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7. 거자필반 -57- >
{와, 술이 이렇게 셀 줄 몰랐는데? 내가 먼저 가버리는 거 아냐?}
{어떻게든 먼저 덮치게끔 만들어야 해.}
{몰래카메라를 어디다 숨기야 자연스러울까?}
특히 마지막에 들려온 목소리는 나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남녀 둘이서 술 마시는 모텔 방에 몰카를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분명 그걸 빌미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쏴아아아-!
변기에 오줌을 갈기며 궁리를 했다.
‘일단 그 몰카라는 것부터 찾아 없애야 겠어. 로시 혹시 전자 장비 같은 걸 감지하는 아이템은 없을까?’
[있다고 해도 현 장소에서는 기기를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모텔방안에 있는 모든 기기가 걸릴 테니까요. 티비나 에어컨 같은 것들까지요.]
‘젠장, 아까 마음의 소리 듣고 있을 때 어떻게든 유도했어야 했는데.’
마음의 소리는 타인의 속마음을 읽는다는 점에서 치트키급 스킬이지만, 실제론 짧은 순간에 떠오른 상대의 생각을 캐치해 낸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상대에게 듣고 싶은 생각을 떠올리게 유도해야 하는데, 스킬이 끝날 때쯤나 몰카의 존재를 깨닫는 바람에 그것에 대해 알아낼 시간이 없었다.
‘일단 최대한 몸 사리시면서 방법을 강구 해 보는 수밖에.’
[네, 파이팅입니다. 주인님.]
오줌을 싸고 나오는데 수지의 얼굴이 좀 더 발그레해져 있었다.
"그렇게 크게 들리는 줄은 몰랐어요."
"뭐가?"
"소변 누는 소리요."
"아···. 미안."
"아까 저도 그랬겠다."
수지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아까 전 자신이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를 생각하니 이제와 창피한 모양이었다.
‘뭐지? 전략을 바꿨나? 왜 저렇게 쑥스러운 척을 하지?’
물론 나는 그녀의 실체를 알기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 앞에서 홀짝 벗고 자위 영상이나 찍어 올리는 변녀가, 밖으로 오줌 소리 좀 들렸기로서니 저렇게 황망해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못 들었어."
"거짓말. 다 들었잖아요."
"나 그렇게 매너없는 사람 아니야."
수지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쪽으로 다가왔다.
"가끔 매너없는 사람이 더 매력적일 때도 있죠."
그녀는 술에 취한 듯 주정을 했다. 내 쪽으로 기우뚱 쓰려지려는 수지의 팔을 부축하자 그녀가 정색하며 뿌리쳤다.
"놔요. 저도 화장실 갈 거니까."
"그래."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며 눈을 흘기며 말했다.
"흥, 눈치도 없어가지고."
‘뭐야? 이번엔 삐진 척이야? 아주 가지가지 하고 있구나.’
그녀는 나를 흔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쾅-!
수지가 신경질적으로 화장실 문을 닫았다.
그때 뭔가 뇌리를 스쳤다.
‘가만. 이쯤 되면 나보다 오히려 수지 쪽이 더 초조해지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이건 내가 자존심 상해할 문제가 아니었다.
모텔에 두 남녀가 들어왔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의 갖은 유혹에도 꿈쩍 않는다면?
오히려 자존심을 다치는 것은 여자쪽이다.
특히 그녀처럼 자존심 강한 사회적 페르소나를 쓴 사람이라면, 지금의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손만 잡고 자자."
"절대 침대로는 안 올라갈게."
"오빠 믿지?"
남자가 여자와 단둘이 있을 때 지껄이는 말들은, 대부분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손도 잡고 가슴도 잡을 게."
"침대로 안 올라간댔지, 바닥에서 안 한다곤 안 했다."
"오빠가 (임신 시켜도 책임 질 거라고) 믿지?"
등등.
즉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언어 게임엔 말속에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한 경우가 대다수다. 실제로도 대부분 속뜻을 먼저 헤아린다. 즉, 행간에 메시지를 담는 것.
그럼 모텔을 잡고 술을 먹자고 제안한 수지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술 먹다가 삘 받으면 바로 한 판 땡기자.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캐치했을 것이다. 또 지속적으로 시그널을 보내는 걸 봐선 틀림없다.
‘로시, 공략할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
[정말요? 호감도 60에, 주인님을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여자를요?]
‘응. 청개구리 전법.’
[설마···.]
‘그렇지. 그녀가 바라는 것을 절대 들어주지 않는 거야.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뜻대로 휘둘리지 않는 남자라는 걸 보여주는 거지.’
[그런 뻔한 수법이 과연 먹힐까요?]
‘곰곰이 생각했어. 자존심 강한 수지가 자신의 매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되는 데요?]
‘자존심이 강한 여자일수록 그런 더더욱 대접을 못 견뎌서 한다는 거야. 왜냐면 평생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을테니까. 한마디로 내성이 부족하달까? 두고 봐. 조금 있으면 수지가 날 먼저 덮치려 들 테니.’
[주인님의 감을 한 번 믿어보죠.]
수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는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술을 홀짝거렸다.
아이템을 먹고 술을 마시니 술이 물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기는커녕, 오줌만 마려울 뿐이다.
"흥. 오빤 소개팅을 하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모르겠네요."
"소개팅도 하고 겸사겸사 술도 마시는 거지."
"여자보다 술이 좋은 건 아니고요?"
"왜? 벌써 힘들어?"
"그럴 리가요."
자존심을 건드리자 수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은, 그녀에겐 하나의 자부심인 것 같았다.
좀 더 도발해 볼까?
"소맥으로 마시니까 술맛이 물 탄 듯 영 밍밍하다야. 이제부턴 그냥 소주 나발을 불까?"
"그것도 좋죠."
수지가 호기롭게 맞섰다. 우린 녹색의 소주병 각각 한 병씩 마개를 까고 잔치기를 했다.
"짠!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것을 기념하며."
"원샷으로?"
"괜찮겠어? 힘들어 보이는데?"
"빼는 걸 보니 저보단 오빠가 힘든가 본데요?"
"전혀."
나는 그 자리에서 소주 한 병을 나발 불었다. 이런 아이템이 조금만 일찍 나왔으면 새터 때 추한 꼴을 보이진 않았을 텐데.
소주 나발은 생수 360ml를 단숨에 마시는 것과 비슷했다. 목을 열어젖히고 수직으로 내리붓자 콸콸 소주가 한입에 털어졌다. 그 모습을 본 수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정말로 소주 일병을 원샷 때릴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쿵-!
빈 병을 탁자에 내리며 수지를 향해 말했다.
"부담되면 넌 나눠 마셔도 돼."
"흥. 누가 부담된 데요?"
이번엔 수지가 병나발을 불었다.
그러나 한 번에 많은 양을 마시는 것이 여간 어려운지 자꾸 입가로 술을 질질 흘렸다.
"괜히 무리 말고."
"풉!"
그때였다.
한입 가득 볼이 빵빵하게 소주를 채운 수지가 나를 향해 뿜어버린 것은.
"푸하악-!"
입에서 분사된 소주는 얼굴을 비롯해 상반신을 흠뻑 적셔 버렸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굳었다.
"괘,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갑자기 말 시키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음···."
화를 내야 마땅했다. 하지만 미안해하며 재빨리 수건을 들고 오는 그녀를 보니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괜히 옹졸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어떡하죠? 옷이 다 젖어 버렸네···."
소주 세례를 맞은 셔츠에서 알코올 냄새가 확- 올라왔다. 여름옷이라 그런지 젖은 셔츠 사이에 피부가 달라붙으며 속살이 내비쳤다.
[주인님. 이번건은 정말 고의 같은데요?]
‘화장실에 있는 동안 저런 꼼수를 생각해 왔군.’
"죄송해요. 제가 세탁해 드릴게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내가 할게."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셔츠를 벗어 비눗물에 담가 빨고는 물을 짜냈다. 옷감이 얇아 에어컨 바람에 널어놓으면 한 두시간이면 마를 것 같았다.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수지가 모텔 가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데로 이거라도."
"고마워."
수지가 내 어깨에 가운을 걸치며 감탄했다.
"와···. 근데 오빠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몸이 좋네요."
"그거 칭찬이지?"
"당연하죠. 몸 좋은 남자 인기 많잖아요. 오빠 인기 많죠?"
"그냥 그럭저럭?"
가운 끈을 앞으로 묶자 도복을 입은 것처럼 가슴 쪽이 지나치게 벌어졌다. 애초에 입으라고 만든 옷이 아니라 그런지, 무척 노출이 심한 편이었다. 수지가 은근슬쩍 벌어진 가슴을 훔쳐보며 말했다.
"예전에 잠깐 만나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교회 오빠 이야긴가?’
내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처다 보자 수지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으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 오빤 되게 말랐었어요. 벗으면 갈비뼈가 보일 만큼."
"늘씬했겠는데."
"남자가 늘씬해 봐야 뭐해요?"
"그래도 요샌 모델처럼 스키니한 사람이 인기잖아. 옷 빨도 잘 받고. 난 셔츠만 입으면 몸이 꽉 껴서 얼마나 불편하던지."
"아무튼, 그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아프리카로 떠나버렸어요. 선교사가 꿈이였데요."
"그렇게 헤어지게 된거야?"
"네. 그 뒤론 아직 아무도 못 안 만났어요. 어쩔 수 없죠.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니까."
[갑자기 남자친구 얘기는 왜 꺼내는 걸까요?]
‘아마도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게 아닐까?’
[그건 왜요?]
‘경험이 아예 없는 여자보단 차라리 있는 여자들을 좋아하는 부류도 많거든. 진솔하게 속내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좀 더 열어 보인다는 계산도 있을거고.’
"혹시 오빠는 사겨본 적 있어요?"
"나? 군대 가기 전에 잠깐. 과씨씨였어."
"아···. 지금도 그럼 같은 과에요?"
"아니 졸업했어. 지금은 선생님 됐어."
"그래도 다행이다. 헤어진 다음에 다시 보면 껄끄러울 수도 있을 텐데."
"뭐, 그냥 그래. 옛날 일인데."
"그럼 그 뒤론 쭉 혼자셨어요?"
"그렇지. 실은 바빴어. 복학하기 전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1학기 내내 학교 적응하느라 힘들었거든. 남자들 군대 갔다 오면 머리 굳는다는 말 안 믿었는데, 막상 내가 당해보니 정말이더라고."
"그려셨구나. 그래도 그 사이에 여자 만날 기회는 있지 않았어요? 가령 알바 할 때라든가."
"같이 일하던 여자애는 있긴 했어."
그때 수지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친했어요? 혹시 같이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밥 한번 먹었었나?"
"그리고요?"
"그리고, 뭐?"
"정말 밥만 먹고 끝났어요?"
‘뭐지? 왠지 취조당하는 거 같은데?’
[수지 양이 과거를 먼저 밝힌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주인님의 과거를 묻기 위해서요.]
‘아, 잠시만.’
퍼뜩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보창에 떠오른 ‘흑막’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
그녀는 나에게서 흑막을 찾고 싶어 한다고 했다.
‘혹시 지금 물어보는 게 그 흑막이란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 건가?’
[그렇다면요?]
‘뭔가 이상하잖아. 난 수지의 배후를 알고 싶었어. 근데 상황을 보니까 수지 역시 나에게서 흑막을 캐묻고 있잖아.’
[설마 수지양도 흑막, 그러니까 배후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요?]
‘그렇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잖아. 가만있어봐, 설마 우리 둘 다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 건가?’
뭔가 점점 꼬이는 느낌이었다.
만약 수지가 한패가 아니라면, 대체 카메라는 뭐고 먼저 덮치게 만든다는 계획은 무엇이란 말인가?
"밥 먹으러 만났으니 밥만 먹었지."
"술 마시러 소개팅 와서 술만 마시는 것처럼요?"
"근데 그건 왜?"
수지가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전 오빠 같은 남자랑 같이 일하다 보면 다른 마음이 생겼을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뭐···. 한 번 쯤 자보고 싶다거나?"
"정말?"
"왜요? 여자들은 성욕이 없을까 봐서요?"
"아니 내 말은···. 너도 지금 그렇다고?"
"그렇다면 어쩔건데요?"
[주인님. 유혹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이젠 작정하고 덤벼대는 군.’
침대에 앉아있던 수지가 갑자기 손 부채질을 하며 가슴 앞을 살짝 들었다.
"아, 술이 오르나 봐요. 방이 더운 것 같아요."
그러면서 벌러덩 침대로 쓰러지는데, 다리를 살짝 벌리면서 팬티를 내비추는 것이었다.
‘크흡-. 미친. 아주 따먹어 달라고 발악을 하는데 이제?’
[주인님의 전략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청개구리 전법!]
‘알고 있어.’
나는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며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술 오르니까 담배 땡기네. 한 대 펴도 돼?"
"알아서 하세요. 내키시면."
마치 그 대답이 자기를 맘대로 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담뱃불을 붙이며 슬쩍 침대 주변을 살폈다.
‘카메라를 숨겼다면 분명 저 각도를 찍을 수 있는 위치일 텐데···.’
나를 침대로 유인하는 걸 보면 필시 그곳을 향해 카메라를 설치했을 것이다. 그때 협탁에 놓인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만년필인가? 저게 왜 저기 있지?’
만년필의 촉 끝은 나침반 지침처럼 수지가 누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담배를 끄고 협탁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몰래카메라라고 했겠다. 어쩌면 만년필처럼 보이는 카메라 일지도···.’
[어쩌시려고요.]
‘다른 곳으로 치워 버려야지.’
내가 다가가자 수지는 더욱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을 선보였다. 흐트러진 자세를 취하는 척 치마를 허벅지 위까지 걷어 올린 것이다.
"아···. 어지러워. 오빠 술 쌔시다. 인정할게요. 제가 졌어요."
"항복하는 거야?"
"네. 술기운이 오르는지 더워 죽겠어요. 확 다 벗어 버리고 싶어요."
"에어컨 온도 낮출게."
"그것으론 부족해요. 아, 몰라. 다 벗어버려야지."
수지가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갑자기 등을 돌려 앉았다.
"원피스 지퍼 좀 내려주실래요?"
< 597. 거자필반 -5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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