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5.거자필반-15- >
"내 옷?"
"네···. 좀 붙는 것 같아서요."
별말 없길래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은근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다른 여자애들이 자꾸 내 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좀 덥더라도 긴소매를 입을 걸 하는 후회가 들던 참이었다.
"글쎄 여름옷을 못 찾겠더라고. 군대 가면서 죄다 버린 걸 깜빡했나 봐. 그나마 한 벌 남은 게 이건데, 몸이 커졌는지 사이즈가 안 맞는 거 있지."
"아, 그러셨구나···. 제가 그럼 반 팔 티 하나 사드릴까요?"
정음은 뭐든 나에게 사주고 싶은가 보다. 커피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타온다는 걸 봐선 지갑 사정이 빠듯해 보이는데 나를 위해 또 선물을 사준다니 받기가 민망했다.
"아니야, 괜찮아. 뭘 자꾸 사주려고 해. 저번에 받은 것도 미안한데."
"그래도···."
"진짜 안 그래도 돼."
"···네."
나를 생각하는 정음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책상 밑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조그맣고 보드라운 손이 큼지막한 내 손안에 꼭 들어왔다.
"말이라도 고마워."
"앗!"
손만 잡았는데도 정음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저 소, 손에 땀 많아요."
정음이 손을 빼려고 하자 나는 더 힘을 주며 놓아주질 않았다.
"땀 없는데? 뽀송뽀송한데?"
"아이참···.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정음이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아 조심스레 손을 놓아 주었다. 그사이 교수가 쉬는 시간을 알려왔다.
"···아무튼, 다음 주까지 조별 과제로 내줄 터이니 4인 1조로 발표 준비해오세요. 잠시 휴식하겠습니다."
정음과 딴짓을 하다 과제 내용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앞자리에 앉은 태영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조별 과제라니?"
"형, 못 들었어요? 교재 12장부터 15장까지 요약해서 PPT로 발표 준비 해오래요."
"4인 1조로?"
"네. 저흰 그냥 우리 과끼리 뭉치면 될 것 같은데요? 서현이 포함해서."
"근데 서현이 오늘 수업 안 나왔는데 괜찮을까?"
정음이 우려스럽게 말했다.
"갸는 범생이라 알아서 예습복습 다 해 올걸? 다음에 만나서 알려주면 되겠지 뭐."
"그럼 내가 미리 연락해 놓을 게.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정음이 사라지자 나는 태영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나 좀 쐴래?"
"네, 형."
강의동을 나와 흡연구역을 찾아가는데 찜통더위로 땀이 주룩주룩 났다. 강렬한 햇살에 지나가던 여대생들이 들고 있던 파일철로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햐, 날씨가 진짜 덥긴 덥구나."
"그러게요."
"이런 날씨면 이론 수업은 그렇다 치고 실기는 어떻게 하지?"
"요샌 보니까 운동장에서 안 하고 무조건 체육관 안에서 하더라고요."
"아, 체육관이 있었지?"
"그래도 땀나면 답도 없어요. 수업 끝나면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가는 사람도 있고요."
태영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내가 심심할까 봐 같이 따라 나왔다. 그의 앞에서 혼자 담배를 물고 있으니 괜히 뻘쭘했다.
"더운데 괜히 같이 나오라고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저야 형 따라다니면 좋죠."
"왜?"
"여자들이 자꾸 쳐다봐 주잖아요. 저 혼자 있음 누가 저한테 눈길이나 주겠어요. 하하."
"너 왜 그러냐. 사람 무안하게."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형 그거 아세요? 똑같이 담배펴도 제가 피면 흡연충 소리 듣는데, 형이 피면 존멋 인 거?"
"존멋이 뭐야?"
"존나 멋있다고요."
"아이고, 지랄은."
뻔한 아부였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미남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난이도를 이지모드로 낮추는 효과가 있다. 같은 잘못을 해도, 좀 더 관대한 처분을 받고 똑같은 성과를 내도 후광효과로 인해 더 잘해 보인다.
여자를 상대할 땐 더 그렇다.
남자는 외모보다 능력이 최고라지만, 젊을 땐 외모가 곧 능력이니까.
"저기···."
그때 갑자기 웬 여학생 한 명이 다가와 말을 붙여왔다. 첫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육감적으로 생긴 여대생이었다.
"라이터를 깜빡 놓고 왔는데 불 좀 빌려주시겠어요?"
"아, 예. 잠시만요."
라이터를 꺼내자 여학생이 담배를 입에 문 채 굳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훅- 하고 진한 향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직접 붙여달라는 건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라이터를 당겼다.
"감사합니다."
"네, 뭐."
"방금 수업 듣다 나오셨죠?"
알고 보니 같은 수업은 듣는 학생이었다.
"네."
"얼핏 세 분으로 보이던데, 조별 과제에 저도 끼워 주실 수 있으세요?"
태영이 눈을 반짝이더니 대신 대답했다.
"아직 팀 못 구하셨어요?"
"네. 전 의상디자인 관데 저희 과에선 이 수업 듣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요."
"그러시구나, 그럼···."
몸매에 혹한 태영이 괜한 뻘소리를 할 것 같았다. 미연에 차단해야겠다.
"저희 4명 다 찼어요. 오늘 사정이 있어서 한 명이 못 왔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여대생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뭐 다음에 기회가 되면···."
"네."
여대생은 용건이 남았는지 쭈뼛거리다 내 단호한 태도를 느끼고는 머쓱해 하며 물러섰다. 그녀가 사라지자 태영이 입맛을 다셨다.
"쩝, 아깝다. 존예였는데···."
"뭐가 또?"
"모르겠어요? 형한테 혹해서 온 거잖아요."
"뭐래? 그냥 담뱃불 동냥하러 온 건데."
"에이, 하고 많은 사람 중에 굳이 형한테요?"
"같이 수업 들으니 낯이 익어 그랬겠지."
"형도 너무 눈치 없네. 제가 볼 땐 굳이 우리 조에 끼려는 이유가 형한테 수작 부리려는 목적이 더 강한거 같았는데."
"얼씨구.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 인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게 옷을 입으니 몸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알아서 꼬이는 느낌이다.
[주인님 웬일로 여자를 마다하시고?]
‘보상도 없는데 괜히 엮어봐야 좋을 게 뭐 있겠어.’
[오는 여자 막지 않는다는 주의 아니었나요?]
‘지금 있는 애들 건사하기도 벅차다.’
변명은 그리 했지만, 사실 정음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 강의동으로 돌아가니 정음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 선배. 서현이가 생각보다 많이 아픈가 본데요?"
"무슨 소리야?"
"방금 통화했는데 지금 병원이라더라고요."
"병원?"
"네. 근데··· 입원할지도 모른다고."
"어? 입원이라고?"
"아···. 그게 주말부터 많이 아팠는데 병원에서 급성 신우신염으로 의심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급성?"
태영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거 위험한 거 아냐?"
"음, 엄청 막 심각한 건 아닌데···. 일단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허어."
"난감하게 됐네."
정말 난감하게 됐다. 느닷없이 입원이라니. 하긴 급성이면 상태가 많이 안 좋을 순 있겠다. 무척 공교로운 상황이지만, 나를 피하려고 거짓말을 한다기엔 너무 스케일이 컸다.
‘혹시 서현이는 아닌 건가?’
[네?]
‘난 설수지의 배후로 서현을 의심하고 있었거든.’
[그렇게 생각한 이유라도?]
‘학교에서 나한테 앙심 품을 사람이 몇 없잖아. 갖지 못하니 부숴 버리겠다는 뭐 그런 심산인가 했지.’
[부숴 버리는데 왜 여자를 소개시켜 주죠?]
‘모르지. 대체 무슨 속셈이었는지는.’
태영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원이면 어차피 조별 과제는 나가리 아닌가요? 다른 사람 영입해야 하나?"
그러면서 강의실을 쑥 훑어보는 게 아까 담뱃불을 빌려 간 여학생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자식, 속이 훤히 보이는구만.
정음이 반대했다.
"그래도···. 다음 주면 퇴원할 수 있지 않을까?"
"참여가 불확실한 사람보단 확실한 대타가 낫지. 지금이면 아직 조 못 구한 사람 구하기도 쉬울 거 같은데?"
"지금 서현이를 빼자는 거야?"
정음이 짐짓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아픈 사람을 곧바로 제외시키려는 태영의 태도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빼는 게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빠지는 거지. 당장 오늘 입원할지도 모른다는데 어떻게 병원에서 과제를 하겠어?"
"난 동의 못 해. 서현이 학점도 엄청 신경 쓰는 데 조별 과제 빠져서 점수 못 받으면 나중에 무척 속상해할 거야. 넌 어쩜 동기끼리 의리가 없니?"
태영도 발끈했다.
"의리라니? 이건 인정으로 할 게 아니지. 교재 봤겠지만 요약할 양이 상당하다고. 넷이서 나누기도 빠듯해. 근데 이걸···."
이쯤에서 내가 나섰다.
"자자, 싸우지 말고."
"아니 전 싸우려는 게 아니라···."
"선배. 진짜 이건 아니잖아요."
"둘 다 일리 있는 말이야. 태영이 말대로 오늘 입원하는 사람하고 과제를 같이 하긴 어렵지."
"거봐. 도훈이 형도 그렇게 말하잖아."
내가 편을 들어주자 태영이 기세등등 소리쳤다.
"근데 정음이 말대로 같은 과끼리 조에서 빼는 것도 너무 잔인한 짓이야. 태영이 너도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네가 사고로 입원했는데 바로 팀에서 재껴 버리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
"그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결론 내렸다.
"서현이 이름 올리자. 그리고 내가 서현이 몫까지 다 해 올게."
"선배가요?"
"그걸 왜 형이 다."
"괜찮아. 어차피 공부할 거 미리 한다 생각하지 뭐. 그리 어려운 일 아니야."
"선배 정말 멋있어요."
"아니, 전 그냥···."
"그래. 태영이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어쩌면 너처럼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 순 있어. 하지만 불가피하게 아파서 그런 거니까 우리가 조금만 이해하자. 같은 체육과잖아."
"쩝···. 네."
내가 자진해서 총대를 메자 태영도 더는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다. 정음은 나의 결정에 무척 감동한 것으로 보였다.
[정음 양에게 더 잘 보일 필욘 없을 텐데요? 호감도 수치는 이미 맥스입니다. 굳이 무리하실 필요가···.]
‘정음이도 있지만, 서현이를 생각해서야.’
[서현 양을 안 좋게 생각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집착이 쩔긴 하지만 심성이 딱히 나쁜 애는 아니잖아. 또 이렇게 해야 접근할 명분도 생길 거고.’
[호오. 결국 심문을 해보겠다는 말이군요.]
‘응. 어쨌든 찝찝한 건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내친김에 병문안 계획도 세웠다.
"그나저나 우리 한 번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병원이 어디라고?"
"그건 못 들었어요. 아직 입원이 결정된 게 아니라 정리되면 물어보려고요."
"그래. 그래도 같은 과 후배가 아프다는데 병문안이라도 가봐야지."
"네. 다음에 같이 가요."
뒤이어 이어진 수업에선 다음 주 과제를 훑었다.
교재가 워낙 두껍고 내용이 어렵다 보니 혼자 정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게다가 서현이 몫까지 남들의 두 배를 해내야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은데요?]
‘못할 것도 없지. 나에겐 스킬이 있으니까.’
[현자 타임요?]
‘어. 대신 부작용이 심하니 혼자 있을 때 해야지.’
[정말 스킬을 소소하게 잘 써먹으시는군요.]
‘그나저나 아까 병원 얘기하니까 접때 폭유 간호사 생각나더라.’
[박지애 양은 정형외과 전문 병원 아니었습니까?]
‘맞아. 튼튼 병원이던가? 급성 신우신염으로 입원했으면 거긴 아니겠군.’
[아쉽겠네요.]
‘아쉬울 것까지야. 병원에 널린 게 간호산데. 아 참, 혹시 업적 중에 여의사 따먹는 내용도 있지 않았나?’
[‘특수직종이 더 맛있어’ 위업 말이죠? 왁싱 전문가, 여경, 여의사, 치어리더, 아이돌을 공략하는 미션요.]
‘맞아. 그거. 혹시 병원 가게 되면 가는 길에 하나 해치울까 하고.’
[역시 동선 낭비 따윈 허용치 않는 꼼꼼함! 대단하십니다 정말.]
‘기왕이면 서현이가 예쁜 여의사가 있는 곳으로 입원했으면 좋겠군.’
두 번째 수업부터는 목적지가 달라 서로 흩어졌다.
태영은 서현의 무임승차보다 아까 의상디자인과 학생과 함께 못한 게 더 아쉬운지 입술이 뾰로통 튀어나와 있었다.
"아직도 서운하냐."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래. 나중에 또 서현이가 보답할 일이 있을거야."
"암튼 그럼 전 가볼게요."
태영이 가고 정음과 단 둘이 남았다.
"전 원어민 수업이 있어서."
"응. 그래."
"오빠 혹시···. 아니에요."
"응?"
정음이 뭔가를 말하려다 얼버무렸다. 무슨 얘길 하려고 했을까?
"그럼 다음에 뵈요."
"그래."
정음일 그대로 보내자니 아쉬웠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 참기로 했다. 우선은 짐작 가는 사람을 몇 명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강민주도 살짝 의심스러워.’
[민주양이요? 민주양은 주인님의 충실한 종이지 않습니까?]
‘맞아. 그렇긴 한데 걔가 살짝 변태적인 경향이 있거든.’
[무슨···?]
‘민주는 전형적인 메조 스타일이란 말이지. 지난번에 송지희랑 한 영상 보면서 엄청 흥분했었잖아.’
[그렇죠.]
‘어쩌면 이번 일도 왠지 나에게 여자를 붙여주려는 이상한 심리의 발현이 아닐까 해서.’
[설마 직접 여자를 공수해 바치는···.]
‘그렇지. 한마디로 네토라레 성향이랄까? 내가 다른 여자랑 하는 걸 보면 주체 못 하고 흥분하는 거야. 왜 예전에 애자매 부친이 마누라를 밖으로 돌린 것처럼.’
[듣고 보니 민주양이라면 가능성이 있겠네요.]
사범대 건물에 도착한 나는 학과사무실로 올랐다.
< 555.거자필반-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