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603화 (576/2,000)

< 585. 거자필반-45- >

병원으로 다시 들어간 도훈은 서현이 입원해 있던 4인실을 찾았다. 그러나 방금전까지 자신을 배웅했던 서현은 자리에 없었다.

"혹시··· 여기 박서현 환자분 어디 갔나요?"

"금방 나가던데? 화장실 갔으려나?"

맞은 편에 있던 다른 환자가 도훈을 알아보고 대답했다.

‘그 사이 나갔나 보네.’

멀리 못 갔을 거라고 판단한 도훈은 여자 화장실 쪽으로 서현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녀가 발견된 곳은 복도 끝의 휴게실이었다.

"박서현. 거기서 뭐해?"

"오빠?"

서현이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링거 걸이를 지팡이처럼 지탱한 채 주춤거리는 모습이 조금은 위태로워 보였다.

"몸도 안 좋다면서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어?"

도훈이 서현을 부축했다.

"다시 오신 거예요?"

"응. 애들 보내고 혼자."

도훈이 혼자 왔음을 강조했다.

"뭐 놓고 가셨어요?"

"너랑 할 얘기가 남은 것 같아서."

"저랑요?"

"일단 앉자."

도훈이 휴게실 의자를 뒤로 빼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서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착석했다.

"휴게실은 왜 들렀어?"

"···그냥요."

서현이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흘리는 모습에 도훈이 뭔가를 직감한 듯 물었다.

"왜? 아까 다른 후배들이랑 뭔 일 벌였을까 봐? 그거 확인하러 왔어?"

"······."

서현은 입을 꾹 다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도훈이 재차 물었다.

"너 성수 형한테 아까 이상한 얘기 했다며?"

"별 얘기 아니었어요."

"다 들었어."

"어차피 솔직하게 말해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뭘?"

서현이 주먹을 말아쥐더니 작심한 듯 물었다.

"전···. 오빠 생각보다 오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요."

"나에 대해 뭘 안다는 거지?"

"오빠 여자관계요."

"당최 무슨 소린 줄 모르겠군."

도훈이 입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을 했다.

"양희주, 육정음, 조교선생님···. 그리고 4학년 수정 선배까지."

"그 사람들하고 친한 건 사실이야."

"오빤 친한 여자랑은 다 자고 다니나 보죠?"

도훈은 서현이 생각보다 많은 비밀을 파악하고 있다는데 놀랐으며, 또한 그걸 꾹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희주랑 민주건만 들켰다고 생각했는데···.’

[나머진 막연한 추측이 아닐까요?]

‘하긴 물증이 없는 이상 발뺌하면 그만이지.’

"자고 다니다니?"

"그렇게 다 따먹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계속 오빠를 감시했으니까."

"뭐?"

"1학기 내내 오빠를 따라 다녔어요. 오빠가 누굴 만나는지 다 알고 있다고요."

도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스로 스토킹을 실토하는 집착녀에게 더이상 연기는 통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나오겠다면 나도 진심으로 받아주지.’

"좋아. 설사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네?"

"내가 누굴 사귀면서 양다릴 걸쳤니?"

"아뇨."

"아니면 내가 누굴 강제로 협박해서 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럼 상관없잖아."

"제가 상관있어요!"

"뭐?"

"저도···. 저도 오빨 좋아하니까!"

서현이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되면서 왜 저는 아닌 거죠? 다른 애들은 다 안아주면서 왜 저만 피하세요?"

"피한 적 없어."

"오늘만 해도 그래요. 기껏 병문안까지 와서 나연이랑 연두랑 놀았잖아요. 제가 그렇게 눈치 없는 줄 알아요? 과일 깎으러 간다던 사람이 20분 넘게 안 돌아오는데? 여기서 뭘 한 거죠? 솔직히 말해줘요."

"아무 일 없었어."

"끝까지 저를 바보 만드시는군요."

"너는 물증 하나 없이 네가 믿고 싶은 것만 믿잖아."

"여자의 직감이란 게 있어요. 오빠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런 사람인 줄 알면서 왜 나를 좋아한다는 거야?"

"모르겠어요. 내가 왜 오빠 같은 사람에게···."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순간 도훈이 서현의 손을 꼭 맞잡았다.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과 반창코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도훈이 말했다.

"서현아."

"네."

"내가 다시 찾아온 건 너랑 말다툼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럼요?"

"사실 난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 네 말대로 난 행실이 바르지 못해. 사귀지도 않으면서 여러 여자를 건드리고, 강제는 아니었을지언정 떳떳하지 못한 짓을 많이 했어. 그건 인정해."

"······."

덤덤한 도훈의 고백에 서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심증이 사실로 확정되는 순간이었고, 마지막까지 믿었던 한 줄기 희망마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고마워."

"···뭐가요?"

"나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지 않아 줘서."

"······."

"내가 많이 미웠을 거야. 일부러 피하고 외면했으니까. 그런데도 넌 내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

"물론 정도가 과할 때도 있었지. 특히 조교실 문을 때려부실 듯이 두들길 땐 살짝 겁이 날 정도였거든."

"그땐 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거죠? 들어가는 건 분명히 봤는데···."

"창문에서 뛰어내렸어."

"거, 거긴 3층이잖아요!"

서현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안 다치셨어요? 왜 그랬어요, 바보같이!"

그 와중에 자신을 걱정하는 서현의 모습에 도훈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집착이 심한 여자지만, 도훈에 대한 감정만큼 진심인 것 같았다.

"농담이야. 배관 타고 조심히 내려왔어."

"진짜요? 그때 창문 밑도 얼핏 본 것 같은데···."

"숨었지. 옆으로 이동해서."

"아···."

"아무튼 지난 일을 따질 생각도 없어. 난 그냥 너랑 다시 사이 좋게 지내고 싶어. 비밀 같은 거 숨기고 네가 언제 폭로할지 조마조마한 관계가 아니라, 예전처럼 친한 선후배 사이로."

"···그게 오빠 대답이에요?"

"난 아직 누굴 사귈 생각 없으니까."

"왜죠?"

"혼자가 좋아."

"알겠어요. 오빠 뜻을 존중할게요."

"고마워. 이해해 줘서. 그 말 하고 싶어서 온 거야. 다른 사람들 있는데 서는 못 하겠더라고."

"오빤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알고 있어."

"분명 후회할 날이 있을 거예요."

"매일 매일을 후회해."

"거짓말."

"맞아. 솔직히 후회 같은 건 안 해. 후회하고 살기엔 너무 짧은 인생이거든."

"무슨 인생 다 살아본 사람처럼 얘기하시네요."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언젠간 너도 알게 될거야."

"전 정말 오빠가 미워요."

"미워해도 할 말은 없어."

"만약 제가 오빠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면 어쩌시려고 했어요?"

"글쎄? 협박이라도 했을까나?"

"협박요?"

"뭐 그런 거 있잖아. 강제로···. 영상 같은 거 찍어서."

"세상에!"

"물론 농담이야."

"방금 저 엄청 흥분했잖아요."

"엥?"

"계속 말해봐요. 무슨 동영상을 어떻게 찍을 건데요?"

도훈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는 서현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얘는 역시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숭을 벗고 모든 걸 내려놓은 느낌인데요?]

‘음, 그래. 어차피 상식 개변할 건데 멋대로 지껄여 볼까?’

"뭐 상상하는 대로야. 실컷 따먹고 육변기로 만들어 버리는 거지. 쾌락에 절어서 허덕이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긴 다음 협박하려고."

"그래서 매일 불러서 따먹겠군요."

"그렇지. 심심할 때마다 불러서 정액받이 시키는 거지."

서현이 다리를 꼬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도훈이 필터링 없이 쏟아내는 음담패설에 바짝 달아오르는 모습이었다.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저를?"

"네가 정말 날 협박했다면 말이야."

"진작 협박해 버릴 걸 그랬네요."

"무슨 뜻이지?"

"오빠한테 강제로라도 당해버릴 걸 그랬다고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네. 아니, 사실 독차지하고 싶었어요.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오빠가 다른 여자랑 놀아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짜증 나고 화가 났어요."

"그런데?"

"그런데···. 오빠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저도 툭 까놓고 얘기할게요."

"응."

"오빠가 다른 여자랑 하는 걸 생각하면 흥분됐어요."

"···뭐?"

"진짜로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를 박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여기가···."

서현이 링거를 꽂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매만졌다. 인적이 드문 휴게실이라곤 하나 너무도 대담한 동작이었다.

"···막 여기가 찌릿찌릿하더라고요."

도훈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너 변태구나."

"오빠도 만만치 않죠."

"그래서 아까 흥분해서 성수 형한테 쪼르르 일러바친 거야?"

"네. 병문안까지 와서 그러는 건 너무하다 싶었죠. 아무리 그래도 저를 눈꼽만큼이라도 배려했다면 나연이랑 연두랑 여기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했잖아. 별일 없었다니까."

"찾아보니 콘돔은 없더군요."

"너 쓰레기통 뒤졌어?"

"네."

"진짜 대단하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병원 휴게실에서 떡을 쳤겠니?"

"오빠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를 너무 안다고 자신 하지마."

"정말 아니에요?"

집요하게 물어오는 서현의 반응에 도훈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서현이 저거 완전 네토라레 성향이구나.’

[NTR인가 하는 그거요?]

‘그래.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랑 붙어먹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거 말이야. 그래서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꾹 참았던 거야. 결국은 그게 자신을 흥분시키는 원동력이거든.’

[허-. 보통 사람은 아닌 줄 알았지만, 정말 지독한 변녀였군요.]

‘물론 눈앞에서 그랬으면 이성을 잃고 흥분했겠지. 민주랑 조교실에서 일 벌였을 때 보면.’

[근데 어쩌시려고요?]

‘내가 서현이 따먹은 적 없지?’

[네. 한 번도 없으셨죠.]

‘저렇게 날 원하는데 소원성취시켜주려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데 산 처녀 소원을 못 들어줄까.’

"했으면?"

"했어요?"

"콘돔이 없다는 게 안했다는 증거는 아니지."

"설마 생···. 개새끼."

"뭐?"

"아니에요. 말이 헛나왔어요."

"너 생각보다 입이 거칠구나?"

"제가 공부만 하는 범생인줄 아셨어요?"

도훈은 서현의 정보창을 들여다보고 그녀가 생각보다 일찍 처녀를 잃었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전혀. 발랑 까진 계집앤 줄 알고 있었어."

서현이 씩 웃었다.

"어딜 봐서요?"

"난 여자 많이 만났어. 네 생각보다 훨씬. 그래서 딱 보면 대충 사이즈가 나와. 얘는 처녀구나. 얘는 경험 좀 있겠구나. 얘는 뒤치기를 좋아하는 구나. 얘는 후장도 대주겠구나."

"그게 정말이에요?"

"뭐든 많이 하면 능숙해 지는 법이니까."

"저는 뭘 좋아할 것 같은데요?"

"넌···."

도훈이 멈칫했다.

정보창으로 그녀의 성감대나 핀포인트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지 망설여졌다.

‘너무 능력을 사용했다간 저 의심 많은 성격에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조금 틀리는 것이 좋겠어.’

"왠지 세게 박는 걸 좋아할 것 같군."

"음··· 그리고요?"

"겨드랑이가 성감대일 것 같아."

"또요?"

"2대1 경험도 있을 것 같고."

"전부 틀렸어요."

"아니야?"

"순 허풍쟁이였군요."

"검증해보면 알겠지."

"여기서요?"

"왜? 더 좋은 장소 있어?"

서현이 눈치를 살폈다.

거의 일주일 가까이 병동 생활을 했으니만큼, 병원 지리에 대해 나름 빠삭한 편이었다.

"이쪽으로 따라와 보세요."

서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도훈을 데리고 간 곳은 환자용 세면장. 장애인용 화장실처럼 안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면 밖에선 열 수 없는 구조였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보호자들하고 함께 샴푸를 하는 곳이에요."

"아···."

"그래서 같이 들어가도 전혀 의심하지 않죠."

"남자랑 들어가도?"

"남자친구라고 생각하겠죠."

"난 네 남자친구 아닌데?"

서현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젠 상관없어요."

***

"그래서 거기다 참외를! 어머 웬일이니!"

지하철에서 내린 연두와 나연은 아까 도훈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깔깔거렸다. 아까까지 캣파이트 벌이던 사이라곤 믿기지 않는 친근감이었다.

한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바이섹슈얼인 연두의 입장에선 둘 다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성된 기묘한 삼각관계였다.

두 사람은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도훈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이것저것 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참 동안 맥주와 안줏거리, 컵라면 등을 고른 두 사람은 매대에 상품을 올려놓았다. 그때 연두가 2+1로 묶음 판매를 하고 있는 간식용 소시지를 보고 말했다.

"나연아. 우리 이것도 살래?"

"3개씩이나 필요해?"

"남는 것 하나는 먹지 뭐."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알바생이 놀란 듯 눈을 껌뻑였다.

편의점을 나온 나연과 연두는 또 다시 깔깔거렸다.

"어우야, 편의점 알바 놀랬겠다. 너 일부러 그랬지?"

"응. 아까 컵라면 고르려고 쪼그려 앉는데 은근히 내 다리를 훔쳐보더라고."

"너 지금 노팬티라지 않았니? 계집애, 조심해."

"거기 바나나 향기 풍기는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거 같은데?"

"뭐? 하여간 도훈 오빠도 짓궂다니까. 아까 안에 들어간 조각 꺼내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일단 가서 씻자. 나도 땀흘려서 찝찝해."

"같이?"

"당연하지."

"힝, 오빠 오기도 전에 너한테 당하는 거 아니니?"

"왜? 안 하려고 그랬어? 오빠 오기 전에 물 좀 빼놔야지."

"내가 그렇다고 마를 것 같니?"

"들켰어?"

두 사람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자췻방으로 들어갔다.

< 585. 거자필반-4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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