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9. 거자필반-39- >
***
[미션을 성공하셨군요.]
로시가 강간 플레이 미션의 성공을 알렸다.
섹스가 끝난 뒤 경희는 기절한 것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쾌락에 절은 채 숨을 헐떡이는 그녀에게 뒷정리를 맡긴 후 유유히 창고를 빠져나왔다. 전형적인 먹튀였지만, 대물 맛에 중독된 경희가 당분간 잠잠해 지낼 것이라 확신했다.
테니스 코트를 빠져나가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섹스 뒤 몰려오는 탈력감을 회복하는 데 담배만 한 것이 없다.
‘어쨌든 경희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었군. 또 헛걸음이라니···.’
[대상자가 한 명 더 줄었다는데 의의를 찾아야겠죠. 겸사겸사 미션도 하나 해결하셨고요.]
‘남은 사람은 이제 마유미와 박서현뿐인가? 서현의 소재는 대충 아는데, 유미는 어디지?’
[유미 양은 현재 부산의 모 대학으로 나옵니다. 제 생각인 데, 대학 리그를 치르느라 전국을 돌아다니는 유미 양에게 이런 음모를 꾸밀 여력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군요.]
‘나도 동감이야. 그래서 처음부터 배제했던 거고.’
유미는 체육교육과의 학회장이기도 하지만, 국성대 여자 배구부의 간판스타다. 원정 경기를 오가며 대학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찬 와중에 나를 해코지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찜찜함은 남아있다.
그녀의 변태력은 내가 아는 모든 여자 중에서 으뜸이다. 또 지난 MT 이후 제대로 상대해 준 적이 없어 나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쌓여있는 상황이다. 그런 그녀가 나의 호색행각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다면?
분명 내 머리통을 배구공으로 여기고 뒤통수에 스파이크를 꽂아 버리고도 남을 여자다. 그녀는 능히 그럴 능력과 실행력을 갖췄으니까.
[아니면 처음 예상대로 박서현 양이···.]
‘서현이도 유력하지. 다만 병원에 입원했다는 점에서 의문이 남지만.’
서현이 또한 정상은 아니다.
내가 자기한테 뭘 한 것도 없는데도 한동안 끊임없이 나를 쫓아다니며 감시를 자청한 이력이 있다. 소위 스토킹을 당한 셈인데, 조교 강민주에게 걸려 혼쭐이 나고서는 한동안 잠잠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면 언제든 극단적인 행동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구역의 미친년이랄까?
‘어쨌든 둘 다 동기는 충분해. 이제 배후는 둘 중 하나로 압축되었다고 봐야지.’
[그렇담 그나마 가까운 서현 양을 방문하는 게 먼저겠지요?]
서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한동안 다른 사람부터 들쑤셨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렇지. 오늘 오후 병문안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병원이 어딘지, 병실이 몇 호 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먼저 찾아갈 순 없는 일이었다. 명분도 없고, 자칫 다른 이들의 오해를 사기도 딱 좋다.
다행히 체육과 내에서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돌았고, 집행부 대표로 성수와 2학년 중에선 내가, 마지막으로 1학년에선 시간이 맞는 두 사람이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병문안을 갈 시간이 되었다.
"오빠, 오셨어요?"
"어제 뵙고, 또 뵙네요."
약속 장소에 먼저 와 기다리던 연두와 나연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인사했다. 실은 이 두 사람 역시 어제 조사를 했지만, 혐의가 없어 배제된 상태였다.
원래는 수업을 같이 듣는 정음과 함께하려고 했지만, 알바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두 사람이 대신하게 됐다. 사실 이 둘의 목적은 서현의 병문안이라기보다는 어제 바빠서 못다 한 나와의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인 것 같다.
‘피곤하게 됐군. 얘네들 때 놓는 것도 일이겠는데···.’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기다리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성수가 등장했다. 커다란 덩치에 한 손엔 꽃다발을, 나머지 한 손엔 과일바구니를 들고 오는 모습이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연두가 화사한 꽃다발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농을 건넸다.
"어머, 오빠. 설마 저 주시려고 사 오신 건 아니죠?"
연두가 꽃다발을 받기 위해 두 팔을 내밀자 성수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 아니. 연두야 이건 서현이 줄 선물인데···."
"아잉, 섭섭해라. 서현이만 꽃다발 주고. 저도 꽃 좋아하는데."
연두가 특유의 장난기를 부리며 애살을 부렸다.
"오빠, 꽃다발은 연두 주시고 저는 그럼 실리를 챙기겠어요."
이번엔 반대편에서 나연이가 과일바구니를 건네받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에 선물을 뺏기고 만 성수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허 참, 녀석들···."
그는 남자들 앞에선 카리스마가 넘쳤지만, 여자 후배들에겐 유독 쩔쩔매는 타입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여동생이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1학년 여후배들에겐 특히 싫은 소리를 못 했다.
결국, 중간에 내가 나서 교통정리를 해야 했다.
"그래. 선배가 들고 가는 것보다 동기들이 들고 가는 게 모양새가 좋겠지."
불쑥 끼어들어 두 사람을 짐꾼으로 전락시킨 나는 성수에게 물었다.
"그럼 출발하실까요?"
"어. 알아봤는데 정문에서 광역버스 타면 40분이면 가더라."
차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네 사람이 움직이는 데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다니···. 그래도 아직 어린 애들이라 그런지 큰 불만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나는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조잘거리는 나연과 연두를 앞서 보낸 뒤 성수와 뒤따르며 대화를 나누었다.
"자비로 사 오신 건 아니죠?"
"뭘?"
"꽃다발이랑 과일요."
"아니야. 총무한테 말해서 학과 운영비에서 지원받았어. 그래도 소속 학생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학과 차원에서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근데 왜 형이 직접 사오셨어요? 애들 시키시지 않구선."
나는 앞서 걷는 나연과 연두를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꺄르르 웃으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남자애들이면 그냥 시켰을 텐데 여자 후배들은 왠지 부담스럽더라고."
역시 호구다.
가만 보면 기사도니 젠틀맨이니 하면서 여자들에게 유독 배려가 깊은 남자들이 있다. 성수가 그런 전형적인 남강여약 스타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여자 후배들에겐 늘 매너남으로 통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형이 너무 잘해주니까 애들이 기어오르잖아요."
"뭘 또 기어올라? 그냥 장난치는 건데."
"형. 쟤들이 태영이 같은 남자 후배였다고 생각해봐요."
"태영이? 아 맞다, 너 그 소식 들었냐?"
"뭐요?"
성수가 중요한 얘기인 듯 목소리를 낮추더니 속삭였다. 앞서가는 두 사람에겐 들리지 않게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내가 연극부에 아는 동기가 하나 있거든. 사회교육과 3학년인데 옛날에 농활 갔다가 친해져서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사이야."
연극과라면 태영이가 들어간 그 동아리인가?
"그런데요?"
"걔랑 어제 통화하는데 느닷없이 태영이 얘기를 하더라고."
"왜요?"
"너 최근에 태영이 본 적 없지?"
"음, 이틀 전에 같이 체육관에서 샤워했어요. 수업 끝나고."
"그니까. 그게 아마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마지막이라뇨?"
"태영이가 요새 학교를 안 나와."
"무단결석이라고요?"
"어. 근데 나도 어제 걔한테 듣고 나서 뭔 일인지 알았잖아."
"무슨 일인데요? 혹시 걔 또 뭔 사고 쳤어요?"
"사고라기엔 음···."
성수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태영이 걔 동방에서 딸치다 걸렸던데."
"예?"
이게 무슨···.
한동안 정적이 우리 둘 사이에 감돌았다.
"글쎄 이 미친놈이 동방 문 혼자 걸어 잠그고 바지 벗고 딸치다 문 따고 들어온 선배들한테 딱 걸렸다는 거야."
"하-."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여자랑 섹스도 아니고 딸치다 걸리다니.
"설마 여자는 아니죠? 들킨 사람이."
"어, 다행히. 어쨌든 그날은 어떻게 넘어갔는데 지도 쪽팔린 줄은 알는지 아예 학교를 안 나오고 있더라는 거야."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러니까. 그 새끼도 참···."
이틀 전이면 태영이 샤워실에서 내 몰카를 찍으려던 날이다. 헤어진 그 뒤로 동방에 틀어박혀 딸을 치다 걸렸다는 건데, 왠지 설수지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아무튼 최대한 소문 안 낸다고 했는데, 솔직히 그런 일이 소문이 안 날 수 있겠냐? 가뜩이나 미투다 뭐다 해서 대학 내 성추행 범죄 사례가 대나무 숲 같은데 올라오는 마당에."
"그래도 엄밀히 말하면 추행은 아니잖아요. 지 혼자 딸치다 걸린 건데."
"목격자들이 남자였기 망정이지 여자였다 생각해봐. 순식간에 바바리맨 되는 거야."
"아···. 진짜 걔는 가끔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모르겠어요."
"내 말이. 별명도 아주 화려하게 붙었더라고."
"뭔데요?"
"동방 딸잡이라나?"
하-. 진짜.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누굴 원망하기도 뭐했다.
어마어마한 흑역사를 기록한 태영에게 해줄 말은 하나뿐.
"···그냥 군대 가야겠네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좀 있음 소문 쫙 돌 텐데 쪽팔려서 학교 못 다니지. 너도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여친부터 사귀어. 소개팅 언제라고 했지?"
"내일요. 근데 왜 불똥이 저한테 튀어요?"
"인마. 태영이가 여친이 있었어봐. 대낮부터 동방에서 딸치다 걸렸겠냐?"
"여친 없는 애들이 태영이처럼 다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만큼 젊은 혈기에 사고 치기 쉽다는 거지."
"알아서 잘 할게요."
성수는 내가 알아서 잘 먹고 다니는 것을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당장 눈앞에서 나연이랑 연두만 해도 내 좆집 콜렉션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소개팅 얘기가 나온 김에 성수에게 물었다.
"참, 형 그 설수지라는 여자분 있잖아요."
"소개팅녀?"
"네. 형 여친 친구라고 했죠?"
"어. 고등학교 동창."
"학교 다닐 땐 어땠는지 들은 거 있어요?"
"지금 뒷조사하는 거야?"
"저보고 소개팅 잘 하라면서요. 기왕이면 상대에 대한 정보가 있는 편이 좋죠."
성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다. 사실 둘이 많이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아, 맞다. 집이 엄청 잘 산댔어."
"그 얘긴 그때 하셨어요. 법조인 집안이라고."
"응. 근데 진짜 잘사는 것 같더라.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맨날 학교 정문까지 태워주셨는데, 엄청 큰 외제차 였다나? 마이바흔가, 뭔가."
"공부 잘하고 돈 많은 거 말곤 없어요? 사생활이라던가."
"사생활?"
"그러니까 뭐 남자친구나···."
"남자는 무슨. 걔 완전 범생이였다는 것 같던데? 남자 사귄 적도 없데."
"한번도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확실히. 그리고 집이 엄청 엄해서 대학교 와서도 남자 만난 적 없을걸?"
남자를 만난 적도 없는데 그런 변녀라는 거야?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처녀빗치도 아니고.
성수가 뭔가 생각나는지 덧붙였다.
"아아. 교회다는 다는 얘기는 들었다."
"교회요?"
"아버지가 그 교회 권사님이던가 장로던가? 아무튼 되게 독실한 집안이라고 들었어. 주일마다 예배 꼬박꼬박 다닌다고."
흐음.
법조인 집안.
교회녀.
처녀빗치.
굉장히 특이한 조합이다.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원래 교회 다니면 연애 몰래몰래 잘하지 않아요? 교회 오빠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도 아니고."
"하긴 거기서 남자를 만났을지도 모르지. 근데 왜? 혹시 처녀가 아닐까 봐 걱정돼? 푸하하. 얀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요즘 같은 세상에 처녀가 어딨냐?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해?"
하긴. 앞에서 팔짱 끼고 걷는 나연이랑 연두도 처녀가 아니긴 하지. 내가 맛있게 따주었으니.
정류장에 도착한 우리는 때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좌석이 흩어져 있어 맨 뒷자리 두 개가 비어 있었다. 성수가 매너남답게 양보했지만, 아까 나한테 한 소리 들은 터라 나연과 눈치가 내 눈치를 보며 자리를 사양했다.
"부회장님 앉으세요."
"저흰 서서 갈게요."
"아냐. 그러지 말고 앉어. 너희들 선물까지 들었잖아."
성수가 재차 권했지만, 나연과 연두는 한사코 사양했다.
"도훈이 너가 앉아라."
성수가 옆자리를 권하는데 버스 앞쪽에 한자리가 났다.
"전 그냥 저쪽에 앉을게요."
자리로 재빨리 뛰어가 앉는데, 과일 바구니를 든 나연이 쪼르르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니 성수 옆에는 연두가 앉아 있었다.
"오빠, 이것 좀 맡길게요."
나연은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를 내 무릎 위에 얹었다.
"넌 왜 나 따라와?"
"저긴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뭐에요? 저랑 같이 있는 게 싫은 거예요?"
나연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자리 때문에 우연히 갈라진 우리는 한 버스를 타고도 두 사람씩 나눠서 가게 되었다. 한참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나연이 허벅지를 주무르며 눈치를 줬다.
"아이고 삭신이야. 어제 체조 수업 너무 열심히 했더니 다리가 아파 죽겠네요."
"응. 그래."
상대하기 귀찮은 티를 내며 무시하자 나연이 끝내 언성을 높였다.
"진짜, 오빤. 어쩜 여자한테 양보도 안 해줘요?"
"네가 여자였어?"
"그럼 남자예요?"
"그냥 후배지."
"흥, 진짜 못 됐어. 애정이 식었네 확실히."
"무슨 소리야?"
"솔직히 그렇잖아요. 그때 저희 자췻방에서···."
"야야!"
맨 뒷자리에 앉은 성수가 들을 리가 없었지만 나는 다급히 나연의 입을 막았다. 나연이 여우처럼 씩 웃으며 물었다.
"왜요? 그 얘기 하니까 쫄려요?"
"사람들 다 있는 왜 그래?"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이고 다리야."
계속 불평을 늘어놓은 나연의 등쌀에 못 이겨 결국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앉아라 앉아. 두 발 튼튼한 내가 양보해야지."
나연은 신이 나서 잽싸게 자리에 앉더니 과일바구니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 신나라. 연두한테 자랑해야지? 오빠가 자리 양보했다고."
"별걸 다 자랑하네."
"왜요? 우리 내기도 했는데요?"
"무슨 내기?"
"오늘 둘 중에 누가 오빠한테 먼저 먹힐지."
아니, 이것들이 진짜.
< 579. 거자필반-3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