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8. 아이돌 vs 돌아이-21- >
정신을 차린 도훈은 팔베개하고 누운 두 사람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깨셨습니까?]
‘로시, 어제 내가 몇 번이나 하다 잤지? 술김에 너무 달린 거 같은데?’’
[린다 양과 총 3번, 제희 양과는 모두 2번을 하셨습니다.]
싸다 죽으면, 다시 세워 싸고.
여기 꽂았다가 저길 뚫었다가.
날밤을 새우며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배 이상으로 힘들었다. 이제껏 강화한 섹스 능력이 아니었다면, 분명 코피를 흘리고 쓰러져도 이상치 않을 정도.
기억을 떠올린 도훈은 질린 표정으로 털래털래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사이 잠에서 깬 린다가 가운을 걸치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보였다.
"피곤하지? 커피 한 잔 해."
린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블랙커피를 도훈에게 건넸다. 뜨거운 커피가 목을 타고 들어가자 잠들었던 뇌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속옷만 입고 나온 도훈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를 추스렸다.
"먼저 가봐야 할까 봐."
"아침도 안 먹고?"
"대낮에 얼굴 팔려도 괜찮아?"
"팔릴 얼굴이나 있나? 미소를 정도 아니면 우리 알아봐 줄 사람도 거의 없어. 아직 정식 데뷔도 안 한 신인들이잖아."
"그래?"
"그리고 룸서비스 시켰으니 여기서 가볍게라도 먹고 가. 빈속으로 다니지 말고."
린다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신을 챙기는 린다의 태도가 도훈도 싫지 않았다.
‘은근히 성격 좋네, 애도. 있는 집 딸이라 그런지 구김도 안 보이고.’
"제희는?"
도훈이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있는 제희를 보고 물었다.
"깨웠는데 좀 더 자고 싶데."
"많이 피곤했나 보네."
"그렇게 괴롭혔으니 당연하지. 새벽에 깨서 똥꼬 쓰라린다고 화장실 엄청 들락거린 건 아니?"
린다의 핀잔에 도훈은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음, 후장은 역시 심했나?’
"많이 아팠을까?"
"신경 쓰지 마. 제희도 좋아했으니까."
도훈은 침대에 뻗은 제희와 커피를 홀짝거리는 린다를 번갈아 보았다.
"근데 너희들 괜찮겠어?"
"뭐가?"
"아니 어젯밤 일···."
도훈은 여차하면 상식개변이라도 쓸 셈이었다. 만에 하나 다른 동료 귀에라도 들어가면 내기의 신과의 대결에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도훈의 걱정을 오해한 린다가 대답했다.
"나 미국에서 학교 다닌 건 알지?"
"응. 버클리 다녔다며."
"그때 기숙사 살았거든. 당시에도 룸메이트랑 비슷한 일이 있었어."
"비슷한 일이라니?"
"축제 때 꼬신 남자를 데려와 기숙사 방 내 침대 위에서 한 판 하는데, 술에 곯아떨어진 줄 알았던 룸메이트가 몰래 깨서 우릴 지켜 보고 있더라고."
"정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그때부턴 셋이 즐겼지. 거의 1년간? 나중엔 나 몰래 자기들끼리 하고 그러더라."
"흠, 어쩐지 익숙하다 싶더니만···."
‘린다는 신경 안 써도 되겠는데?’
[하지만 제희 양은 어쩔지 모르죠.]
"제희도 걱정 할 필요 없어. 제 완전 내숭쟁이거든."
"내숭쟁이라니?"
"뒤에서 호박씨를 까면 깠지, 자기 입으로 그런 일 먼저 떠들고 다닐 성격은 절대 아니라는 거야. 조신한 척은 다 하고 다니니까."
"···언니, 저 다 듣고 있거든요?"
"어머, 깼니? 계집애 깼으면 깼다고 얘기라도 하지. 저 봐, 몰래 자는 척 듣고 있는거."
"막 일어난 거예요"
제희가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도훈에게 말했다.
"우리 걱정보단, 도훈이 오빠나 조심하세요."
"나?"
"오빠는 그냥 일반인이지만, 저흰 데뷔를 코앞에 둔 가수잖아요. 입방아 올라 봐야 좋을 일도 없으니까."
"하긴···. 그렇겠군. 암튼 어젯밤 일은 세 사람끼리 평생 묻고 가자."
"응."
"좋아요."
***
아침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성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야. 어제 어떻게 된 거야?
"집엔 잘 들어가셨어요?"
-일어나보니 내 방이더라? 나 혹시 어제 취했냐?
"기억 하나도 안 나세요?"
-어. 하나도.
"술 마시다 저랑 담배 피우자면서 밖에 나갔다가 그대로 택시 잡고 집으로 가셨잖아요."
-헉! 진짜? 미안하다. 내가 어지간하면 그 정도 마신걸로는 안 취하는데···. 어젠 컨디션이 별로였나 봐. 나 실수 한 건 없었지?
"네."
-돈은 얼마나 나왔냐? 네가 계산했어? 지금 깨톡페이로 보내줄게.
"하나도 안 썼어요."
나는 어젯밤 린다가 골든벨을 울렸다고 짧게 요약했다.
-정말? 노래방비에 클럽까지 다 쐈다고? 린다 혼자?
"들어보니 집에 좀 산다더라고요. 아이돌도 취미로 하는 거라나···."
-그랬구나. 암튼 재밌었겠네.
아이템으로 성수를 먼저 보낸 것이 미안해 대충 둘러댔다.
"딱히 재미가 있지는···. 2차 땐 뿔뿔이 흩어져서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했어요."
-흩어지다니? 뭔 일 있었어?
"클럽 들어가 다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중간에 다른 약속 있는 사람은 먼저 가고, 또 취한 사람은 따로 택시 타고 가고···. 아무튼 끝이 좀 흐지부지했어요."
-그랬구나. 아무튼 너 혼자 후배들 챙긴다고 고생했다.
"고생은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미도 혼자서 실컷 봤으니까 뭐.’
-아, 그나저나 애들 연락처라도 미리 받아 놓을걸···. 사인도 하나 못 받았는데.
"종현이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걔 낼 모래 입대잖아. 그럴 정신이나 있겠냐? 나중에 휴가 나오면 부탁하던 해야지. 근데 밖이야? 차소리 들리는데?
"네."
-뭐야? 설마 날 새고 들어간 건 아니겠지?
성수는 은근히 예리한 데가 있다.
"날 새긴요. 잠깐 일 있어서 나온 거예요."
-농담이야 인마. 소개팅녀랑 잘 되고 있다면서. 조만간 밥한끼 얻어먹을 수 있는 건가?
"성수 형이라면 밥은 오늘도 사줄 수 있죠. 그리고 아직 잘 몰라요. 연락만 주고받는 사이라."
-말이라도 고맙다. 근데 시간이 안 돼. 나 오늘 여친이랑 데이트거든. 그리고 도훈아, 혹시나 해서 말인데···.
성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다른 애들 몰래 만난 것도 그렇고, 여친한테 큐티 만난 건 얘기 안 했으니까···.
"알겠어요. 형수님 귀에 안 들어가게 잘 할게요."
-짜식. 눈치 겁나 빠르네. 그리고 뭔 형수야?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형님 여친이면 당연히 형수님이죠."
-그래, 암튼 주말 잘 쉬어라.
"네. 형."
[성수 군도 어지간하군요. 저 얘기 때문에 전화했을까요?]
‘소심해서 바람도 못 피울 사람이 걱정은 무슨.’
[근데 번호 받았다는 건 어째서 얘기 안하셨습니까?]
‘누구? 린다? 굳이 얘기할 필요 있나? 린다는 이제부터 링링하고 미소를 연결해줄 다리 역할인데. 성수가 껴들어서 좋을 게 없지.’
[하긴 그렇겠네요.]
그때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처음 보는 번호였다.
‘누구지? 우선이려나?’
"여보세요?"
-아, 모시모시?
예상과 달리 일본어가 들려왔다.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오카모토 상이세요?"
-하잇. 와따시와 오카모토 데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저야 잘 지내죠. 근데 왜 이렇게 연락이 늦었어요?"
-비자금 확보에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동남아시아 쪽에 일이 있기도 했고요. 알다시피, 회사 회계를 건너뛰고 진행하는 일이라···.
"그렇군요."
-일정상 하루만 한국 머물다 모스크바로 넘어가야 합니다. 혹시 오늘 시간 되십니까? 지난번 출연료 정산 때문에 뵙고 싶은데.
"네. 어디서 뵐까요?"
-강남에서 뵙겠습니다.
오카모토와 약속을 잡은 나는 호텔 커피숍에서 그와 접선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그는 나를 보고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도훈사마."
"아이고, 나이도 한 참 어린데 뭘 이렇게까지···."
"나이는 어리지만 저희 소속사 대배우님이니까요."
"대 뭐요? 제가요?"
"아, 못 들으셨겠군요. 일본 원정남 시리즈 대박입니다. 영업부 말로는 역대급 매출을 찍었다 하더군요."
"정말요?"
"대표님께서 얼른 후속작 들어가자고 성화십니다."
"저, 후속작은···."
말끝을 흘리자 눈치 빠른 오카모토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물론 지금은 도훈사마의 학업이 더 중요하지요. 아무튼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기···."
오카모토가 발밑에 놓아둔 가방을 내밀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서류 가방이었다.
"양이 많아 한화로 환전하느라 애먹었습니다."
나는 가방을 슬쩍 열어보다 5만원으로 묶인 뭉텅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상보다 금액이 상당했던 것이다.
"이렇게나 많이···."
"아, 지난번 출연료와 차기작 계약금을 더 했습니다."
"차기작이요?"
"부담 가지실 필욘 없습니다. 언제까지 도훈 상의 시간이 허락되고 신분 노출을 허용하지 않는 조건에서의 촬영이니까요."
"그래도 이걸 받아버리면···."
"일단 계약서 부터 보여드리는 게 좋겠군요."
오카모토가 주섬주섬 서류를 꺼냈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기재된 계약서의 조항을 짚어가며 그가 설명했다.
"이쪽에 보시면 차기작의 촬영에 대해선 계약자가 직접 그 기간을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말해 도훈 상은 계약금만 받고 언제까지 촬영을 미루더라도 아무 문제 안된다는 거죠."
"이건 미키 프로덕션 측에서 너무 손해 보는 조건 아닌가요?"
"미키 대표께선 도훈 상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십니다. 꼭 잡아야 할 배우라면서 우리 회사 사람으로 만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러니 절대 부담같은 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손해 볼 게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나는 계약서에 사인 한 후 돈 가방을 챙겼다. 오만원 뭉치가 어찌나 많은지 손목이 묵직했다.
"근데 러시아에는 왜?"
"섭외죠. 저는 스카우터니까요."
"러시아 여배우를 섭외하시는 건가요?"
"네. 현지 로케 촬영엔 제작비가 상당히 많이 들거든요. 세트 문제도 있고, 촬영 스텝 데려가는 비행기 값부터 체류비까지···. 그냥 거기서 배우를 구해 일본으로 데려오는 편이 제작비에는 훨 낫죠."
"그렇군요."
"한국과 달리 일본은 AV가 발달한 지 오랩니다. 고객들도 자국인보다는 이색적인 외국인을 더 원하는 추세고요."
"네."
"아무튼 시간 되실 때 아까 연락드릴 번호로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
오카모타와의 만남을 끝낸 나는 묵직한 돈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현금을 뭉텅이로 들고 돌아다니니 괜히 누가 쳐다보는 건 같고, 머리에 땀이 날 정도였다.
‘어휴, 이게 대체 얼마야?’
가방을 뒤집어 방바닥으로 탈탈 털자 묶인 오만원권 뭉텅이로 쏟아졌다. 하나를 풀어 천천히 세보니 한 묶음에 100장이었다.
"오만원이 백장이면···."
[500만원입니다.]
‘나도 알아 인마.’
[혹시나 싶어서요.]
‘내가 아무리 빠가라도 덧셈도 못 해 보이냐?’
[방금 그건 곱셈인데요.]
‘여튼!’
뭉텅이의 개수는 모두 20개.
"이, 일억?"
갑자기 손이 떨렸다.
전생의 재산은 1억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은 사이버머니나 마찬가지. 현찰 1억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와, 이렇게 많은 돈이···."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40대에 10억보다 20대 초반의 1억이 훨씬 커보이는 법.
특히 대학교 2학년 밖에 안된 나에게 1억의 쓰임새는 엄청났다.
[거금을 몰래 챙기느라 지급이 늦어졌나 봅니다.]
‘그러게. 1억까지 줄 줄 생각도 못 했는데.’
[레이블이 대박 났다니까요. 차기작 계약금까지 포함되어 있구요.]
‘안도 미키의 사심도 살짝 섞인 것 같고.’
[돈으로 주인님을 유혹하는 걸까요?]
‘돈으로 날 살 순 없어. 그럴 거면 진작 고은성에게 빨대 꼽고 기둥서방 노릇이나 했겠지. 고은성까지 갈게 뭐 있어? 아침에 본 린다만 해도 일반인 기준에서 엄청 부잔데.’
[주인님이 돈에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니긴 하죠.]
‘근데 막상 내 앞에 있으니까 심장 떨리긴 하네. 이 많은 돈을 어떻게 쓰지?’
[저번에 차를 구매한다지 않으셨나요?]
‘아, 맞다. 차.’
이동이 잦아지다 보니 매번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게 부담되었다.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타기엔 지난 삶에서 자가용을 다녀 영 불편했다.
"1억이면 외제 차도 가능하겠는데?"
차를 살 생각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 로시가 조언했다.
[너무 비싼 차는 눈에 띄지 않을까요?]
‘뭐가?’
[주인님 나이에 비해 말입니다. 주변 분들이 주인님 사정을 뻔히 아는데 갑자기 큰돈이 생긴 것에 대해 의심할 지도 모릅니다.]
하긴. 나쁘게 말하면 몸 팔아 번 돈이다. 대학생이 에로영화에 출연해 번 돈으로 차를 샀다고 하면, 주변에서 절대 좋게 보진 않을 것이다.
‘그래. 생각이 짧았네. 굳이 남의 눈에 띌 필욘 없지. 차는 쓸만한 국산 중고로 가야겠어. 내 나이엔 경차만 있어도 능력 있어 보일테니까.’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오늘 알아보시려고요?]
‘말 나온 김에 움직여야지. 현금 손에 쥐고 있어봐야 불안하기만 할뿐이고.’
나는 옷장 수납장을 열어 돈을 숨기고, 가방에 일부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20대 초반에 현찰 1억이 덜컥 생기니 갑자기 걸음걸이가 당당해졌다. 원래 자신감은 넘쳤지만, 외모가 주는 것과 돈이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크크크. 이제 난 부자다.’
< 628. 아이돌 vs 돌아이-2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