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8. 아이돌 vs 돌아이-11- >
***
"자정 넘었으니, 클럽가기 딱 좋은 시간 아닌가요?"
"클럽? 나이트 말이야?"
아는 클럽이라곤 나이트밖에 없던 내가 물었다.
"웬 나이트? 그냥 클럽요."
"아···."
뜻밖에 제안.
대체로 여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나를 비롯한 남자들은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춤에 자신이 있는 링링은 술 먹고 게임 하는 것보다 신나게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클럽 죽순이 출신인 제희가 링링을 거들었다.
"오, 클럽 좋네. 어차피 2차로 옮길 때도 됐고 말이야."
사촌 오빠인 종현의 상태를 걱정하던 미소 역시 차라리 클럽이 낫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이제 술은 그만 먹고 춤이나 추러 가요."
반대 의견도 있었다.
왕게임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던 린다였다.
"아니, 왜 갑자기 종목을 바꿔? 그냥 하던 거나 하지."
하지만 독재를 펼쳤던 그녀에겐 지지자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언니. 왕게임에선 왕 마음대로 아닌가요?"
"맞아요. 규칙은 규칙이죠."
그녀가 내세운 절대 왕권의 힘이 부메랑처럼 다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나 역시 장소가 바뀌는 손익을 빠르게 저울질했다.
‘그래. 어차피 노래방은 탐색전에 불과해. 계속 게임을 이어간다고 별다른 수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차라리 장소를 옮기면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생기겠지.’
노래방은 지나치게 공개된 공간이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이상, 일정 수위 이상 나가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클럽에는 불특정 다수가 모여든다.
오늘 같은 불금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일 것이다.
시선의 사각지대가 생기고,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가능해진다.
"그래. 그것도 재밌겠다, 클럽."
"형, 춤 잘 춰요?"
우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몸치에 박치가 분명한 개코는 클럽이 몹시 떨떠름한 모양이다.
"아니. 그냥 가보는 거지. 꼭 잘 출 필요가 있나?"
"가면 술 계속 안 마셔도 되는 거죠?"
종현의 물음은 제희가 받았다.
"클럽에선 술 안 마셔도 누가 뭐라고 안 해요."
"아···, 그럼 저도 클럽에 한 표."
"자, 그럼 다들 원하는 분위기니 이동하실까요?"
다수결로 결정된 만큼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린다가 입술이 삐죽 나온 채 벗어두었던 구두를 구겨 신었다. 팬티까지 못 벗은 게 그리도 서운했을까? 걱정 마라. 니 빤스는 오늘 내 손으로 벗겨줄 테니까.
화장실을 들렀다 나오자 다들 인도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모두 일곱 명이니 나눠서 이동해요. 저희끼리 택시 타고 먼저 출발할 테니 남자분들도 청담동 엘리스 앞으로 와주세요."
"그래. 가서 보자."
"네. 입구에서 기다릴게요!"
여자 넷이 먼저 도착한 택시를 잡아 출발했다.
셋만 남게 된 우린 두 번째 택시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우선은 여전히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도훈이 형 클럽 가보셨어요? 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나도 처음이야."
"엇? 정말요?"
"응. 군대 있을 때 선임들 따라 나이트는 몇 번 갔는데, 클럽은 한 번도 못 가봤어."
"가면 막 춤추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 진짜 춤에는 자신 없는데···."
"그냥 대충 따라 하면 되겠지. 어, 택시 왔다."
마침 도착한 택시를 타고 2차 장소로 향했다. 보조석에 앉아 있으니, 뒷좌석에 앉은 우선과 종현의 대화가 들려왔다.
"링링씨가 춤추는 걸 좋아 하나 봐."
"형. 그럼 그거 한 번 해보세요."
"뭐?"
"부비부비요."
"그게 뭔데?"
"그 왜 남자가 여자 뒤에 착 달라붙어서···."
"헉! 쪽팔리게 그런 걸 어떻게 해?"
"에이, 전혀 신경 안 쓸 것 같던데요? 게다가 형이랑 뽀뽀도 했잖아요."
"아니 그건 게임이었고···."
룸미러로 힐끔 보는데, 우선은 상상만으로 좋은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선이 링링한테 관심이 있나 본데?’
[주인님의 경쟁자로군요.]
‘경쟁자는 무슨. 링링이 부비부비 정도로 꿈쩍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냐? 좆을 꺼내서 뒤에 비비고 있어도 코웃음이나 안 치면 다행일걸?’
[하긴. 그녀가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죠.]
‘종현인 누구한테 꽂혔는지 궁금한데? 사촌 동생이니까 미소는 아닐 테고. 링링도 아니면 나머지 둘 중 하나겠군.’
[왜요? 알면 양보하시려고요?]
‘양보는 무슨. 너 그 말 몰라? 나무는 멈추려 하나 바람이 가만두지 않고, 도훈은 쉬고 싶으나 여자들이 물고 빨며 놔주지 않는다면서.’
[허어. 원본은 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아닙니까? 본래 뒷 구절은 자식은 효도하려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겠죠.]
‘아무튼 내가 유혹하는 아니라, 여자가 작정하고 꼬시려드니 양보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소리야.’
[하여간 주인님도 참으로 욕심쟁이십니다.]
‘낸 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내기의 신과 내기가 걸렸으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사실 두 사람이 누굴 노리든 아무 상관없었다.
어차피 마지막엔 내가 다 먹을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종현이 나에게 물었다.
"형 1차 계산은 린다 씨가 했으니, 2차는 저희가 사야겠죠?"
린다는 양주값을 자기가 내겠다면서 노래방을 카드로 긁었다.
연습생 주제에 월급을 받진 않을 거고, 애초에 부잣집 딸래미 같다. 하긴 유학을 그리 오래 한 걸 보면 집은 좀 살겠지.
"그럴까?"
"양주 때문에 꽤 나왔을 텐데···. 린다 누나가 돈이 많나 봐요."
종현이 자꾸 린다를 언급하는 게 수상해 한 번 찔러 보았다.
"왜? 돈 많은 여자가 이상형이야?"
"아, 아뇨. 꼭 그렇다기보단···. 멋있잖아요. 전 여자가 먼저 계산하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요."
"대학생들하고 같진 않겠지. 그래도 나름 직장인들인데."
"그러니까요. 왠지 저희가 꿀리는 거 같아요."
"그럼 2차는 우리가 내는 걸로 하자. 미소한테 연락해서 클럽은 우리가 쏘겠다고 해."
"네, 형."
종현이 깨톡을 보내면서 나의 눈치를 살폈다.
"형 근데···. 미소 괜찮으세요?"
"미소? 예쁘고 귀엽더라. 왜?"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물음을 듣자 퍼뜩 그녀의 과거가 떠올랐다.
‘아차. 종현이는 사촌이니까 미소가 미혼모란 사실을 알고 있었겠구나?’
[그렇군요. 아무리 비밀로 숨겨도 애를 낳은 것을 감추긴 어려웠을 테니까요.]
"저··· 미소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아마도 종현은 나에게 이실직고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이미 아는 사실이기도 하고, 굳이 상대의 불유쾌한 과거를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근데 난 개인적으로 미소보단 제희씨가 내 취향이야."
"아···. 그래요?"
"노랠 그렇게 잘 부르는 여자는 실제로 처음 봤어."
미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자, 종현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대충 보니 우선도 알고 있는 내용인지 종현의 손을 잡으며 만류시키는 분위기였다.
‘둘이서 화장실 갔을 때 얘기했나 보군.’
[그런가 봅니다. 종현군 입장에선 과거가 있는 사촌 동생과 체육과 선후배들이 엮이는 것이 부담스러웠겠죠.]
‘그래. 어떤 마음인진 알겠어. 아무튼, 모르는 척 넘어가주지.’
"도훈이 형은 그럼 제희 누나에게 관심 있어요?"
"관심까진 아니고 그냥 내 스타일이란 거지."
"오···. 형 잘하면 아이돌 여친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밀어 드릴게요."
"됐어, 인마. 오버하지 말고.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뭔 여친이냐?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거지."
이것으로 서로 겹치는 사람 없이 노선이 갈렸다.
우선은 링링을, 종현은 린다를, 그리고 나는 제희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의도했다. 안타깝지만 미소는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것으로.
물론 이것은 남자들의 생각일 뿐, 여자들 입장은 전혀 달랐다.
정보창의 호감도를 근거로 할 때 린다와 제희는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링링은 그럭저럭. 그리고 미소는 전혀 흥미가 없다.
그렇다면 공략 순서도 얼추 정해졌다.
오늘 밤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겠군.
클럽에 도착하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린다가 남자들에게 팔찌를 하나씩 건넸다.
"받아."
"이게 뭐예요?"
"입장권. 들어갈 때 가드에게 보이면 돼. 참고로 바(Bar)에 제시하면 음료 하나까진 무료니까 마시고 싶은 거 주문하고."
"아··· 여긴 저희가."
우선이 난처해 하자 린다가 쿨하게 웃었다.
"뭐래? 까짓거 얼마나 한다고? 누나 돈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얼른 들어가자."
린다의 쿨 한 모습에 종현이 감격했다. 물론 린다가 나를 의식해 말했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훗, 나 이런 여자라고.
라는 시선으로 부를 과시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하긴, 20대 나이에 돈을 마음껏 쓰는 모습이 매력으로 보일 순 있겠다. 나에겐 별 의미 없지만.
‘그나저나 린다는 노브라 상태로 입장할 셈인가?’
[과감하네요. 근데 다른 여자들 복장도 심상치 않은데요?]
로시 말대로였다.
불금에 자정이 조금 넘은 클럽 입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특히 강남 유명 클럽이라 그런지 도로변에 값비싼 스포츠카며, 명품 백을 걸친 여자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핫팬츠에 나시티는 기본.
몸을 가린 면적이 수건 한 장을 안 넘는 여자들도 많았다.
나이트에 갈 때보다 연령대가 5살 이상은 어려진 느낌이었고, 복장은 훨씬 과감했다.
‘우아. 어리고 예쁜 여자들은 다 여기 모아놓은 것 같네.’
대기열도 엄청 길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데, 일정 숫자 이상은 입장을 거부하는 듯했다.
선수에 선 린다가 별도로 선이 그어진 곳으로 가더니 팔찌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찬 것은 VIP 전용 입장권이라 가격도 배는 비쌌고,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종현이 사촌인 미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누나 무리하는 거 아니지?"
"린다 누나 부자야. 신경 쓰지 마."
"아···."
"지금은 숙소 생활하느라 뚜벅인데, 원래 외제차도 몰고 다녔어."
"와, 진짜?"
"응. 이 바닥에서도 금수저로 유명해. 힙합하는 사람답게 머니 스웩도 장난 아니지."
"아···."
미소의 말에 살짝 가시가 돋쳐있었다.
아까부터 린다와 자주 부딪히는 느낌인데, 생계형 아이돌인 그녀가 린다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다.
‘흠. 미소를 꼬시기 위해선 린다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최대한 숨겨야겠군. 둘이 아주 앙숙이야.’
[쉽지가 않군요. 여자들 사이에 감정까지 고려하셔야 하니.]
어두운 통로를 지나 클럽으로 입장하자 강렬한 우퍼의 진동이 심장을 강타했다. 쿵쿵- 하는 비트가 클럽의 초입부터 열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단 자리부터 잡아요."
클럽 죽순이답게 제희가 선두에 서서 구석 스텐드 테이블로 안내했다. 의자 하나 없이 가슴 높이의 원형 테이블 하나만 설치된 곳으로 이곳이 우리의 베이스 캠프 역할이었다.
음악에 묻혀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가운데 린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가서 술 좀 ··· 가져 올···게!"
뭐라는 지 몰라도 술을 더 주문해 오겠다는 말로 들렸다.
린다를 따라 종현과 미소가 함께 빠로 이동하는 사이 제희가 나에게 물었다.
"오빠 ··· 추 좀···!"
"뭐라고? 안 들려!"
제법 변두리 자리였는데도, 커다란 스피커에 묻혀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어두운 조명 덕에 얼굴도 제대로 분간이 안 돼 가끔 터지는 싸이키에 식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제희가 답답했는지 내 목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대고 다시 소리쳤다.
"오빠, 춤추실 거냐고요!"
"아, 춤?"
목소리가 안 들리다 보니 지나치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특히 제희는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근접하며 특유의 큰 가슴을 내 팔에 부딪히고 있었다.
물컹-
‘어쭈, 이것 봐라?’
"네, 같이 춤추러 가요!"
제희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갑자기 팔짱을 훅 껴왔다.
그 사이 우선은 링링에게 작업을 거는지 열심히 옆에서 귓속말 중이었다.
‘이건 뭐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구만.’
지난번 나이트클럽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땐 필드에 있기보다 주로 룸에서 작업 했기에 목소리가 안 들리거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클럽은 너무 혼잡스럽고 정신없었다. 스테이지 위는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고, 조금만 인파에 섞여도 누가 어디있는 지도 분간을 못 할 지경이었다.
나는 제희에게 끌려가다시피 무대 위로 올라갔다.
다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우아, 여기서 대체 어떻게 작업을 한담?’
생전 처음 겪는 환경의 변화에 난감해하는 데, 한 뼘도 안 되는 조그만 공간에서 제희가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추어 팔과 골반을 흔들어 대는 모습이 매우 섹시 했다.
‘와, 이렇게 보니까 제희도 엄청 나구나.’
청순한 얼굴에 언 벨런스한 풍만한 가슴. 쭉쭉 뻗은 다리와 긴 머리를 휘날리며 흔들어 대는 모습은, 주변의 시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나는 병신처럼 팔만 좌우로 흔들어 대며 아저씨같이 흐느적 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제희가 한 번 더 나를 껴안더니 귓속말을 했다.
"오빠, 자꾸 아재처럼 그러고 있을 거예요?"
‘아, 아재라고!!’
[주인님. 이러다 있는 호감도마저 까먹을 판입니다.]
‘젠장, 내가 무슨 춤을 춰봤어야지!’
[주인님도 할 수 있습니다.]
‘뭔 소리야?’
[재능약탈자로 나연 양의 현대무용 적성을 빼앗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인님의 몸엔 춤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엥? 진짜?’
나도 몰랐던 나의 적성을 발견했다.
< 618. 아이돌 vs 돌아이-1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