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아이돌 vs 돌아이-18- >
***
링링은 음악에 몸을 흔들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리듬에 몸을 맡길 땐 고통스러운 기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막 생리를 시작한 다음 날, 그녀의 부모는 전국을 유랑하는 기예단에 자신을 팔아넘겼다. 링링은 쫓겨나듯 집을 나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서커스를 배워야 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발에 물집이 날 정도로 연습해도 돌아오는 건 늘 욕설뿐. 고아 출신 아이,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들과 함께 비좁은 숙소에서 부대꼈다. 음식은 항상 부족했고, 자유시간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수년을 보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하염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차차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점점 두각을 드러냈다. 조숙해지는 몸매에 사내들이 군침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가슴이 봉긋해지고 엉덩이가 탄탄해질수록 단원들의 희롱도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쉬는 데 단장이 링링을 따로 불렀다.
공연을 본 손님 한 명이 자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었다. 단장은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오면, 일시에 한 달 월급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링링은 당연히 거부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남성과 정을 통한 적이 없었다. 그녀 나이 고작 16살이었다.
그러자 단장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네까짓 년이 지금까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링링은 그제야 자신이 처녀를 지켜 온 것이 단장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천만에. 최고의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인 채 남겨둔 것 뿐이었다. 처녀만 밝히는 호색한 고객을 위해서 말이다.
링링은 마침내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유랑 기예단의 무희이자, 동시에 고객들에게 몸을 파는 창녀로 길러졌다는 사실을.
그날 링링은 비곗살 두둑한 변태 중년인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처녀를 잃었다.
부자가 말했다.
-어린 것이 명기를 타고 났구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아 볼 테냐?
링링은 부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러나저러나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 할 운명이라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을 택하고 싶었다. 적어도 변태는 돈은 많아 보였으니까.
그렇게 링링은 16살에 어린 신부가 되었다.
그녀는 부자의 4번째 부인이었다. 1처 3첩 중 막내였다.
부자는 새로 들인 링링을 무척 좋아했다. 원체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데다, 뉴페이스인 그녀를 하루가 멀다하고 찾았다.
타고난 자질을 가진 그녀에게 과외 선생도 붙여 주었다.
바로 링링보다 먼저 들어온 첩실들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3년간 전문적으로 방중술을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엽색 행각을 즐기던 부자가 끝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비록 첩실일지언정 호사스러운 삶은 영위하던 링링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었다.
남편의 유산만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본부인은 첩실들에게 한 푼도 쥐어 주지 않고 쫓아냈다. 공안에 신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라며. 죽은 남편의 명예를 위해 관용을 베풀겠다는 듯이.
19살에 불쑥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된 링링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학교도 중퇴하고, 배운 것은 춤뿐이던 그녀가 선택할 진로는 뻔했다.
반반한 외모를 이용해 화류계로 진출하는 것.
그녀는 KTV라 불리는 유흥주점에 취직했다.
일을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그녀는 가게의 에이스로 등극했다.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녀를 독보적으로 빛나게 한 것은 바로 2차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링링과 하룻밤을 보낸 손님들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또 찾아왔다. 살면서 그렇게 맛깔나게 섹스하는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대부분은 포주의 배만 두둑이 불리는 불합리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손님 하나가 링링과 하룻밤 자고 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나이도 아직 어린데 이런 데서 썩기엔 너무 아깝다며. 혹시 한국에서 가수가 되어 볼 생각이 있느냐고. 자기가 책임지고 아이돌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링링은 또 한 번 인생의 기회가 찾아온 걸 느꼈다.
화류계의 삶이란 대부분 비참한 결말이다.
젊었을 때야 잘 나가지만, 나이가 들고 피부가 처지기 시작하면 지명 뺏기고 후배에게 등 떠밀려 외지 밀려 나가기 일 수. 호구 하나 물어 신분 세탁을 하지 않는 이상, 늙은 창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가난의 고통을 잘 아는 링링은 두 번 다시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링링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아이돌로 데뷔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자신을 스카우트한 기획사PD에게 주기적으로 성상납을 해야 하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혼자 왔어요?"
그녀의 상념을 깨고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말끔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셔츠를 걷어 손목에 찬 비싼 시계를 드러내 보이는 모습이, 전형적인 졸부처럼 보였다.
"왜 그러시죠?"
"같이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구요."
링링이 피식 웃자, 남자를 밀치며 누군가 끼어들었다.
"여기 일행 있습니다."
끼어든 사내는 우선이었다. 링링과 뜨거운 키스를 나눈 뒤 그녀에게 홀딱 빠져버린 순진한 대학생.
링링에게 수작을 건 남자는 우선의 매서운 눈매에 주춤주춤 물러났다. 우선은 체육과 학생답게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특히 군인처럼 바짝 깎은 헤어스타일 덕에 굉장히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실제로도 싸움을 잘하는 편이라 남자들 앞에서 기싸움에 밀
린적이 거의 없던 우선이었다.
"아, 일행이 있으셨구나."
꼬리를 말며 물러서는 사내를 보며 링링이 우선에게 물었다.
"목마른데 좀 쉴까요?"
"네, 링링씨."
링링은 우선과 테이블로 이동했다. 미소와 종현도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는지 자리엔 두 사람뿐이었다.
"저희밖에 없네요?"
"종현이는 사촌 동생이랑 커피 사러 간다고 나갔어요. 도훈이형이랑 다른 사람들은 아까부터 안 보이고요."
"그렇군요."
링링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맥주병을 들어 우선에게 건넸다.
"한 잔 마셔요."
"네. 감사합니다."
우선은 링링과 단둘이 남겨진 게 기쁜지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벌컥벌컥 원샷 했다. 그렇게 마시면 왠지 남자다워 보일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목구멍에 맥주를 들이붓는 우선을 향해 링링이 불쑥 물었다.
"우선씨는 저랑 자고 싶어요?"
"푸훕-!"
당황한 우선이 허공으로 맥주를 뿜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옷이 다 젖었지만 그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나랑 자고 싶냐고 물었어요."
"아, 아니 그게···."
우선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상대는 중국인이긴 하지만, 무려 아이돌 준비생. 그것도 어떤 남자라도 탐낼 만한 몸매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순진한 그는 링링의 직설 화법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전 그냥···."
"우선씬 많이 순진하시구나."
링링이 우선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웃을 때 드러난 치열이 매우 골라, 우선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방금 장난치신 거죠?"
"아뇨. 진심이었어요. 전 순진해 빠진 남자는 별로에요."
링링은 그 말을 끝으로 홱 돌아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우선은 눈만 끔뻑거린 채 감히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서, 설마 나 방금 까인 건가?’
우선이 멘붕에 빠져 있는데, 밖에 나갔다 온 미소와 종현이 자리로 돌아왔다. 종현은 얼이 빠져있는 우선에게 물었다.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
"우선이 형? 괜찮아요?"
종현이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우선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야. 아무일도."
"왜 혼자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모르겠어.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혀, 형?"
우선이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대로 링링 씨를 보내면 안 돼! 어쩌면 다신 못 볼지도 몰라.’
링링은 분명 순진한 사람이 싫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대처를 뒤늦게 후회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자고 싶다고 했어야해! 내가 미쳤지, 그게 나를 떠보는 건지도 모르고!’
우선은 클럽을 입장하려는 사람들을 밀치며 미친 사람처럼 뛰쳐 나갔다. 링링이 나간 지 얼마 안되었으니 분명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링링씨!"
밖으로 나온 우선이 링링의 이름을 호명하며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택시에 올라타는 링링의 모습이 보였다.
"링링씨 잠시만요!"
우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링링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선이 빠르게 달려가 출발하는 택시의 트렁크를 두들겼다.
탕탕-
"링링씨 잠깐만요! 차 좀 세워봐요! 링링씨!"
우선이 위험하게 달라붙자 택시 기사가 차를 멈췄다.
보조석의 차창이 내려가며 링링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우선에게 말했다.
"저 피곤해서 먼저 숙소로 가려고요."
"링링씨, 내가 잘못했어요."
"뭘요?"
"저, 하고 싶어요! 링링씨랑 자고 싶다고요!"
링링은 물끄러미 우선의 얼굴을 응시했다. 운전대를 잡은 택시 기사가 술 취한 우선을 또라이처럼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전 우선씨에게 흥미 없어요. 그럼 이만."
링링이 차창을 올리자 택시가 출발했다.
우선이 멀어져가는 택시를 보고 절규했다.
"이, 이것도 아니야? 대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건데!"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보, 보지 보여주고 가란 말이야···, 흑흑."
그는 너무 취했고, 인생 최악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링링을 태우고 간 택시 기사가 곁눈질로 링링의 몸매를 훔치며 입맛을 다셨다. 몸에 달라붙은 원피스만 보아도 숨이 넘어갈 것은 매력적인 처자였다.
"허허, 요새 클럽에 약쟁이들 그렇게 많다는데 약 취한 사람인가 보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순진해서 별로일 뿐."
"엉?"
"아저씨, 저 피곤해서 눈 좀 붙일게요."
"아, 네. 손님."
택시 기사는 대화를 차단하는 링링의 단호한 태도에 어깨를 으쓱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링링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요샌 영 땡기는 남자가 없네.’
그녀는 오늘 만난 남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보인 우선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무뚝뚝한 성격 같더니, 취하고 나선 제법 말이 많아졌다. 딱히 큰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고, 매너없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별로였다.
‘시시해. 분명 섹스도 어설프겠지.’
그녀는 어린 나이지만 남자들 수도 없이 겪었다. 그래서 행동거지만 봐도 대충 그 남자의 섹스 편력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본 우선은 풋내기였다.
미소의 사촌 오빠라는 종현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사촌인 미소가 억척스럽고, 한 성깔 하는 성격이라면 종현은 극도의 반대 성향이었다. 여자의 눈빛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숫기도 없었다.
‘숫총각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링링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내를 떠올렸다.
‘이도훈.’
링링은 도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은 자신 만큼이나 과거가 화려한 사람이라고.
고수는 고수를 보고 알아본다는 말처럼, 링링은 도훈의 눈빛을 읽는 순간 그가 굉장히 바람기 많은 사내임을 직감했다.
게다가 체형으로 보아 굉장한 정력가일 것이 생각했다.
‘하아···. 그라면 나의 불감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을까?’
방중술을 극성으로 익힌 링링은 이제 어지간한 남자와 섹스엔 감흥도 없었다. 특히 첫 관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연애를 못 하고 남자를 만나왔기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단 한번도 사랑을 나눈 기억이 없었다.
사랑 없는 섹스.
섹스만을 위한 관계.
링링은 점점 지쳐갔다.
주어진 운명에 발버둥 쳤을 뿐인데, 삶은 점점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난 언제쯤 행복해 질수 있을까?’
눈을 감은 링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
올라간 지 한참 되어도 우선이 돌아오지 않자, 미소와 종현은 클럽을 나와 우선을 찾아 나섰다. 어떻게 된 일인지 7명이 클럽을 왔는데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종현은 보도블록에 쭈그려 앉아있는 우선을 찾았다.
축 처진 어깨가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슬퍼보였다.
"형!"
종현이 우선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형, 취했어요? 여기 앉아있으면 위험해요."
"···집에 가야겠다."
"형? 뭔 일 있었어요?"
"아니야. 아무 일도. 그냥 내가 한심해서 그래."
"형···."
"다른 사람들한텐 미안하다고 전해줘. 참, 링링씨도 먼저 숙소로 갔어."
우선은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종현이 우선을 배웅하고 미소에게 돌아왔다.
"왜 저래?"
"몰라. 많이 취했나봐. 얼굴이 말이 아니야."
"그러게 적당히 마셨어야지."
"링링씨도 아까 숙소 갔다는데?"
"링링까지? 이 사람들 진짜 말도 없이!"
미소는 마침내 클럽에 사촌 오빠랑 둘만 남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클럽이란 곳이 워낙 사람이 북적대고 정신없는 곳이긴 하지만 간다는 말도 없고 뿔뿔이 흩어진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었다.
"하-. 진짜 너무하네. 같이 놀러와서 뭐하는 거야?"
"그러게. 도훈이 형은 또 어딜 간 거지?"
"일단 네가 도훈 오빠한테 전화해. 난 제희 언니한테 할 테니까."
"그래."
두 사람은 각기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짜증이 난 미소가 종현에게 말했다.
"오빠. 안 되겠어. 나도 숙소로 복귀해야 할까 봐. 다들 간 것 같아."
"그래. 시간도 늦었는데 들어가자."
"미안해.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재밌게 놀자고 불렀는데···. 클럽 온게 에러였던 것 같아."
"아니야. 오늘 즐거웠어. 군대가서 편지 쓸게."
"응, 오빠. 조심히 가."
"그래, 미소야. 너도."
마지막 남은 두 사람까지 헤어지자 모임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물론 클럽 위 호텔에선 여전히 끝나지 않는 세 남녀가 남아있었다.
< 625. 아이돌 vs 돌아이-1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