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13화 (586/2,000)

< 595. 거자필반-55- >

‘나를 아주 가지고 놀고 있잖아?’

협박을 당한 사람은 처음엔 몹시 당황한다.

평범한 삶에서 생전 그런 비열한 수법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을 단숨에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는 약점을 잡히게 되면 누구라도 겁먹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반발심이 생겨난다. 왜 하필 나를 골랐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저리 겁박하는지 분노가 끓어 오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상대가 협박을 통해 뭔가 얻어 낼 게 있다면, 어쩌면 그 점을 역이용할 수도 있을까 하는.

그것은 흡사 인질극과 같다.

인질의 가치는 오직 살아 있을 때다.

죽은 인질은 더는 납치범의 방패막이 될 수 없다.

그것을 이용해 한 푼도 뜯어내지도 못한다.

오히려 인질이 죽게 된 이후, 상황은 180도 반전된다.

따라서 납치범은 결코 인질에게 치명적 위해가 가할 수 없다. 자신도 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형법에 대해 전공하고, 특히 범죄학에 조예가 깊던 수지는 자신의 처지가 이와 같다고 여겼다.

그리고 한 가지 당돌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칼자루를 쥔 쪽은 어쩌면 자신이 아닐까 하는.

-SSG1004 : 가만 보면 시비 거는 게 습관이신가 봐요?

답장을 보낸 수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껏 협박범과의 관계에서 이런 강경 대응은 처음이었다. 이빨을 드러낸 지금, 상대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궁금했다.

한참 답이 없었다.

수지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다.

괜한 짓을 벌였다는 후회와 함께, 계속 이대로 휘둘릴 순 없다는 저항심리가 팽팽히 맞섰다. 기다리다 못한 수지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 할 때, 마침내 흑막에게서 답장이 왔다.

-gmrakr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사과할게.

답장을 확인한 수지가 영악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상대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나약한 사람이다.

어쩌면 평범한 소시민이며, 보통 땐 남에게 폐도 끼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 일지도 모른다.

단지 이도훈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는 것뿐. 수지가 답장했다.

-SSG1004 : 아무튼 내일 소개팅 약속 잡았어요.

-gmrakr : 잘했어.

-SSG1004 : 당신이 원하는 게 그와의 섹스 동영상이죠?

-gmrakr : 눈치가 빠르네. 똑똑해.

수지가 피식 웃었다.

이젠 협박범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녀를 자신의 밑으로 낮춰보는 우월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약점을 잡았을 뿐, 협박에 관해 아마추어나 마찬가지라고.

-SSG1004 : 비싼 몰래카메라까지 보내줬는데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요?

-gmrakr : 어쨌든 동영상은 증거 확보용일 뿐이야. 그리고 꼭 관계까지 갈 필요는 없어. 상대를 성폭행으로 몰기만 하면 되니까.

-SSG1004 : 무슨 뜻인지 알아요. 성폭행과 성폭행 미수는 똑같은 처벌을 받으니까.

-gmrakr : 역시 법학과라 그런지 말귀가 잘 통하는군.

-SSG1004 : 한 가지만 물어 볼게요.

-gmrakr : 나한테? 뭘?

-SSG1004 : 이도훈이 당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gmrakr : 그걸 내가 너에게 밝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상대가 즉각 경계심을 드러냈다.

수지 역시 쉬이 대답이 나올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SSG1004 : 굳이 이런 짓을 벌이려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gmrakr : 이런 짓이라고? 감히 너.

-SSG1004 : 왜요? 제 말이 틀렸나요? 멀쩡한 대학생을 성폭행범으로 몰아 인생 쫑 내려는 게 솔직히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gmrakr : 멀쩡한 대학생? 이도훈이? 그 새낀 그냥 쓰레기야.

-SSG1004 : 그에게 혹시··· 당한 건가요?

수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밖에 없었다.

이런 또라이 짓을 벌이려면 그에 상응하는 강한 원한이 필요했다.

-gmrakr : 강간당했냐는 거야? 아니.

"아니라고? 하-. 설마 갖잖은 질투심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야?"

수지가 기가 찬 표정을 짓는 동안 다시 답장이 왔다.

-gmrakr : 놈은 겉보기만 멀쩡해. 하지만 실상은 여자를 노리개쯤으로 아는 쓰레기 새끼지. 사람 마음을 멋대로 가지고 놀고 말이야.

-SSG1004 : 이봐요. 저도 같은 여자예요. 이도훈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협박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도와줄 의향이 있다고요. 그러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줘요.

수지가 교묘한 감언이설로 상대를 설득했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하지, 그녀는 결코 흑막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협박한 흑막에게 어떻게든 복수할 생각뿐이었다. 내막을 알면 알수록 그녀의 약점을 잡기 수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한참 대답이 없던 상대는 간신히 답장을 보냈다.

-gmrakr : 이봐, 설수지. 슬슬 주제를 넘고 있군.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일 영상 찍어서 나에게 넘기라고. 그리고 이도훈을 성폭행으로 고소하면 너의 역할은 끝이야.

-SSG1004 :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gmrakr : 그 어느 때보다 분발해야 할 거야. 이도훈을 유혹해내지 못한다면 네 인생도 끝장이니까. 그럼 내일 다시 연락하지.

대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쪽지를 연거푸 보냈지만 상대는 아예 읽지도 않았다.

수지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괴성을 질렀다.

"이 씨발년이! 감히 나를 뭘로 보고!"

그때 총총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1층에서 TV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방문을 노크했다.

"수지야? 무슨 일 있는 거니? 방금 큰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수지는 자신이 여전히 야한 속옷만 입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목소리를 확 바꾸어 조신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잠시 노래 좀 따라 불렀는데 목소리가 너무 컸나봐요."

"그래. 공부하다 쉬는 모양이구나. 엄마가 과일이라도 가져다줄까?"

"괜찮아요. 요새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과일은 살도 안 찔텐데···."

"엄마.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럼 이제 다시 공부할게요."

"그려럼. 너무 무리하진 말고."

다시 발소리가 작아지자 수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엄마는 귀도 밝아서···."

폰을 들어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확인한 수지의 얼굴이 딱딱했다.

"넌 시키는데로만 하면 돼? 제깟 년이 어디다 대고 명령 질인데? 하여간 두고 봐. 넌 내가 절대 곱게 끝내지 않을 테니까."

수지가 벽에 부딪혀 박살 난 로터 조각을 쓸어 담으며 중얼거렸다.

***

마침내 소개팅 당일.

어제 무리했던 여파로 늦잠을 자버린 나는, 허겁지겁 짐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안개가 낀 듯 멍해있던 머리는 오전 수업 중간 커피를 한 잔 마시고서야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나 원 참. 어제 무리 좀 했다고 바로 티가 나버리다니. 젊다고 피로감을 못 느끼는 건 아니구나.’

[무리하긴 하셨죠. 한 사람이랑 세 번 연속도 힘든 판국에 네 사람과 돌아가면서 하셨으니까요. 그쯤 되면 변강쇠 할아버지라도 무리가 아닐까요?]

‘근데 그게 참 특이하단 말이지? 파트너가 바뀌면 나도 모르게 전력을 다하게 돼버리니까. 특히 마지막 나연두 콤비랑은 정말. 어우야, 지금도 입에서 단내가 날 것 같아.’

나연과 연두와 쓰리썸에선 오랜만에 정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간 충분히 성장했다 생각했는데, 연속 떡의 부담이 예상외로 컸다. 만약 블라인드 테스트를 빙자한 각개 격파 전법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둘과의 대결에서 나는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직도 수련이 부족하다는 증거고,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여간 징한 것들.’

[그래도 덕분에 어장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으셨나요? 여러 후배들을 만나 상식 개변도 시키고, 입단속도 시키고, 후장 플레이 약속도 받아 내시고···.]

‘섹스해서 손해 본 건 없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소득도 없는 순회공연이기도 했지. 네 말대로 학교 외부인일 가능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둬야 했는데···.’

[하지만 그래서는 너무 후보가 많습니다. 주인님이 이제껏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여자가 거의 쉰 명에 육박한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남자까지 더하면 그 두 배는 더 될 거고요.]

‘끄응. 뭐가 그렇게 많아? 이도훈 몸으로 갈아 탄 후 대학 생활한지 채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그만큼 주인님이 엄청난 속도로 레벨업을 했다는 뜻이죠. 지금은 급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는 중이고요. 뭐든 좋기만 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로시 네 말은, 내가 한국 경제처럼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바람에 그 반대급부로 나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생겨났을 거란 말이지?’

[물론입니다. 호사마다라는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그치만 내가 일부종사를 한 건 아니라도, 여자를 만날 땐 늘 최선을 다했어. 강간을 한적도, 협박을 한적도 없었고 특히 상식 개변 스킬이 생긴 이후부턴 입단속에도 철저했다고.’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아마 원한을 가진 여자가 있다면 상식 개변 스킬이 생기기 이전의 인물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 하고 있습니다.]

‘상식 개변 이전이라···.’

상식 개변은 교생 실습 이후.

그렇다해도 후보가 너무 많다.

5일간 좆뺑이쳐가며 추려낸 숫자라고 해봐야 기껏 학과 선후배 십여명 정도뿐.

소거법으로 진행하기엔 물리적 시간의 한계에 임박했고, 아무나 찍자니 뚜렷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 실수했을까?

나이트에서 원나잇 만난 여자들?

아니면 가게에 들러서 후다닥 따먹고 버린 직원들?

대관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거참, 적당히 가려 먹을 것을 그랬나?

‘이젠 남은 방법이 없어. 설수지를 대면해서 배후를 파악하는 수밖에.’

[결국 설수지양은 이러나 저러나 공략해야 할 상대가 되겠군요.]

‘참, 걔 어제 나랑 쪽지 끝내고 나서 또 인스타에 글 올렸더라? 제목이···.’

[내일 소개팅 의상, 어때? 였죠. 저도 같이 봤습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더만.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런 대담한 제목을···.’

[주인님은 한참 뚫어져라 감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무슨 소리야? 어제 아이템 사는 중에 힐끔 본 거고만. 아이템은 잘 들겠지?’

[네. ‘황혼707’은 최강의 알콜 분해 음료입니다. 오랜 개발 끝에 나온 시제품으로, 그 효과는 임상실험을 통해 수차례 검증되었죠. 나온 지 갓 일주일 된 따끈따끈한 신상이기도 하고요.]

‘사용법은 어떻게 되었지?’

[술 마시기 전 원샷 하시면 됩니다. 위벽에 달라붙은 알콜 분해효소가 점막을 코팅함과 동시에 10시간 동안 모든 알콜 성분을 원자 단위로 분해시켜 줄 것입니다.]

‘원자 단위라면.’

[알콜을 구성하는 탄소와 산소 수소 등이죠. 인체엔 절대 무해 하니 너무 걱정마십시오.]

로시의 말을 들으니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소모성 아이템이지만 꼴에 신상이라고 한 병에 1,000포인트씩이나 나가는 고가품이다. 오늘의 대작은 이것으로 이미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술 대결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아니야. 내가 가진 주사 때문에 지난번처럼 중간에 잠들어 버릴까 봐 그게 걱정인 거지.’

[술에 취하지만 않으면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승산이고 말고 없어. 섹스타 SSG가 모텔로 나를 끌어들인 걸 보면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아뇨. 배후를 캘 자신요.]

‘아무렴? 좆 대가리 밀어 넣는데 안 불고 배길거 같아?’

[너무 자신하지 마십시오. 제가 볼 땐 설수지양은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배경이 훌륭하다는 것이 개인의 능력을 담보해 주는 건 아니지. 이러나저러나 법대에 다니는 일개 여대생일 뿐이야.’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요···.]

***

수업을 모두 마친 도훈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콜박스 사거리에 위치한 우체국 건물 앞이었다.

도훈은 번호를 교환한 지 일주일 만에 성사된 소개팅에 제법 긴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뉴페이스를 만나는군.’

[긴장되십니까?]

‘조금은. 근데 이건 긴장이라기보다 기대감에 가깝지. 최근엔 계속 먹었던 여자애들 돌려먹었잖아.’

[박서현 양과는 처음이었는데요?]

‘그랬나? 서현이는 너무 오랫동안 알아와서 참신함이 좀 부족했지. 반면 설수지는···.’

"도훈 오빠··· 맞죠?"

누군가 도훈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도훈이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수수하게 입고 나온 수지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설수지에요."

"아···."

도훈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깨톡 사진으로 수차례 봐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예뻤던 것.

‘뭐, 뭐야? 개존예잖아? 이런 애가 인스타에서 노출을 하고 다닌다고?’

도훈의 머릿속으로 수지의 원피스 아래 받쳐진 속옷이 아른거렸다. 인스타 사진에서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늘 벗은 몸만 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된 것이었다.

"처음 뵙네요. 이도훈이에요."

도훈이 당황하며 악수를 청했다.

수지는 의외라는 듯 싱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스킨십 너무 자연스럽게 하시는 거 아닌가요? 호호."

도훈은 수지의 발랄한 목소리에 자기도 혼이 빼앗겨 버렸다.

인스타에서 몰래 훔쳐보던 섹스타 SSG와, 소개팅을 나온 청순 발랄 설수지 사이에는 도저히 매울 수없는 간극이 있었다.

‘저, 정말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 595. 거자필반-5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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