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2. 아이돌 vs 돌아이-15- >
***
한참 춤을 추던 제희는 땀을 식히기 위해 자리로 돌아 왔다가 미소가 혼자 있는걸 보고 물었다.
"어? 다들 어디 갔어?"
"누구요?"
"린다 언니랑 도훈 오빠."
"아, 빠에 가서 칵테일 마시고 있을걸요?"
"둘이서만?"
제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 그녀였다.
"네. 간 지 한참 됐는데?"
"그래? ···나도 칵테일이나 마시러 갈까?"
제희는 엄한 핑계를 대며 빠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늘 현실이 되었다.
‘뭐야? 없잖아?’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두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클럽 밖으로 사라진 느낌이었다.
‘설마···. 진짜 둘이서?’
그녀의 머릿속으로 불온한 상상이 펼쳐졌다.
온통 살 색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평소 린다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아는 제희는, 린다가 도훈을 유혹해 단둘이 나갔음을 확신했다.
"에이씨! 진짜 이것들이!"
아무리 동료라도 남자를 두고 양보하긴 싫었다. 특히 린다가 평소에도 몰래 남자를 만나 즐기는 것을 알고 모른 체하던 제희로서는 배신감마저 드는 순간이었다.
남자가 한둘도 아니고, 여러 명을 돌려 만나는 것으로 아는데 그 와중에 자신이 찍은 도훈을 몰래 빼돌린 건 해도 너무하다고 여겼다.
‘내가 이대로 가만있을 줄 알고?’
제희가 바삐 클럽을 빠져나오더니 린다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계속 가는데도 린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쭈? 내 전활 씹는다 이거지?’
불쑥 오기가 치밀었다. 그녀는 받을 때까지 걸겠다는 각오로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5번 넘게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겨우 린다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맞은편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경쟁에서 승리한 승자의 여유로운 음색이었다.
"Speaking, im Linda."
린다는 전화를 받을 때 습관처럼 영어로 대답했다. 심사가 뒤틀린 제희는 그것마저 꼴불견처럼 느껴졌다.
‘스피킹은 지랄, 확 아갈머리를 찢어 버릴라! 어디서 양갈보 같은 년이!’
하지만 제희는 아무리 흥분한 상태여도 결코 내색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싱어송라이터로 잠시 방송에 출연했을 땐, 누구도 그녀가 클럽 죽순임을 의심하지 못했다. 그만큼 내숭 100단이었고, 절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언니? 한참 걸었는데···."
제희는 린다의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절대 클럽 주변은 아니었다.
"전화했었니? 미안, 몰랐네."
‘모르긴, 이 불여시 같은 년이. 일부러 안 받았겠지.’
"어딘데요? 혹시 밖에 나가셨어요?"
"어,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왔어."
"숙소를요?"
"아니 숙소는 아니고···."
찹!!
그때 뭔가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탱탱한 살가죽을 뭔가로 내리치는 듯한 사운드였다.
‘씨발, 뭐지? 방금 그건 뭔데?’
"숙소가 아니면 어딘데요?"
"어. 그냥 친구 좀··· 아, 아앙!"
‘아앙? 아아앙? 이 씨발년이 설마 지금 도훈이랑 떡치면서 전화 받는 거 아냐?’
또다시 나체로 뒤엉킨 두 남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큼직한 대물을 달랑거리는 도훈이 린다의 엉덩이를 후려치는 장면이었다.
"언니 혹시 누구랑 같이 있어요?"
"아, 아니. 혼자야. 근데 왜? 무슨 일인데?"
"아뇨. 클럽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걱정되서요."
"어머, 웬일이니? 네가 내 걱정을 다하고? 푸훕-. 걱정마. 내가 애도 아닌데."
"아니, 도훈 오빠도 안 보이더라고요."
"도훈이?"
"네."
‘어서 불어 쌍년아! 같이 있는 거 다 아니까.’
"도훈일 왜 나한테 물어?"
"같이 나간 줄 알았죠. 미소가 둘이 빠로 갔다고 해서요."
"아아, 칵테일 한잔 하고···. 흡! 그, 그러고 헤어졌어. 난 계속 거기 있는··· 아앙, 하지마!"
"언니!"
린다는 이제 대놓고 남자와 있는 티를 내고 있었다. 끈적이는 비음과 이따금 터지는 찰진 타격음은 명백한 섹스의 증거였다. 사태가 이쯤 이르자 제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언니, 지금 도훈 오빠랑 같이 있죠?"
"왜 그렇게 생각해?"
"그거야···."
‘그거야 니가 몸 좋은 남자만 보면 환장하는 양갈보년이니까!’
···라고 퍼붓고 싶었지만, 앞날을 생각해 자제하는 제희였다.
데뷔를 며칠 앞둔 지금, 처음 보는 남자를 가지고 팀원끼리 싸우는 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불화의 씨앗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나았다.
그때 린다가 누구와 얘기하는지, 수화기 너머로 조그맣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제희는 겨우 스며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의식을 집중했다.
"아니 그건···. 아무리 그래도. 아, 아앙!"
‘뭐야? 대체 뭔 상황인데?’
"아니. 나도 경험이 없는 건 아니야. 그래도 이건 생각도 못 해봤는데···."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설마 싸우는 건가?’
"···언니?"
궁금함을 못 참고 제희가 입을 열었다.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수화기에서 린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제희야. 너 지금 혼자 있니?"
"지금요?"
"어. 옆에 누구랑 같이 있는 거야?"
"통화하려고 잠깐 밖으로 나왔어요. 클럽 앞 도로에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린다가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하자 제희도 살짝 긴장했다.
"네."
"클럽 위에 건물 있잖아. 보여?"
제희가 핸드폰을 붙잡은 체 고개를 쳐들자 커다란 10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는 클럽, 1층은 아케이드 샵. 2층부터 4층까지는 식당 및 상가로 쓰이는 빌딩이었다. 그리고 5층부터 10층까지는 흔히 부띠크 호텔이라 불리는 고급 호텔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 설마? 언니가 저기에?’
"나 사실 거기 있거든. 1층 로비 통해 올라와 볼래?"
꿀꺽-.
"지금요?"
"응. 바로. 다른 애들한테는 얘기하지 말고."
제희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혼란을 느꼈다.
‘이 미친년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설마 도훈 오빠랑 뒹귈면서 나를 부르는 거야?’
"언니 혹시···."
제희가 입을 여는데 린다가 중간에 말을 잘랐다.
"도훈이가 너도 보고 싶대."
제희는 ‘도훈이가’라는 친근한 호칭에 갑자기 열이 받쳤다. 순간적으로 배신감, 당혹감, 그리고 질투심이 부아악 솟구쳤다. 게다가 ‘너도’ 라니. 단 둘이 만나도 모자랄 판에, 꼽사리처럼 부르는 호칭이 너무나 아니꼬았다.
"어때? 생각있어?"
"······."
어지간한 일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제희였지만, 그 순간 만큼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린다는 쓰리썸을 제안하는 중이었다.
‘미친년! 아니 둘 다 미쳤어. 지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제희도 순진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상도덕이란 게 있었다. 한 남자를 둘이서 같이 나누는 것은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위였다.
‘린다가 프리한 스타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또라이잖아?’
린다는 팀 내에서도 유독 튀는 스타일이었다.
깐깐한 로드매니저 앞이건, 심지어 소속사 대표 앞에서도 할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았다. 다들 그녀가 금수저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룹이 망해도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눈치 볼 필요 없이 멋대로 한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특히 린다는 사생활을 침범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누가 뭐라고 하건 그녀는 원할 때 남자를 만나야 했다.
그런 일로 마찰이 잦아지자 그녀는 몇 번 팀을 이탈한 적도 있었다.
다 필요 없다고.
하고 싶은 데로 살 거라고.
자를 거면 자르라면서.
그러나 린다는 잘리지 않았다.
아니 자를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돈 많은 기업체 사장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사생활이 엉망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랩 실력 만큼은 진짜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도 그만한 실력을 가진 새 멤버를 영입하긴 쉽지 않았다. 팀내 유일한 랩퍼가 빠지면 새롭게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대표는 린다에 한해서만큼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하는 선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단, 절대 팀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조건이었다. 멋대로 하는 건 좋지만 개인의 사생활로 그룹을 저해하는 일은 없도록 신신당부했다.
린다도 그 조건만은 수용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남자를 몰래 만나면서도 지금껏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암묵적인 규칙은 지금까지 잘 지켜져 왔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제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걸그룹 멤버끼리 한 남자를 두고 기둥자매가 된다?
이건 막장 중에서도 막장이었다.
린다야 본래부터 그런 여자라고 쳐도, 자기까지 그럴 순 없었다.
미소만큼은 아니지만 제희 역시 이번 엘범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 중 하나였다. 숱한 도전에도 솔로 데뷔를 실패하고 겨우 얻은 기회. 나중에 솔로로 성공하기 위해선 지금의 발판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번 일이 불미스럽게 엎어진다면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아닌 건 아닌 거야.’
제희가 거절하려고 입을 열려던 차.
핸드폰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앙···. 지금 제희랑 통화 중이잖아. 갑자기 그렇게··· 아앙!"
‘이, 이것들이 진짜!’
찌꺽찌꺽-
질척거리는 사운드.
거친 숨소리.
소리만 듣고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도발에 제희의 마지막 이성이 툭- 끊어지고 말았다. 끓어오르는 질투가 제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감정은 이성에 선행한다.
격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앙, 제, 제희야. 더 통화 못 하겠어. 1004호 스위트 룸으로 와··· 아, 아앙!"
뚝-
"여, 여보세요?"
제희가 급히 말을 걸었지만 이미 신호음이 끊긴 후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불 켜진 방 중 하나.
저곳 어딘가에서 도훈과 린다가 헐벗은 채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불유쾌한 상상이 제희를 눈 멀게 했다.
‘이것들이 지금 나를 도발했다 이거지? 내가 오라면 못 갈 줄 알고?’
제희가 성큼성큼 걸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나 1층에선 10층 버튼을 눌러도 활성화되지 않았다.
키 카드로 승인을 받아야 눌리는 시스템이었다.
유일하게 눌리는 5층에 도착하자 호텔 카운터가 바로 앞에 보였다. 앞에선 벨보이가 용무를 물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10층 스위트룸을 가려고요."
"예약이 다 차 불가능합니다, 손님."
"뭐라고요?"
당연하지만 혼숙은 불가였다. 여자끼리만 있다면 동행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린다는 도훈과 함께 있었다. 오라고 하더니 갈 수도 없는 상황 앞에 제희가 당황했다.
그때 카운터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던 직원이 황급히 벨보이를 호출했다.
"잠깐, 그 손님분 1003호 안내해."
"네? 1003호로요?"
"그래. 방금 막 예약이 됐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벨보이가 깍듯이 사과하더니 10층 버튼을 눌러주었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제희가 10층으로 올랐다.
‘뭐지? 나한테는 1004호로 오라더니, 1003호가 예약이 되어 있다고? 혹시 내선으로 방금 방을 잡은 건가?’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제희가 안내도를 보고 룸을 찾았다.
10층 전체가 스위트룸 객실이었으므로 방 개수가 다른 층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002호··· 1003호. 여기구나.’
1003호 객실을 찾은 제희가 뒤를 돌자 1004호가 보였다.
린다와 도훈이 묶고 있다는 방이었다.
방문을 보자 제희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호텔로 들어올 때만 해도 분노와 질투심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막상 남녀가 헐벗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니 긴장으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문을 열고 나면 본인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1004호 룸 앞에 선 제희는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의 발목을 옭아맸다.
‘내가 미쳤지. 앞으로 다른 멤버들 얼굴 어떻게 보려고···.’
고민은 길었다.
제희는 자신이 이토록 용기없는 인간이란데 실망하면서, 동시에 팀을 위한다는 명분이 그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냐. 이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지금 타락하느냐 마느냐 갈림길에 서 있어.’
섹스는 남녀 둘이 하는 것이다.
제희가 이제껏 지켜온 규칙이었다.
그것이 한 번 무너지면, 앞으로 셋이 하던 넷이 하던 아니면 남자가 아닌 여자랑 하던, 혹은 사람이 아닌 다른 것과 하던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될 것 같았다. 그건 결코 그녀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래. 관두자. 남자 하나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꼴이야 이게?’
제희가 돌아서려던 순간.
1004호의 문이 벌컥 열였다.
제희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열린 문틈으로 가운을 걸친 도훈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뭐야? 도착했으면서 왜 거기 멀뚱히 서 있어요?"
"네, 네?"
긴장으로 제희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들어와요. 같이 술 한 잔 해요."
도훈의 손엔 와인잔이 들려있었다.
살짝 취기가 도는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들어오라니까요? 술 한잔 같이 하자고 불렀어요."
도훈이 제희의 손을 이끌었다.
그의 두툼한 손은 강인하고 따뜻했다.
방금 전까지 돌아갈 결심을 하던 제희의 굳은 마음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 그래 술 한잔하는 거야 뭐···. 다른 방도 하나 더 있으니까.’
제희가 스스로를 세뇌하며 룸 안으로 들어갔다.
< 622. 아이돌 vs 돌아이-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