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48화 (621/2,000)

< 630. 아이돌 vs 돌아이-23- >

"얼마든지요. 참, 면허증은 가져오셨죠?"

아차.

원주인은 군대 가기 전 면허를 딴 뒤로 운전대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장롱 면허였다. 물론 나의 20년 경험이 있기에 운전을 하는 데 전혀 무리는 없지만, 면허증을 어디 두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그게 집에 놔두고 온 것 같은데요."

"흠, 그럼 곤란한데."

"그냥 근처 한 바퀴만 돌고 오면 안 될까요? 그래도 한 번은 타봐야 구매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박미영 팀장은 팔꿈치를 턱에 괴더니 고민에 빠졌다.

하긴 나라도 20대 초반의 남자에게 덜컥 차 키를 맡기는 것은 부담스러울 것 같다. 그래서 보험료도 만24세 미만일 때 가장 비싸다지 않은가? 실제로 사고율도 높으니.

"운전은 괜찮으신 거죠?"

"네, 군대에서 운전병 출신이었어요."

"어머, 벌써 제대도 했어요? 더 어리게 봤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원래 규정상 안 되지만 이렇게 해요 그럼. 제가 동승 할 테니까 요 주변만 잠깐 돌고 오는 거로."

"감사합니다."

미영이 씽긋 웃으며 보조석에 앉았다.

나는 차 키를 받아들고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연식에 비해 키로수도 적고, 무엇보다 엔진음이 정갈하니 듣기 좋았다.

‘관리가 잘 된 차구나.’

"벨트 하셔야죠."

"아, 네."

벨트를 매고 미영을 쳐다보자 미영도 자기 벨트를 채우고 있었다. 벨트 선이 가슴선을 가르며 짓누르는 바람에 그녀의 풍만한 볼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슴 골짜기를 가로지른 벨트는 유난히 타이트해 보였다.

‘오, 제법인데? 사이즈가 얼마나 되려나?’

[쓰리 사이즈 스카우터로 확인해 보시던지요.]

‘참, 그게 있었지. 준비시켜.’

"저 안경 좀 쓸게요."

"안경도 쓰세요?"

"네. 운전할 때만요."

나는 자연스럽게 가방으로 전송된 스카우터를 착용했다. 도훈의 얼굴이 서글서글한 편이라 안경을 쓰자 모범생처럼 잘 어울렸다. 역시 패완얼이군.

"안경 쓴 모습도 잘 어울리는네요?"

"감사합니다."

웃으며 미영을 쳐다보자 그녀의 몸매가 측정되며 디스플레이에 세 개의 숫자가 떠올랐다.

<36-28-37

왼쪽부터 바스트 웨스트 힙이다.

‘음, 빨통이랑 궁댕이는 빵빵한 데 허리가 좀 두꺼운 편이군.’

[주인님. 언어를 좀 정선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충 알아들으면 되지, 까탈스럽긴.’

확실히 굴곡이 훌륭하다.

30대 중반에 저 정도 몸매면 젊었을 때 남자에게 꽤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붙임성도 좋은 성격에 무엇보다 은근슬쩍 흘리는 데 능숙하다. 방금 벨트를 바짝 조여 맨 것도 분명 큰 가슴을 과시하기 위함이리라. 보라는데 봐주는 게 예의지.

나는 노골적으로 가슴을 응시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너무 빤히 쳐다보자 미영이 허리를 수그리며 몸을 움츠렸다.

"학생, 지금 어디 보는 거?"

"아, 보조석 사이드미러가 안 맞아서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버튼을 눌러 사이드 미러의 각을 조절했다. 미영이 민망했는지 "흠." 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 맞췄으면 출발하죠."

"네."

매장을 빠져나가자 미영이 옆에서 말했다.

"보통 시 운전 하시면 우회전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음, 직선 주로 때 밟으면 10분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그녀를 유혹할 수 있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단 10분.

어떠한 정신 조작 없이, 이 바람기 다분한 아줌마를 꾀어내야 한다. 차값도 깎고 뽕도 따니 일석이조인 셈인가?

나는 스무스하게 차를 몰며 물었다.

"결혼은 하셨나요?"

"저요?"

"네."

"당연히 했죠. 애도 있는데."

"와, 정말요? 저는 진짜 아가씬 줄 알았어요."

"어머, 별소리를 다 듣겠네. 호호!"

나이 든 여자에겐 어리다는 칭찬을 해야 한다.

정석 중의 정석. 뻔한 아부인 줄 알아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여자의 본능이다.

"제가 정말 그렇게 어려 보여요? 몇 살 같은데요?"

미영이 답정너를 걸어왔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쉬워 보이면 안 된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한 척 했다.

"음···. 30대 후반?"

"네?"

"하하, 농담이에요. 20대 후반요."

"애도 있다니까 자꾸 그러네."

"일찍 낳은 줄 알았죠."

"서른은 훌쩍 넘었어요."

"그렇게 안 보이세요."

"젊은 학생이 말주변도 좋네. 내가 선심 써서 썬팅은 다시 해줄게요."

미영이 곧바로 영업을 들어왔다.

"차값이 얼마라고 하셨죠?"

"등록비랑 세금 빼고 정확히 천이요. 이 정도 컨디션에 천만원이면 완전 특가라고 봐야죠."

전면 썬팅을 맡기면 20~30은 들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영맨의 능력 범위 안이다.

일상적인 서비스 말고, 나에겐 좀 더 파격적인 혜택이 필요하다.

"천만원···. 아···."

금액을 듣고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미영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 자금이 부족해요?"

"네. 살짝요."

"부모님 한테 연락 해봐요. 이 가격에 이런 차 구하기 쉽지 않은데···."

슬슬 썰을 풀기 시작한다.

"썬팅만 다시 해도 정말 새 차 같을 거예요. 보시면 시트나 내장재도 굉장히 고급스럽잖아요. 전 차주가 풀옵션을 샀거든요."

"네. 근데 제가 부모님께 손 벌릴 입장이 아니라서···. 이것도 제가 알바해서 사는 거거든요."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AV 출연료와 차기작 계약금으로 사는 거니까.

어려운 형편을 얘기하자 미영의 표정이 누그러들었다.

원래 잘생기고 예쁘면 가난해도 동정을 받는 법이다.

"저런···. 학생이 고생했겠네. 근데 왜 차가 필요해?"

미영이 자연스럽게 말을 놨다.

"그게··· 괜찮은 조건으로 과외가 하나 잡혔는데 학생이 고3이라 새벽에나 끝난다더라고요. 지하철도 끊기는 시간에다, 택시 타고 다니기엔 너무 부담되는 거리라서."

"아, 그렇구나."

"어차피 졸업하면 사야 되는 데 2년만 일찍 사려고요."

"그랬구나."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제안했다.

"아니면 이것보다 좀 더 싼 차가 있는데 그건 어떨까? 어차피 이동용으로 쓰는 거라면 가격대가 저렴한 게 낫지 않겠어?"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중고차를 너무 싼 걸 사면 얼마 못타고 폐차시켜야 한다더라고요. 기왕 살 때 오래 탈 수 있는 걸로 사려고요."

"뭐, 중고라는 게 다 그렇긴 한데···."

미영이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래, 그럼 까놓고 말해보자. 얼마가 부족하니?"

계산을 때렸다.

10%를 깎으면 1000포인트다.

30%는 후려 쳐야 수지가 남는 미션이 된다.

"음··· 삼백쯤?"

"사, 삼백?"

미영이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삼백이면 매입가보다 손해가 나는 장사일 것이다.

"그건 좀···."

"어떻게 안 될 까요?"

"너 카드 가진 건 있니?"

"카드요?"

"응. 부족한 만큼만 대출하면 될 것 같은데."

"근데 제가 직장이 없어 가지고···."

"그렇게는 무리야 나도. 솔직히 그렇게 하면 나도 남는 것 하나도 없이, 손가락 빠는 거야."

"···네. 죄송해요."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속 차를 몰았다.

어느새 국도로 접어든 차는 시원시원 잘도 나갔다.

미영이 우울해진 내 표정을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형편이 많이 힘드니?"

"아니 뭐···. 이젠 익숙해요. 입학할 때부터 학자금 대출 받아서 제 힘으로 돈 벌어서 다녔거든요. 지금도 생활비랑 등록금 벌려고 과외하는 거구요."

"그랬구나. 그래도 젊은 학생이 열심히네. 보기 좋아."

"감사합니다."

"혹시 목돈 필요하면···. 아, 아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네? 왜요?"

미영의 낌새가 이상했다.

분명 뭔가를 제안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랍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그러게요.]

"뭔데요? 뭐 말씀하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아냐. 내가 순진한 학생한테 괜한 말을 했어. 신경쓰지마."

"전 하나도 안 순진해요. 말해 주세요."

찰싹-!

"때끼. 못하는 말이 없네."

미영이 보조석에서 내 팔뚝을 찰지게 때렸다.

곧 그녀의 표정에 이채 떠올랐다.

"와. 너 근데 되게 단단하다?"

"네, 운동 좀 했거든요."

"흠, 몸도 좋고 얼굴도 잘 생기고···. 정말 딱 어울리는 알바가 있긴 한데."

"알바요?"

미영이 둘밖에 없는 차 안을 힐끔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너 이거 어디 가서 말 안 할거지?"

"뭔데요?"

"그것부터 대답해. 아니면 나도 말 못 해주니까."

미영의 표정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뭔 말을 하려는 거지?’

[마음의 소리 준비할까요?]‘아냐. 일단 말할 것 같으니 들어보고.’

"알겠어요. 어디 가서 절대 말 안 할게요."

"좋아."

미영이 핸드백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일단 받아."

"이게 뭔데요?"

검은색 명함에는 ‘정다희’라는 이름과 함께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언니 번호야. 차 팔다가 만난 인연인데··· 암튼 그 얘기 하려는 건 아니고. 너 혹시 호스트빠라고 알아?"

"호빠? 남자 접대부요?"

"떽, 접대부라니. 말이 좀 그렇네. 그냥 누나들한테 술 따르고 재롱떠는 일이지."

"근데 이걸 왜 저한테···."

미영이 씩 웃었다.

"너 과외로 한 달에 얼마 버니? 그 잘 쳐준다는 과외 집."

살짝 고민했다.

과외를 위해 차까지 구매할 정도로 메리트가 있어야 하므로 적게 말하면 그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음, 100만원이요."

"100만원?"

너무 세게 불렀나?

"네."

"너 만약에 이 언니한테 연락해서 알바 뛰면, 하룻밤에 100만원도 벌 수 있어."

"하, 하룻밤에요?"

호빠가 그렇게 돈을 잘 번단 말이야?

하긴 뭐 몸파는 애들이 돈 잘버는 거야 유명하지.

일전에 인터넷에 한 달 수입이라고 현금 천만원이 넘게 인증했던 오피걸도 있었으니.

"그래. 네가 사정이 딱해 보여서 물어보는 거야. 그만하면 외모도 충분히 통할 것 같고."

참나.

미션 때문에 차 값 좀 깎으려고 없는 척했다 별 제안을 다 받게 되었다. 지금 내 가방에 현금 1500만원이 있다는 걸 알고 하는 소린가?

미영이 호빠 얘기를 꺼내자 문득 나이트 조각모음에서 만났던 텐프로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쩜오급이지만.

그때 쟈스민인가 재스민이가 하는 여자가 마지막에 그런 소릴 했었다.

-이 바닥엔 우리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도 많아. 아무리 너라도 ‘그 여자’ 한 테는 안 될걸.

나는 다시 명함의 이름을 눈여겨 보았다.

‘정다희’

실장이라고 적힌 걸 보니 정마담이라 불러야 하나?

설마 이 여자가 그때 말한 그 여자는 아니겠지?

[주인님, 어쩌실 겁니까?]

‘어?’

[미션 수행 안 하실 겁니까? 벌써 시운전이 끝나고 있습니다.]

‘아차, 10분. 지금 몇 분 지났지?’

[매장 도착까지 2분 전입니다. 이러다 미션 실패하겠는데요?]

‘젠장, 갑자기 난데없는 스카웃 제의를 받아 가지고···.’

이럴 때가 아니다.

우선은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자.

차도 싸게 사고, 포인트도 벌 수 있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 없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다시···. 어? 이 길이 아닌데? 너 어디 지금 가니?"

미영이 황당해하자 내가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직 누나랑 할 얘기가 더 남은 것 같아서요."

***

도훈이 중고차를 사기 위해 매장을 방문한 시각.

연습생 숙소에서 깨어난 미소가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1층에 있는 화장실은 누가 쓰고 있었다.

똑똑-

"안에 누구?"

"···나야."

제희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희 언니? 언제 들어왔어?"

"아침에··· 아, 잠깐 말 걸지 말아봐. 지금···. 흐응!"

뿌직-

망측한 소리가 나며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뻘쭘해진 미소가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났다.

"난 2층 화장실 쓸게."

"그, 그래. 미안."

"아니야. 근데 언니 뭐 잘 못 먹었어? 배탈 난 거야?"

"아, 아니 그게··· 지금 좀 말하기 힘들어서."

"어, 그래. 미안."

미소는 숙소 2층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변빈가? 평소에 똥도 잘 싸던 사람이 왜 저런담?’

사실 제희는 어젯밤 후장의 여파로 죽을 맛이었다. 뒤틀린 직장이 배변 기능을 자극해 장이 바깥으로 돌출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밤새 남사친이랑 뭘 하고 왔길래 아침에 들어왔을까나···."

혼잣말을 하며 2층 화장실 문을 연 미소는 안에서 샤워 중인 린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구야?"

"어, 언니!"

"넌 애가 조심성이 없니? 문을 갑자기 벌컥 열면 어떡해?"

린다의 성화에 미소가 황급히 문을 닫고 물러섰다.

"미안요. 온 줄 몰랐어요."

쾅-.

문을 닫고 선 미소는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가만? 어제 인천 집에 간댔는데?’

"언니?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뭐라고? 잘 안 들려!"

"집에 갔다면서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요."

"애가 뭐래는 거야? 씻고 나가서 얘기해."

"네."

화장실에서 물러난 미소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수상한데. 어젯밤 숙소 미복귀한 둘이 나란히 아침에 집에 들어왔다고? 저 앙숙들이?’

있는 척하는 린다와, 내숭쟁이 제희는 썩 잘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한 그룹에 속해 있으니 티를 안 낼뿐, 다른 목적으로 만났다면 원수가 됐으면 모를까 절대 친구가 되긴 힘든 사이였다.

‘우연히 비슷한 시간에 들어온 걸까?’

공식 데뷔 전 마지막 휴가. 멤버 중 절반은 집으로 향했다.

숙소에 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제희처럼 고향이 너무 멀거나, 린다처럼 가족끼리 사이가 안 좋거나, 그것도 아니면 링링처럼 외국 국적인 사람뿐.

사촌 오빠인 종현을 군입대 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약속을 잡았던 미소를 제외하곤, 딱히 나갈 이유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의 외출이 석연찮은 이유로 외박으로 바뀌었고,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침에 숙소로 복귀했다.

미소는 어느 순간 말없이 사라진 도훈을 떠오르며, 의심쩍은 생각을 했다.

‘설마 그 싸가지?’

< 630. 아이돌 vs 돌아이-2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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