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4. 거자필반-14- >
‘흐음. 하긴 있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대답하진 않겠지. 괜히 들쑤신 꼴만 됐군.’
-이도훈 : 그냥 아는 사람 있나 해서요. 실은 성수형 여자친구분은 만나본 적도 없어서요.
-설수지 : 저도 마찬가지예요. 성수 씨에 대해선 얘기만 들었어요. 무척 좋은 분이시라고.
-이도훈 : 성수형 참 괜찮죠.
그 무렵 수지 또한 도훈을 의심하고 있었다.
‘뭔가 찔러보는 느낌인데···. 설마 흑막 본인은 아니겠지?’
두 사람은 가벼운 탐색전을 벌이며 자신을 이어준 제3의 연결고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밝혀진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서로 헛발질만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 담판 짓는 편이 낫겠어. 도훈이 흑막이든, 흑막과 관련이 있든 만나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어?’
-설수지 : 근데 저희 언제 볼까요?
-이도훈 : 다음 주중 편하신 시간이?
-설수지 : 전 월, 수 빼곤 다 괜찮아요. 그땐 법학 스터디 모임이 있어서요.
-이도훈 : 아, 전 화요일 선약 있고 목요일엔 운동 동아리가···.
도훈은 있지도 않은 선약과 동아리를 만들어 냈다.
[상대가 튕겼다고 주인님도 튕기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고 업적 때문이야.’
[업적요?]
‘이번 미션은 소개팅 시작하는 순간 타이머가 작동되는 거잖아. 하루 만에 끝장을 봐야 하는데 다음 날 수업이 있으면 그걸 핑계로 빠질 공산이 크단 말이지. 여지를 두지 말아야지.’
[아! 그렇군요.]
소개팅 자리에서 곧바로 잠자리까지 이어지는 미션.
주어진 시간은 길어 봐야 반나절 남짓이다.
도훈은 외박이 가능한 금요일을 베스트로 여겼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으로 보아 토요일도 위험했다.
-이도훈 : 혹시 금요일 괜찮으실까요?
-설수지 : 불금요? 좋죠.
-이도훈 : 그럼 중간에 종종 연락드리면서 약속 장소도 같이 잡도록 해요.
-설수지 : 네.
수지와 소개팅 약속을 잡자 마자 곧바로 성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다.
"네, 형."
-야. 연락해 봤냐?
"이번 주 금요일 보기로 했어요."
-오,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하고 있군. 잘했다.
"저 형, 근데."
-왜? 무슨 할 말 있어?
"설수지라는 분하곤 전혀 안면이 없으신 거예요? 형 얘기했더니 본적도 없다던데···."
-맞어. 여친 친구긴 한데, 그닥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거든.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절 소개팅 시켜줬다고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최근 들어 많이 친해졌어. 고등학교 동창인데 대학 와서 연락 안 하고 지내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쳤더라고. 그러니 나랑은 같이 볼 시간이 거의 없었지. 근데 사진으로 봐선 엄청 괜찮더라고. 여친도 모태 미인이랬어.
성수의 말을 들은 도훈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흠, 마치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같은데?’
[너무 극단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물론 길 가다 우연히 만난 동창이 반가울 순 있겠지.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묻다 소개팅을 주선할 수도 있고. 그 와중에 또 하필 나를 딱 지목하는 상황도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세가지가 동시에 벌어졌다고? 말이 돼?’
[듣고 보니 조금 수상하긴 하네요.]
‘우연이 연속되면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상대가 주인님을 의도적으로 노리고 접근했다는 말씀이시죠? 다른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서?]
‘사주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지. 다만 소개팅을 부탁하기 전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설마 PK단은 아니겠지?’
[설수지 양이요?]
‘왜, 이제 중수까지 위업도 몇 개 안 남았잖아. 슬슬 PK단이 눈치를 챌 시기란 말이지.’
[만약 PK단이 주인님의 정체를 알아챘다면 벌써 찾아오고도 남았을 겁니다.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요. 물론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겠네요.]
‘내 말이. 남는 시간 뒷조사를 한 번 해봐야겠어. 의심가는 사람들 위주로.’
[박서현양 말이죠?]
‘그래. 그 스토커. 민주한테 혼쭐이 난 뒤로 불안할 정도로 잠잠하단 말이야. 이럴 리가 없는데.’
[내일이면 수업 때문에 어차피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만나서 한번 털어봐야지. 스킬만 발휘할 수 있다면 부처님 손바닥 안이란 말씀.’
도훈이 씨익 웃었다.
***
다음 날 아침.
아침부터 옷장을 뒤져 반 팔을 찾았다.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었는지, 창살로 들어오는 햇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원주인은 옷장 안엔 반 팔이랄게 거의 없었다.
‘얼레? 왜 여름옷이 안 보이지?’
[전역 당시가 겨울이다 보니 여름옷은 따로 안 챙긴 게 아닐까요? 입대를 하면서 보관하지 않았다면요.]
하긴, 그렇군. 이도훈의 제대는 작년 겨울이다.
그 뒤로 3월 전까지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던중 사고를 당했으니, 여름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옷장을 뒤지고 뒤져 반 팔 하나를 겨우 찾았으나, 막상 입어보니 너무 타이트했다. 몸통은 꼭 끼고, 팔 부분은 바짝 조여졌다. 최소 한 치수 이상은 작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옷이 쪼그라들었을까?’
[그것보단 복무기간 몸을 키우느라 예전 옷이 안 맞는 게 아닐까요?]
‘벌크업으로 사이즈가 커졌단 말인가?’
[2년은 제법 긴 시간입니다.]
‘거참, 난감하게 됐군. 여름옷도 없는데 그나마 한 벌 있는 것은 사이즈가 맞질 않으니···.’
티를 입고 전신 거울로 보는데 무슨 쫄티를 입은 느낌이다. 그나마 몸매가 좋아 보기 흉하진 않지만, 젖꼭지 부분이 튀어나와 살짝 민망했다. 무슨 쫄쫄이도 아니고···.
‘더워 죽겠는데 긴 팔 입고 나갈 수도 없고 일단 오늘은 이거 입고 나갔다가 오후에 쇼핑이라도 하고 와야겠어.’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훈은 꽉 끼는 반 팔 티를 걸치고 학교로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저 사람 몸 좀 봐. 완전 쩐다."
"뭐지? 자기과시?"
"쉿, 다 들려 인마."
나 참, 대놓고 욕을 하던가? 어처구니 없어 쳐다보자 남학생 둘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물론 질투의 시선만 받은 것은 아니다. 여자들은 타이트한 쫄티 앞에 얼굴을 붉혔다.
궁금함에 마음의 소리로 속마음을 읽자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렸다.
{와···.얼굴도 잘생겼는데 몸매도 끝내주는구나. 여자친구 백퍼 있겠지?}
{젊은 총각이 힘도 좋게 생겼네.}
{모델 일하는 사람인가? 나도 모르게 계속 쳐다보게 되잖아?}
듣고 있으니 주로 남자들은 부러움과 시기를, 여자들은 민망해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음, 뭐 생각보다 반응은 나쁘지 않군.’
[주인님 몸이 원체 잘 빠지셨으니까요.]
‘솔직히 예전엔 이렇게 드러내놓고 몸 자랑하는 남자들 정말 밥맛이었는데.’
[본인이 막상 그런 남자가 되니까 어떠신가요?]
‘솔직히?’
[네.]
‘부러우면 운동 빡시게 해서 니들도 만들던가?, 라고 말하고 싶군.’
[역시 올챙이 개구리 시절을 모른다더니···.]
‘사람 맘은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가 다른 법이잖냐. 엣헴.’
캠퍼스에 도착해 강의동으로 향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수업 장소로 이동하는 태영이었다. 야구모자에 메신저 백을 걸친 녀석은, 반바지에 화려한 스니커즈 신발로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어, 도훈이 형?"
"수업 가냐?"
"네. 같은 수업이잖아요."
태영은 내가 입은 쫄티를 보고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와, 패완얼이라더니, 오히려 패완몸이구나."
"뭔 소리야, 갑자기."
"저도 나름 신경 써서 나왔는데, 형한텐 쨉도 안 되니까요. 패션의 완성은 역시 몸매였네요."
"왜 멋있기만 한데? 그 신발 어디서 샀어? 잘 어울리는데?"
"괜한 위로 마세요. 제가 명품으로 도배를 해도 넝마를 걸친 형보다 못할 테니까.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여름 오기 전에 운동이나 할걸."
"사실 여름옷이 없어서 2년 전 입던 옷을 꺼내 입었거든. 몸이 좀 커졌는지 너무 쪼인다."
"그래도 보기 좋네요. 멀리서 보고 캡아 코스프렌 줄 알았잖아요."
"캡아?"
"캡틴 아메리카요. 이햐, 근데 진짜 몸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그냥 운동 꾸준히 했어. 헬스장 다니면서."
전생의 이도훈이.
"저도 헬스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못할 건 없지."
"암튼 부럽네요."
"그나저나 2주간 실습 가느라 학교 못 나왔는데 별일은 없지?"
나는 태영을 통해 학과 소식을 물었다.
"그냥 그렇죠. 참, 지난주 2강의동 에어콘 고장 나서 완전 찜통 됐었잖아요. 진짜 무슨 사우나 들어온 줄?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너무 더워요."
"그러게. 올여름은 유난히 덥네."
최대한 그늘 있는 곳으로 햇볕을 피해 다녔으나 오전부터 온도가 심상치 않았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음료수를 뽑아 태영에게 건네고 나도 목을 축였다. 태영이 감사를 표하며 나에게 말했다.
"근데 여름이 되니까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에요."
"왜?"
"흐흐. 여자애들이 옷이 점점 짧아지고 있거든요. 저기 좀 보세요."
태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한 여대생 한 명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나가고 있었다.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가 보는 사람마저 시원함을 느끼게 했다. 태영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하긴 뭐 그래 봐야 그림의 떡이네."
"그러게 현미 소개팅 시켜준데도. 지가 부탁해 놓고선."
"윽, 그, 그건 사양요. 하하."
태영이 말을 돌리며 다른 곳을 가리켰다.
"형, 저기 저 여자 좀 봐요. 뒤태가 와! 청바지에 흰 티만 있었는데 저 정도라니···."
"저거 우리 과 정음이 아니냐?"
"네?"
"정음이 맞는 거 같은데? 정음아!"
정음의 이름을 부르자 꼭 끼는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못 보던 사이 한층 더 예뻐진 정음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은 청바지에, 헐렁한 흰 티만 걸쳤는데도 청순함이 물씬 풍겼다.
"어? 도훈 오빠!"
그녀는 반가움에 자기도 모르게 나를 오빠라 부르더니, 머쓱했는지 태영을 향해 인사했다.
"태영이도 안녕."
"뭐야? 너 오늘 엄청 신경 쓰고 왔네?"
"그, 그냥 평소처럼 왔는데···."
정음이 급히 변명했지만, 태영의 말처럼 여러모로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입술에는 안 하던 붉은 색 틴트까지 발려있었다. 수수한 화장이 오히려 타고난 이목구비를 살리며 물오른 미모를 실감케 했다. 특히 입학 초에 다소 보이쉬해 보이던 짧은 머리는 어느덧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어 여성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흐음, 정음인 정말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오랜만에 주인님 본다고 제법 신경 쓰고 나온 느낌인데요?]
‘그러려나?’
"아닌데? 화장도 한 거 같은데?"
"그, 그냥 얼굴 탈까 봐 썬크림 좀 바른 거야. 참, 선배 실습은 잘하셨어요?"
정음은 자꾸 자신의 화장에 관심을 보이는 태영을 무시하며 말을 돌렸다.
"그럭저럭? 어차피 참관은 출근만 하면 되는 거라서."
우연히 강의동 앞에 세 사람이 모였다.
"그럼 이제 서현이만 오면 다 오는 건가?"
"서현인 오늘 못 온 데요."
정음이 대답했다.
"왜?"
"아파서 결강한다고 저한테 톡 왔어요."
"그 범생이가 웬일로 수업을 다 빠졌데?"
태영이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냥 몸이 좀 안 좋다더라고. 아침에 나한테 연락왔었어."
"별일이네."
그러게. 별일이다. 서현일 대질심문하려던 참에 공교롭게도 수업을 결강하다니.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금요일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여유를 갖고 기다리기로 했다.
"정음이 너도 음료수 마실래?"
"아니에요. 전 집에서 들고 왔어요."
정음이 백에서 텀블러를 꺼내 보였다.
"커피값 많이 들어서 요샌 집에서 아이스로 타서 오거든요."
"으, 구두쇠 같으니. 알바로 돈도 벌면서 엄청 아끼네. 너 요새도 도장 나간다며?"
"뭐래? 혼난다?"
자꾸 옆에서 깐족거리던 태영은 정음이 주먹을 말아쥐자 대번에 쫄아 내 뒤로 몸을 숨겼다.
"형. 보세요. 쟤가 저렇다니까요. 그래도 형 있으니까 경고라도 해주네. 지난 주엔 일단 주먹부터."
"야! 정태영, 너 진짜!"
역시 터프걸!
성격은 어디 안 가는구나.
하지만 정음이 용돈을 아끼는 이유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내 실습복을 사주느라 지갑이 얇아졌기 때문이었다.
‘하-. 역시 정음이 밖에 없다. 정음이가 최고야.’
[주인님 엄청 모순적인 거 아시죠?]
‘뭐가?’
[어제까지만 해도 송미나양이랑 사귀었으면 좋겠다더니, 정음양이랑 있으니 또 정음양이 최고라고 그러고.]
‘둘 다 좋은데 어쩌냐 그럼?’
[과욕은 금물입니다. 결국엔 한 명을 선택해야죠.]
‘그래서 최대한 미루고 있잖아. 누굴 골라도 나머지가 아쉬울까 봐.’
근 한 달 만에 받는 수업이라 그런지 강의가 귀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무엇보다 태영의 말대로 여름이 되니 여학생들의 노출이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곳곳에 짧은 치마와 가슴골이 패인 티를 입은 여학생들이 부주의하게 앉아있었다. 대체 수업을 하러 온 건지 몸매를 과시하러 온 건지 모를 지경이다.
하긴 나도 바짝 붙는 쫄티를 입고 온 마당에 누굴 흉보기도 뭐하군. 그때 옆에 앉아있던 정음이 앞자리에 앉은 태영이 몰래 조용히 물었다.
"오빠. 근데 옷이 좀 야하신 거 아니에요?"
< 554. 거자필반-1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