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9. 아이돌 vs 돌아이-42- >
***
약사라는 게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돈이 많은 건 확실해 보였다.
‘···차가 BMW네.’
[많이 비싼 찹니까?]
‘비싸지. 나도 SUV 타입은 처음 타봐.’
대리기사가 차를 몰고 펜션으로 이동하는 사이 남편은 자연스럽게 앞 좌석에 앉았다. 일부러 라디오 볼륨까지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걸 봐선, 뒷좌석 대화를 묻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커다란 차라 그런지 유난히 시트가 넓은 뒷좌석엔 홍일점이 환희가 가운데에, 좌우로 대산과 내가 앉았다. 대산은 이런 경험이 많은 듯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환희, 나이가 얼마 그랬제?"
"서른하나에요. 대산 오빠랑은 여섯 살 차이네요."
"아따, 그라믄 궁합도 안 볼 나이구마잉."
"그래도 궁합은 맞춰 봐야죠, 호호호!"
술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새 낯가림이 없어진 탓일까?
환희는 대산과 죽을 맞추며 시시덕거렸다. 누가 보면 셋 중 누가 남편이고 누가 손님인지도 헛갈릴 지경이었다.
"아야, 학생 니는 몇 살이라고 했냐?"
"스물 ㅅ···다섯요."
나도 모르게 원래 나이를 말할 뻔했다. 위조된 신분증에서 두 학번을 올렸기 때문에 급하게 말을 바꿨다.
"뭐여? 아닌 거 같은 디? 구라까는 거 아녀?"
"뭐가요?"
"자세히 봉께 액면이 훨씬 어려보이는 구만? 포경은 했냐잉~."
"어머, 오빠 애 놀라겠어요. 무슨 그런 질문을···."
나는 대산의 농담보다 은근슬쩍 비위를 긁는 환희가 더 얄미웠다. 셋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는데 나보다 대산 쪽에 몸을 기울이며 살을 맞대고 있는 것도 거슬리던 차였다.
‘가만있으면 안 되겠어. 안 그래도 환희 취향이 산적 아재 같은 마초남 스타일 같은데, 괜히 찝찝한 기분 때문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 같아.’
[맞습니다. 주인님이 꿀릴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다 미션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실패라니? 초대남 이벤트에 초대되면 성공 아니었어?’
[저런, 정확한 내용 숙지가 안 되어 있군요. 초대만 받는 거로 끝이 아닙니다. 미션에서도 ‘관전’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잠깐. 그럼 만약 환희가 대산이랑만 하고 나랑 안하게 되면···.’
[맞습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거죠. 기껏 포인트 써서 신분증 위조 다 해놓고 헛물만 켜는 셈입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로시의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죄책감이니 찝찝함이니 핑계를 대며 소극적으로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황은 나에게 여러모로 불리했다.
대산이라는 경쟁자의 존재.
그리고 환희의 독특한 취향.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점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있었다.
"왜요? 여기서 한 번 보여드려요?"
내가 지퍼를 여는 시늉을 하자 환희가 두 손을 잡고 만류했고, 대산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껄껄 웃었다.
"아야, 자제 해라잉. 앞에 기사가 보것 다야."
"자꾸 아저씨가 아까부터 어리다고 무시했잖아요?"
"아따, 뭔 말을 그러코롬 한다냐잉. 섭섭하게."
"그래요. 대산 씨가 장난으로 한 말인데 화 풀어. 근데 생긴 거랑 다르게 은근 성깔있다, 자기."
성질을 한 번 부리자 분위기가 살짝 달라졌다.
환희는 그제야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샌님 같은 남편과는 상반되는 남성성에 끌리는 타입이 확실하다. 인텔리에 유순하지만 섹스 능력이 전무한 남편보다, 무식하고 거칠어도 자신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마초남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야겠다.
"암튼 어려도 그건 자신 있으니까 너무 무시마요."
"헤에, 정말 자신 있어?"
환희가 내 쪽으로 달라붙으며 엉겨왔다. 낯가림이 심하다는 말이 순뻥이었는지, 애교 많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가슴을 밀착시키는 게 무척 약은 여자 같았다.
"자신이야 뭐."
"근데 자긴 여자친구도 많아 보이는데 왜 신청했어?"
"아줌마 따먹고 싶어서요."
"어머, 진짜?"
"아따, 학생 허벌라게 거시기 해블구마잉."
"사진 봤어요. 몸매가 좋으시던데."
"아잉, 뭐 그냥···. 아직 애가 없어서."
"아무튼 사진 보는데 꼴리더라고요. 그래서 꼭 따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힛-. 그런 말 들으니까 흥분된다."
"뭐시여? 아직 팬션도 안 갔는디 흥분해 블믄 곤란한디."
그러면서 대산이 환희에게 은근슬쩍 어깨동무를 했다.
그의 손끝이 가슴 위를 조금씩 주무르자, 환희가 몸을 움츠리면서도 코맹맹이가 같은 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아앙, 앞에서 다 봐요."
"보믄 또 어쨌간디?"
과감한 스킨쉽에 살짝 넘어왔던 환희가 다시 대산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지.
나는 가슴을 조물딱 거리는 대산과 달리 곧바로 허벅지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나도 만질래요."
"핫!"
바지를 입긴 했지만, 몸에 착 달라붙는 쫄바지가 그런지 곧장 살갗에 닿는 촉감이 났다. 가슴을 주무르던 대산도 이 정도는 생각 못했는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워메, 아그가 성격이 많이 급하구마잉."
"아저씨가 먼저 시작했으니 저도 뭔가 해야죠."
"알았다잉. 나도 여기선 안할랑께 너도 적당히 해라잉."
대산이 머쓱해하며 어깨동무를 풀자 나도 허벅지 안에서 손을 빼냈다. 환희는 두 사람의 스킨쉽이 중단된 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아,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당."
"참, 근디 뒤에 온다는 부부는 뭐여?"
"아, 연정 언니네요?"
"연정 언니?"
"네. 저희 부부랑 가끔 동반으로 여행가는 사이에요."
"동반 여행을? 혹시···."
"맞아요. 사람들 이렇게 부르기 전까지는 스와핑으로 먼저 시작했거든요."
‘아! 정말 막장 중의 막장이네, 이 부부는.’
"원래 연락하고 지내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지금은 연정 언니네랑 만나요."
"그려?"
"연정 언니도 엄청 예뻐요."
"예뻐?"
"네. 아, 그 언니는 영계 좋아하는데 정우 너 보면 엄청 좋아하겠다."
"그래요?"
"응. 나랑은 살짝 취향이 반대야. 난 나이 든 사람이 좋거든."
"흐흐. 환희가 남자 맛을 알구마잉. 원래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무르 익거든."
‘염병, 원래 내가 너보다 형이야 새끼야.’
"그쵸. 남자는 와인 같은 맛이 있잖아요. 성숙할수록 뭐랄까··· 끈끈해진달까?"
"어려도 끈끈해요."
나는 바로 대꾸했다.
"정우도 끈끈하니?"
"끈끈하다 못해 질기죠. 제가 사실 주로 연상을 만나고 다녔거든요."
"정말? 몇 살까지?"
"음, 40대 후반?"
"진짜?"
"제가 얼굴은 이래도 살짝 아줌마들 취향이거든요."
"아줌마 취향이 뭔데?"
"세게. 오래. 깊이."
일부러 환희가 좋아할 만한 단어를 조합해 던졌다.
대물 취향인 그녀는 분명 파워섹스를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끈끈한 걸 좋아한다고 하는 걸 봐선 오래해줘야 느끼는 타입이다. 마지막으로 깊이는 그녀의 정보창에 나온 공략팁을 참고로 했다.
취향을 저격해서 일까?
환희가 두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너 그거 뻥 아니지?"
"뻥이라뇨?"
"실은 예전에도 20대 초반애들 몇 명 부른적 있거든."
"근데요?"
"솔직히 어린 애들은 너무 초반에만 타오르더라. 처음에는 막 씩씩거리며 덤비는데, 조금만 지나도 사르륵-. 알지?"
환희의 말을 듣던 대산이 껄껄웃엇다.
"그라제. 20대는 불쏘시개여. 30대가 장작이지."
‘그럼 40대인 나는 숯불이냐?’
"그게 꼭 나이의 문제는 아니죠."
"그럼?"
"경험의 문제랄까? 전에 만난 애들은 별로 경험이 없었나 보죠."
"아따, 그라믄 학상 니는 경험이 많다는 거여?"
"왜요? 못 믿겠어요?"
"그래도 연식이 있어야 여자도 많이 꼽아 보는 것이제."
"잘생기면 여자들이 알아서 붙어요."
"······."
한마디로 대산을 일축 시킨 나는 허세를 부렸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환희가 좋아할 법한 취향을 연기했다.
"제가 중학생 때 처음 아다를 땠어요. 옆집 누나한테요."
"정말?"
"네. 누나가 한 번 자기 집에 놀러와 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냅다 따먹어 버렸죠."
"우아."
"한 번 하고 나니까 뭐···. 여자 따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쉽더라고요. 고딩때도 남녀 공학이었는데 학교에서 예쁘다는 애들은 다 따먹고 다녔어요. 대학교 와서도 마찬가지고. 알바를 해도 클럽을 가도 여자들이 알아서 달라붙는데 뭐···."
"대단한데?"
"솔직히 하도 많이 하고 다니니까 슬슬 질리더라고요. 자극도 무뎌지고. 왜 그런거 있잖아요. 막 꼬셔가지고 따먹으면 성취감이라도 있는데, 여자들이 알아서 대주면 쉽게 질리는 거."
"맞어. 그런 거 있지, 남자들은."
환희는 내가 풀어놓는 썰에 집중했다. 시큰둥하던 대산도 흥미로운지 잠자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색다른 걸 해보고 싶었어요."
"지금 이런 거 같은?"
"네. 남편 앞에서 부인을 따먹으면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짜릿할까."
"아!"
나의 말에 환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진성 변태가 되어 버린 그녀는 그런 말만으로도 심하게 자극을 받는 듯했다.
"너 진짜 생긴 거랑 다르네."
"제 생긴 게 뭐요?"
"사실 처음엔 너무 번듯하게 생겨서 별로 였거든."
"진짜요?"
"응. 아까도 말했지만 난 어린애들 별로였어. 지 혼자만 즐기고 빨리 끝내버리고. 한 번도 재미를 못 봤거든. 근데···."
환희가 손을 뻗더니 내 가랑이 사이의 물건을 천천히 붙잡았다.
"정우, 너는 좀 기대가 되네."
분위기가 바뀐 것을 감지한 것일까?
대산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씰데없는 소리 말고 내릴 준비나 하자고잉. 인자 다 온 것 같은디."
전방을 보자 팬션이 보였다. 환희는 아쉬운 표정으로 대물을 한 번 움켜쥔 뒤 손을 뗐다.
잠시 후 대리기사가 차를 주차 시키고는 물러났다.
남편이 말했다.
"어떻게, 대화는 많이 나누셨어요?"
능글맞게 웃는 걸 보니 대충 분위기를 예감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매번 이런 식으로 초대남들에게 부인과 친해질 기회를 주는지도 모른다.
짐승같이 자기 아내를 노리고 온 남자들에게 멋대로 하라고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곤 뒤에서 벌어질 수작을 뻔히 예감한 체 상상으로 흥분해 버리는 것이다. 정말이지 구제불능의 변태가 아닐 수 없다.
"네 뭐. 이제 낯가림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갈까요? 주인분한테 연락해서 바비큐 세팅을 해달라고 했거든요. 두 분 다 아직 저녁 안드셨을 거 아니에요."
"뭐요? 지금 고길 꿔 먹자고?"
팬션 오자마자 환희를 덮칠 생각부터 한 것인지 대산이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산 씨. 밤은 깁니다. 오늘 자고 가실 거 아니에요?"
"글긴 헌디···."
"아는 형님네 부부도 밥 먹고 있으면 올 것 같아서요. 정우 학생도 배고프지?"
"네. 먹고 해요. 먹어야 힘을 내죠."
"하하! 오늘 재밌겠네. 아주 재밌겠어."
약사 남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아가씨. 산책가실 시간입니다."
삼현 그룹 고회장의 대저택.
감정 평가된 땅값만 100억대를 호가한다는 으리으리한 규모를 가진 저택이다.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화려하지만, 정작 그곳에 갇혀 지내는 막내 손녀 은성은 바깥이 그리웠다. 하루 한 번씩 운동 겸 기분 전환을 위해 나가는 산책 코스도 슬슬 지겨워질 시점이었다.
‘답답해.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런닝화 끈을 묶으며 은성이 생각했다.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도훈 오빠도 보고 싶은데···. 맨날 집에서만 지내야 하다니···.’
카리스마로 그룹을 지배하던 고 회장이 나날이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유일한 직계 혈육인 고성민과 고은성은 장차 유산을 물려받아 그룹을 승계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미 오빠인 성민은 작가 생활을 접고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자신은 성민의 요구에 따라 할아버지를 간병하며, 경영 수업을 배우는 중이었다.
부자로 태어난다는 것.
평범한 삶을 원하던 누군가에겐 몸에 맡지 옷일 지도 몰랐다.
은성이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는데 어설프게 묶은 끈이 도로 풀렸다. 묵묵히 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연이 그녀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메어드릴게요."
"앗, 안 그래도 되는데."
"산책하다 보면 맨날 풀리잖아요. 출발할 때 단단히 묶어 두는 게 좋아요."
"언니···."
최근에 경호팀에서 차출된 한지연은 지루한 가택연금 생활 중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벗이었다. 똘똘하고, 강단있고, 무척이나 예의 바른 그녀.
편하게 언니 동생 부르자며 약속했지만, 정작 자신에겐 늘 경어를 유지했다. 그나마 언니라는 호칭에 화들짝 놀라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자, 튼튼하게 묶었습니다."
"고마워요, 언니."
"그럼 산책을."
"언니 우리 밖으로 나가버릴까요?"
"···네?"
"집에서만 빙빙 도는 거 말고요, 진짜 문 밖으로 나가자구요."
‘또 시작이구나.’
지연은 나이 차 나는 막내동생을 타이르듯 말했다.
"아가씨. 답답한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합니다. 고 회장님, 아니 할아버님께서 요 며칠 건강이 더 악화···."
"알아요. 아침마다 문안 인사드리니까. 그치만 할아버지 옆엔 늘 의사들이 상주해 있잖아요. 제가 잠깐 밖에 나간다고 별일이야 있겠어요? 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구요."
"흠···. 저 짤립니다, 아가씨."
"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임무는 아가씨를 경호하는 것도 있지만 감시하는 역할이기도 하니까요."
"감시요? 누구로부터요?"
"고성민 도련님께서···."
"그러니까 오빠가 왜 절 감시하냐고요."
"그건···."
지연이 대답을 망설였다.
< 649. 아이돌 vs 돌아이-4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