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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21화 (594/2,000)

< 603. 거자필반-63- >

오늘은 예림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수지는 평소보다 화사하게 화장을 했다.

‘얕잡아 보여선 안 돼.’

남자들이 재산과 학력, 직업이나 직위로 상대를 평가한다면, 여자들은 미모로 상대와의 우위를 가늠하는 편이었다. 흑막을 처음으로 직접 보는 날이니만큼, 수지는 꿀리지 않기 위해 복장에도 무척 신경 썼다.

채비를 갖추고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거실에서 뉴스를 시청하던 아버지가 수지를 붙잡았다.

"저녁인데 어딜 나가는 게냐?"

"아···. 까페에서 친구 좀 잠깐 보려고요."

"친구? 누구?"

보수적인 수지의 아버지는 유난히 화장이 짙은 수지의 행색이 못마땅했다. 그는 대학 시절의 연애라던가, 청춘의 방황 같은 것에 질색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미모가 출중한 자신의 딸이, 엄한 놈에게 정신이 팔려 시간을 뺏기는 꼴은 절대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은선이라고, 과 동기에요."

수지가 친구의 이름을 팔았다.

"친구끼리 만나면서 무슨 옷을 그리···. 쯧쯧."

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짧은 반바지를 밑으로 끌어 내렸다.

"요새 날씨가 워낙 덥잖아요."

"난 계집애들 그렇게 짧은 바지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괜히 꼬투리 잡힐 행동은 애초에 안 하는 게 좋아.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성범죄율이···."

아버지의 잔소리가 그칠 기세를 몰랐으므로 수지는 재빨리 신발을 갈아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 그럼 다녀올게요."

"아니 넌 어른이 얘기하는데···."

쾅-!

재빨리 문을 닫고 도망쳐 버린 수지를 보며 아버지 설인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쟤는 도대체 언제 쯤 철이 들는지."

"아유, 자기도 너무 뭐라고만 하지 마요. 한창 꾸미고 다닐 나이잖아요."

부녀의 대화를 듣고 주방에서 나온 수지 엄마가 딸 편을 들었다. 설인혁이 곧바로 반박했다.

"지금부터 바짝 공부해야 국성대 로스쿨이라도 보낼 거 아니요? 딸아이라고 계속 싸고돌았다간 허송세월하는 거 금방이라니까?"

"그래도 조금은 숨 쉴 구멍도 줘야죠. 오늘 중간고사 성적 나온 거 보니 공부도 무척 열심히 했던데."

"올A+도 못 맞은 성적 가지고 무슨. 국성대 같은 이류 대학에선 당연히 그 정돈 해야지. 그러라고 보낸 학교고."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의 모습에 수지 엄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는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안다니까?"

"근데 혹시 수지에게 남자가 생긴 건 아니겠지?"

"남자요?"

설인혁이 안경을 치켜 올렸다.

"요 며칠 좀 수상하지 않았어? 밥 먹다가 핸드폰 계속 만지작거리고, 아무 때나 실실 웃질 않나."

"남자친구 좀 생기면 어때서요?"

"어허! 큰일 날 소릴!"

"자주 웃으니까 보기 좋던데요, 뭘. 그리고 우리 수지가 어떤 아인데 아무나 만나겠어요? 다 생각이 있겠지."

"어떤 놈이건 남자는 다 짐승인 법이야. 내가 이쪽에서 오래 일하니 보니···."

"하이고, 이 양반도 참. 집에선 일 얘기는 그만 하라니까."

두 부부가 한참 옥신각신하는 사이 수지는 예림을 만나기로 한 까페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훈에게 깨톡을 보냈다.

-설수지 : 저, 지금 약속 장소로 가고 있어요.

-이도훈 : 난 이미 도착했어.

-설수지 : 굉장히 용의주도한 사람 같아요. 제가 도착해서 인증 사진을 보내면 그때 연락을 준다고 했어요. 늦게 올 생각인가 봐요.

-이도훈 : 그래?

-설수지 : 근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이도훈 : 네가 접선만 시켜주면, 그 뒤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설수지 : 오빠.

-이도훈 : 응?

-설수지 : 혹시 설득이 안 통하면 그땐 제가 직접 처리할게요.

-이도훈 : 이건 내가 해결할게.

-설수지 : 오빠만의 일이 아니잖아요.

-이도훈 : 알아. 너한테 절대 피해 안가게끔 할게.

-설수지 :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 오빠에게도 피해 가는 게 싫단 말이에요.

소개팅 이후 수지는 도훈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는 ‘소개팅에서 원나잇까지’ 업적 달성으로 받은 <망부석이 되지 마오.> 아이템의 부가 효과 덕분이었다.

해당 아이템은 관심목록에 올려둔 대상에게 일상적인 문자를 주고받는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최대 5명까지 지속 관리가 가능했다.

소유자의 문자 패턴을 분석해 상대의 기호와 관심에 맞게 자동으로 문구를 완성해 전송하므로 상대가 방치당하는 느낌 없이 꾸준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들었다.

물론 중요한 약속을 잡거나, 관계를 재설정하는 등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엔 AI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소유자에게 부가 여부를 확인받는 기능도 포함되어있었다.

까페에 앉아 수지와 깨톡을 주고 받던 도훈은, 점점 자신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는 수지의 답변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이렇게 마음이 커져버렸담? 아이템 효과 너무 뛰어난 거 아니냐?’

도훈은 적당한 선 긋기에 어느 때 보다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렘을 차릴 것도 아닌데, 무작정 여자들을 늘리는 것을 경계했다.

[확인해 보시면 알겠지만, 일상적인 대화가 전부입니다. 호감도의 상승은 오히려 그날 소개팅 덕분이겠지요. 망부석이 되지마오는 호감도를 유지 시켜주는 역할일 뿐 극적으로 상승시키진 못합니다.]

‘그래도 소개팅 이후 연락을 계속 주고받는 게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암튼 이번 건만 해결되고 나면 수지는 대상에서 빼놔야겠어.’

[부담되시나요?]

‘당연하지. 의외로 저런 여자애들이 남자에게 한 번 푹 빠지면 정신없이 매달리거든. 질투심도 무척 강해서, 내가 다른 여자 만나면 칼 들고 쫓아올지도 몰라.’

[설마 그렇게야 할라구요. 어쨌든 행복한 고민이군요.]

‘행복은 무슨. 지금 나예림을 어떻게 처리할지 머리가 빠게지겠는데.’

모자를 눌러 쓴 도훈이 투덜대는데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젊은 여자가 까페로 들어왔다. 도훈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나예림이란 걸 알았다.

‘왔구나.’

[예림양이 확실한가요?]

‘응. 선글라스로 가린다고 설마 그 얼굴을 못알아 볼까? 근데 살이 좀 쪘나 본데?’

예림은 오랜 칩거 생활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한때 ‘철벽녀’라고 불리던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피부도 상하고, 살도 제법 찐 상태였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외모는 당연히 평균 이상이었다.

오히려 살이 찌면서 가슴도 덩달아 커지는 바람에 입고 온 반팔 티로 풍만한 가슴이 여실히 드러났다. 육덕을 좋아하는 남자들에겐 굉장히 호감을 살법한 체형이었다.

그녀가 까페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도훈이 급히 모자를 눌러쓰며 들고 온 책을 읽는 척 했다.

[주인님. 거꾸로 들었습니다.]

‘아차.’

도훈이 황급히 책을 뒤집어 들었지만, 다행히 예림은 그를 못 알아보는 듯 했다. 그녀는 가장 구석 자리에 자릴 잡더니 핸드폰을 들고 연락을 주고 받았다.

‘수지랑 연락하는 건가?’

[그렇게 보이는군요.]

‘설마 설마 했더니 정말 나예림일 줄이야···. 거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참말이었구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적도 생기기 마련이죠.]

‘그러게. 다음부턴 꼭 서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도훈은 모자를 깊숙이 늘러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체를 감추는 아이템으로, 일전에 한 번 쓴 적이 있는 모자였다.

그는 화장실로 가는 척 예림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모자를 눌러 쓴 도훈의 모습에, 예림은 가까이 그가 접근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훤칠한 키나 월등한 몸매로 옆에만 지나가도 여자들의 시선을 받던 도훈이었으나, 지금은 모자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인식되었다.

‘로시, 정보창.’

[네. 나예림양의 정보창을 확인하겠습니다.]

잠시 후 예림의 정보창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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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나예림 (비처녀, 21세 3개월)

나이 : 23 #철벽녀 #육덕녀 #자존감상실

호감도 : 24/100

개방성 : A

성감대 : 겨드랑이, 질 안쪽, 엉덩이

*애무 포인트 : 질 안쪽 깊숙이 찔러주는 걸 좋아합니다.

성욕지수 : 중하

공략팁

*위 대상은 이미 공략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신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기춘에게서 자신을 구해준 당신을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아에게 2:2 미팅 이후 당신과 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듣게 된 이후 당신에 대한 마음이 식었습니다.

-이후 감옥에 있는 기춘이 합의를 선처하는 편지에 당신과의 범죄 모의를 자백한 순간부터 당신을 맹렬히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똑같이 복수하고 싶어 합니다.

-설수지를 이용해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푸느라 평소보다 10kg 이상 살이 찐 상황입니다.

-늘씬한 몸매를 잃은 그녀는 자신감이 극도로 저하되어 남자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평소의 도도한 성격과 맞물리면서, 굉장히 표독스러운 스타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복수를 마친 후 완벽히 다시 태어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추천 행동 : 그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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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을 확인한 도훈은 그제야 사건의 전모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연락이 안 되고 얼굴을 못 봤더라도 호감도가 불구대천의 원수 지경까지 떨어진 이유엔, 수아와 기춘의 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아! 내가 너무 뒷수습을 안일하게 했구나.’

수아가 예림을 만난 것은 예상치 못했지만, 기춘의 입을 틀어 막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감옥에 보냈다고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입막을 했어야 했다.

충격을 받은 도훈이 예림의 주위에서 얼쩡거리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예림이 도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예요?"

정보창만 확인하고 급히 벗어나려 했던 도훈은 예림이 말을 걸어오자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 화장실을 가려고···."

"웃기고 있네. 방금 제 가슴 쳐다 봤잖아요?"

예림이 경멸스러운 눈길로 도훈을 쳐다보더니 가슴골이 패인 셔츠를 손바닥을 가렸다.

"오해하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도훈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자, 예림이 "흥" 하며 콧방귀를 꼈다.

"하여간 별 변태 같은 것들이···."

도훈은 그녀가 자신을 못 알아 본데 안심하며 화장실로 급히 숨었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어도 주인님의 얼굴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러게. 근데 예전에도 좀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성격이 더 지랄 맞아 졌는데?’

[남자에게 한 번 데이고, 뭔가 심사가 뒤틀린 느낌이더군요.]

‘흐음. 근데 육덕으로 변한것도 나름 매력이 있단 말이지.’

도훈은 예림의 풍만한 가슴을 떠올렸다.

원래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 였던 예림은, 살이 찌면서 가슴이 더욱 커져 남자들이 자연히 눈길을 돌릴 만큼 인상적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님. 사과를 빌러 온 와중에···.]

‘가만있자, 근데 정보창을 보아하니 그 일 이후로 한 번도 남자를 만나지 못한 분위기인 것 같은데?’

[남자에게 트라우마가 생길만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체형도 변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잃은 것 같구요.]

‘어쩌면 진심 어린 사과를 구하는 방식을 달리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

[네? 어쩌시게요.]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도훈이 화장실에 숨어있는 사이 까페로 핫팬츠를 입은 묘령의 여대생이 들어왔다. 그녀는 외출할 때 입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가방에 넣고 끈나시 차림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까페 안에 있던 남자들은 색기 넘치는 수지의 등장에 다들 숨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부터 몸매 어디 하나 거를 타선이 없는 완벽한 섹시 다이나마이트였던 것이다. 예림에게 기를 죽지 않기 위해 도발적인 차림을 한 보람이 있다고 느끼며 수지가 테이블에 자릴 잡았다.

-SSG1004 : 저 왔어요.

흑막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gmrakr : 사진 찍어 보내.

-SSG1004 : (사진)

-SSG1004 : 까페 안 이에요.

-gmrakr : USB는 가져 왔겠지?

-SSG1004 : 네. 빽에 있어요. 지금 어디신데요?

핸드폰으로 답장을 보내는 수지 앞에 진한 선글라스를 쓴 예림이 등장했다.

"이미 와있었어."

"아···."

예림과 처음만난 수지는 그녀의 외모에 적잖이 안심했다.

‘뭐야? 완전 육덕 돼지잖아? 도훈 오빠가 정말 이런 여자를? 하-! 괜히 의식하고 나왔네.’

한편 예림 역시 인스타 상으로만 보던 수지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창녀 같은 년이네. 옷차림부터 싼티를 팍팍내고 있어.’

서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목적으로 만난것도 아니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협박을 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감정이 좋을리 없었다.

예림이 먼저 말했다.

"USB 내 놔."

"그전에 먼저 해야 할 게 있죠."

수지가 가방에서 작성한 각서를 꺼내들었다.

공증인 앞에서 공증을 받지 않는 각서는 법적인 효력이 없지만, 예림이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모를 거라는 생각이었다.

딱딱한 법률 용어로 작성된 각서를 보는 순간 예림의 표정도 안좋아졌다.

"이렇게까지 안해도 앞으로 너에게 다시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일단 지장이나 찍어요. 말보단 문서가 더 확실하니까."

"흥, 누가 법대생 아니랄까봐."

수지가 미리 준비한 인주를 엄지에 묻힌 예림이 각서에 도장을 찍으려 할 때였다.

"근데, 대체 왜 그렇게 도훈 오빠를 미워하는 거죠?"

< 603. 거자필반-6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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