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4. 거자필반-64- >
예림의 표정이 썩었다.
"도훈오빠라고?"
"그럼 도훈 오빠를 도훈 오빠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수지가 대립각을 세웠다.
그녀는 도훈에게 푹 빠진 이후, 예림의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도훈을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원수보듯 하는 시선이었다.
예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 설마···. 도훈이 그 새끼랑 했구나?"
"영상 보냈잖아요."
"하는 척 해도 된다고 했는데 진짜로 했단 말이지?"
"왜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해요? 설마 살쪄서 귀도 안 들리세요?"
노골적인 적대감.
그녀의 나이를 아는 예림 역시 화가 치솟았다.
"이게 나이도 어린게, 어디서 창녀 같은 년이!"
"야! 나오는 데로 지껄이지 마! 어디서 협박이나 하는 범죄자 주제에!"
수지는 다이렉트로 들이받았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까페 직원과 손님들이 힐끔거렸지만, 수지는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었다.
‘오빠가 직접 해결한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어.’
수지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협박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도훈을 함정에 빠뜨린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그녀와 도훈이 정을 통했다는 것에서 강한 질투를 느꼈다.
사실 자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니만큼 예림에게 질투를 느낄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 이미 도훈을 남자친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예림을 무슨 헤어지고 나서 찌질거리는 전여친이라도 되느냥 강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게 진짜 씨!"
한 성깔하기로는 예림도 만만치 않았다.
과거 그녀는 철벽녀라 불릴 만큼 콧대 높은 미인.
지금은 비록 몸매 관리의 실패로 육덕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 많은 까페에서 2살이나 어린 여자애와 머리채 잡고 싸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도훈의 일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수지와 언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됐고. 지장 찍었으니까 USB나 내놔. 서로 깔끔하게 정리했으니 더 이상 얼굴 볼일 없을 거야."
수지는 지장 찍힌 각서를 얼른 잡아채 가방에 담았다. 그러고도 별다른 액션이 없자 예림이 재촉했다.
"USB는?"
"지금요?"
"뭐라고?"
"다음부턴 계약서에 도장 찍을 땐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세요. 약속 이행을 한다고 했지, 언제까지 한다는 기한이 적혀 있진 않았을 텐데요?"
"무, 무슨?"
수지의 장난질에 예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왜요? 제 말이 틀렸어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네 신상 학교에 다 뿌려 버리는 수가 있어?"
"무슨 신상이요?"
"국성대 법대 설수지가 인스타의 유명한 걸레 SSG 라고 말이야. 유명한 변호사인 네 아버지가 알면 정말 기절초풍하실걸?"
수지는 예림의 협박에도 침착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죠?"
"왜? 내가 못 할 것 같니?"
"아니요. 이제 녹화 끝났으니까 증거로 제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예림 쪽으로 놓여 있던 빽에서 수지가 만년필을 꺼내 흔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촬영용으로 쓰라고 보낸 몰카용 팬이었다.
수지에게 완벽히 당한 것을 깨달은 예림이 흥분으로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어떻게 이런 짓을!"
"지금부터 말 똑바로 하세요. 난 당장이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 있으니까."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예림이 뺨을 후려칠 것처럼 손을 치켜들자 수지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협박에 상해까지 더하면 진짜로 실형 나올걸요? 잊었어요? 저희 아버지 변호사라는 거? 방금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선."
수지의 냉정한 태도에 예림도 전략을 바꿨다.
"너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왜 도훈이 그 새낄 감싸는 건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수지의 대답에 예림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미친년."
"모욕죄도 추가해 드릴까요?"
"너 도훈이가 어떤 놈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거야?"
"글쎄요? 제가 굳이 안 좋은 말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요?"
예림은 수지가 도훈에게 단단히 빠졌다고 생각했다.
‘도훈이 그놈이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까지···. 놈의 실체를 알려줘야해.’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도훈이 등장했다.
"오, 오빠."
"이도훈!"
두 사람의 반응은 극명히 달랐는데 수지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한 당혹을, 예림은 오랜만에 조우한 도훈에 대한 적개심으로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내가 직접 얘기한다니까."
"아, 아니 저는 그냥···."
"내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그래도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해결해 볼게."
정중한 축객령에 수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저 가라고요?"
"응. 내일 다시 얘기하자."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나랑 약속했잖아."
약속이라는 말에 수지가 뜨끔했다. 여기서 애처럼 때를 쓰면 도훈이 자신을 신의없는 사람으로 여길 것 같았다. 그것은 자칫 좋아지는 관계에 찬 물을 끼얹을 수도 있었다.
"···알겠어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주세요."
"그래. 고마웠어 오늘."
수지는 도훈의 손을 맞잡더니, 앉아있는 예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너, 진짜로 콩밥 먹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나대."
"뭐라고?"
"오빠, 전 가볼게요."
수지가 퇴장하자 예림이 분을 못 참고 욕설을 내뱉었다.
"무슨 저런 미친년이!"
"예림아."
맞은 편에 앉은 도훈이 차분하게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도훈을 마주한 예림은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
"흥, 누가 난봉꾼 아니랄까 봐 그새 어린애를 구워 삶았구나? 하여간 너란 놈은···."
"수지가 무슨 얘기를 했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웃기시네. 넌 내가 아직도 호구로 보이니? 난 네가 지난 봄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다고!"
예림이 목소릴 높였지만, 도훈은 최대한 자중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온 거야. 그러니까 일단 흥분부터 가라앉히고 얘기하자."
도훈의 입술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아이템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는 그가 <오빠 믿지?> 립밤을 바른 결과였다.
오빠 믿지 립밤을 바를 경우 호감도 80이상인 상대에겐 곧이 곧대로 말을 수긍하게 하고, 80미만이 상대라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과연 아이템의 효과가 발휘되는지 예림이 조금은 수그러든 태도로 대답했다.
"흥분은 누가 했다고 그래?"
하지만 여전히 도훈에 대한 적개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지가 소개팅에서 만나서 그러더라. 누군가에게 협박 당하고 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만났다고."
"하-. 그새 다 일러바쳤네. 또 뭐랬는데?"
"원래는 영상을 찍고, 나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하라고 시켰다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렸어. 그래봐야 너도 좋을 일 없으니 내가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겠다고."
"그래서 둘이 짜고 나왔니? 나 엿 먹이려고?"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난 단지 만날 자리만 마련해 달라고 한 거였어."
"웃기시네. 저 계집애가 날 역으로 협박한 건 뭔데?"
"그건 스스로 결정한 걸 거야. 소개팅 때도 그 말 했거든. 자긴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면서."
립밤의 효과 덕에 도훈의 말에 진심이 실렸다.
비록 그에게 미운 감정이 많은 예림이라도, 그의 말 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훈은 예림의 사나운 눈빛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걸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궁금했어. 나에게 이렇게까지 복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일지. 근데 설마 너였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못했어."
"흥. 입은 여전히 청산유수구나? 저 계집애도 그렇게 꼬셨니? 아니지. 영상 보니 둘이 아주 살판 났더만? 너 요새도 그러고 다니니?"
"내가 뭘?"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성폭행 당할뻔 했던 밤, 수아 집에 가서 걔랑 잔 거?"
도훈은 미리 예상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 사실이야."
"더러운 새끼."
"하지만 내가 왜 욕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내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넌 그 계집애랑 뒹굴었으면서?"
"내 설명도 들어봐."
도훈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도 그날 힘들었겠지만, 수아도 엄청 힘들어했어. 같이 놀던 남자친구가 현행범으로 끌려가는 상황이었으니까."
"······."
"조서 쓰고 네가 집으로 갈 때 난 수아를 배웅해야 했어. 넌 부모님이 왔지만, 수아는 새벽에 혼자 집에 가야 했잖아. 그래서 걔네 집까지 따라간 거야."
"그래서?"
예림이 팔짱을 푸는 모습에, 도훈이 조금은 안심했다. 방어적인 태도를 해제한 것으로 보아 조금은 얘기를 들을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정이 안 되는지 계속 우는 거야. 우리 그날 술 많이 마셨잖아. 술도 취했겠다, 마음이 괴롭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 나에게 안기더라고. 그러다 어쩌다 보니···."
도훈은 자신이 업적을 위해 꼬신 이야기를 거두절미하고,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똑같은 거잖아."
"그래. 그건 맞어. 하지만, 어떤 남자라도 그 상황에선 참기 힘들었을 거야. 먼저 달려드는 여자애를 어떻게 밀어내겠어."
"흥! 넌 항상 그 따위 지. 그래서 수지도 실컷 따먹었니?"
"수지는···."
도훈이 괴롭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수지는 뭐?"
"아냐. 이건 말해도 네가 안 믿을 거야."
"믿든 안 믿든 내 맘이니까 말해봐."
"수지도 처음에 네 말대로 할 생각이었대. 영상도 찍고 날 신고하고."
"근데?"
"근데 하고 나니까 너무 좋더래. 생전 그런 기분은 처음이라서 내가 너무 좋아져서 그러고 싶지 않았대."
"미, 미친!"
예림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쏟아졌다.
한마디로 떡정이 붙어서 도훈에게 홀딱 빠졌다는 소리였다.
"거봐. 내가 못 믿을 거라고 했잖아."
"그딴 개소리가 어딨어? 넌 네가 그렇게 잘난 줄 아니?"
"아니. 난 잘난 것 하나도 없어. 하지만 방금 그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냐."
도훈의 말에 예림이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그걸 잘하면···. 하긴. 거기가 워낙 크긴 하니까···.’
예림은 순간 도훈과의 과거를 떠올렸다.
화장실에서 있었던 그 날의 섹스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그 스릴.
그리고 엄청난 오르가즘.
그때를 떠올리자 도훈의 말이 거짓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만 해도 단 한 번의 섹스로 그를 잊지 못하고 지금까지 애증하는데, 수지라고 별 다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아. 수아까지는 네 말이 맞다고 쳐. 하지만 이건 뭐지?"
예림이 준비했던 기춘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혹시나 수지를 설득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도훈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챙겨온 것이었다.
"그게 뭔데?"
"기춘이 감옥에서 합의를 부탁하면서 보낸 편지. 여기에 네 더러운 행적이 낱낱이 적혀 있어."
도훈은 차분히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다 읽은 도훈이 예림에게 말했다.
"이건 사실이 아냐."
"뭐라고?"
"왜 이런 식으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교묘하게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어."
"하-! 이제와서 발뺌하시겠다?"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춘은 너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상황이었어. 당사자와 합의가 되면 감형이 될까 기대한 거겠지. 그리고 거기에 교묘한 거짓말로 나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한 거야. 그래야 자신의 죄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이게 다 거짓말이라고?"
"내가 팩트만 정리해줄게. 우선 기춘이 너를 노렸던 건 맞아."
"근데?"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보고 너랑 잘되게 밀어달라고 했을 뿐이야. 설마하니 강제로···. 아무튼 그런 의도인 줄은 전혀 몰랐어."
"그런 말은 누구나 다 하지."
"생각해 봐. 그때 널 구해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앞뒤가 안 맞잖아. 난 사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날 이미 너랑 화장실가서 관계를 한 직후였어. 그런데 내가 뭣하러 기춘의 범행을 돕겠어?"
도훈의 말은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았기 때문에 예림은 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거기에는 수아와의 업적을 달성하려는 목적과 함께, 당시 허영자 건으로 자신을 옭아매려던 기춘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계획이 숨어있긴 했지만 예림으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예림이 아무 대답을 못 하자 도훈이 다시 말했다.
"난 내가 잘했다는 게 아니야. 수아가 먼저 덤벼들었더라도, 밀어냈어야 하는 게 맞아. 그리고 상처받은 너에게 소홀히 한 것도 미안해. 그렇지만 기춘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야."
"그, 그렇지만···."
"너는 지금 너를 구해준 사람의 말보다 범죄자의 말을 신뢰한다는 거야?"
도훈의 마지막 물음이 결정적이었다.
"아, 아니 그건···."
예림은 시쳇말로 멘붕이 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훈의 항변을 차근히 듣고 보니 기춘의 거짓 자백에 자신만 놀아난 꼴이 되었다.
할 말을 잃은 예림은 마지막으로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넌 바람둥이야! 나도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근데 너 대학 다니는 모습을 은밀히 뒤쫓아 보니 여자들 엄청 만나고 다니더라? 일주일에 두 세명씩 바꾸면서?"
도훈은 그제야 예림이 자신을 몰래 뒤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어장관리에서 풀리면서 예림이 뒤쫓는다는 사실을 놓쳤나 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지난번에 서현양 때도 그러더니, 주인님을 감시하는 눈이 한 둘이 아니군요. 좀 더 주위에 신경을 쓰셔야 겠습니다.]
‘한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내가 바람둥이라서 나를 미워한다고?’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의 여성 편력이 상상 이상으로 화려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은 모양이지요. 왠지 가지고 논 것 같으니까요.]
‘흠.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거 정면돌파 하는 수 밖에.’
"그래. 나 바람둥이 맞아. 근데 뭐?"
< 604. 거자필반-6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