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9. 아이돌 vs 돌아이-52- >
‘비밀의 문고리만 있으면 앞으로 지각은 절대 안 하겠군.’
[충분하죠. 집안에서 문 열면 강의실이 바로 열릴 테니까요.]
로시의 말에 도훈은 집에서 곧바로 강의실로 이동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집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강의실이, 혹은 여자친구의 방이, 때론 하와이의 해변이 펼쳐지는 장면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박! 이게 바로 천상계의 기술력이구나! 이건 완전 초능력자잖아?’
[하지만 늘 충전에 유념하십시오. SP가 모자라면 사용이 불가능한 아이템이니까요.]
‘가만. 그럼 멀리 나갔는데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거야?’
[전에 설명해 드렸는데 까먹으셨나 보군요. 비밀의 문고리는 기본적으로 왕복을 전제로 합니다.]
‘휴, 다행이군. 원웨이 티켓은 아니라.’
[대신 반대편에도 문고리를 붙여 여닫을 문이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곳이 없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랜덤하게 포탈이 열리게 됩니다.]
‘오호, 대충 무슨 개념인 줄 알겠어. 이거 무슨 영화에서 봤던 거 같은데.’
[천상계의 기술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초능력과 신기술이 구현 가능합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준달까요?]
‘진짜? 슈퍼맨이나 헐크 같은 능력도 가능?’
[물론이죠. 불가능, 그것은 하나의 의견일 뿐.]
‘광고 멘트 같은 소리 작작하고.’
주차장에 차를 댄 도훈은 아후 종일 학교 공부에 집중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철저한 이중생활이었다.
수업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모범생 모드로 전환, 평소의 난봉꾼 같은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강의하는 교수에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필기도 성실하게 했다.
빠가로 변해버린 머리 탓에 남보다 배는 열심히 해야 겨우 만족할 만한 성적을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으으. 대가리에 조금만 더 투자했더라면 이 고생 안 해도 될 텐데···.’
[그럼 어디를 빼시게요?]
‘글쎄.’
교수가 시사 얘기를 꺼내며 잡담을 하는 사이 도훈도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
‘키가 185, 아이큐가 97, 잦이가 18 이었지, 아마?’
[네. 정확합니다.]
‘키를 좀 줄이고 아이큐를 세자릿 수로 만들어어야 했어. 그럼 평균은 갔을 텐데.’
[97이나 100이나 별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요.]
‘하긴···. 도긴개긴이네. 사실 지금 아이큐도 딱히 낮다곤 볼 수 없지. 보통 동일 연령대에서 아이큐 100이 딱 중간값이니까. 97이면 대충 절반에 걸쳐 있다고 봐야지.’
[그런데 왜 그렇게 답답해하십니까?]
‘그건 마치 이런 거야. 니가 최신 CPU를 오버클럭해서 쓰고 있었다고 생각해봐. 어떤 작업을 해도 빠릿빠릿하고 반응도 무척 빨랐단 말이지. 동시에 여러 작업도 거뜬하고.’
[네.]
‘근데 학교에서 레포트 쓴다고 컴퓨터 켰는데 부팅만 한 세월인 거야. 바탕화면 뜨고 모래시계 사라지는데만 3분. 거기서 뭘 좀 실행시키려고 하면 또 버벅대고.’
[듣기만 해도 암 걸릴 것 같은데요.]
‘그런 상대적인 괴리 때문에 더 답답한 거 같아.’
[충분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교수 뻘소리 끝났네. 그럼 또 열공해 볼까?’
도훈이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천하의 난봉꾼인 도훈이 누구보다 진지하게 수업에 빠져들었다.
***
도훈은 도서관에 들러 배운 내용의 복습까지 완료했다. 혹여 중간에 아는 여자라도 만날까 봐, 정체불명의 모자로 은신까지 불사한 도훈이었다.
‘오늘은 중요한 미션이 걸렸으니까 허튼데 힘을 써선 곤란해.’
공부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는데 린다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얼추 맞겠군.’
짐을 챙겨 차로 이동한 도훈 린다가 알려준 숙소 주소를 네비에 쳤다. 위치를 봐선 강남에 주소지를 둔 멘션이었다.
‘확실히 연예인이 돈 많이 버나 보네. 갓 데뷔한 아이돌 숙소가 이렇게 비싼 동네라니.’
도훈은 연예계 쪽으론 문외한이라 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도 딱히 관심이 없었고, 이도훈으로 환생한 지금도 자기와는 별개의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돌은 말 그대로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어리고 늘씬하고 예쁘고. 노래도 곧 잘하고 춤도 잘 춘다. 애초에 일반인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인데 우연히 끈이 닿았다.
‘가만···. 이렇게 된 거 아이돌에 그칠게 아니라 영화배우나 탤런트들도 한 번 자빠뜨려봐?’
도훈은 차를 몰고 가며 TV에서나 보던 예쁜 여자배우를 떠올렸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 그들을 공략하는 것도 상당한 성취감을 줄 것 같았다.
‘하기야 걔들도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일 뿐이잖아. 봊이에 금테 두른 것도 아닌데 넘보지 못하란 법도 없지.’
은막의 스타들, 화려한 워킹을 뽐내는 슈퍼모델, 새침한 표정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여자 아나운서들.
생각해보면 이제껏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학생들만 공략한 건 몸풀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큐티를 직접 만나고 느낀 것이지만, 연예인은 급이 달랐다. 3류에 불과한 큐티의 멤버 하나하나가 대학에선 퀸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흠흠. 그것도 나름 재밌겠어."
[무슨 생각을 하시길레 그렇게 중얼거리십니까?]
‘로시. 특수 직종 위업 말고 연예인을 공략하는 위업은 없을까?’
[연예인이요?]
‘왜 영화배우나 모델들 있잖아. 스포츠 스타도 괜찮고. TV에 나오는 여자들 말이야.’
[업종 위업이 별도로 존재하진 않습니다. 다만···.]
‘다만?’
[아무래도 캠퍼스와 별개의 장소에서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만나면 이벤트나 미션이 활성화될 가능성은 크겠죠.]
‘오호. 하긴. 장소와 사람이 바뀌었을 때 가장 이벤트가 빈번해 지니까?’
[그렇죠. 중수에 오르고 나서는 미션 보상이 업적에 필적할 정도로 올라가거든요.]
‘가만 그건 뭔가 이상한데? 미션보다 업적이 상위 개념이 아냐? 플레이어 레벨도 업적을 통해 올라가니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인님께서 한 가지 아셔야 할게 있습니다.]
‘뭔데?’
[동일한 미션은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네. 그래서 처음엔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미션이 빈번이 발생합니다. 실제로도 주인님은 업적과 비슷한 정도의 미션을 수행해 왔죠.]
‘그렇지.’
[하지만 해당 조건을 클리어하고 나면 점점 미션의 난이도가 상승하게 됩니다. 가령 지하철 치녀 미션을 또다시 받을 수 있을까요? 안마방 미션은 어떻구요?]
‘아아, 그 말이구나.’
[동일한 유형의 미션은 한 번으로 그칩니다. 즉 주인님의 경험이 늘어날수록 평범한 사건으로는 미션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되죠. 또 어렵게 등장한 미션의 보상이 강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구요.]
‘요컨대 미션의 조건을 맞추는 것이 점점 까다로워 질 거라는 얘기군.’
[그렇죠. 그래서 연예인을 공략하는 게 업적에는 도움을 안 되더라도 미션을 받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케이. 완벽히 이해했어. 어, 잠깐. 목적지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도훈은 네비를 보며 목적지에 다왔다는 걸 깨달았다.
골목 사이로 빌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5층 미만의 층빌라였다. 외관만 봐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인상이었다.
‘와, 여기 엄청 비싼 동넨데.’
도훈은 전생에 부동산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이곳이 굉장한 고급 주택가라는 것을 단박에 깨달았다. 주로 넓은 평수의 멘션들이 주를 이루는 곳으로 평당 가격이 억 단위을 호가하는 동네였다.
‘연예인들이 비싼 동네 산다는 것은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입이 떡 벌어지는 군.’
[뭔가 이상하군요. 큐티는 이번에 막 데뷔한 그룹 아닌가요? 갓 데뷔한 신인들이 이렇게 비싼 멘션에 살다니요.]
‘그러게. 나도 좀 이해가 안되는 데.’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도훈은 린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도착했어."
-어, 오빠가 왠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도훈은 린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을 직감했다.
‘누구랑 같이 있나 보다.’
옆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린데?
-저희 친오빠예요.
‘아하. 아직 그 매니저가 퇴근 안 했나 보네.’
도훈이 귀를 기울이자 매니저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너희들은 더이상 무명이 아니다. 정식으로 데뷔한 걸그룹이란 걸 명심하고 사생활에 특히 신경 쓰도록. 특히 린다. 한동안 외출은 금지라는 걸 명심해.
-알았다고요. 오빠랑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잠시 후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도훈에게 씩씩거리는 린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짜증나 사장 새끼.
"사장? 매니저 아니고?"
-몰라. 갑자기 쳐들어와선 외출금지 내리잖아.
"외출금지라고?"
-데스패치라고 들어왔어?
"뭐야 그건?"
-있어. 연예인들 사생활 캐고 다니는 파파라치 녀석들. 사장이 뭔가 들었나 보더라고. 당분간 각별히 조심하고 개별적인 외출은 금지래.
"아니 무슨 군대도 아니고···."
-여긴 군대보다 더해. 미친 것 같아. 오늘도 하루종일 풀 때기만 먹었는데. 우이씨 짜증나.
도훈은 곰곰이 생각하다 린다의 외출 금지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됐네. 어차피 내가 들어가려던 참인데."
-나가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뭐가 잘 돼?
"꼭 나가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뭐라고? 잠깐 너 설마···.
"너희들 멤버들하고 각방 쓴댔지?"
-그, 그렇긴 한데···.
"내가 몰래 잠입해 볼게. 너네 방 까지만 들어가면 문제 없잖아."
-안 돼! 여길 들어온다고? 누구 잘리는 꼴 보고 싶어?
"왜 잘려?"
-방음이 전혀 안 된단 말이야. 옆 방에서 통화하고 있으면 다 들릴 정도라고!
"그럼 목소리 너무 큰 거 아냐? 지금 통화 내용도 다 들리겠다."
도훈의 경고에 린다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냐. 여긴 베란다야. 대표가 멤버들 다 모아놓고 거실에서 얘기하고 있어. 들은 사람 없을 거야.
"아무튼 당장은 못 들어간다는 거네?"
-오면 안 돼. 통화 너무 길어지면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끊을 게. 미안한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길어질지 모르니까 어디 까페라도 가있던가.
"알았어."
통화를 마친 린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을 닫고 베란다로 나왔기 때문인지 통화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에이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도훈이랑 만나기로 한 날에 이게 뭔 경우야?"
린다가 짜증을 내며 다시 거실로 나갔다. 그때 베란다 옆방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던 링링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 봐라? 이도훈이 여길 몰래 들어온다는 소린가?’
우연히 통화를 엿듣게 된 링링은 뭔가 계획을 떠올렸다.
***
린다의 조언에 따라 근처 커피숍에 자릴 잡은 도훈은 흡연실에서 담배를 꼬나 물었다.
‘정말 재수도 없군. 몰래 만나기로 한 날 대표의 방문이라.’
[어쩌면 승부의 신의 개입일 수도 있습니다.]
‘승부의 신? 아, 그 내기 좋아한다는?’
[네. 승부의 신이 내건 조건은 그때 만난 네 명의 아이돌을 모두 공략하는 것이었죠. 현재까지 공략한 대상은 두 명. 이제 슬슬 방해 공작이 시작될 타이밍이거든요.]
‘근데 잠깐. 신이라는 사람이 멋대로 인세에 개입을 해도 되는 거야? 상도덕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승부의 신은 하위 신입니다. 신격에도 등급이 있으며, 하위 신들은 그런 법칙을 가끔 무시하기도 하죠.]
‘그래도 이건 완전히 승부 조작급인데?’
[물론 직접적인 증거를 찾긴 어려울 겁니다. 굉장히 교묘하고 우회적으로 상황을 유발하거든요. 가령 데스패치를 교묘히 선동해 대표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식으로요.]
‘거참. 이기려고 별짓을 다하는군. 아, 이것도 신성모독인가?’
[아뇨. 하위 신은 모독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유일신이신 신만이 존엄하시니까요.]
도훈은 신격의 차등이 있다는 로시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인공지능인 로시에게도 차별될 정도라면 애초에 하위 신이라는 존재가 실상 이름뿐인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승부의 신인가 내기의 신인가 하는 놈이 적극적으로 방해 공작을 펼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아마 상당히 위험천만한 미션이 될 것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셔야 합니다.]
‘흐음.’
여자 아이돌 숙소로의 잠입.
린다는 마중물에 불과할 뿐 실제로 도훈이 노리는 대상은 미소와 링링이었다. 그 자체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여기서 승부의 신의 훼방까지 있다고 생각하자 상당히 어려운 미션이 되고 말았다.
‘미션 임파서블급인데 이건.’
[흐음, 그럼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 지면 패널티가 있는 데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늘 그래왔듯이.’
도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대표님 졸려요."
"그래.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내일도 강행군이니까 핸드폰 적당히 하고 일찍 일찍 자."
"네."
큐티 멤버들은 한시간 가까이 일장연설을 한 대표가 사라지자 곧바로 툴툴거렸다.
"아우씨, 짜증. 간만에 쉬고 있는데 왜 쳐들어와서는."
"외출 금지라니! 아, 데뷔 안 할 때가 더 좋았는데."
"대표님도 너무 극성이야. 우리같은 신인들에게 무슨 데스패치가 붙는다고."
멤버들의 불만이 심해지자 리더인 미소가 나섰다.
"조심하라는 소리니까 너무 고깝게 듣지 마요. 솔직히 대표님 아니었으면 우리 같은 생짜 신인이 이런 고급 빌라를 숙소로 쓸 수 있겠어요? 우릴 얼마나 생각해주시는데."
"아니 그건 우리 소속사 간판인 소녀전선이 중국 활동에 전념한다고 현지로 옮겨서 그런 거잖아. 걔네 돌아오면 어차피 짐 빼야 할 텐데."
대표를 편드는 미소를 저격하는 린다였다.
< 659. 아이돌 vs 돌아이-5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