남자를 끌어들일 줄이야···. 린다가 막 나가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배달 직원으로 변신한 도훈이 갑자기 배를 잡고 말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되면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화장실요?"

린다가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네,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아이고, 저런. 1층 화장실 쓰세요."

"넵.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도훈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린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링링에게 말했다.

"배가 많이 아픈 가봐."

"···그러게요."

둘의 수작을 뻔히 지켜보던 링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우리 그럼 주방으로 갈까?"

주방은 현관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린다는 도훈을 내보내는 척하며 방으로 들일 요량이었기 때문에, 링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장소를 옮기려 했다. 링링이 어림없다는 듯이 소파 앞 테이블에 족발 봉지를 풀었다.

"그냥 여기서 먹어요. 티비 보면서."

"여, 여기서?"

예상치 못한 대답에 린다가 당황하는 사이 링링이 재빨리 족발 봉지를 열어 세팅을 시작했다. 배달 족발 세트엔 쌈야채니, 비빔국수니, 주먹밥이니 하는 잡다한 것들이 많아 테이블 위에 쭉 펼쳐버리자 다시 옮기기 곤란했다.

‘아씨, 이게 아닌데···.’

도훈을 안으로 들이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링링의 방해가 만만치 않았다. 린다가 초조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들어간 도훈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린다 : 아직 나오지 마. 링링이 계속 지켜보고 있어.

-도훈 : 계속 여기 있으라고?

-린다 : 애가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해. 원래 티비도 별로 안 좋아하는 데 오늘따라 영 이상하네···.

-도훈 : 알았어. 일단 사인 줄 때까지 계속 있을 게.

"누구에요?"

"응?"

"아까 친오빠?"

"아, 아. 어어."

"다급하게 문자를 보내는 것 같아서요."

"아냐. 내가 좀 빠른 편이라."

"네. 근데 저 사람 왜 안 나올까?"

링링이 1층 화장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린다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 660. 아이돌 vs 돌아이-5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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