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76화 (549/2,000)

< 558. 거자필반-18- >

***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는지 궁금하면, 상대 옆에 다른 이성을 붙여두면 된다. 만약 얼굴이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온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정음을 보는 내 반응이 딱 저랬다.

엄청난 배신감에 순간적으로 뇌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지금 정음이가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는 거야?’

[단순히 가는 길이 같은 친구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하시죠.]

‘진정은 무슨? 나 화 안 났거든?’

[지금 굉장히 씩씩거리고 계신데요? 아드레날린도 과다분비상태고요.]

‘그냥 지하철 안이 갑갑해서 그래.’

정음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지하철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였다. 정음과의 거리는 8m 남짓인데, 그 사이 사람들이 거의 50명은 넘게 들어찬 것 같았다.

‘젠장. 너무 혼잡하군. 깨톡이라도 보내야지.’

-이도훈 : 정음아 뭐하니? 학교야?

연락을 남기고 반응을 살폈다. 정음은 문자를 확인했는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훔쳐보자니 나도 모르게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

-육정음 : 집에 가는 길이에요.

‘···집이라고?’

[정음 양의 집은 반대 방향 아니었던가요?]

뒤통수가 얼얼했다. 후두부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목덜미부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정음이가 나한테 거짓말을 한다고?’

[흐음, 확실히 수상하군요. 이럴 리 없는데···.]

배신감과 실망으로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거리가 가까우면 스킬을 이용해 상태창을 열거나 마음의 소리라도 들을 텐데, 만원인 지하철에선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혹시나 정음이 방향을 착각했나 싶은 마음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도훈 : 혹시 친구랑 같이 있니? 통화해도 돼?

다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만약 두 사람이 떳떳한 사이라면 내 연락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폰을 확인한 정음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답장을 남겼다.

-육정음 : 아뇨, 그건 아닌데···. 지금 지하철 안이라 통화가 곤란할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맥이 빠졌다.

정음은 짧은 순간 나에게 벌써 두 번의 거짓말을 했다.

하나는 집으로 간다고 했으나 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지하철을 탄 것이고 둘째는 남자랑 같이 있으면서 혼자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너무나 화가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음이가 나를 속이는 모습에 분통이 터졌다. 이건 배신이다.

[이상하군요. 어째서 정음양이 주인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나도 지금 그게 궁금한데.’

차라리 희주같이 바람기가 다분한 여자였더라면 그러려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지고지순하고 한결 같았던 정음이가 나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절대 열어선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한 느낌이랄까? 기분이 싸하다. 불같은 분노는 이제 너무 뜨거워 오히려 차갑게 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불쑥 정음과 헤어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오빠 혹시···, 아니에요.

정음이 그때 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땐 정신이 없어 가볍게 넘겼는데, 어쩌면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말하려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아끼던 정음의 배신은 나를 멘붕으로 빠뜨렸다. 말 그대로 멘탈이 산산이 조각났다.

지하철이 멈추자 정음이 남자와 함께 정거장에 내렸다. 나 역시 반대편 입구로 따라 내렸다. 당장 뒤쫓아가 따지고 싶었으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가 정음이에게 뭘 요구할 수 있는 사이던가?’

공식적으로, 정음과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비공식적으로 몰래 사귀는 사이 역시 아니다.

둘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한 것은 순전히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애인이 생기면 업적과 미션을 이루는 데 방해될까 어정쩡한 사이를 유도한 것이다.

갑자기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정음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멀끔하게 생긴 저놈 앞에서, 대관절 무슨 근거로 화를 낼 것인지 떠올리자 막막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자연스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주인님. 계속 멀뚱히 서 계실 건가요?]

주저하는 내 모습이 답답했던지 로시가 말했다.

나는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가서 뭐라고 따지지?’

[네?]

‘아니, 그렇잖아.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바람피웠냐고 물을 수도 없는데. 나 역시 떳떳하지 못하니까.’

[아···.]

사실 그게 더 문제였다.

내가 과연 정음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따질 수나 있는 입장인 것일까? 나는 심지어 정음을 만나던 날조차 다른 여자를 만나 섹스한 적 있다.

오늘만 해도 오전에 정음과 헤어진 후 강민주와 조교실에서 떡을 쳤다. 과연 내가 누굴 나무랄 수 있는 처지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내로남불이라도 이건 염치가 없는 거다.

얼빠진 채 우두커니 서 있는데 정음에게 다시 깨톡이 왔다.

-육정음 : 오빠, 나중에 지하철 내려서 연락드릴게요.

문자를 보는 순간 다시 눈에 불똥이 튀었다.

뻔히 남자와 함께 지하철을 내리는 것을 목도한 상황이라 더욱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인파를 헤치고 달려갔다.

‘로시.’

[네, 주인님]

‘정체를 감추는 아이템, 당장!’

[정체를 감추는 종류로···. 네. 알겠습니다.]

에스컬레이터 끄트머리에 정음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따라 예쁘게 꾸미고 나왔다 했더니, 그 이유가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기 위해서였다니.

허탈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정체불명의 모자’라는 아이템입니다. 모자를 착용한 순간 3m 안으로 근접하지 않고선 가족도 몰라보도록 착시를 일으킵니다. 가격은···.]

‘전송시켜.’

[넵.]

아이템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당장 정음을 뒤따라야 했다. 잠시 후 바지 주머니에 불룩한 이물감이 들었다. 손을 넣어 꺼내자 흔히 군용모자라 불리는 투박한 형태의 캡 모자가 나왔다. 모자를 착용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정음을 뒤쫓았다.

[근데 어쩌시려고요?]

‘몰라. 일단 지켜봐야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내야겠어.’

정음은 낯선 남자와의 대화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종일관 희희낙락 웃는 표정이었다. 당장 득달같이 달려가 따지고 싶었지만, 애써 화를 억눌렀다. 얼마나 가까운 사인지는 알고 따져야겠다.

지하철로 연결된 쇼핑몰에 입장한 두 사람은 남성 캐쥬얼 복을 파는 매장에 들렀다. 나는 먼발치서 그녀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랑 똑같아.’

[무슨?]

‘실습 기간 나한테 옷 사주던 날 기억나지?’

[네, 정음양이 주인님의 실습복을 사줬죠.]

‘정음이는 원래 남자를 만나면 뭘 자꾸 사주는 타입이었나봐.’

그런 여자가 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뭐든지 퍼주는 여자.

어쩌면 정음도 그런 과였을지 모른다. 나를 특별히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본래 연애하는 타입이 그런 것이다. 갑자기 집에 곱게 걸어둔 정장을 갈기갈기 찢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나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안 준것만 못하다.

[주인님, 근데 너무 단정 짓는 것은 아닌지···.]

‘뭐가?’

[정음양이 비록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이유라도 한 번 들어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유?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 이유야 뻔한 거 아니겠어?’

[주인님은 너무 주인님 입장에서만 생각하시는군요. 착잡한 심정은 알겠지만, 우선 정음양 이야기도 들어보셔야···.]

‘됐어. 이쯤 봤으면 뻔하지.’

나는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전 마누라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났을 때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정을 준 사람이 또 한 번 나를 배신했다.

주먹을 쥔 손에 손톱이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계속 있다간 누구 하나, 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에 결국 등을 돌렸다.

***

-육정음 : 찬우야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 좀 있니?

-박찬우 : 어, 왜?

-육정음 : 남자 옷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 사이즈가 긴가 민가해서. 디자인도 볼 줄 모르고.

-박찬우 : 저번에 말한 그 형님 선물 사주게?

-육정음 : 응, 오빠가 여름옷이 하나도 없대서.

-박찬우 : 엥? 왜 여름옷이 없어?

-육정음 : 그게, 군대 갔다 오느라 여름옷을 다 버렸다나 봐.

-박찬우 : 아아, 군대. 그럴 수도 있지. 알았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부탁인데, 시간 내 볼게.

수업이 끝나고 찬우와 만난 정음은 지하철을 타고 쇼핑몰로 향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지하철 안이 복잡했다.

"남자들은 정말 힘들겠다. 군대 다녀오면 옷도 다 새로 사야 하니까."

"난 얼른 군대 가고 싶은데?"

"왜?"

"거긴 남자밖에 없잖아. 하하!"

"어윽, 야! 내 앞에서 그런 개그 치지 말라고."

정음 앞에서 커밍아웃을 한 찬우는 이따금 게이 드립을 날렸다. 정음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데, 갑자기 도훈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도훈 : 정음이 뭐하니? 학교야?

갑작스러운 연락에 정음은 당황했다.

‘엇? 오빠가 무슨 일이지? 옷 사러 간다면 분명 말리려 들 텐데···.’

반 팔 티가 하나뿐이라는 말에 몰래 선물을 사려고 했던 정음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육정음 : 집에 가는 길이에요.

-이도훈 : 혹시 친구랑 같이 있니? 통화해도 돼?

‘헉! 통화? 쇼핑한다는 거 들켰다간 한사코 안 받는다 할 거야.’

-육정음 : 아뇨, 그건 아닌데 지하철 안이라 통화가 곤란할 것 같아요.

정음이 심각한 표정으로 문자를 남기자 옆에 있던 찬우가 물었다.

"누군데? 그 사람?"

"응."

"오, 연락 잘 안 된다더니···."

"최근엔 실습하느라 바쁘셔서 그랬던 거야."

"그래?"

"원래 잘 챙겨주셔."

정음은 찬우가 흉볼까 거짓말을 했다. 실습 내내 연락이 없어서 새까맣게 속이 타들어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너 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달려봐야 하나도 좋을 거 없어. 남자들은 다 잡은 물고기엔 관심 없거든. 남자인 내가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뭐래니? 혼날래?"

"참나. 오후 스케줄 다 비우고 따라가 준 친구한테 그러기야?"

"남자 옷을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내가 다른 남자랑 친한것도 아니고."

"어, 다 왔다. 여기서 내리면 쇼핑몰로 바로 연결돼."

쇼핑몰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바로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찬우는 게이라 그런지 패션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는데, 입고 다니는 스타일도 그렇고 유행에 대해서도 굉장히 빠삭한 편이었다.

"여기가 요새 가장 핫하다는 브랜드야. 근데 좀 비쌀지도··· 돈은 좀 있지?"

"음···. 빠듯하긴 해. 아직 알바비를 못 받아서."

"너도 진짜 불쌍하다. 돈 없다고 맨날 학식만 사먹으면서 그 형한텐 매일 퍼주기만 하고."

"자꾸 까불래? 그러다 뒤지게 처맞는 수가 있어?"

"워워. 너 이렇게 폭력적인 거 그 형이 알긴 알려나?"

주먹으로 팔을 때리려던 정음이 멈칫했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음?’

뒤를 돌아보는데 멀리서 모자를 쓴 사람이 돌아서는 게 보였다. 왠지 낯익은 실루엣에 정음이 움찔했다.

‘오빠랑 엄청 비슷하게 생겼네.’

그러나 아이템 효과 때문인지 오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때의 도훈은 몸에 쫙 붙는 민망한 쫄티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째서 인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구야? 아는 사람?"

"으,응. 아니야. 내가 착각했나 봐. 근데 오빠가 키는 너랑 비슷한데 몸이 좀 큰 편이거든?"

"근육질이랬지?"

"응."

"나도 언제 한번 보고 싶네. 근육질 마초가 내 이상형인데···."

"혼날래? 우리 오빠 눈독 들이기만 해봐. 아주, 그냥."

"왜 이래? 우리 같은 사람들도 보는 눈이 있거든? 무슨 남자면 다 좋아하는 줄 아나."

***

축 처진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도훈은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짜증이 났다.

‘기분 뭐 같네 진짜. 안 되겠어. 돌아가서 면상에 한 방 갈겨버리던지 해야지.’

[정음양을요?]

‘미쳤어? 정음이를 왜 때려. 당연히 그 새낄 조져야지.’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해했을 지도 모르는데요.]

‘오해라니? 이제와서 무슨? 현실 부정일 뿐이야.’

[깜빡하신 거 같은데, 주인님께는 어장관리 어플이 있습니다.]

‘그게 뭐?’

[어장관리 어플의 기능 중에는 어장에 침투한 상대에 대한 경고 기능이 있죠.]

‘아, 그렇지?’

[만약 정음 양이 정말 바람을 피우는 것이라면, 해당 기능이 발동했을 겁니다.]

‘근데 그건 상대가 흑심을 품었을 때 발동하는 거 잖아. 그러니까 저번에 고성민이 여동생한테 추잡한 수작을 부렸을 때처럼.’

[물론 그렇지요. 어쨌든 어장 침투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는 말은 적어도 남자 쪽에서 섹슈얼한 접근이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그런가?’

도훈은 지난번 정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한테 게이 친구가 있어요.

‘아차! 이런 빡대가리 같으니!’

[왜 그러십니까?]

‘아아,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정음이한테 게이 친구가 있다는 거.’

[사회과 킹카라던 박찬우 군 말이군요.]

‘맞아맞아. 어쩐지 남자새끼 존나 느끼하게 잘생겼더라니. 걔가 게이였구나.’

[근데 왜 정음 양이 주인님께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냥 친구랑 옷 사러 간다고 말하면 될 것을···.]

< 558. 거자필반-18- > 끝

ⓒ 성난불기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