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71화 (544/2,000)

< 553. 거자필반 -13- >

그것은 실수였다.

인스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그때.

슬쩍 가슴골을 노출한 사진 한 장에 좋아요가 수백개를 돌파하고, 댓글이 쏟아졌다. 불특정 다수의 열광적 관심.

수지는 자궁이 떨린다는 표현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들이 자신의 벗은 몸에 환호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자신에게 노출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그녀의 사진에 거하게 자위행위를 마쳤다는 남자들의 댓글에는 자신조차 흥분해서 애액을 뿜어낼 정도였다.

"그러게 호사다마라 했는데···."

그러나 인기에 너무 도취 되었던 것일까?

늘 신상이 털리지 않도록 조심성을 기하던 그녀가 딱 한 번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벗은 모습을 찍어 올린다는 것이 하필 침대 위에 놓아둔 대학 교재가 함께 찍혀 버리고 만 것이었다.

두꺼운 법학 개론서 측면엔 학번과 나란히 찍힌 설수지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 게시글을 갱신하던 중 크나큰 실수를 깨닫고 바로 삭제했지만, 하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사람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런 악질에게···."

수지는 당황한 나머지 한동안 인스타를 끊었다.

그러나 채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사람들이 보여준 열광적인 반응은 마약과 같아서, 어느덧 그녀를 중독시켰던 것이다.

다행히 해당 사진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는지 조용히 묻히는 듯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구석에 조그맣게 찍혀나온 교재를 굳이 확대해 이름을 확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장면을, 그것도 올리자마자 지웠기 때문에 본 사람이 있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 당사자인 수지마저 그 사건을 까맣게 잊어가고 있을 때쯤 그녀는 한 통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바로 인스타 계정을 통해 날아온 쪽지였다.

-gmrakr :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수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린 시절 성적에 대한 압박감에 컨닝을 저지르다 선생님께 들킨 이후로, 그때만큼 식은땀을 흘려보긴 처음이었다.

다행히 그때는 초등학생 시절이었고, 당시의 담임은 귀엽고 똘똘한 자신을 예뻐해 순간의 실수로 여기고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날아온 쪽지에선 지독한 악의가 느껴졌다. 랜선 너머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스토커 같은 팔로워의 짓궂은 장난으로 여기며 무시했으나, 3일 뒤 또다시 쪽지가 날아왔다. 이번엔 좀 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gmrakr : 20162590, 국성대 법대 설수지. 감히 내 쪽지를 무시해?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수지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그녀는 인스타 계정을 폭파하려 했다.

그러나 뒤이어 날아온 쪽지에 그마저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gmrakr : 만에 하나 인스타를 탈퇴했다간, 네가 지금껏 올렸던 모든 사진을 대학 대나무 숲을 통해 유출해 버리겠어.

대나무 숲이란, 대학생들의 익명의 공간으로 온갖 루머와 제보의 본상이라 부를 곳이었다. 허위와 과장된 소문도 많았으나 사진이 첨부되는 이상 빼도박도 못할 것은 분명했다.

수지는 이제 쪽지를 무시할 수도, 계정을 날려버릴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날렸다.

-SSG1004 : 누구세요?

-gmrakr : 이제야 반응을 보이네.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그냥 널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이라고만 해두지.

일부 팔로워들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맞히려고 애를 쓰는 상황.

유명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니 모델 지망생이니 심지어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한 유부녀라는 말도 안 되는 억측들만 난무했다. 수지는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아는 사람은 오직 ‘gmrakr’라는 익명의 아이디 뿐임을 깨달았다.

여태껏 비밀을 까발리지 않고 자신에게 직접 접촉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고 판단했다.

수지는 이제 둘 중 하나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협박죄’의 명목으로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를 넣고 인스타를 탈퇴하는 것, 아니면 그가 제시하는 조건을 들어보고 협상을 시도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몰래 신고를 알아보니 굉장히 복잡했다.

인스타의 경우 메일과 간단한 인증을 통해 계정 생성이 가능하고, 또 본사가 외국계였기 때문에 국내 경찰력으론 신원을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다. 유력 정치인이 관련되어도 수사 협조가 어려운 마당에 일개 개인이 접근하기엔 너무도 난이도가 높았다.

사실 본인조차 인스타를 통해 노출을 감행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보안 시스템 때문이었으니까.

더구나 어찌어찌 신고가 되었다 한들, 상대가 자폭하듯 사진과 신상을 뿌리는 순간 피해는 온전히 본인이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예훼손으로 건다 한들, 이미 지킬 명예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상대는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었고, 최악의 경우 대학 전체에 그녀가 했던 부끄러운 행동들이 낱낱이 공개될 가능성이 컷다.

본인의 불명예는 차치하고라도, 법조계 엘리트 집안이라는 가문에 누를 끼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우였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아버지가 무서워 시키는 대로 따르는 중인데, 참한 모범생으로 여겼던 자신이 알고 보니 SNS상에서 온갖 노출을 감행하는 변녀로 소문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악을 피하기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

결국, 수지는 협박범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만 그가 인도적으로 자비를 베풀길 바라는 수밖에.

-SSG1004 :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뭐죠?

-gmrakr : 일단 시키는 대로 할 각오가 되었는지 봐볼게.

협박범은 가벼운 사진을 올리기를 명령했다.

특정 부위를 노출하거나 자신의 원하는 포즈로 게시글을 등록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것은 평소 수지가 하던 노출 행위였기 때문에 딱히 어렵진 않았다. 수지가 시키는 대로 따르자 두 번째로 그녀의 폰번호를 요구했다.

수지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강간, 납치, 변태적인 행위 강요, 금전 갈취 등···. 어떤 것을 떠올려도 최악의 상황만 그려졌다. 하지만 도저히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없었던 수지는 그의 요구대로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걸려온 낯선 번호.

전화를 받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여보세요?"

-······.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어쩜, 목소리도 예쁘네.

수지는 소름이 돋았다.

놀랍게도 익명의 상대가 여자였던 것이다.

심지어 목소리로 유추해 볼 때 굉장히 젊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보다 한 두살 많거나, 아니면 또래 정도?

수지가 당황하자 상대가 말했다.

-놀랬니? 변태 같은 남자가 아니라서?

"아···. 아니에요."

-오늘은 확인차 전화해 본 거야.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연락하도록 할게.

뚝-

첫 통화는 허무할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수지는 온몸의 긴장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물론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상대가 여자니 만큼 변태적인 행위 강요는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상대가 레즈비언이라 해도 남자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수지의 번호를 알게 된 이후에도, 익명의 상대는 주로 인스타 쪽지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 대체로 쪽지의 내용은 최근의 근황을 묻는 등의 별 볼 일 없는 내용이었다.

수지는 점차 안도감이 들었다.

대화를 나눠볼수록 상대가 정상인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 레즈비언이거나 바이섹슈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인스타에 올라오는 수지의 노출 사진에 반응을 보였으며, 가끔은 질투섞인 멘트를 남기기도 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gmrakr :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야겠어.

상대가 마침내 제안을 걸어왔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이었다.

-gmrakr : 이도훈이란 녀석을 만나 봐.

-SSG1004 : 그 사람이 누군데요?

-gmrakr : 너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야. 체육과고.

-SSG1004 : 체대생이라고요?

-gmrakr : 아니, 체대가 아니고 사범대 체육교육과.

-SSG1004 : 만나서 제가 뭘 해야 하죠?

-gmrakr : 그 사람은 네가 누군지 전혀 몰라. 그냥 소개팅만 하면 돼.

-SSG1004 : 그냥 소개팅만 하라고요?

-gmrakr : 그래, 일단은.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난데없이 소개팅이라니?

수지는 어쩌면 익명의 상대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 이도훈 본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상대 목소리는 남자가 변조해서 낼 수 없는 완벽한 여성의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소개팅 상대는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다. 별의별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쩌면 이도훈이라는 사람이 다른 여자를 시켜 나를 꾀어낸다거나?’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만일 그녀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면, 협박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결국 익명의 상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도훈’이라는 사람에게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나 수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개인적인 원한일까?

아니면 그냥 무작위로 찍은 상대?

인맥을 뒤져 사범대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을 떠올렸다.

체육교육과와는 직접적인 접점이 없어, 부득이 한 다리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절박한 심정이 통했는지 오랜만에 해후한 고교 동창의 애인이 마침 체육과 부학회장이라고 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수지가 손 놓고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협박한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자신도 반격할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예상보다 훨씬 철저한 사람이었다.

‘gmrakr’이라는 영문 아이디에선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영타를 한글로 변환해보니 ‘흑막’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흑막이라니.

참으로 고약한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핸드폰 대리점에 찾아가 수신 목록의 분석도 시도했다.

본인의 통화 내역을 뽑아보면, 가변 변호로 걸려오는 것일지라도 실제 번호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형사법과 판례를 배운 것을 실생활에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생각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낸 상대의 번호는 어처구니 없게도 ‘공중전화번호’였다. 상대 역시 자신만큼 머릴 굴렸던 것.

‘결국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어.’

수지는 ‘흑막’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결국 도훈을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만에 하나 흑막이 ‘도훈’ 본인일 수도 있다는 미약한 가능성과, 설사 그게 아니라도 그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높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흑막이 랜덤으로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니기만 바라는 수밖에.

흑막과 통화를 마친 수지가 폰을 손에 꾹 쥐었다.

‘두고 봐. 내가 꼭 널 찾아내서 복수하고 말 테니까.’

수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노출증과 별개로, 그녀는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대대로 내려온 뛰어난 유전자는 그녀 안에도 잠재되어 있었다.

***

집으로 돌아간 도훈은 간만에 집 정리를 하며 다시 학교에 나갈 채비를 했다. 중간고사, 일본 여행, 교생 실습으로 이어지는 4주라는 기간은 본인이 대학생이란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무슨 방학 끝나고 다시 학교 가는 것 같네."

도훈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로시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거의 한 달 가까이 학교 안 나가신 거죠?]

‘응. 애들 못 본 지도 오래됐어.’

학교에 도통 나가질 않다 보니 중간중간 만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정음이나 민주 정도는 한 번 봤지만, 나머지 애들은 잘살고 있으려나?’

정음은 실습복으로 정장을 사준다며 함께 쇼핑했고, 민주는 교생 실습 중 위문차 저녁을 같이 먹었다.

‘나연이나 연두도 그렇고, 희주나 오수정까지. 다시 보면 반갑긴 하겠구나. 아참, 박서현.’

갑자기 서현에 생각이 미친 도훈은 불쑥 설수지에게 문자를 남겼다. 혹시라도 그녀와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도훈 : 운동 마치고 집에 왔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설수지 : 네. 점심 먹고 집에서 뒹구는 중이에요.

-이도훈 : 성수 형 여자친구분하고 친구라던데.

-설수지 : 네, 은희랑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요. 그때는 좀 서먹했는데 최근에 많이 친해졌어요.

‘최근이라고?’

도훈은 뭔가 의심이 들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도훈 : 혹시 사범대 다니는 다른 지인은 없으세요?

잠시동안 깨톡이 중단되었다.

뭔가를 눈치 챈 것일까?

살짝 초조감을 느끼며 답장을 기다리는 데 수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설수지 : 아뇨, 없어요. 그건 왜 물으시죠?

< 553. 거자필반 -1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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