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86화 (559/2,000)

< 568. 거자필반-28- >

***

운동을 마친 은성은 가볍게 몸을 씻은 후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매주 2회씩 전문가들에게 배우는 1:1 코칭.

유명 애널리스트, 현직 경영학과 교수, 전직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까지. 경제에 관해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된 초호화 개인 과외였다. 물론 천성적으로 공부를 싫어하는 은성에겐 무척이나 곤욕스러운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딴 걸 배워야 하지?’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천상여자였다.

여자로서 행복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예쁜 아이를 낳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둔 사람이었다. 때문에, 재벌 3세라는 출신만으로 원치도 않는 경영수업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 못마땅했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아무 남자나 만날 수 없는 지금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한 기억이 있긴 했을까?

유학을 떠나 미술 공부를 하던 때에도 늘 감시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녀를 밀착 감시하는 경호원들은, 고연봉의 값어치를 다하겠다는 듯 24시간 불철주야로 그녀를 지켰다.

특히 모 대기업 막내딸이, 집안의 반대로 연인과 결별한 뒤 외국에서 자살한 이후로 경호원들의 감시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녀는 이제 죽고 싶어도 맘대로 못 죽는 처지가 된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노예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아니, 어떤 면에선 노예보다 못하지. 여자 노예는 같은 남자 노예라도 만날 순 있을 테니.’

"많이 지루하신가 보네요. 잠시 휴식 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네."

강사가 휴식을 선언하자 은성이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기거하는 저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감방에서 나와 본들, 결국엔 드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수용시설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은성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이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새로 경호팀에서 차출됐다는 인원이다. 늘 긴장한 채로 서 있는 경호원의 모습이 안쓰러워 은성이 말했다.

"편히 앉아 계셔도 돼요."

"저는 이게 편합니다."

"설마 수업 내내 서 계셨던 거예요?"

"······."

지연이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은성은 지연의 인생도 자신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벌가 3세로 태어나 자유를 구속당한 자신이나, 그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늘 긴장한 상태로 곁을 지켜야 하는 지연이나.

결국엔 무엇인가에 한 발이 묶여있는 셈이었다.

자신은 신분에. 지연은 직업에.

"함께 산책하러 가실래요?"

문득 지연에게 동질감을 느낀 은성이 물었다.

의외의 요청에 지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산책하러 가시고 싶으심 말없이 출발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저는 늘 아가씨를 곁을 수행할 테니까요."

은성은 지연의 대답이 불편했는지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네?"

"한지연 씨가 제 시종은 아니잖아요."

"아···."

은성을 바라보는 지연의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돌았다.

‘제 오빠하곤 전혀 다르네.’

그녀의 오빠인 고성민은 말 그대로 망나니였다. 동화에 나오는 못된 부잣집 도련님을 그대로 현실로 끌고 온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만큼 천방지축이었다.

어찌나 성정이 고약한지 이미 학창시절부터 악명이 높았다. 운전기사를 노예처럼 부리기 일쑤고, 패악질을 거듭하며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사태를 무마했다. 꼴에 머리는 좋아서 어려서부터 시건방이 도를 넘었으며, 반반한 얼굴로 후리고 다닌 여자들로 늘 골칫거리였다.

지연은 은성이 외국에 나간 이후 입사했으므로, 여동생의 성격에 대해선 잘 아는 바가 없었다. 소문에 제 오빠와 달리 성정이 착하고 유순하다고 했으나 어쨌든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잠깐 본 모습만 봐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부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았다.

‘신기해. 가만 보면 얼굴은 어렴풋이 닮은 것도 같은데, 한 명은 천사고 한 명은 악마가 되었구나. 같은 배에서 태어나 어쩜 이리도 성격이 다를 수 있을까?’

"네, 그럼 가실까요. 산책?"

지연이 기분 좋게 앞장섰다.

저택의 밖으로 나오자 거대한 크기의 거대한 정원이 드러났다. 서울 한복판 고급 주택 단지의 땅값을 생각할 때,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앞마당이었다. 낮은 산을 배후로 삼아 지어진 삼현가의 대저택은, 산 전체를 에워쌀 만큼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별채를 포함해 저택에 딸린 방만 99칸이 넘었고, 집사와 운전기사 등 상주 인원만 100여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물론 그 100여명 안에는 경호팀인 지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지연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신록이 어우러진 대정원을 걸으며 은성이 물었다.

"올해로 스물여섯입니다, 아가씨."

지연의 절도 있는 대답에 은성이 코끝을 찡그렸다.

"둘이 있을 땐 아가씨 소리 안 붙여도 돼요, 언니."

"어, 언니라니요···."

어지간한 일론 당황하지 않는 지연이 말까지 더듬거렸다.

"저는 올해 스물둘이거든요. 그러니 편히 말씀하세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어요, 언니."

"자꾸 이러시면 제가···."

"언니는 육사 출신이라던데, 어떻게 경호원이 되신 거예요?"

은성의 놀라운 붙임성에 지연도 점점 경계심이 풀어졌다.

‘흠, 생각외로 너무 깜찍한 아가씨잖아?’

동시에 그녀와 이도훈을 두고 신경전을 벌일 생각에 앞날이 막막해졌다.

‘차라리 성격이나 못됐으면···. 얼굴도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예쁘고 심성까지 착하니. 이건 뭐 내가 비빌 건더기도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사람은 대체로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질투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격차가 무지막지하게 벌어지면 도리어 존경심을 갖게 된다.

‘휴-. 내 팔자야. 하필 도훈이랑 이런 일에 얽혀서는···.’

"사관학교는 중퇴했어요."

"왜요?"

"그게 실은···."

지연이 오랜만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쪽 일을 하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은 처음이었다.

***

그렇게 김기춘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설마 고성민일까?’

[그 재벌 집 아들요?]

‘정확히는 재벌 집 손자지.’

[그렇게 추측하시는 근거는요?]

‘놈은 나를 엄청 미워하잖아. 자기 동생이랑 친하다는 이유로. 놈이라면 능히 이런 짓을 벌일 재력과 능력이 있지.’

[하지만 재벌가의 3세가 할 일이 없어서 주인님을 괴롭힐까요? 저번에 듣기론 제 앞가림만으로도 무척 바쁜 상황인 것 같던데.]

지연이 이따금 들려주는 얘기로는 고성민은 지금 그룹을 이어받기 위해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감시도 거두었다나? 제 앞가림도 바쁜 고성민이 이제 와 불쑥 나를 함정에 빠뜨릴 것 같진 않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리고 놈의 성격상 정면으로 맞받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치졸한 짓을 꾸미진 않겠지.’

나는 배후를 찾기에 앞서 이번 일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왜 하필 설수지 일까?

겉으론 멀쩡한 법대생.

하지만 실상은 음탕하기 짝이 없는 음란 마귀.

그런 그녀와 굳이 무리해 소개팅을 주선시킨 이유.

‘가만, 어쩌면···.’

[왜요?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설수지는 법대생이지?’

[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고?’

[네, 법조인 집안이니까요. 뻔한 걸 왜 자꾸 확인하시나요?]

‘어쩌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인데···. 설수지가 누군가에게 조정을 받는다고 쳐 보자고.’

[네.]

‘만약 내가 소개팅하는 날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는데, 그녀가 갑자기 나를 성폭행범으로 몰아버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네?]

‘아까 그랬잖아. 강간은 최소 3년 이상의 징역, 미수에 그쳐도 형량은 똑같다면서.’

[그렇죠.]

‘혹시 꽃뱀이라는 단어 들어 본 적 있어?’

[꽃뱀요?]

‘일부러 몸을 대준 뒤 나중에 고소로 엮는 악질적인 사기꾼 말이야. 유명 연예인이나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들이 많이 당하는 수법이지.’

[설마 그렇게 심한 짓을···.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설수지가 주인님을 고소하겠습니까?]

‘왜 못해? 설수지는 지킬 게 많은 여자잖아. 자신의 변태적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일 거란 말이야. 그녀가 그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시킨다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못 할 것도 없지. 법에 대해서도 빠삭하겠다, 아빠는 유명한 변호사겠다.

배경 좋잖아?’

[그렇다면 설수지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주인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보낸 꽃뱀이라는 가정입니까?]

‘그렇지. 자객이지. 그것도 아주 맛있고 탐스러운.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 남자를 낚기 딱 좋은 미끼.’

[놀랍군요. 만약 주인님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상대는 필시 주인님의 호색한 사생활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일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 의미에서 고성민은 절대 아니야. 남자 중에서 나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아는 놈은 누구도 없으니까. 범인은 무조건 여자일 수밖에 없어.’

나는 동시에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늘 비밀로 감추고 다녔다. 따라서 나에 바람기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강민주는 아니었지.’

[네, 주인님이 확인하셨죠.]

‘섹파인 오수정도 역시 아니고.’

[그녀는 쿨합니다. 주인님의 다분한 바람기를 알면서도 인정하고 넘어가는 여성이죠.]

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의 정체를 모른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한 명 더 있다.

내가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박서현.’

[그 스토커녀는 아파서 입원했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용의 선상에서 제외된 걸로 아는데요.]

로시의 말대로였다.

박서현은 입원을 이유로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하지만 아픈 게 거짓이라면?’

[아···! 근데 박서현양은 주인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게 아니었나요? 주인님의 비행을 알면서도 소문이 나지 않도록 무마했던걸로 아는데요.]

확실히 그랬다. 그녀는 내가 희주와 DVD방을 즐긴 것도 목격했고, 조교실에 들렀다가 사라진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밖에 학교에서 벌였던 수많은 짓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소문을 내지 않았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나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을 망가질까 두려워 둘로 쪼개지 않는 것처럼. 내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져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거듭되는 좌절에 지쳐 돌아섰다면?

여자가 질투에 눈이 멀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어쩌면 박서현은 가질 수 없는 날 부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참으로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차도살인.’

[네?]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사자성어지.’

[뜻은 알고 있습니다.]

‘만약 범인이 박서현이라면 정말 치졸한 방식이 아닐 수 없어. 제 손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 시키려 한 것이니까.’

[아직 단정하긴 이릅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나는 정음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이도훈 : 정음아.

-육정음 : 네, 오빠.

-이도훈 : 서현이는 어떻게 됐어? 진짜 입원했으면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육정음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서현이한테 연락했는데 계속 답장이 없어서요. 많이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이도훈 : 전화는 해봤고?

-육정음 : 네, 톡 보내도 답이 없길래 전화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고요.

-이도훈 : 그렇구나. 아무튼 연락 오면 나중에라도 태영이랑 같이 병문안 가보자.

-육정음 : 네, 오빠.

‘수상한데···. 병원 갔다는 것도 죄다 핑계 같아. 자객을 보내 놓고 완전히 잠수타 버린 꼴이군.’

[서현 양의 위치가 궁금하십니까?]

‘위치 추적기 아이템이라도 있어?’

[물론 있지만, 별도로 아이템을 구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인님께선 이미 가지고 계시니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 걸 샀다고?’

[어장관리 어플 말입니다.]

‘아!’

평소에 자주 활용을 안 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어장관리 어플의 메뉴 중엔 ‘충돌방지’라는 기능이 있었다. 정보창을 스캔한 대상에 한 해 자동으로 위치를 표기하는 기능이었다.

‘역시 넌 천재야, 로시!’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주인님.]

오랜만에 디스플레이를 눌러 어플을 실행시켰다. 어장에서 떨어져 나간 몇몇은 사라졌지만, 새롭게 추가된 인원들로 스크롤을 여러 번 내리고서야 서현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박하린 ? 충주(교대)

허영자 - 편의점

송미나 ? 필라테스 학원

육정음 ? 국성대 캠퍼스(인문대)

오수정 ? 국성대 캠퍼스(도서관)

양희주 ? 국성대 캠퍼스(학떨목)

박서현 ? 한국 병원(입원)

···

★ 대상간 충돌이 우려되지 않습니다.

TIP- 관리하는 인맥이 너무 많을 경우, 차단 설정을 통해 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실 수 있습니다.

‘어라? 병원에 있네?’

[진짜로 아팠던 걸까요?]

‘이럴 리가 없는데···.’

만에 하나 거짓으로 입원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교통상해의 경우 외관상 뚜렷한 부상이 없어도 아프다고 우기면 전치 2주는 나오게 되어 있다. 또한 환자가 작정하고 떼를 쓸 경우, 며칠 정도 입원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어플에는 입원 중이라는 내용만 나왔지, 병명까지 기재가 안 된 것으로 보아 ‘나이롱 환자’로 꾸며 드러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디스플레이에 익숙한 지명이 눈에 띄었다.

내가 있던 장소에 누군가 어장 속 물고기 하나가 난입해 있었다.

"오빠, 거기 앉아 있으면 학점 떨어지는 거 모르세요?"

빻녀, 양희주였다.

< 568. 거자필반-28-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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