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 아이돌 vs 돌아이-6- >
돌아보니 큐티의 센터 미소였다.
"너 담배도 피우니?"
"네. 피우면 안 되나요?"
생각보다 당돌하게 받아친다.
하긴, 안될 거야 없지.
다만 어여쁜 계집애가 담배를 피운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꼰대 같은 생각이 들었을 뿐.
"아, 아니 그래도 명색이 가수잖아."
"아이돌이거든요?"
"아이돌은 가수 아닌가?"
"아닌데?"
미소가 담배를 입에 문 채 교묘히 반말을 섞었다. 필터를 빠는 솜씨를 보아하니 한두 해 핀 솜씨가 아니다. 골초의 향기가 난다.
"솔직히 아이돌은 상품이죠."
"상품이라고?"
"아이돌, 특히 걸그룹은 셀링 포지션이 정확히 나뉘어 있어요. 링링은 나중에 중국시장 공략을 위한 보험, 린다는 영어권 투어와 랩을 전담. 그리고 제희 언니는 노래를 담당."
"어쨌든 노래는 다들 부르잖아. 앨범도 내고."
"우리 걸그룹 맴버가 모두 여덟이에요. 함께 부르는 후크 빼고, 실제 솔로 부분이 평균 몇 촌지 아세요?"
"글쎄?"
"8초에요. 한 곡당 고작 8초씩 노래한다고요. 그나마도 노래가 되는 멤버에게 킬링파트를 몰아주고 나머진 대충 기계로 다듬으면 끝이고요. 정말 아이돌이 가수라고 생각하세요?"
"음···."
요컨대 자긴 아이돌일 뿐 가수가 아니니 목 관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비겁한 자기 합리화지만, 묘하게 현실적인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스스로를 상품으로 인정하는 아이돌이라니.
"그럼 넌 뭐야?"
"네?"
"아니 다른 사람 포지션은 말해줬으면서 정작 너는 말 안 했잖아."
"후후-. 당연 비주얼이죠. 보면 몰라요?"
"비주얼이라, 음."
왠지 얄밉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다.
"비주얼에도 여러 타입이 있어요. 저희 팀은 이름부터가 ‘큐티’잖아요. 깜찍, 발랄, 귀여움을 컨셉으로 잡고 있죠. 저는 거기서 센터를 맡고 있고요. 소시에 윤아언니라던가, 미쓰에이의 수지같은 역할이랄까?"
자뻑이 너무 심한데.
스스로를 유명 아이돌과 비교하는 미소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예뻐도 예쁜 척을 안 해야 더 예뻐보이는 법인데, 스스로 예쁘다고 발광을 해대니 괜히 나도 모르게 심사가 뒤틀렸다.
대체 이 아이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근데 넌 어쩌다 아이돌이 됐니?"
"꿈이었으니까요."
"꿈?"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주목받는 게 좋았어요. 인기도 많았음 좋겠고, 그러자니 연예인만 한 게 없더라고요. 솔직히 가수보단 연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트레이닝을 받아보니 그쪽엔 영 재능이 없더라고요."
"아···."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을 선택한 거예요. 일단은 아이돌로 데뷔. 나중에 경력을 쌓으면 연기 쪽으로 진출. 뭐 사례는 많잖아요?"
"꿈이 상당히 확고한 편이구나."
이 친구는 굉장히 목표가 뚜렷했다.
마치 과거의 이정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때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이정우로 살 때는 맹목적으로 공부만 했다.
운 좋게 타고난 두뇌.
공부를 향한 집념과 승부욕.
할 줄 아는 게 공부뿐이었고, 공부만 죽어라 해서 이른 나이에 성공했다.
나는 당시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만 먹었으면 판사가 될 수도 의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당시엔 세상이 너무 쉬워 보였다.
그리고 불혹을 넘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라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 결과적으로 불우한 인생이었다.
마침 그 생각이 떠오르자 미소란 아이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맹목적인 것은 가끔 주변을 놓치게 만든다.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목표를 알기 전까진 한 걸음도 나아간 게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었는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음, 미소야. 열정도 좋지만, 가끔···."
"뭐야? 꼰대 같이 잔소리 하려고요? 하여간 군대만 다녀오면 우리나라 남자들은 다 아재 된다니까? 종현 오빠도 그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큭!
꼰대라니! 나보고 꼰대라니!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하긴 처음 본 사이에 주제넘게 남의 인생에 왈가왈부하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맞는 말도 타이밍이 부적절하면 처맞는 말이 된다.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질투 나서 그렇죠?"
"뭐?"
"제가 어린 나이에 성공하니까 부러운 거잖아요. 다들 그러더라고요.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면 매번 듣는 소리가, 눈 잘 된 것 같다느니, 코 예쁘게 됐다느니. 흥, 지들이 뭐 내가 성형하는 데 보태준 거 있나?"
뭐 성형? 그럼 저 얼굴이 고친 얼굴이었단 말이야?
뻥 진 표정을 짓자 미소가 담뱃재를 툭툭 털며 말했다.
"뭘 새삼스레 놀라고 그래요? 아이돌쯤 하려면 당연히 한두 군데 고치는 건 일도 아닌데. 암튼, 담배 잘 피웠어요. 종현 오빠에겐 저 담배 피우는 거 이르지 마요. 잔소리 겁나 해댈꺼 뻔하니까."
"으, 응.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미소는 쌩하니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남은 담배를 마저 피우며 생각했다.
‘거참. 보이는 거랑 영 딴판인 성격이네. 살짝 얄미운 캐릭터였잖아?’
[주인님도 겉보기완 전혀 다르긴 합니다만. 대체로 그런 사람들을 표리부동하다고 하죠.]
‘뭐 인마? 뼈 아프게 때릴거야?’
[저야 늘 주인님 편입니다.]
‘암튼, 살짝 정떨어지려고 그런다. 어린애가 영 어린애다운 맛이 없으니. 스무살 새내기가 아니라 닳고 닳은 여자같아.’
[성형 미인이라 싫으신 건 아니고요?]
‘물론 그것도 있고. 성형해서 저 정도면 원판은 정음이 만도 못 한 거 아냐?’
[그래도 고쳐서 저 정도면 원판도 어느 정도는 받쳐줬겠죠.]
‘그거야 당연한 소리고. 암튼 생긴 것에 비해 그닥 마음에 안 드는 성격이군.’
[굳이 미소 양을 공략할 필욘 없습니다. 아이돌이면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요.]
‘그럼 린다 먹고 후딱 치울까? 걔는 잘하면 오늘 밤 가능해 보이던데.’
[주인님. 이들이 아직 데뷔 전이라는 걸 유념하십시오. 오늘의 공략은 실질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업적에 기록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지. 일단 한 번 먹고 나면, 데뷔하고 나서도 먹기 쉬울 거 아냐? 나중에 데뷔한 뒤에 콧대만 더 높아지고 먹기가 더 힘들테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요?]
‘요컨대 입도선매 같은 거지.’
[오호. 역시 전략가.]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니 춤판이 벌어져 있었다. 링링과 린다가 흥겨운 댄스 음악에 맞춰 안무를 선보이는데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오, 역시 아이돌이라 몸놀림이 다르네.’
특히 링링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그냥 보면 막 추는 것 같은데도, 동작 하나하나에 포인트를 줘 춤을 몹시 잘 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런 타입이 의외로 침대에서 격렬하던데.
흥겨운 무대가 끝나자 자리로 돌아앉는데 우선이 물었다.
"어? 아까 성수형이랑 같이 나가지 않았어요?"
"형 집에 갔다."
"네?"
"벌써요?"
"어. 갑자기 취한다면서 택시 타고 가버리는데 말릴 수가 없더라고."
"아! 주사!"
"주사라뇨?"
제희가 물었다.
"성수 형이 취하면 집에 가는 게 술버릇이라 했거든요. 아까 좀 술이 과한 것 같더니만."
"아아! 그럼 말도 없이 가버린 거예요?"
"저한테 재밌게 놀라면서 인사는 하고 갔어요. 형님이 술버릇이 좀 독특한 편이라···."
"저도 특이한데."
한바탕 춤을 추느라 땀을 흘린 린다가 한 모금 목을 축이며 말했다.
"린다씬 주사가 뭔데요?"
"저는 음···. 근데 이거 말해도 되려나?"
"말해봐요."
"궁금해요."
"하나씩 벗어요."
"네?"
"어, 언니!"
"왜? 다들 성인 아냐? 이런 말도 못 하니?"
"죄송해요. 언니가 미국에 오래 살아서 좀 자유분방한 편이라."
그러고 보니 린다는 처음 들어올 때 입고 온 청자켓을 벗고 있었다. 춤추는 데 불편해서 벗은 줄 알았더니, 저게 술버릇이었다니.
"그래도 여름이라 외투가 한 벌뿐이라 다행이네."
우선이 생각 없이 뱉은 말에 린다가 피식 웃었다.
"왜? 이제 벗을 게 없을까 봐서?"
"언니! 진짜!"
"어디 한 번 취할 때까지 마셔볼까?"
린다가 양주를 들어 우선의 잔에 스트레이트로 따랐다.
가만, 양주가 어디서 났지?
"어? 웬 양주?"
"아까 린다 누나가 시켰어요. 술 떨어졌다면서."
내가 잠깐 나간 사이 린다가 양주를 주문했었나 보다.
그나저나 노래방에서 양주라니. 대체 뭐 하는 노래방이지?
"술값은 내가 낼 거니까 돈 걱정은 마시고, 최자 오빠."
"아,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린다는 노골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4:4의 균형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고 있었다.
술에 취한 아이돌들은 너무나 자유분방해졌고, 살짝 우리를 내려보는 느낌이었다. 특히 린다가 나를 보는 느낌은 호스트빠에 놀러 온 손님이 호빠 선수를 보고 짓는 표정과 똑같았다.
‘뭐야? 우린 평범한 대학생이고 자기들은 아이돌이라 이건가?’
살짝 골이 났다. 나이도 어린것들이 나름 매스컴 좀 타봤다고 으스대는 꼴이 못마땅했다. 아까 전 미소의 태도 때문에 더 열이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로시. 이거 안 되겠는데. 애들 하는 꼴이 영 맘에 안 들어.’
[그렇다고 열 낼 필요야 있습니까? 주인님은 업적만 달성하면 그만인 걸요.]
‘그게 아니라, 열 받아서 싹 다 따먹어 버려야겠다고.’
[아! 역시 남다른 분! 어떻게 그런 결론이···.]
‘아이돌이고 아이돌 할애비고 간에 지들은 뭐 여자 아니야? 봊이 안 달렸어? 어디서 성형한 얼굴에 같잖은 재주 가지고 깝치고 있어? 박으면 다 똑같은 주제에.’
띠링-!
‘어엇! 이 소리는!’
[이벤트 알림음일까요?]
‘디스플레이 띄워봐.’
[넵.]
★천상의 메시지★
-승부의 신과 내기-
"당신의 호승심이 승부의 신의 관심을 자극했습니다. 승부의 신은 당신이 4명의 아이돌을 모두 공략할 시 10,000포인트를 후원합니다."
‘어엇! 뭐, 뭐야?’
[스, 승부의 신께서!]
‘여기 아이돌 모두 공략하면 1만 포인트를 주겠다는 거지?’
[하지만 상대는 승부의 신입니다. 분명 조건이 걸려있을 겁니다.]
디스플레이를 넘기자 뒤이어 단서 조항이 나왔다.
"단, 한명이라도 공략에 실패할 경우 당신은 5,000포인트를 토해내야 합니다.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승부의 신이 나랑 내기를 하자는 거야?’
[승부의 신은 원래 배팅으로 유명합니다. 포인트를 넉넉히 제공하는 대신에 항상 패널티를 걸곤 하죠.]
‘그러니까 일주일 안에 여기 넷을 공략하면 1만 포인트, 못하면 마이너스 5,000 이라는 거지?’
[네.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어째서? 오늘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이면 시간은 충분하잖아?’
[승부의 신은 지는 내기에 승부를 걸지 않습니다. 분명 주인님을 시험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흐음-.’
갑작스럽게 신들의 후원이 떴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나랑 포인트를 걸고 내기를 하잖다.
‘로시. 지금 내 능력을 불신하는 거야?’
[주인님. 상대는 하위 신이라도 해도 신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더욱이 아까도 말했지만 승부의 신은 지는 배팅을 하지 않는걸로 유명하구요.]
‘지금껏 한 번도 안 졌다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지만···.]
‘그럼 상관없네. 받아들인다. 콜.’
[주, 주인님. 어느 때보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 후리는 데 있어선 내가 최고야. 감히 나를 시험해? 웃기지 말라고 해. 내가 맘먹고 못 자빠뜨린 여자가 없어.’
[하아. 알겠습니다. 승부의 신과의 내기를 받아들입니다. 조건은 현 시간부터 일주일. 대상은 지금 이곳에 있는 4명의 큐티 멤버들로 한정합니다.]
내기까지 걸리자 갑자기 더욱 의욕이 솟구쳤다.
기필코 이 건방진 아이돌들의 기둥서방이 되고 말겠다.
***
술자리가 이어지자 슬슬 취하는 사람이 나왔다. 아이템을 사용한 도훈을 제외하면 다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특히 취하면 말이 진다던 우선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었다.
평소 우직하고, 군인 같은 성품의 우선은 거의 떠벌이 수준이 돼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아하하! 마셔요 마셔. 아이돌도 사람이네. 취하니까 똑같아 하하하!"
특히 웃음이 아주 헤퍼졌는데, 도훈이 1학기 동안 보면서 웃는 모습보다 오늘 술자리에서 웃는 게 더 많을 정도였다.
"당연히 아이돌도 사람이죠. 우리라고 뭐 별다른가요?"
"그럼 연애는 어찌해요?"
"연애요?"
"아니 그 나이면 막 남자 만나고 싶지 않아요?"
"남자야 자주 만나죠."
"진짜로요?"
"애인 없는 아이돌들은 거의 없어요. 솔직히 방송에서야 다 없다고 쉬쉬하지만 서로 얼마나 몰래 만나는데요."
"와, 놀랍네. 난 아이돌은 똥도 안싸는 줄! 하하하핳!"
말이 많아지면 말실수도 많아진다.
우선은 점점 필터링 안 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니, 방구니?"
자리가 편해진 린다가 우선에게 쫑크를 줬다. 그녀는 어느새 구두까지 벗고 맨발인 상태였다. 이제 벗을 것은 입고 있는 얇은 나시티와 치마밖에 없다.
"우리도 똥도 싸고 자위도 다 하거든?"
"어, 언니!"
"왜 내말 틀려? 한 번 진실게임 해볼까? 숙소에서 자위 한 번도 안 해본 애 있으면 손들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내가 여기 술 다 마신다."
린다의 폭탄 발언에 다른 아이돌들의 얼굴이 새빨게졌다.
도훈은 슬슬 취해가는 사람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오케이. 분위기 좋고.’
< 613. 아이돌 vs 돌아이-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