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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54화 (627/2,000)

< 636. 아이돌 vs 돌아이-29- >

일요일 저녁.

추리닝 차림으로 티비를 보고 있던 정음은 갑작스러운 도훈의 방문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느라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엄마, 나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게!"

"이 시간에 어딜 가는데?"

"요 앞 편의점에."

"편의점 가는데 웬 화장이니?"

"너무 생얼이잖아!"

오랜만에 좋아하는 선배를 만나는데 맨 얼굴로 나갈 순 없었다. 정음은 급히 화장대 거울을 보며 얼굴에 파우더를 찍어 발랐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구느라 머리를 안 감았다는 점이었다.

‘악! 지금 샴푸 했다간 말리는데 시간 다 갈 텐데!’

도훈은 20분 전부터 아파트 놀이터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음은 어쩔 수 없이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급히 뛰쳐나갔다.

‘근데 오빠가 웬일이람? 말도 없이 갑자기 집까지 찾아온 건 처음인데···.’

도훈은 일전에 컴퓨터를 고쳐준다며 정음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혹시?’

순진한 정음은 어쩌면 도훈이 오늘 고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새터 때부터 지금까지 그 순간만 기다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맞아, 요즘 부쩍 연락도 잦았었잖아.’

도훈은 최근 들어 자주 안부를 물어왔다.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라는 둥, 알바 잘 갔다 오라는 둥, 아니면 주말에 푹 쉬라는 둥의 형식적인 연락이었지만 정음은 그것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물론 그것은 도훈이 새롭게 얻은 아이템의 인맥 관리 기능 때문이긴 했지만.

‘어, 어떡하지? 급히 나오느라 너무 대충 나와버렸나?’

정음은 뒤늦게 후회했다. 머리도 감지 않고, 모자를 눌러쓴 채 고백받는 여자가 세상 어느 천지에 있단 말인가.

‘다시 들어갈까?’

놀이터 앞까지 도착한 정음은 차마 도훈을 부르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이러다 불쑥 꽃다발이라도 안겨버리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아아! 이 푼수 같으니! 생각해 보니 오늘 샤워도 안 했잖아?’

정음은 본디 선머슴 같은 성격이다.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오래 배워 반쯤 운동선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늘 가방에 도복을 넣고 다녔고, 땀에 흠뻑 젖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도훈을 만나고부터 그녀는 달라졌다.

늘 단발로 유지하던 머리를 계속 길러 이제는 어깨 바로 밑까지 내려왔다. 교복 치마 말고는 평생 안 입을 것 같던 치마도 입었다. 유명 유튜브 영상을 보며 화장도 배웠다.

그런 노력 끝에 그녀는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체육과 최고의 퀸카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물론 원체 본바탕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다년간의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는 빼빼 마르기만 한 여성들과는 피부의 탄력부터 달랐다. 새하얀 얼굴과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두 볼은 청순하면서도 발랄한 인상을 풍겼다. 게다가 예뻐도 예쁜 척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성격 탓에 남자들 사이에선 거의 여신 취급이었다.

벌써부터 체육과를 넘어 사범대에서 손꼽히는 미녀라는 소문이 돌았다. 특히 도훈을 만나고 성에 눈을(?) 뜬 이후 숨겨왔던 특유의 여성미가 발휘되며 어딘지 모르게 남성의 방심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옆에 있으면 괜히 한 번쯤 덮치고 싶어지는 그런 여자 말이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높은 평가와 달리 그녀의 생활 습관은 잘 바뀌지 않았다. 본디 집순이였던 그녀는 주말엔 소파에서 뒹굴며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게 낙이었다. 그럴 때면 씻지도 않고 대충 잠옷이나 추리닝 바람으로 하루 종일 있었다.

하필 그때 도훈이 방문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어. 내가 집에 있을 때 잘 안 씻은 줄 알면 오빠가 엄청 실망할 거야.’

정음이 폰으로 연락을 남겼다.

-육정음 : 오빠, 죄송해요. 저 좀 늦을 것 같아요.

-이도훈 : 응, 괜찮아. 천천히 나와.

-육정음 : 네, 금방 나갈게요.

정음이 메시지를 남기고 돌어서는데 등뒤에 도훈이 서 있었다.

"금방 나온다더니 벌써 나왔어?"

"아앗!"

정음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머리에서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오, 오빠!"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니? 근데 내가 먼저 발견해서 어쩐다."

"드, 들켜 버렸네요. 하하!"

정음이 머쓱하게 웃었다.

민망해진 그녀는 급히 말을 돌렸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왜? 오면 안 될 데라도 왔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깨톡하실 땐 오늘 집에서 쉬신다고 하셔서···."

도훈이 흠칫 놀랐다.

‘뭐야? 내가 언제 깨톡을 보냈지?’

[‘망부석이 되지마오’ 아이템의 자동응답 기능입니다. 지속 관리 대상에 정음 양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맞다. 그랬었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음이랑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었구나. 혹시 내가 놓친 내용은 없겠지?’

[중요한 메시지의 경우 사용자의 재가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별다른 알람이 없던 것으로 보아 일상적인 안부 수준의 대화로 추정됩니다.]

‘그렇담 다행이고.’

"사실 내가 서프라이즈야."

정음은 서프라이즈라는 말에 기대하며 도훈의 양 손을 살폈다. 혹시 등 뒤에 꽃다발이라도 숨기고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도훈은 빈손이었다.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정음은 속으로 살짝 실망했다.

‘에휴, 내가 너무 김칫국을 마셨나?’

"사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실망하던 정음이 다시 눈을 반짝였다. 혹시 어딘가에 이벤트를 준비해 놓은 것일까? 막 바닥에 촛불로 길이 나 있고 가운데 장미꽃 한 다발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쪽으로 따라 올래?"

"네."

정음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뭔지 몰라도 도훈이 뭔가를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정음은 고백을 받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벌써부터 고민에 빠졌다.

‘어, 어떡하지? 남자들은 단 번에 승낙하면 여자를 쉽게 생각한다던데···. 한 번쯤 튕겨야 하나? 아니야. 괜히 튕겼다가 오빠가 진짜로 마음을 접으면 어떡해? 그냥 무조건 좋다고 하자.’

정음이 쓸데없는 고민으로 갈팡질팡하는 사이 도훈이 놀이터 옆 주차장에 도착했다.

"짜잔. 나 차 샀지롱!"

"···예?"

"오빠 차 뽑았다고."

"아!"

기대에 부풀어 있던 정음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도훈은 정음의 마음도 모르는지 혼자 신이 나서 떠들었다.

"중고차긴 해도 되게 깨끗하지?"

"네. 이 차에요?"

"응."

"···예쁘네요."

정음은 재빨리 실망감을 감추었다.

‘오빠가 많이 자랑하고 싶었나 보네. 굳이 이 시간에 집까지 와서 보여주는 걸 보면.’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는 거야."

"고마워요. 근데 돈이 어디서 나서···."

"응. 알바 해서 모은 돈에 아버지가 좀 보탰어. 한국에서 혼자 고생한다면서."

"와···. 대단하세요. 그래도 많이 비쌌을 텐데."

"딜러가 사람이 좋더라고. 시세보다 훨씬 싸게 샀어."

"네."

"한 번 타볼래?"

"지금요?"

도훈은 씩 웃으며 보조석 문을 열였다.

"가볍게 드라이브나 하자."

"고마워요, 오빠."

정음을 차에 태운 도훈은 차를 몰고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운전대를 잡은 도훈이 물었다.

"갑자기 불러내서 놀랐지?"

"아니에요. 와, 근데 차 정말 깨끗하네요."

정음이 신기한 듯 차량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도훈은 정음의 동네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도는 중이었다.

어느새 가로등이 켜진 늦은 시간.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야경에, 실망스럽던 정음의 마음도 차츰 누그러졌다.

‘그래. 오빠랑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만도 어디야? 학교에선 눈치 보여서 말도 잘 못 거는데.’

정음이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데 도훈이 말했다.

"네 생각 나더라."

"···네?"

"차를 딱 사고 나서 누구랑 드라이브할까 생각하는데, 네 생각이 제일 먼저 나더라고."

"아···."

"중고차긴 해도 내 생애 첫차에 가장 먼저 태워주고 싶었어."

"오, 오빠···."

도훈이 슬며시 오른손을 뻗어 정음의 손등에 올렸다.

"앞으로도 자주 태워줄게."

"···고마워요."

정음이 손바닥으로 뒤집더니 도훈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꽉 잡은 두 손이 따뜻했다.

‘···고백 같은 거 안 받아도 괜찮아요. 오빠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 잘 아니까.’

"참, 차 뒤에 봐봐. 오는 길에 뭐 좀 사 왔어."

"네?"

"그래도 남의 집에 가는데 빈손으로 오기가 뭐하더라고."

정음이 고개를 내밀자 뒷자석 시트 위에 네모난 상자가 보였다.

"저게 뭐예요?"

"응. 치즈 케익. 너 달달한 거 좋아하지?"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정음은 몹시 행복해졌다.

달달한 것도 좋지만, 자신을 생각해 선물까지 사 온 도훈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도훈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많잖아. 항상 고맙고 미안해."

"아니에요. 오빠가 저한테 얼마나 잘 해주시는데요."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그때 생각나지 않아?"

"네?"

"왜, 새터에서. 우리 차력 재료 산다고 철물점 갔을 때. 조교선생님 차 빌려서."

"아···!"

도훈이 민망한 추억을 상기시키자 정음의 두 볼이 금세 빨게졌다.

두 사람의 첫 섹스이자, 정음이 처녀를 잃었던 카섹스였다.

"···부끄러워요."

"그래? 난 정말 좋았는데."

"무, 물론 저도 좋았지만."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학기 방학도 얼마 안 남았네."

"그러네요. 기말고사까지 한 달인가?"

"정음이 넌 방학 때 뭐해?"

"음, 7월 초에 호주로 가족 여행이 있어요. 그리곤 뭐 평소처럼 도장일을 봐주지 않을까요? 오빠는요?"

"난 알바 구해야 할까봐."

"알바요?"

"응. 전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아버지가 최소 생활비만 붙여 주시거든. 용돈은 벌어서 쓰라고."

"아···."

정음이 주저하면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혹시 실례가 안 되면···."

"응?"

"제가 용돈이라도."

"뭐래 이게 진짜."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음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른 뜻이 아니고요. 관장님께서 최저 시급 올랐다고 알바비를 더 올려주셨거든요. 그래서···."

도훈은 정음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었다.

"됐어. 나도 돈 많아."

"모은 돈으로 차 사셨잖아요."

"또 벌면 돼. 그러니까 나한테 뭐 사줄 생각 안해도 돼."

"음···."

도훈의 단호한 태도에 정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기분 나쁘셨던 건 아니죠?"

"뭐가?"

"제가 괜한 말을 했나 해서요···. 오빤 학기 중엔 알바 안 하고 공부만 하시잖아요. 저는 계속 돈을 벌고 있고. 그래서 전···."

"아니야. 그런 거. 네가 날 생각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 근데 내가 쓸건 내가 벌어 쓸게."

"네."

도훈은 정음의 마음이 기특해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너 근데 너무 착하다."

"제가요?"

"응. 어떻게 나한테 용돈을 줄 생각을 다 했어?"

정음이 얼굴이 빨개졌다.

"그냥··· 전 오빠한테 주는 거 하나도 안 아까워요."

"정말?"

"네. 그냥 다 주고 싶어요."

도훈은 정음의 진실한 고백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아··· 정음이 앞에서 고개를 못 들겠구나. 이 차도 심지어 몸으로 때워서 깎아 산 건데···.’

도훈은 삿된 마음을 품은 게 죄스러워 허벅지에 올렸던 손을 빼냈다. 이렇게 일관되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정음 앞에 인간적인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아까 박미영이 자신의 등판을 손으로 할퀸게 떠올랐다. 만에 하나 정음이 보게 된

다면 다른 여자를 만난 것을 의심할 게 분명했다.

반면 정음 역시 도훈의 손이 올라왔을 때 뜨끔했다.

‘앗! 오, 오늘은 안 돼. 샤워도 안 하고 머리도 안 감았단 말이야. 냄새 나면 오빠가 실망할 거야.’

사실 정음은 집에만 있었기에 딱히 땀 냄새가 나거나 지저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괜한 걱정에 얼른 핑계를 댔다.

"저 근데 오빠. 엄마한테 잠깐 편의점 간다고 하고 나와가지고."

"아, 그랬니?"

"네. 늦게 들어가면 걱정하실 것 같아요."

"그래, 그래. 제대로 된 드라이브는 다음에 다시 하자."

도훈은 다시 정음을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차를 세워놓고 배웅을 하는데 문 앞을 서성이던 정음이 도훈에게 다가왔다.

"오빠, 오늘 고마워요. 케익."

"아니야. 다음에도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쪽-

정음이 발꿈치를 들어 도훈의 입술에 키스했다.

겨우 용기를 내 굿나잇 키스를 한 정음은 도망치듯 후다닥 엘리베이터로 뛰어가 버렸다.

도훈은 정음의 입술이 남기고 간 부드러운 감촉을 되새기며 중얼거렸다.

"씨바···. 서버렸잖아?"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볍게 뽀뽀만 해도 그의 똘똘이가 반응하고 있었다. 아까 전 박미영와 의무방어전을 치를때완 극명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아으 씨! 그냥 할 걸 그랬나?"

도훈이 뒤늦게 후회하며 차에 올랐다.

***

수업 중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박미영 : 차량 이전 등록 마쳤어. 참, 그리고 오늘 중으로 연락 갈거야.

-이도훈 : 고마워요. 근데 무슨 연락요?

-박미영 : 어제 말했잖아. 정마담 언니. 무슨 말인지 알지?

아, 올게 왔구나.

[주인님. 근데 지금 당장 알바를 시작하시려고요?]

‘아니. 어차피 방학 때나 가능하지. 근데 일단 어느정도 안면은 터놔야 할 것 같아서.’

[큐티 걸그룹 공략은 기한이 정해진 미션입니다. 내기의 신과 대결도 걸려 있구요. 잊으시면 안됩니다.]

‘당연히 잊지 않았지. 그냥 할 수 있는 건 동시에 조금씩 진도만 빼는 거야.’

그때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636. 아이돌 vs 돌아이-2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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