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9. 거자필반-29- >
처음엔 무슨 처키 인형을 보는 줄 알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희주는 흰색과 빨간색이 교차되는 단가라 셔츠에 살짝 오버핏처럼 보이는 데님 멜빵을 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윽, 눈 갱!’
그뿐이 아니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몰라도, 희주는 양 갈래로 땋은 삐삐 머리를 하고 있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패션에 나도 모르게 욱하고 말았다.
"넌 무슨 옷차림이···."
"어때요? 패션 죽이죠?"
그래.
입고 나온 사람을 죽이고 싶은 패션인 것 같긴 하네.
희주는 내 마음도 모르고 한술 더 떴다.
"요샌 깜찍한 여자가 인기라잖아요, 데헷."
주근깨 많은 얼굴로 방긋 웃어 보이는 희주는, 깜찍을 넘어 끔찍한 지경이었다. 나라면 도무지 저 몰골로 학교를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학떨목 벤치 앞에서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는 내 자신이 무척 창피해졌다. 저런 못난이 처키와 친하게 지냈다간 괜히 나까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어머, 희주 오늘 예쁘네."
"고마워."
희주를 아는 사람이 지나가며 그녀에게 덕담을 건넸다.
여자들은 참 희한하다.
잘 보면 꼭 이쁘지도 않은 애들에게만 이쁘다는 칭찬을 한다. 자기보다 예쁜 친구는, 절대 소개팅에 데려오지 않는다는 법칙과 비슷한 확률이다.
"수업 가는 중 아니었냐?"
"아뇨, 끝났는데요?"
희주가 눈치도 없이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앉는 동작이 트리거 된 것처럼, 나는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섰다.
"생각해 보니 내가 수업이 있구나."
"오빠 오늘 수업 끝이잖아요."
"응?"
"화요일 오후 수업 없는 거 뻔히 다 아는데 왜 이러실까나?"
귀신 같은 년.
아니 처키 같은 년.
어느새 나의 시간표를 쫙 꿰고 있었군.
"실은 도서관 가서 공부하려고."
머쓱해진 표정으로 둘러댔다.
"헹, 여자 만나러 가는 거겠지."
"···뭐?"
"오빠가 뭐 저만 있겠어요? 잘 지치지도 않으면서."
학생들 오가는 학떨목 벤치에 앉아 큰 소리로 떠드는 희주의 모습에 소름이 돋아났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표정을 싹 굳히며 말했다.
"야. 너 입조심 해."
"그러니까 잠시만 여기 앉아봐요. 오빠한테 물어볼 거 있단 말이에요."
희주가 벤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겼다. 마치 내 비밀이 까발려지는 게 싫으면 당장 시키는 대로 하라는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졌다.
그러잖아도 설수지를 지시한 배후를 찾느라 예민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희주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맞아. 양희주를 빼먹었군. 워낙에 질질 흘리고 다니는 년이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얘도 나의 행실은 대충 알고 있잖아?’
나는 주로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투영하는 편이다.
피학적 취향의 여자에겐 채찍을.
교회 오빠 스타일을 원하는 여자에겐 부드러운 훈남의 모습을.
그리고 끼 부리는 걸 좋아하는 여자에겐, 껄떡거리는 난봉꾼처럼 말이다.
희주는 원체 발랑 까진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 또한 쿨하게 대했었다. 심지어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노래방에 불러 따먹을 적도 있었다. 희주 역시 내가 어떤 사람인 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얘도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로시, 마음의 소리 가능해?’
[아까 태영군에게 쓰셔서 아직 쿨타임이 필요합니다.]
‘크흠. 정보창은?’
[역시 1시간 안 되게 남아있습니다.]
‘곤란하게 됐군.’
[일회용 아이템을 사시는 방법도 있죠.]
‘됐어. 1시간 뒷면 확인할 수 있는 걸 굳이 포인트까지 쓸 필욘 없지.’
나는 별수 없이 그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희주 속내를 읽어내려면 최소 한 시간은 꼼짝없이 함께 있어야 했다.
‘의심 가는 사람을 하나씩 소거하는 게 가장 확실하니까.’
"물어볼 게 뭔데?"
협박을 당했기 때문에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한 상태였다.
"에이, 장난인데 삐졌어요?"
"······."
"이런 데서 누가 남의 말은 듣는다고요, 참나."
"시간 없으니까 얼른 질문이나 해."
"아, 다름 아니고요, 교양수업 교수님께서 설문조사 과제를 내주셨거든요."
"설문조사라니?"
"주제 하나를 잡아 앙케이트 식으로 조사해 오는 거예요. 성과 문화 수업인데 이런 걸 내주네요?"
"넌 뭘로 정했는데?"
"남자의 자위행위요."
"야이 씨!"
어처구니가 없어 소릴 지르는 데 희주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한번만 도와주세요. 제가 이런 걸 누구한테 물어보겠어요."
"남자친구 있잖아."
"걔한텐 진작 물어봤죠. 근데 여러 명한테 해야 하는 거란 말이에요. 통계조사니까."
끙-.
"아무튼 여긴 너무 공개적이야. 누구라도 대로변 한복판에서 그런 예민한 질문을 받으면 곤혹스러울 거라고."
"오빠라면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야. 나도 대외적인 이미지라는 게 있어."
"아···. 겉으론 순진한 척하시니까. 알겠어요, 제가 커피 한 잔 쏠게요."
희주가 선심 쓰듯 말했다.
귀찮아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일단 결백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2,000원짜리 싸구려 커피를 들고 구석에 자릴 잡은 희주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설문이 담긴 질문지였다. 그녀는 싸인팬을 꺼내 테이블에 셋팅하더니 자세를 잡았다.
"금방이면 끝나요."
"되도록 큰 소리로 말하지 마."
"왜요?"
"몰라서 물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사람들이 네 삐삐 머리 보고 힐끔거려서 같이 있기 쪽팔려 죽겠단 말이다!
전부터 느꼈지만, 희주는 못생긴 얼굴에도 유달리 자신감이 넘치는 타입 같다. 아마도 그것은 저 멜빵 안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몸매 덕분일 테지.
지금도 멜빵 고리 옆트임 사이로 불룩 튀어나온 가슴이 상당한 볼륨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목 아래만 떼놓고 보면 사기 캐릭임엔 분명하다.
음, 빻은 주제에 좀 꼴리긴 하네.
"···설문 내용이 좀 그렇잖아."
"후후-. 오빠 의외로 순진하시네."
"뭐?"
"여자랑 단둘이 있을 땐 안 그렇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질문이나 해."
"흥, 까칠하게 굴긴. 알겠어요. 우선 신상부터. 이름이요."
"알고 있잖아."
"제 설문에 진지하게 응해주실래요? 나름 커피까지 사드렸는데."
"참나···. 이도훈."
희주가 볼 펜을 들고 이름을 받아 적었다.
"나이는요?"
"스물셋."
"아, 오빠 스물셋이었어요?"
"왜?"
"전 이제까지 둘인 줄?"
"스무살 때 1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가 스물하나, 스물둘 군대서 보내고 올해 복학했잖아. 그러니 셋이지."
"글쿠나. 전 군대 1년 인줄 알았잖아요."
어휴-.
빻은 것도 모자라 상식도 좀 부족하군.
얘는 어떻게 우리 과를 왔지?
아, 맞다. 정음이도 살짝 백치미가 있었지? 사범대라곤 하지만 체육과는 가장 수능 비중이 적은 학과다. 아마도 희주는-거의 100% 확신이지만- 정음이처럼 몸으로 때우는 타입임이 틀림없다. 몸매만 봐선 운동도 곧잘 할 것 같긴 하다. 가슴이랑 엉덩이는 빵빵하면서 허리는 잘록한 게 의외로 날렵해 보인다.
"흠흠, 아무튼 설문 들어갑니다. 당신은 자위를 해본 적이 있나요?"
"좀만 작게 물어봐 줄래?"
"왜요? 일부러 사람들 안 보이는 데로 자리 잡았는데."
희주와 내가 앉은 곳은 커피숍에서도 맨 가장자리 공간이었다. 앞에 [STAFF ONLY]라고 적힌 공간 덕에 다른 테이블이 붙어있지 않은 구석자리.
"아무튼 자위라고 하지 말고 좀 순화해서 표현해봐. 듣기 민망하니까."
"그럼 응응 으로 하죠. 오빤 응응 해본 적 있어요?"
어째 더 야한 것 같다만···.
"있지."
"헤에. 역시 남자들이란."
"왜 또 남자가 나와?"
"남친이가 그러더라고요. 남자들은 싹 다 응응 한다면서."
"안 하는 사람도 있어."
"물론 고자 빼고요."
"스님이랑 신부도 빼."
"아무튼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고 했어요. 오빠는 얼마나 자주해요?"
"별로."
"에이, 솔직하게."
"진짜로 안 해."
"왜요?"
"할 필요가 없으니까."
정말이다.
있는 여자들 관리하느라 정액이 마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돈데 혼자 뺄 일이 어딨겠는가?
하지만 희주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테이블 위에 꽃받침 자세로 턱을 받쳐드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아우, 저 삐삐 머리 붙잡고 뒤치기 해버릴까 보다.
"흥, 뭐 좋아요. 그렇다고 치죠. 그럼 가장 최근에 해본 응응은 언제에요?"
"기억도 없어."
이 또한 진실이었다. 이도훈으로 다시 태어난 뒤부터 자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전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도 없다.
"여자가 해준 것도 포함요."
"응?"
"대딸 말이에요."
"아니 진짜 넌!"
서슴없이 상스러운 소릴 지껄이는 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이 미친년은 MT가는 버스 안에서 남 몰래 젖통까지 들춘 희대의 또라이 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역시 희주양은 발랑 까진 게 매력이군요.]
‘발랑 까지다 못해 껍질까지 벗겨진 년이지. 이런 애가 선생된다고 사범대를 왔다니, 세상이 말세군.’
[지금 똥 묻은 개가 겨 묻었다고 나무라시는 겁니까?]
‘흠.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로시가 정곡을 찌르자 할 말이 없었다.
희주도 자유분방하지만 내 여성편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밖에 안 될 것이다.
"그건 있구나?"
"근데 그걸 어떻게 자··· 응응 으로 치냐?"
"왜요? 넣어서 안 하면 다 딸딸이지."
"나 참."
"가장 최근이 언제에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대딸이나 입싸만으로 가기엔 내 정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잘 기억이···. 응?"
그때 불쑥 테이블 밑에서 뭔가 내 정강이를 툭 건드렸다.
밑을 내려보니 희주가 캔버스 운동화를 벗은 맨발로 내 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뭐하냐?"
"아니 혹시 그건가 해서요."
"뭐?"
"불감증."
"무슨 소리··· 야, 야, 야!!!"
그녀의 발은 대담하게도 내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들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건을 자극하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워워, 그러다 들켜요♥"
희주는 교묘하게 내가 남들 앞에서 조심스러워 한다는 걸 역이용했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커피숍에서 내가 저항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 빻녀가 진짜!’
[크큭. 희주양은 정말이지, 못 말리겠군요.]
"음, 확실히 잘 안서는 건 같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서는 줄 알아?"
"자극이 부족했나?"
희주가 한 다리를 허벅지 사이에 밀어 넣은 채 갑자기 멜빵 양쪽을 풀어 내렸다. 그러자 스트라이프 무늬 덕에 유독 도드라진 그녀의 빵빵한 가슴이 드러났다. 한 치수 작게 입은 게 분명한 그녀의 셔츠는, C컵에 달하는 그녀의 젖통을 도발적으로 과시하고 있었다.
‘흡! 진짜 몸매는···.’
"어때요? 자극 좀 돼요?"
"대체 나한테 왜이러는 거야?"
"오빠가 내 설문에 불성실하니까 그렇죠."
"너 이러면 남자친구한테 안 미안하냐?"
"흥. 남친 있는 여자 실컷 따먹을 땐 언제고?"
"아니 그건···."
"신경쓰지 마요."
"응?"
"그때 걔랑은 또 다른 애거든요."
"헐, 그새 바뀌었어?"
"그 새 라뇨. 한 달도 지났구만. 게는 너무 못했어요."
"그래서 갈아치웠다고?"
희주가 쉼 없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근데 문제는 새로 사귄 애도 영 시원찮다는 거예요."
"허 참."
"하여간 어린 것들이 맥아리가 없어가지고는. 오빠가 딱 좋았는데. 어, 커졌다."
"너라면 안 그러겠냐?"
"후훗. 그럼 난 안 그래요."
"장난쳐?"
"한 번 시험해 보시던가요."
희주가 발을 내리더니 갑자기 두 다리를 쩍 벌렸다. 아무리 외진 자리라고 한들 공공장소에서 이런 똘끼를 보일 줄이야.
[여윽시 희주다, 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네요.]
‘어설픈 유행어 따위 집어치워, 얘는 또라이야.’
[살짝 나사가 풀린 것도 매력이지요.]
"들어와 봐요, 어서."
"하라면 못 할 줄 알고?"
나 역시 신발을 벗어 전방으로 다리를 쭉 뻗었다.
이번엔 내 다리가 희주의 멜빵바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흐응, 분위기 한결 좋네요. 계속해 볼게요. 아무튼 최근에는 자위를 안 해봤다 이거죠?"
"그래."
일부러 발끝에 힘을 바짝 주어 가운데를 찔렀으나, 희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문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데님의 두꺼운 소재가 자극을 무디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질문. 과거에 자위를 했을 때 연속으로 몇 번까지 쳐봤어요?"
"무슨 설문이 그 따위야?"
"대답해 봐요. 참고로 제 현 남친은 다섯 번 연속까지 성공했데요. 병신새끼, 박을 때나 그렇게 열심히 하지."
희주가 은근히 다른 남자의 기록을 대며 나를 도발했다.
나는 계속 발가락으로 그녀의 균열을 자극하며 대답했다.
"자위는 잘 기억 안 나고 섹스는 최대 일곱 번까지 해봤군. 자위도 그 정도 가능할걸?"
"이, 일곱 번이나요?"
"응."
그때쯤 희주도 슬슬 느끼는지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거길 발가락으로 문질러댔으니, 그때까지 참은게 용하긴 했다.
"거짓말."
"뭐야 못 믿어?"
"남자들 원래 이런데 허세 쩔잖아요. 말도 안 돼. 자위면 믿어주려고 했는데, 섹스 일곱 번은 좀."
"세상엔 다 똑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
"증명해 보시던가요."
희주가 두 볼이 상기된 채 말했다. 흐느적거리는 꼴을 보니 슬슬 봇물이 터진 것 같았다.
"뭘 어떻게?"
"제가 대주면 되잖아요."
< 569. 거자필반-29-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