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4. 거자필반-54- >
‘아아, 소개팅이 내일이었지?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잖아?’
도훈은 수지의 연락을 받고서야 소개팅이 내일임을 상기했다. 그간 설수지를 조종한 배후를 쫓느라, 정작 메인 이벤트가 코앞까지 닥쳐올 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던 것이다.
-이도훈 : 맞아요. 내일 수업 끝나고요.
-설수지 : 아···. 전 도통 연락이 없으셔서 제가 날짜를 착각한 줄 알았지 뭐예요?
뼈있는 농담에 도훈이 뜨끔했다.
‘이렇게 비난받아도 할 말 없지. 결국 여기 저기 들쑤셔 놓고선, 배후도 찾지 못했으니까.’
최근 몇 일간 설수지를 끌어들인 실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도훈이었다. 마치 릴레이를 펼치듯 후배들을 하나씩 만나가며 배후를 추적했으나, 상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한마디로 힘만 쓰고 삽질만 한 것이다.
-이도훈 : 미안해요. 요새 조별 과제 때문에 정신이 없어가지고.
-설수지 :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어디서 볼지나 알려주세요.
-이도훈 : 음, 콜박스 사거리 쪽 어때요?
-설수지 : 그 술집 많은 곳이요?
‘또한 모텔도 많은 곳이지.’
콜박스 사거리는 국성대를 끼고 형성된 대학로였다. 인스타에도 자주 올라오는 맛집과, 가성비 좋은 술집들이 즐비했으며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모텔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도훈 : 불금인데 가볍게 한 잔 괜찮으시죠?
도훈은 ‘소개팅에서 원나잇까지’ 업적을 염두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취하게 만들고자 했다.
‘배후고 뭐고 간에 일단 업적부터 달성하고 봐야지. 어차피 누군지도 밝혀내지 못했으니,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보는 수밖에.’
-설수지 : 흠, 초면에 술은···.
도훈은 수지의 반응에 식겁했다. 설마하니 술자리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 못 한 것이다.
‘헛, 이럼 완전 계산이 달라지는데···.’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이라면 굳이 술기운을 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자를 공략할 수 있지 않습니까?]
‘보통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내일은 지인들을 통해 받는 정식 소개팅 자리잖아.’
[그게 뭐가 다르죠?]
‘솔직히 술을 먹여 자빠뜨리겠다는 생각은 아니야. 상대가 술이 얼마나 센지도 모르고, 더 큰 문제는 내가 술이 엄청 약하다는 거니까.’
[그럼요?]
‘술은 좋은 핑계가 될 수 있거든.’
[핑계라뇨?]
‘생각해봐. 내일 소개팅 자리에서 어떻게든 수지를 자빠뜨릴 거야. 하지만 수지도 처음 만난 사람하고 모텔로 직행하는 게 쑥스럽지 않겠어?’
[아무래도 그렇죠.]
‘그럴 때 바로 술의 힘을 빌릴 수 있단 말이지. 취해서 그랬다, 술 먹고 어쩌다 보니 따위의.’
[아하! 요컨대 명분이 필요한 거군요.]
‘맞아. 근데 수지가 술 마시길 거부한 상태로는 아무래도 당일 공략은 어려울 거란 말이지. 솔직히 여자들은 남자와 정말 자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체면상 참는 경우도 많거든. 싸 보일 수도 있고, 또 쉬워 보이기도 싫으니까. 술은 그걸 완화 시켜주는 강력한 촉매제고.’
[저런. 그럼 수지양의 대답 여부에 따라 내일 공략의 난이도가 결정될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도훈이 뭐라 답장을 보낼지 초조해하는데 수지에게서 연이어 깨톡이 왔다.
-설수지 : 저는 간만 보는 거 싫어요.
‘오잉? 이건 또 뭔 소리지?’
-이도훈 : 네?
-설수지 : 기왕 술 마실 거면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에요.
‘헉! 이게 뭐야?’
도훈은 수지의 반응에 흥분했다.
그녀가 이 정도로 애주가라는 건 예상치 못 했다.
‘이거 잘하면···.’
-이도훈 : 하하! 혹시 술 잘 마시세요?
-설수지 : 저보다 잘 마시는 남자는 본 적 없네요. 아직까진.
-이도훈 : 그럼 내일 대작 한 번 하실래요?
-설수지 : 혹시 도훈 오빠도?
-이도훈 : 네, 저도 취해본 적이 없어서요, 아직까진.
[아니. 왜 갑자기 안 하던 허세를 부리십니까?]
‘가만있어 봐. 일단 술로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 뒷일 생각 않고 던져봐야지. 못 먹어도 고야, 이럴 땐.’
과연 도훈의 호기에 수지가 곧장 덤벼들었다.
-설수지 : 자신감이 엄청나시네요. 혹시 주량이?
-이도훈 : 주량을 셀 수가 없네요. 보통은 배불러서 못 마셔서. 취한 적은 한 번도 없고요.
-설수지 : 하하. 괜히 제 앞에서 센 척하시는 거 아니에요?
‘센 척 맞아. 하지만 아이템의 도움을 받는다면, 주당이 되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렇지 로시?’
[음, 일단 마켓부터 검색해 보겠습니다.]
-이도훈 : 뭐, 내일 직접 보시면 알겠죠.
-설수지 : 좋아요. 그럼 저녁은 건너뛰고 바로 술 마시러 가요.
‘후후. 다행이군. 설수지가 이 정도로 애주가일 줄은. 내일 공략 수월하겠는데?’
물론 여전히 설수지 배후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수지 공략은 그것대로 진행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후를 캐는 쪽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때 수지가 또 다시 연달아 깨톡을 보내왔다.
-설수지 : 아니다. 괜히 술집가서 돈 쓰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방 잡고 노실래요?
수지의 깨톡을 읽던 도훈은 갑작스런 제안에 들고 있던 담배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눈을 비비고 자신이 문자를 잘 못 봤는지 다시 확인했다.
‘어랍쇼? 뭔 소리야 이건, 또?’
-설수지 : 아, 오해는 마시고요. 술집에서 시켜먹으면 괜히 가격만 비싸지잖아요. 그냥 마트에서 장 봐서 술을 사서 먹자고요. 그래야 많이 먹을 수 있으니.
-이도훈 : 사는 건 그렇다 치고, 어디서 마시죠?
-설수지 : 음, 오빠 혹시 자취해요?
-이도훈 : 네.
-설수지 : 자취방이 젤 좋긴 한데 처음 보는 사이에 다짜고짜 집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이도훈 : 그러니까요.
-설수지 : 전 도훈 오빠만 괜찮다면 모텔도 상관없어요.
‘가만, 이건 뭔가 이상한데?’
도훈이 본능대로 움직이는 인간이었다면 수지의 제안에 뒤도 안 따져보고 혹했을 것이다. 소개팅 첫날 모텔에 가서 술을 마시자는 여자를 거부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오늘 하루만 4명의 여자를 자빠뜨렸고, 3번의 진득한 사정을 했다. 한마디로 좆에 좌우되기엔 너무나 성욕이 감소한 상태였다. 좆의 지배를 벗어난 남자는 누구보다 현명하다. 그는 지금 한없이 현자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로시에게 물었다.
‘로시.’
[마켓을 검색 중입니다, 현재 숙취 해소를 시켜주는 아이템은···]
‘아니 멈춰봐. 뭔가 수상해.’
[네?]
‘방금 수지가 바로 모텔로 직행하자고 제안했어.’
[네에? 수지양이 먼저요?]
‘어. 술값 많이 드니까 술을 사가지고 모텔에서 먹자는데? 이 제안 어떻게 생각해?’
[함정입니다. 정상적인 반응으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 계집애가 지금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거지?’
도훈은 현자 타임에 근접한 상태였으므로, 그녀의 유혹을 냉철히 분석할 수 있었다. 만약 소개팅으로 알게 된 사이가 아니라 인터넷 같은 것으로 접촉한 사이였다면, 장기팔이나 인신매매까지 의심할 수 있는 혹한 제안이었다. 모텔로 갔는데 눈 떠보니 새우잡
이 배 위에 있다거나, 혹은 수술대에서 깨어나는 등 말이다.
‘아무리 봐도 설수지를 끌어들인 배후와 그녀가 한 패거리 같지 않아?’
[지금 반응만 봐선 그렇게 의심될 수밖에 없군요.]
‘흠,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도훈은 이제껏 설수지를 이번 사건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제삼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으로 봐선 처음부터 그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일단 받아야지.’
[함정임이 분명한데도요?]
‘난 솔직히 설수지는 설수지 대로 공략하고, 실제론 그녀를 조종한 배후를 찾아보려고 했어. 근데 만약 둘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면 설수지만 털면 나머지도 자연히 따라 나올 거 아냐?’
[하긴 그렇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수밖에.’
도훈이 작전을 변경했다.
-이도훈 : 그것도 괜찮겠네요.
-설수지 : 잘 됐네요. 오빠가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도훈 : 오해는요, 무슨. 수지씨가 제 주머니 사정 생각해줘서 고맙죠.
-설수지 : 암튼 방은 제가 예약할게요. 술은 오빠가 책임지실거죠?
‘장소까지 직접 섭외하려는 걸 보니 뭔가 확실히 있구나.’
도훈은 그녀의 장단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으나, 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했다. 설사 함정에 빠지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도훈 : 좋아요. 주종은 뭘로 할까요?
-설수지 : 당연히 소맥이죠. 섞어 마셔야 빨리 취하지 않겠어요?
-이도훈 : 오케이, 콜!
도훈은 집으로 가는 도중에 계속 깨톡을 주고받으며 대략적인 장소와 시간을 잡았다.
‘어차피 수지가 먼저 제안했으니, 모텔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성수형에겐 피해 가는건 없겠군.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집에 도착한 도훈은 내일 벌어질 술자리를 대비해 아이템을 검색하며 잠을 청했다.
***
한편 도훈과 약속을 정한 수지는 침대에 폰을 내던졌다.
마치 예상대로라는 반응이었다.
"어떤 미친년이 소개팅 자리에서 바로 모텔로 직행하자는 제안을 하니? 하여간 사내놈들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다니까?"
그녀는 자신의 제안을 도훈이 거부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자는 것도 모텔로 입성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흑막이 보내준 몰카형 만년필을 딸깍거렸다.
"그럼 이제 영상만 확보하면 되는 건가?"
그녀는 정체도 모르는 흑막에게 휘둘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먼저 선수를 쳐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흑막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도훈의 파멸. 그것을 미끼 삼아 흑막을 양지로 끌어내야 했다. 처단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두고 봐. 사람 함부로 가지고 놀았다간 혼쭐난다는 걸 깨닫게 해 줄 테니."
수지가 옷장 앞에 섰다.
내일 소개팅에 입고갈 의상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겉옷보단 속옷이 더 중요하려나?"
그녀는 수납장을 열어 안쪽 깊이 감춰둔 속옷을 꺼내 들었다. 인스타에 사진을 올릴 때 소품으로 쓰기 위해 몰래 구매해 놓았던 시스루 속옷 세트였다.
아직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어 그녀는 옷을 벗고 실착을 해보기로 했다.
"흠, 배란일이 다가와서 가슴이 좀 부푼 것 같은데···."
옷을 홀딱 벗고 전신 거울 앞에선 수지가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몸매를 점검했다.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 나이스 바디였다.
"이렇게 잘 빠진 여자랑 모텔에 들어가다니. 이도훈, 너 복 받은 줄 알아."
수지는 스스로 몸매에 도취 되어 한참 동안 나신을 구경하다 브라를 착용했다. 패드가 있을 부분은 시스루로 뻥 뚫려 있는 브래지어는 입으나 마나한 디자인이었다.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거뭇거뭇 드러난 유륜부와 도톰이 솟은 꼭지가 상상력을 자극하며 농밀
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후후. 예상대로 섹시하구나."
수지는 이어 시스루 팬티를 발목에 끼웠다. 뒤는 T팬티 스타일로 뽈록한 엉덩이가 여과 없이 노출되었고, 앞의 중요부위만 아슬아슬 천이 덧대져, 계곡 주변의 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건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분간도 안 되네."
실착을 마친 수지는 문득 새 속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이것을 이도훈 한 명에게만 공개하는 것이 아쉬웠다.
"밤도 적적한데 오빠들 물이나 빼게 해줄까?"
수지는 핸드폰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촬영했다.
워낙에 라인이 훌륭해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찍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사진이 나왔다.
인스타에 글을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이 폭발했다. 그녀는 실시간으로 댓글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댓글을 하나 하나 읽었다.
"풉-. 속옷 벗어서 아래 주소로 보내주면 50만원 쏜다고? 미친놈. 남이 입던 속옷을 왜 사니?"
한참 댓글을 읽어내려가자 수지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소위 댓글 강간이라 불리는 음탕한 말들에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오빠들 물 빼주려고 했는데 내가 빼게 생겼네."
그녀는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사이에 숨겨둔 소형 로터를 꺼내 들었다. 만에 하나 청소를 하러 온 엄마에게 들킬까 자위 도구는 꽁꽁 숨겨놓은 수지였다.
지이이이잉-!
메추리 알을 닮은 조그만 로터가 얇은 팬티 위를 스치고 지나가자 속옷만 입은 수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배란일이 가까워져서인지 평소보다 로터의 진동이 유달리 예민하게 느껴졌다.
"아앙-."
그녀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음란한 댓글을 음미하며 자위를 계속했다. 사진을 올린 직후 폭탄처럼 쏟아지는 댓글들은 그녀를 흥분시키는 강력한 최음제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노출사진을 올리는 것도 바로 그 반응을 즐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찌꺽찌꺽-!
어느새 팬티를 젖히고 손가락을 넣던 수지에게 쪽지가 한 통 도착했다. 바로 흑막의 메시지였다.
-gmrakr : 속옷 구경 잘했어. 내일 소개팅 때 입을 의상인가?
한참 자위에 몰입하던 수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분위기 깨는 데는 귀신이었다.
-SSG1004 : 왜요? 이젠 입을 속옷까지 지시 받아야 하나요?
-gmrakr : 아니야. 그런 건 알아서 잘하겠지. 섹스타로 유명한 설수지양께서 말이야.
"이런 썅!"
수지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기분을 잡친 수지는 신경질적으로 로터를 벽에다 집어 던졌다. 내구성이 약한 플라스틱 제품은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건전지와 분리된 모터가 동력을 잃고 부들거렸다. 수지의 내면에서도 뭔가가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 594. 거자필반-5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