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0. 아이돌 vs 돌아이-43- >
어차피 은성도 다 아는 사실이다.
자신의 가택 연금이 도훈을 질투하는 오빠의 작품이란 걸.
고 회장의 병환만 아니었더라면, 그녀가 이렇게 일찍 귀국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은성이 도훈에게 품는 감정은 치기 어린 호기심일 뿐. 멀리 떨어져서 몇 년 안 보면 자연스레 잊혀질 거라고. 나중엔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스쳐 지나간 남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고은성은 생각보다 일찍 귀국해 버렸고,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정신이 없는 성민에겐 도훈의 존재가 목의 가시처럼 내내 신경 쓰였다.
지속적인 감시를 통해 그를 주시한 것도 고성민의 의도였으며, 은성이 다시 돌아온 지금은 그녀를 집안에 꽁꽁 가둬둔 것으로 그와의 접촉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했다.
만나지 못하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보지 않으면 잊혀진다.
그것이 고성민의 의중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오빠의 훼방 덕에 은성의 마음은 더욱 커져 갔다.
20대 초반, 옛 된 처녀의 순정은 고성민의 예상보다 훨씬 간절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갈라놓으려는 집안의 반대가, 오히려 그녀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꼴이었다. 비극의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막으려 할수록 점점 감정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지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세한 내막에 대해선 저도 잘 모릅니다."
적을 사랑한 스파이, 지연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은성이 보고 싶어 하는 사내는, 지연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어쩌면 은성만큼이나 자신도 도훈을 그리워하는 줄도 몰랐다.
"아무튼, 외출은 안 됩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슨 뜻이죠? 제집인데 제 발로 못 나간다뇨?"
"아가씨의 동선은 경호팀의 감시 아래 속속들이 보고 되고 있습니다."
"오빠한테요?"
"네."
"제가 무슨 죄수인가요?"
"아가씨. 저희는 고회장님 밑에서 일하는 일개 직원일 뿐입니다. 위에서 시키면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언니도 그들과 같은 편이에요?"
"네?"
은성이 울먹이며 말했다.
"언니도 정말 저를 감시하려고 붙어 있는 거냐고 물었어요."
지연은 난처했다.
사실 처음 경호팀에서 차출되어 나올 때만 해도 은성에 대해 별 감정 없었다. 그녀가 만난 고 씨 집안 사람들이라곤, 호랑이 같은 고회장과 그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개차반 고성민뿐이었다. 직업으로 그들을 모시는 입장이긴 했지만, 인간적으론 전혀
호감을 느낄 수 없는 부류였다.
자수성가로 거대 기업을 일궈 낸 고회장은 사람을 쓸모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장기 말처럼 여겼다. 그저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맹신자였다.
그리고 그를 빼다 박았다는 고성민은 오히려 할아버지 보다 더했다. 쉽게 말해 인간쓰레기. 자수성가는커녕 할아버지의 부를 노력 없이 물려받았기 때문인지 회장보다 못난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고 회장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수족만큼은 꼼꼼히 챙기는 타입이라면, 고성민은 사람을 사람처럼 여기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밑에 있고,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믿는 극단적인 부류였다.
그러나 이 집안의 혈육 중에서 고은성만은 달랐다.
할애비와 오빠의 못난 점을 전혀 닮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늘 주변을 배려했다. 기품있는 귀족을 연상시키는 외모도 한몫했지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고운 심성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연 역시 은성의 그러한 점에 매료되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연적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여자였다. 질투를 느끼는 것조차 자격지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아닙니다. 저는 늘 아가씨 편입니다."
지연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군인처럼 딱딱한 말투에 오히려 진한 진심이 묻어나왔다.
"고마워요, 언니."
"별말씀을."
"저···. 언니한테 부탁이 있어요."
"부탁요?"
지연이 바짝 긴장했다.
계약관계보다 인간적인 유대로 묶여버린 그녀는, 자신이 은성의 어떤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제가 정말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이도훈이구나.’
지연이 은성의 속내를 짐작하고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남자구요."
"아가씨.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면 얼마든지 들어드릴게요. 하지만 밖으로 외출하자는 건 현실적으로···."
"아뇨. 제가 나갈 수 없다면, 그 사람을 여기로 데려오면 되지 않을까요?"
"···네?"
뒤통수가 얼얼했다.
완벽한 역발상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예요. 제가 정말 보고 싶은 남자가 있거든요. 그 사람을 여기에 초대할 수 없을까요?"
"음···."
지연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분명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방법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집사와 메이드, 경호원부터 운전기사, 메인 쉐프와 개인 주치의에 이르기까지. 대저택을 유지하기 위해 상주하는 인원만 100여명에 육박한다.
이들의 감시망을 뚫고 경호팀에서 빤히 얼굴을 아는 이도훈을 끌어들인다? 거의 첩보작전에 방불케 한다. 지연은 이것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사이즈임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불가합니다."
"어째서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손님들, 심지어 아가씨의 개인 교사까지 모두 신원을 확인하고 검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고회장님의 병색이 짙어지신 이후, 잠입 취재를 하려는 기자들이나 그들의 정보원을 색출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검증하는 편이구
요."
고회장의 건강 상태는 삼현 그룹의 주가를 뒤흔들만한 엄청난 뉴스거리다. 벌써 이미 식물인간이 아니냐, 혹시 죽었는데 송장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막무가내의 추측성 기사가 오르내리는 중이다.
언론대응팀에서 최대한 막고는 있지만, 그로 인해 저택의 경계는 훨씬 삼엄해졌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연이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특히 아가씨가 부르고 싶어 하는 대상은 경호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마 문에 발을 들이기 전에 그 소식이 고성민 도련님 귀에 들어갈 겁니다."
"아···."
은성이 실망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다시 도훈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짤막했던 통화 말고는 여태껏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연의 말에 따르면 이대로는 평생 그를 못 본다는 의미였다.
은성이 풀이 죽자, 지연도 미안해졌다.
‘제길, 내가 무슨 오작교도 아닌데 왜 두 사람이 못 만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야?’
사실 지연도 도훈을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소식을 전하긴 하지만, 최근 자신의 개인 폰 조차 감청을 당하는 기미를 보이자 즉시 연락을 중단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보고 싶은 사람인가요?"
지연은 궁금했다.
이렇게 부족할 것 없는 재벌가의 아가씨가 도훈에게 목 매는 이유가 무엇일지.
"네."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대답.
"왜죠?"
은성은 지연과 달랐다. 마음만 먹는다면 도훈보다 훨씬 잘생기고, 재력있고, 뛰어난 사내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지연이 만날 수 있는 남자 중 도훈이 최상의 조건이라면(물론 객관적으론 아니지만), 은성이 만날 수 있는 남자 중 도훈은 최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랑하니까요."
"사랑···."
지연의 심장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지금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은성을 돕고 있는 걸까?
"방법을 찾아 주세요."
"아가씨."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아요. 전 언니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애초에 외부인이 저택을 드나드는···."
지연이 은성을 타이르는데, 불쑥 낯선 사람 하나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입고 있는 조끼에 [○○전자 AS서비스 센터]문구가 박혀 있었다.
지연은 그 순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가만. 외부인이라고?’
저택에 발을 들이는 사람이 꼭 손님일 필요는 없었다.
거대한 저택이니만큼 집안에 상주하는 사람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들이 매일 발생했다. 인터넷 점검을 한다거나, 전자제품을 수리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하수구를 뚫는 다던가.
이들은 간략한 신분 확인만으로 저택에 드나들었다.
이미 업체에 대해 1차 검증을 끝냈기 때문에, 말단 직원들까지 일일이 검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연은 어쩌면 도훈을 집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지금 자신은 도훈을 은성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아닐까?
은성과의 경쟁에서 자신이 우위에 있는 점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정말 은성과 도훈이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그 장면을 참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당장은 우울해하는 은성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어느새 그녀에게 푹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에휴, 내가 미쳤지 진짜.’
지연은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어이없게 생각하며 은성에게 말했다.
"아가씨.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정말이에요, 언니?"
"물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도훈의 신분 세탁을 위해선 내부자료의 조작이 필요했다.
이제부터 그녀는 삼중 스파이가 되어야 했다.
"기다릴게요. 얼마든지. 지금껏 기다렸으니까."
"···알겠습니다."
지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드럼통을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바비큐 통 안에선 붉은 숯이 뜨겁게 타올랐다. 위에 그릴이 얹어지고, 맛있게 숙성된 고기가 불판에 올랐다.
처음엔 무슨 바비큐냐고 실망하던 대산이 가장 신이 나서 나섰다. 장갑을 끼고 집게로 고기를 뒤집는 폼이 여간 많이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따, 고기 때깔 보소? 1등급 등심이구마잉!"
도훈은 대산의 옆에서 군불을 쬐며 고기가 익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환희가 팬션 안에서 야채를 씻어오는 사이, 약사 남편이 야외 테이블에 그릇을 세팅했다.
"맛있겠죠? 이곳 펜션 주인이 직접 공수해 오는데 고기질이 아주 좋더라구요."
"이번이 처음이 아녀?"
"네. 저흰 주로 펜션을 이용하는데 여긴 벌써 3번째에요."
"하기사, 펜션 만한 데가 없제."
모텔은 혼숙이 금지되어 있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가 들어가면 불가피하게 방을 두 개 잡아야 한다. 게다가 대실이다 뭐다 계속 손님이 들락거리므로 주변의 눈치도 신경 쓰인다.
하지만 펜션은 남녀가 섞여 몇 명이 들어와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특히 지금처럼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구조라면 외부와는 철저하게 고립된다.
그야말로 변태들의 천국이다.
"···때씹 할라믄 말여, 껄껄."
대산이 껄껄 웃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사내였다. 어쩌면 그 지나친 솔직함에 환희가 매료된 걸지도 모른다고, 도훈은 생각했다.
‘거참. 하루종일 발정 난 개새끼처럼 구는구나. 저런 산적 같은 놈이 뭐가 좋을 걸까?’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이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물론 도훈도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
환희는 겉보기와 달리 내면이 복잡한 여자였다.
남편과는 섹스리스.
스와핑부터 초대남까지.
극단적인 경험을 해온 만큼 정상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벽이 구축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매너 좋고 교양있는 남편과는 정 반대의 극단적인 남성성에 자기도 모르게 끌리는 것이다.
짐승같고, 거칠고, 야만적인.
도훈은 집게를 들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냉큼 뜯어 먹는 대산을 보고 야만인 같다고 생각했다.
"으뜨뜨, 이 정도믄 먹어도 되겄는디? 근디 환희씨는 뭐던디 안 나온다냐잉."
"주방에서 야채 씻으러 갔어요."
"고기는 그냥 묵어야 맛있제. 뭔 풀때기랑 같이 먹는데잉."
"여섯 사람이 같이 먹을 거라 준비할 게 많거든요. 고기도 넉넉합니다."
"아, 다른 부부도 합석한다 그랬제? 언제 오는디?"
"아까 연락해 봤는데 30분 내로 온다더라고요."
"흐흐. 많으믄 많을수록 좋제. 아따 그럼 숯불이 부족 하겄는디?"
"안 그래도 나중에 계속 불 쬐려고 장작 좀 얻어 놨습니다."
"가만 있어봐. 아야 정우라고 했제. 너 할 거 없으면 옆에서 장작 좀 패라잉."
"제가요?"
"지금 손이 비는 게 너밖에 없잖냐?"
"알았어요."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노가다 십장도 아니고 왜 가만 있는 걸 못 보고···. 아 진짜 십장인가?’
하긴 공사판에서 오래 일했다는 걸 보면 정말로 십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훈은 도끼를 들고 원통으로 잘린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도끼질을 하다 보니 쩍쩍 갈라지는 모습이 통쾌한 맛이 있었다.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하자 도훈은 아예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버렸다.
"왐마, 애기 몸 좋은 거 보소?"
부풀어 오른 광배근 덕에 도훈의 몸집이 평소보다 커 보였다. 약사 남편도 도훈의 몸을 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더워서요."
도훈이 본격적으로 도끼를 패고 있는데, 주방에 있던 환희가 바구니 한가득 채소거리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힘차게 도끼를 내려찍는 도훈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사진보다 훨씬 몸이 좋은데?’
땀이 송글이 맺힌 상체가 오일을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서 어둑해진 조명이 근육 사이의 굴곡에 음영을 드리우며 깊이감을 더했다.
도훈이 쿵쿵 도끼를 내리찍을 때마다 환희는 마치 거대한 대물이 자궁까지 쿵쿵 닿는 기분이었다.
< 650. 아이돌 vs 돌아이-4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