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9. 거자필반-19- >
상황이 이쯤 되자 도훈도 전후 사정이 꿰어 맞춰졌다.
정음이 굳이 비밀로 숨기려고 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 선물이구나!’
[네?]
‘내 선물을 사려고 그런거라고! 몰래 주려고! 아까 수업시간에 반 팔 사준다고 했잖아.’
[아! 그렇군요.]
‘어쩐지 남자랑 같이 남성복 매장을 들르더라니···. 아, 내가 왜 정음이를 오해했지?’
[쯧쯧. 그러게 좀 더 알아보고 화를 내시라니까요. 애꿎게 포인트만 날렸잖습니까.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
‘이 모자? 얼만데?’
[디스플레이에 설명 띄워 놓았습니다.]
[정체불명의 모자]모자, 1500p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3M 이내로 근접할 때까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탐지’ 능력이 있는 상대에겐 위장이 간파당할 수 있습니다.
‘1500포인트라고? 이딴 모자 하나에?’
[위장은 천상계에서도 최첨단 기술이 들어간 제품입니다. 게다가 소모성 아이템도 아니니 당연히 가격이 나갈 수밖에요. 그러게 왜 전후사정도 알아보지 않고선···.]
‘아냐. 어차피 필요할 때가 있겠지. 근데 탐지에 간판당할 수 있다는 소린 뭐야? 탐지라는 스킬도 있어?’
[일반인들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PK단이 보유한 기술이니까요.]
‘한마디로 PK단 앞에선 무용지물이란 소리군.’
[PK단의 눈을 속이기 위해선 은·엄폐 레벨 3 이상의 고가 장비가 필요합니다. 가격은 당연히 몇 배나 비싸지고요.]
‘흐음, 그건 당장 구매할 필욘 없을 것 같아.’
도훈은 다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정음에게 발길을 돌렸다. 혼자 오해해 잔뜩 화를 내다가, 다시 돌아가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무슨 핑계로 접근하지?’
[옷 사러 나왔다 우연히 만난 것으로 하시죠.]
‘그럼 정음이가 민망할 거 아냐?’
[그런가요?]
‘일단 두 사람이 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정말 스토커라도 된 것 같군요.]
도훈은 아까 정음이 있던 매장을 기웃거리며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는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어디갔지?’
도훈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매장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떤 옷 찾으세요?"
"잠깐 둘러보는 거예요."
"올해 신상 오늘 막 입고 됐는데 보여드릴까요?"
"아···, 그게···."
의외로 끈질기게 달라붙은 직원 때문에 정음을 놓치고만 도훈은 벌컥 짜증이 났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계속 시선을 돌리는데 정음을 따라온 게이 남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매장 좀 둘러보고 올게요."
"네, 손님."
도훈은 겨우 점원을 따돌리고 정음의 게이 남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혼자 옷을 고르고 있고, 정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유지한 채 정음을 찾고 있던 그에게 점원과 얘기하는 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옷은 얼마에요?"
"여자친구 분 사주시게요?"
"여자친구라뇨?"
"방금 화장실 가신 분 여자친구 분 아니세요? 되게 미인이시던데···."
"아, 아니에요. 그냥 친구에요."
"정말요? 엄청 깜찍하게 생기셨던데···. 그럼 썸녀?"
찬우가 정색했다.
"아뇨. 전혀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그냥 돈 없다길래 하나 사줄까 해서요."
"아, 넵."
두 사람의 대화를 훔쳐 듣던 도훈이 생각했다.
‘정음이가 자기 옷 살 돈도 없는데 내 옷을 사주는 거였나?’
[내용을 들어보니 그런가 보군요.]
‘하긴 저번에 실습복 사준다고 엄청 무리했으니···. 갑자기 너무 창피해지네.’
[뭐가요?]
‘알바비 모아 선물까지 하는 정음이한테 별로 해준 게 없다는 게···.’
[그걸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여성분 사이즈가···."
"44일 거예요. 아, 잠시만요. 전화가 와서."
옷을 고르던 찬우는 전화를 받더니 다른 곳으로 가봐야겠다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금방 살 것처럼 굴더니 자리를 뜬 찬우를 보며 똥 씹은 표정으로 옷을 개고 있던 점원을 향해 이번엔 도훈이 다가갔다.
"저기요."
"네, 손님. 어떤 옷 보러 오셨어요."
"그거 주세요."
"네?"
"지금 개고 계신 거."
"아, 이건 여성복입니다."
"네. 그러니까요. 여자친구 주려고요."
***
"오늘 고마웠어, 찬우야."
"내가 옷 한 벌 사준다니까 그래."
"됐어. 옷 사는 데 따라와 주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너한테 선물을 받니? 저녁도 못 사줘서 미안한데."
"허이구-. 너도 참 지극정성이다. 너 옷 살 돈도 없으면서 맨날···."
"그만.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근데 이 옷 오빠가 좋아하겠지?"
"1시간 넘게 매장 일곱 군데나 돌면서 고른 거야. 내 안목을 믿어봐."
"설마 네 취향은 아니지?"
"뭐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옷 고르는 센스는 어지간한 여자보다 좋거든? 너도 마음에 들어 했잖아."
"알았어. 고마워."
"그럼 난 지하철이 반대쪽이라."
"그래. 다음에 꼭 밥 한 번 살게. 다음 주에 알바비 나오니까."
"됐어. 너나 좀 잘 입고 잘 먹고 다녀."
찬우와 헤어진 뒤 정음은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그녀의 손엔 내일 도훈에게 줄 선물이 들려 있었다.
‘아차, 오빠한테 연락한다고 해놓고 깜빡해 버렸네?’
뒤늦게 도훈의 문자가 떠오른 정음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을 기다리는 정음의 표정이 무척 초조했다.
‘이런 바보! 오랜만에 오빠가 먼저 연락해줬는데···.’
통화가 연결되자 정음이 다급히 말했다.
"오빠,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갑자기 일이 생겨가지고."
-무슨 일?
"음, 그, 그게···. 친구 좀 만나느라."
-그랬구나. 지금은 어디야? 집이야?
"집은 아니고요···. 음 잠깐 밖에 나왔어요."
-뭐하러?
"그러니까···."
통화를 하던 정음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통화 중인 도훈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가까이서 울리는 것이었다.
-너 거짓말 되게 못한다.
"네?!"
정음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오는데 바로 뒤에 도훈이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정음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까무러치게 놀랐다.
"오, 오빠!"
-계속 핸드폰에 대고 말 할 거야?
도훈이 씩 웃으면서 통화를 끊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오빠가 왜 여기서?"
"응. 옷 사러 나왔다가 우연히 너 보고 따라왔어. 너도 쇼핑하러 왔니?"
정음이 황급히 손에 쥔 쇼핑백을 뒤로 숨겼다.
"네, 네. 친구랑요."
"친구? 어딨는데?"
"집이 반대 방향이라 방금 헤어졌어요."
"그렇구나."
도훈은 당황하는 정음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때 정음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아앗."
"저녁 아직 안 먹었니?"
"그게···."
"나도 안 먹었는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
"괜찮아요."
도훈의 선물을 사느라 그야말로 개털이 된 정음은 도저히 같이 가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얻어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늘 더치페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줄게."
"서, 선배가 왜요."
"왜냐니? 후배 밥 사줄 돈은 있어."
"그, 그래도."
"가자. 밥먹으러."
도훈이 덥석 정음의 손을 잡았다. 정음은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이라 난처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렇게 다녀도 돼요?"
"뭐가?"
"보는 사람도 많은데···."
정음은 대학 안에서 늘 도훈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단둘이 손을 잡는 상황이 너무나 어색했다. 도훈은 그녀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아···. 내가 정음이한테 너무 못 해줬구나.’
"손에 땀이 많아서가 아니고?"
"아, 아앗. 저 땀나요?"
"아니 전혀."
도훈은 기분이 좋은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사실 좀 나는 것 같아."
"아, 아! 제가 좀···."
"그러니까 팔짱 껴."
"네?!"
도훈이 팔꿈치를 구부려 내밀었다. 정음은 여전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굉장히 조심스러워했다.
"저, 정말요?"
"당연하지."
정음이 용기를 내 도훈의 팔에 팔짱을 꼈다. 늘 꿈에 그리던 데이트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뭔가 어색해요."
"너무 떨어져서 그래. 좀 더 달라붙어."
도훈이 한 손으로 허리를 휘감더니 바짝 붙였다. 안 그래도 커다랗던 정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오늘따라 엄청 기분 좋아 보이네?’
처음엔 어색해하던 정음은 점점 도훈의 몸에 밀착해갔다. 두 사람은 한 몸이 된 것처럼 나란히 붙어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저녁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정음은 도훈과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 이미 배가 부른 것 같았다. 그때 정음의 폰에서 전화가 울렸다.
‘응? 찬우가 왜···.’
"오빠 잠시 전화 좀."
"응."
"찬우야 왜?"
-정음아! 나 아까 너한테 지갑 맡겼었잖아.
"지갑?"
생각해 보니 찬우가 아까 자기 여름 바지를 하나 사겠다면서 탈의실에 들어갔을 때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을 정음에게 맡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음은 지갑을 챙겨 가방에 넣고는 둘 다 깜빡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 지하철 카드랑 다 들어있어서 지하철 개찰구도 못 들어가고 있··· 어? 저기 너 아니야?
마침 지하철을 다시 빠져나온 정음과 도훈은 입구에 서 있던 찬우와 마주쳤다.
"너는 왜 다시 나와? 아, 누구···."
찬우는 정음의 옆에 서 있던 도훈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러다 몸에 쫙 붙는 쫄티를 보고 단박에 그가 정음이 짝사랑하는 선배 오빠라는 것을 눈치챘다.
"안녕하세요."
"아, 네."
"정음이 친구 박찬우라고 해요."
"네. 이도훈이에요."
정음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난감해졌다.
‘아씨, 오빠랑 단둘이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쟤는 하필.’
"제가 정음이한테 지갑을 맡겨놓고 깜빡해가지고."
"자 여기. 지갑."
정음은 찬우를 떨쳐내기 위해 재빨리 지갑을 건네줬지만, 어쩐 일인지 찬우는 쉽게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정음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듣던 데로 엄청 미남이시네요."
찬우가 특유의 눈웃음을 흘리며 도훈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정음은 그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저 새끼가 근데 어디서!’
"야. 지갑 받았으면 얼른 집에 가."
"근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얼른 가라고!"
도훈은 갑작스러운 삼자대면도 그렇지만 머릿속에 울리는 로시의 메시지에 당황하고 있었다.
[주, 주인님! 간만에 업적 알림입니다!]
‘뭐? 무슨 난데없이?’
[‘숨겨왔던 나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 대상이 등장했습니다!]
‘아니 내가 왜 남자랑! 미쳤어?’
[그러지 마시고 좀 더 포용적으로···.]
"넌 왜 자꾸 가라고만 해?"
찬우가 뭉그적거리자 정음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폭력(?)적인 성향을 익히 알고 있던 찬우는 겁을 집어먹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 아무튼 다음에 또 뵈요, 형."
"니가 왜 봐?"
"정음이가 참 다혈질이라 힘드시겠어요."
"야! 너!"
결국 찬우는 지갑만 챙겨 쫓겨나듯 도망쳤다. 욱하는 기질을 보이고만 정음이 도훈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오빠."
자기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변하는 정음의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아니야. 근데 쟤가 혹시 저번에 말한 그···."
"맞아요. 취향이 좀 남다른 친구예요."
"음, 잘생기긴 했네."
"잘생기긴요? 완전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는."
"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 아뇨! 제가 무슨 남자한테···."
정곡을 찔린 정음은 얼굴이 빨개져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우이씨, 진짜 찬우 저 자식은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도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간을 쪼개 같이 옷을 골라준 친구를 순식간에 매도하는 정음이었다.
도훈은 정음의 그런 모습까지 사랑스러웠다. 이제껏 뚜렷한 목적을 두고 여자를 대할 때완 너무 달랐다. 그녀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 기운이 나게 했으며, 손만 마주 잡고 있어도 섹스하는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군.’
[주인님이 정음양을 너무 아끼시는군요.]
‘어찌 안 그럴 수 있겠어.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저는 방금 놓친 업적이 더 아깝습니다.]
‘닥쳐. 남자랑은 절대 안해.’
[중수를 이룰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업적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거기다는 안 넣어!’
도훈은 머릿속으로 남자와 하는 장면을 생각하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근데 진짜 뭐 먹을래?"
"저 그럼···."
정음은 도훈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고 생각했다.
‘오빠도 옷을 샀으니 용돈이 부족할 거야. 그냥 제일 싼 걸로 얻어 먹어야지.’
도훈의 지갑 사정을 배려한 정음이 대답했다.
"떡볶이요."
"저녁으로 분식을?"
"네, 저 되게 좋아해요. 그거 사주세요."
"거참."
도훈은 한사코 분식을 고집하는 정음의 태도에 끝내 분식집으로 향했다. 역 앞에 흔히 볼 수 있는 김밥 프랜차이즈였는데, 정음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식사를 마친 정음은 우물쭈물하다 가지고 있던 쇼핑백을 도훈에게 내밀었다.
"저 오빠 실은···."
"응?"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도훈은 모르는 척 되물었다.
"오빠가 알면 거절할까 봐 말 못 했는데···. 이거···."
"뭐야? 설마 내 거야?"
정음이 민망한 듯 베시시 웃었다.
"네. 오빠 여름옷 없대서 하나 샀어요."
도훈도 가지고 있던 쇼핑백을 정음에게 건넸다.
"공교롭게 됐네."
"네?"
"나도 실은 내 옷이 아니라 니꺼 샀는데."
"예?!"
"저번에 실습 때 너무 고마워서. 내 옷 사러 왔다가 네 생각 나더라. 그래서 한 벌 샀어. 잘 어울릴진 모르겠다."
"아, 왜, 왜 그러셨어요."
정음은 자기도 모르게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오늘처럼 행복한 날은 처음이었다.
< 559. 거자필반-1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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