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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62화 (635/2,000)

< 644. 아이돌 vs 돌아이-37- >

예림을 집에 바래다주고 상쾌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예림은 어차피 늦은 거 외박을 한다고 했으나, 다음날 등교해야 한다며 겨우 설득했다.

‘버릇 들이면 자꾸 요구할 테니···.’

여자를 만나는 건 좋지만 긴 밤은 주말이 아니고선 곤란하다. 어쨌든 난 학생이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그나저나 4시간도 못 자고겠군.

나는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

띠리리링-!

요란한 알람 소리에 도훈이 겨우 눈을 떴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 시각을 확인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억! 뭐야? 지각이잖아? 로시! 왜 안 깨웠어!"

[죄송합니다. 아무리 깨워도 못 일어나셔서···.]

애꿎은 로시를 책망하던 도훈은 급하게 사태부터 수습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출석부터.’

최근 좀 등한시하긴 했지만, 도훈은 학점관리에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이었다. 수업을 확인한 그는 급히 같은 클라스의 우선에게 깨톡 메세지를 남겼다.

-도훈 : 우선아, 아직 수업중이지?

혹시 몰라 깨톡을 남겼는데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형? 어디에요? 왜 실기수업 안 들어오세요?

"아, 미안. 깜빡하고 늦잠은···. 지금이라도 가면 지각으로 처리해 주시려나?"

결석과 지각은 엄연히 다르다.

마지막 10분이라도 어떻게든 얼굴을 내비치면 지각으로 처리해 줄지도 모른다.

도훈이 전전긍긍하며 묻자, 우선이 웃으며 대답했다.

-형. 걱정하지 마요. 제가 아까 교수님한테 잘 말했어요.

"어? 무슨 소리야?"

-실기 교수님이 형 엄청 예뻐하잖아요. 출석 부를 때 형 없어서, 제가 몸이 좀 아파서 늦는다고 둘러댔거든요. 그냥 수업 끝나기 전에만 들어오시면 돼요.

우선은 2학년 과대였다.

과대의 말에는 무게감이 실린다.

더욱이 체육 실기 교수는 도훈의 뛰어난 운동 능력을 어여삐 여겨 늘 시범 조교를 시키거나 자질구레한 것들은 열외시켜주는 편이었다. 도훈은 천만다행이라고 느끼며 우선에게 고마워했다.

"야, 고맙다. 형이 밥 한끼 살게."

-뭘 이런 걸 가지고. 형이 워낙 잘해서 교수님이 봐준 거죠.

"빈말 아니야. 지금 중간 쉬는 시간이지?"

-네.

"그럼 15분 내로 어떻게든 가 볼게."

-15분요? 택시 타고 오시게요?"아니. 다 방법이 있지."

도훈은 부리나케 세수를 마치고 모자를 눌러썼다.

머리를 못 감아 쓴 것이지만, 잘생긴 얼굴 탓에 그마저도 패션으로 보였다. 잠옷으로 입던 추리닝 바지에 위에 대충 반 팔만 걸쳤는데도 간지가 줄줄 흘렀다. 유난히 긴 다리와 균형이 잡힌 역삼각 몸매 덕이다.

도훈은 거울로 보고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역시 잘 생긴 게 짱이네. 패완얼!"

새삼 얼굴의 위력을 실감한 도훈은 원룸 주차장으로 날 듯이 뛰었다. 확실히 자차가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택시를 타더라도 택시를 잡는 시간 때문에 3분은 더 걸릴 거리를 아슬아슬 신호를 넘나들며 15분이 되기 전에 실기 수업을 하는 체

육관 앞에 도착했다.

교수가 지각한 도훈을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아프다더니 집에서 푹 쉬지 그랬어."

"아닙니다. 병원에서 주사 맞았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요."

도훈이 연기를 하며 둘러대자 교수가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훈 군은 태도가 훌륭하군. 오늘은 체조를 익히는 중이니 잘 모르는 동작은 다른 동기들에게 물어보게."

"넵."

과 동기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체조 동작을 익히는 중이었다. 새천년 건강체조, 혹은 국민건강체조라고 불리는 체조였다.

도훈은 일부러 우선에게 다가가 아는 체를 했다.

"고맙다. 신세 한 번 졌다."

"형, 오셨어요."

우선이 깍듯이 인사했다.

미필인 주제에 유난히 예의 바른 그는,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형들에게 충성스러웠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 택시 바로 잡히던가요?"

"아니. 택시는 아니고."

도훈은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우선에게 귀뜸했다.

"나 차 생겼거든."

"차요?"

우선이 눈이 똥그랗게 변해 물었다.

고작 스물 하나인 그에게, 차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다.

"어떻게요?"

"아니··· 미국에 계신 아버지 친구분께서 이번에 새 차 뽑는다면서 타시던 중고차를 나에게 싸게 파셨거든."

"와! 진짜요? 대박. 나중에 한 번 얻어 타볼 수 있어요?"

"물론. 넌 특별히 내가 태워줘야지. 참, 그리고 오늘 점심은 내가 사줄게."

"에이, 형 원래 동기는 의리죠. 우리 과 교수님이라 대출도 못 하고 그냥 아프다고만 둘러댄 건데요."

"아니. 사양하지 말고."

도훈은 그에게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남은 수업을 마친 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시내로 이동했다.

우선은 차를 타는 내내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우아! 차 엄청 좋네요! 근데 이거 왜 계속 소리 울려요?"

"어, 벨트부터 하고."

"아, 맞다. 네."

"맨날 학식만 먹으면 질리잖아. 오늘은 외식한 번 하자. 뭐 먹을래?"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보다가 맛있어 보이면 들어가는 걸로."

"네. 형 근데 이차 얼마 주시고 산 거에요?"

"시세보다 훨씬 싸게 주셨어. 아버지랑 친한 친구분이거든. 알바해서 모은 돈에 부족한 건 집에서 좀 보태주셨고."

"와···. 그래도 멋있어요. 우리과에서 차 모는 사람은 형하고 4학년 도진선배 뿐일 걸요?"

사범대는 과마다 학부생이 작다 보니 끽해야 그 정도. 어쨌든 대학생은 차가 있는 것만으로 엄청난 메리트를 가진 셈이다.

"부럽다. 형 여자친구 사귀면 엄청 좋아하겠네요. 드라이브도 마음껏 다닐 수 있고···."

"인마. 나도 너랑 똑같아. 생겨야 드라이브를 하지."

"형은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거잖아요. 저랑은 완전 다르죠. 저번에 보니까 큐티 애들도 형한테 관심있어 보였는데···."

도훈은 일부러 모른 척 뜸을 들였다.

"큐티애들?"

"아니 접때 종현이 사촌 동생이 한다는 걸그룹 애들요."

"아아!"

도훈은 그제야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걔 네 이름이 큐티였지? 참, 걔들 곧 데뷔라지 않았냐? 벌써 했나?"

"아직일걸요. 가만있어봐, 아마 날짜가 오늘 아님 내일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우선이 으로 날짜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오늘 맞는 것 같아요. 그때 린다 누나가 알려줬거든요."

"그래?"

‘오늘이 데뷔라고? 그래서 아직까지 기사 한 줄 없었구나. 좋아. 이제 슬슬 견적 잡아봐야 겠군.’

도훈은 그때 일이 막 떠오른 것처럼 우선을 떠보았다.

"참, 그날 어떻게 된 거야? 성수형 먼저 들어가고 우리끼리 클럽 갔을 때 말이야. 뿔뿔이 흩어져서 어떻게 끝난지도 모르게 끝나버렸잖아."

"그러게요. 전 중간에 링링씨 배웅하고 들어갔거든요."

"링링씨를 네가?"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도훈이 귀를 쫑긋했다.

링링은 앞으로 공략예정인 상대였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우선은 그때일을 떠올리며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때 술이 너무 꼴아가지고···."

"응? 무슨 일 있었어?"

"형, 이건 종현이나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어. 내가 누구한테 말해. 어차피 그 일은 네 사람만의 비밀인데. 그리고 종현인 군대 갔잖아. 성수형은 클럽도 안 따라갔고."

"그렇긴 한데···. 엄청 창피한 일이라."

"왜? 링링씨랑 무슨 일 있었어?"

"그날 제가 좀 취해서 링링씨한테 들이댔거든요."

"그랬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도훈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구나. 링링 정도면 술김에 눈이 돌아갈만도 하지. 새끈한 몸매에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그러면서도 과감하고 도발적이다.

어딘가 모르게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속쌍커플 진한 눈매는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맛이 있었다.

"바로 까였죠."

"까였어?"

"네. 무슨 단호박인줄 알았잖아요. 칼 같이 돌아서더니 집으로 가버리데요."

"그럼 배웅이 아니고···."

"네, 들이대니까 짜증나서 집에 가버렸나 봐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춤추느라고 전혀 몰랐네."

우선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보보가’를 외쳤던 흑역사까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암튼 그래도 인연인데 데뷔 잘하라고 격려 메시지나 남기려고요."

"연락처도 알아?"

"네. 근데 그 날이후로 한 번도 연락은 못 했어요."

"한 번 해봐. 혹시 또 모르니까. 그땐 처음 만난 거잖아."

"아니에요. 진짜 엄청 단호했어요."

우선은 택시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던 링링의 싸늘한 눈빛을 잊지 못했다. 무언의 눈빛으로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나를? 젖이나 더 먹고 오렴.

"원래 처음 만난 날은 들이대는 게 아니지. 네가 좀 급했네."

처음 만난 날 두 명과 쓰리썸을 즐겼던 도훈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아무도 모르니 도훈은 마음대로 지껄였다.

"그러니까요. 참, 형은 뭐 없었어요? 그날 제희씨랑 분위기 좋았던 것 같은데."

"별거 있겠냐. 그냥 술자리 분위기지."

"하-. 하긴 형은 근데 굳이 아이돌 아니라도 여친 금방 생기실 거에요. 이제 차까지 생겼으니 날개를 단 셈인가요?"

"아이고, 대체 얼마나 뜯어 먹을라고 아부까지."

시내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점심을 함께했다.

낚지볶음 밥이 메인인 음식점이었는데, 첫끼로 점심을 때우니 공복감에 밥이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도훈은 다시 우선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대학 본부를 잠시 들렀다. 장기 주차 할인권을 끊기 위해서였다. 일요금을 내는 것보다 소속 학생으로 등록해 월정액으로 끊는 게 훨씬 저렴했다.

수속을 마치고 본부를 나서는 도훈에게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도훈 학생?"

검은 정장 치마 실키한 소재의 블라우스를 입은 새끈한 여성이 도훈을 불러세웠다.

"어? 교수님."

"여긴 어쩐 일로?"

빨간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은주 교수가 다가왔다.

손에 갈색 서류뭉치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어디 회의라도 참석하고 온 모양이었다.

"학생처에 들를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근데 요샌 많이 바쁜 가 봐? 수업 마치면 바로 쌩 가리고. 연구실도 놀러 안 오고."

손교수는 골드미스란 말이 무척 잘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옷부터 들고 다니는 빽까지 위아래 전체를 명품으로 치장할 정도로 부티가 넘쳤다. 검은 뿔 태 안경이 깐깐한 B사감을 떠올리게 했으나, 실제론 정렬 넘치는 뜨거운 여인이었다.

"아··· 네. 교생 실습 다녀오고 정신이 없어가지고."

"하긴. 사범대생들은 중간에 실습을 가야 하니···."

손 교수가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거렸다.

"시간 있으면 차라도 한잔하고 갈래? ···내 연구실에서."

손교수가 유독 ‘연구실’이란 단어에 악센트를 주었다.

"아, 지금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도훈이 망설였다.

오늘은 큐티의 데뷔 날이니만큼 오후 일정이 빡빡했다. 그전에 공부를 끝내 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도훈이 난처해 하자 손교수가 은근슬쩍 부추겼다.

"좀 있음 또 기말고사지? 시험 관련해서 얘기해주고 싶은 것도 있고···."

‘헛. 참나. 학점으로 유혹할 줄이야.’

[손교수도 급했나 보군요. 공과 사는 철저한 사람인데 말이죠.]

‘그거야 떡 정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겠지.’

[떡정요?]

‘원래 살을 부대낀 사람들 사이엔 어쩔 수 없는 그런 게 있거든.’

도훈은 하는 수 없이 1시간만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네, 뭐 그럼 잠깐 정도는."

"호호. 그래. 오랜만에 도훈이랑 차 마실 생각을 하니 두근 거리네?"

‘차를 마시겠다는 건지 내 좆물을 마시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헛. 주인님···.]

‘암튼 일단 따라가보자.’

손교수의 연구실은 별반 달라진게 없었다.

벽 뒤엔 책으로 가득 찬 서랍장이, 구석엔 운동용인지 자위용인지 모를 실내자전거가 비치되어 있었다. 여름 햇살이 따사로워 블라인드를 쳐 놓아 살짝 내부는 어두운 편이었다.

도훈과 오랜만에 단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손교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었다.

"도훈이 차 뭐 마실래?"

"저는 커피요."

"커피? 그럼 나도 도훈이랑 나눠 먹어야 겠다."

"네?"

"후훗-. 아까 회의할 때도 한 잔 했거든."

"아··· 네."

직접 커피를 내려온 손 교수가 굳이 3인용 소파에 앉은 도훈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짧은 치마가 밀어 올라가 허벅지가 훤히 보이자 도훈이 속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헛, 시작부터 노골적인데?’

[손 교수가 많이 굶주렸나 보군요.]

‘그럴 수밖에. 교생 실습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으니까.’

"도훈 학생은 여전히 단단하네?"

손 교수가 자연스럽게 도훈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리며 그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도훈은 슬쩍 몸을 비틀며 교묘히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참, 시험 관련해서 해주실 말씀이 있다고···."

"아, 그거? 음, 이번 기말시험은 예고했던 대로 논술로 볼 거야."

"논술이요?"

"응. 몇 해째 객관식으로 문제를 냈더니 글쎄 학생들 사이에서 내 시험 족보가 돌아다니더라고."

"아···."

"나도 사람이니까 중요한 개념은 계속 반복적으로 출제할 수밖에 없거든. 그러다 보면 비슷한 문제도 몇 개 있을 거고···. 결국엔 족보를 구하는 사람과 못 구하는 사람하고 차이가 벌어지는 거지. 그건 내가 원하는 측정 방식이 아니야."

"아···."

"어때? 이 정도면 괜찮은 정보지?"

도훈은 논술 시험이 차라리 편했다. 만능만년필의 위력이라면 머릿속의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펼쳐 줄 것이다.

손교수의 손이 이번엔 도훈의 어깨 위로 스르륵 올라왔다.

그녀는 립스틱이 반짝이는 입술로 도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주제가 어떤 게 나올지는 안 궁금하고?"

< 644. 아이돌 vs 돌아이-37-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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