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70화 (543/2,000)

< 552.거자필반-12- >

***

수지가 폰을 내던졌다.

"이 짓도 영 지겹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수지야. 식사하러 오너라."

남방을 활짝 열어젖힌 채 침대에 누워있던 수지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방문을 잠가놓은 기억이 떠올라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이곳은 자신의 허락 없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네, 엄마. 금방 나갈게요."

흐트러진 모습이라곤 일체 찾을 수 없는 공손한 목소리. 팔로워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야한 포즈를 취하던 SSG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꺼내놓은 자위 기구를 서랍 속 깊숙이 정리하며 모범생 수지로 돌아가기 위해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일요일 점심은 아빠랑 같이 먹으니까 최대한 조신하게 보여야해.’

입술에 칠했던 진한 립스틱을 지웠다.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를 끈으로 묶자 어느새 참한 여대생의 얼굴이 거울에 비추었다.

참으로 단정한 얼굴이다.

화장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가 아이처럼 보들보들했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과 살짝 처진 눈매는 청순가련이란 말이 정로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변신을 자축하며 방긋 웃었다.

"됐어. 이 정도면."

주방으로 나가자 아버지가 신문을 펼쳐놓고 있었다. 세상 고민을 홀로 다 짊어진 사람처럼 심각한 얼굴로 신문을 읽던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세우며 수지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여느 때처럼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

"네?"

수지가 바짝 얼었다.

아버지는 늘 그녀를 다그치는 편이었다.

"아무리 집안이라도 그렇지, 치마 길이가. 쯧쯧-."

"죄송해요. 편한 옷으로 입고 있다 보니까···."

수지가 고개를 떨구며 변명했다. 최대한 지적받지 않게 옷매무시를 다듬었음에도 깐깐한 아버지를 만족시킬 순 없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말렸다.

"이이는 또. 주말이라고 집에서 쉬는데 옷이라도 좀 편히 입으면 안 돼요? 수지도 이제 다 큰 대학생인데···."

"숙녀가 된다는 건 귀찮은 걸 감수한다는 거야. 당신이 그렇게 싸고돌면 애 버릇만 나빠진다고."

아버지의 면박에 어머니도 입을 다물었다.

수지는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금방 바지로 갈아입고 올게요."

수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숨 막혀. 이러다 진짜 미쳐버릴거야.’

거대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인 아버지는 그야말로 독재자였다.평생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아버지 말이라면 꼼짝 못 했다.

그가 벌어준 돈으로 평생을 호강하며 살았으니 발언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어머니는 남편의 말이라면 늘 하늘같이 여기는 여자였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아버지가 시키는 데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생이었다.

가기도 싫은 법대를, 집안의 명예를 위해 진학해야 했고, 마음에도 없던 로스쿨도 준비했다. 그녀를 국성대 법대에 밀어 넣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로스쿨은 자대 출신을 일정비율 챙긴단 말이지. 괜히 일류법대에 진학해 박 터지게 경쟁하느니, 차라리 국성대가 로스쿨 입학하긴 훨씬 수월할 거야. 넌 성적이 변변치 못하니 말이다.

소년등과에 연수원 수석 출신인 아버지는 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는데도 올백을 맞지 못했다며 나무랐다.

-넌 정말 공부 쪽으론 재능이 없구나.

-우리 집안에 너처럼 둔한 아이는 없었는데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판사 출신에, 삼촌 또한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천재였다. 전교 일등이 최대치던 수지에게, 전국구 단위로 순위를 매기는 게 일상이었던 아버지를 만족시키란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사법고시를 보던 우리 때랑 달리 어떻게든 로스쿨만 들어가면 길이 있으니.

연수원 동기 출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국성대 법대로 진학시킨 이유도, 그녀의 실력을 철저히 무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수지는 마음에도 없는 대학에 가서, 관심도 없는 법학 공부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방으로 되돌아온 수지가 신경질적으로 치마를 벗었다.

무릎 위 5CM. 결코, 짧은 치마가 아니었다. 요즘 또래들이 얼마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지 안다면 아버지는 기절초풍하고 말 것이다.

치마를 훌렁 끌어내리자 하얀 팬티가 보였다.

늘씬한 다리는 대리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짜증 나. 아무리 예뻐 봐야 뭐해. 어차피 보여주지도 못할 거.’

빼어난 몸매의 소유자인 수지였지만, 아버지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로 늘 수수한 차림으로 다녀야했다.

치마는 무릎 아래.

안이 살짝이라도 비치는 블라우스는 절대 불가.

화장이나 악세사리 또한 금지.

고등학교 때까진 고분고분 따랐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반감이 들었다. 그녀는 해방구를 절실히 찾았고, 마침내 SNS에서 공간에서 익명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하의 실종 컨셉으로 한 장 찍어볼까?’

문득 충동을 느낀 수지가 팬티마저 벗었다. 그리고는 걸치고 있던 남방으로 아슬아슬 밑을 감추었다. 카메라를 들고 거울을 찍는데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러면 팬티를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분간이 잘 안 되네.’

그녀는 발목까지 내렸던 팬티를 허벅지 위로 끌어 올렸다. 아까 팔로워들을 위해 사진을 찍느라 살짝 흥분해 있던 팬티 안쪽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됐다. 이러면 노팬티인 줄 단박에 알겠지?’

하의 실종 패션에, 허벅지에 팬티를 걸친 자세로 수지가 셀카를 찍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봤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큼 음탕하고 도발적인 포즈.

그녀는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고 태그를 지정했다.

SSG1004 #점심 먹기 전 #하의 실종 #젖은 팬티 #제모시켜주실 분?

다시 바지로 갈아입은 수지가 주방으로 내려갔을 땐, 조금 전 음란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철저할 정도로 이중생활을 감췄고, 집에서는 늘 조신한 딸인 척 연기했다.

신문을 계속 읽던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이 사건 결국 매스컴 탔네."

"무슨 사건요?"

"그 왜, 저번에 독립한 한 변 있잖아."

"한영철씨 말이죠?"

"응. 그때 한 번 나한테 자문을 구하더라고. 1심 판결 뒤집고 용케 무죄 받아냈군."

"그래요?"

"공동정범으로 있던 피의자가 진술을 번복했다나봐. 근데 좀 찜찜해. 내가 그것 말곤 다른 수가 없을 거라고 알려줬거든. 어떻게 피의자를 구워삶았을까? 수지야. 중간고사 결과는 어떤 것 같니?"

어머니랑 대화를 나누던 아버지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 말고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마치 집안에서 왕처럼 군림했다.

"성적은 학기 말에나 나온다나 봐요."

"그래도 감이란 게 있을 거 아니냐?"

"음,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아버지가 못 마땅한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내가 전에도 말했잖니. 최선을 다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결과로 보여주지 못하면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니까?"

"···네."

"최선은 누구나 다하는 거야. 최고가 되는 게 중요하지. 일부러 점수도 낮춰서 국성대로 보냈는데 그마저도 못해내면 내 얼굴이 뭐가되니?"

"그만 좀 해요. 얘 밥 먹다 체하겠어요."

"당신은 빠져. 당신이 그렇게 사사건건 싸고도니까···."

다시 시작된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수지가 식탁 아래로 스마트 폰을 훔쳐보았다.

좋아요♥ 알림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감옥같은 그녀의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

한바탕 질펀한 섹스가 끝난 후 미나가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넌 정말··· 어쩜 그렇게 잘해?"

미나가 탄복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았어요?"

"당연하지. 지금도 밑이 빠져버릴 것 같아. 어휴, 오후 수업은 어쩐다."

미나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오랜만에 잦이 끝이 얼얼했다.

그녀의 강력한 조임은 여전히 최고였다. 그동안 성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주말인데 좀 쉬시는 게 좋지 않아요?"

"나도 쉬고싶어. 근데 개업한 지 한 달 만에 퍼졌다간 사람들이 흉 볼거야. 지금은 무리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할 때니까."

"이젠 사장님 다 되셨네요. 돈 많이 버시겠다."

"많이 벌면 뭐하니? 같이 쓸 남자친구도 없는걸···."

미나가 넌지시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저도 아직 없어요."

"잘됐네. 그럼 우리 사귈래?"

미나가 장난스레 물었다.

"누나랑 저랑요?"

"응? 안될 거 있니?"

미나는 무척 적극적이었다. 약간 조바심이 느껴졌다.

"나 별로야? 난 너랑 무척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잘 맞긴 하지.

훈남 훈녀에. 몸짱 커플에.

어느 남자라도 필라테스 강사를 애인으로 둔다면 부러워 미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아직 애인을 둘 수 없는 몸이다.

미나와 사귄다면 행복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무리다.

"제 상식으로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대학을 졸업한 이후가 좋을 것 같아요."

상식개변 스킬을 적용하자 미나의 동공이 커다래 지며 순식간에 세뇌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역시 공부하는 학생 시절에 애인을 사귀는 건···."

"그러니까요. 제가 학생만 아니면 당장 누나랑 사귈 텐데···."

"정말?"

"당연하죠.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시기잖아요. 임용고시가 워낙에 어려우니까."

"그렇겠구나···. 많이 힘들지?"

상식개변으로 미나의 생각이 변화했다. 그녀는 대학생인 내가, 직장인인 자신을 만나는 것이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죠.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그중에서 제일 힘든 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제일 힘든 건 뭐?"

"가끔 땡길 때 참아야 하는 거예요."

"무슨···? 아. 그렇구나."

"아무래도 혼자 서 푸는 건 한계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아무 나 만날수도 없고."

"후후. 알아서 잘 풀고 다니는 것 같던데?"

"제가요?"

"아니었어?"

"그냥 뭐···. 어쨌든 지금은 만나는 사람 없어요. 누굴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냥 가끔."

말귀를 알아차린 미나가 고개를 손을 맞잡았다.

"언제든 말해."

"네?"

"너 하고 싶을 때. 난 괜찮으니까."

미나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분명 좋은 여자다.

예쁘고, 몸매가 좋고를 떠나 마음씨도 곱고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그런 그녀를 붙잡아 놓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방생을 해주는 것이 그녀가 행복한 길이 아닐까?

"그래도···."

"그래도 돼."

미나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나 어차피 너 말고 다른 남잔 눈에 차지도 않아. 왜 그런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아···."

"그러니까 괜찮아. 풀고 싶을 땐 실컷 풀어.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릴테니까."

"누나."

"미안해 하지 마.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

결국 방생은 무리였다.

풀어주려고 해도 벗어날 생각이 없는 여자다.

그래서 고맙고, 더 미안했다.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데 미나가 말했다.

"그리고 안 바쁘면 가끔 연락이라도 해. 안 만나도 좋으니까."

"네."

이번 미션의 보상이 더욱 절실해 졌다.

***

수지의 아버지는 점심을 먹고 스크린 골프장엘 다녀온다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 역시 장을 보러 간다며 나갔다.

커다란 집에는 수지 혼자 뿐이었다.

"아빠가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우리딸."

엄마는 외출 전 혼자 남는 수지가 안쓰러운지 손에 용돈을 쥐어주며 위로했다.

"네, 전 괜찮아요."

"주말인데 가끔 친구도 좀 만나고 그래."

"아침에 교회 다녀 왔잖아요. 어차피 다음주까지 레포트 쓸 거 있어서 책 읽어야 해요."

"그렇구나. 아무튼 밥 잘 챙겨먹고. 엄마는 항상 널 믿고 있단다. 알지?"

"네."

수지는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와 공손히 인사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집을 나가자 그때까지 얌전한 표정으로 있던 수지가 머리부터 풀어 헤졌다.

"레포트는 무슨."

그녀가 풀어진 모습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켜는데 불쑥 전화가 걸려왔다. 번호를 확인하던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또 그 번호야.’

한참 핸드폰을 쳐다보던 수지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진동으로 해놔서 늦게 봤어요."

-됐고, 내가 시킨 건 어떻게 되고 있어?

"하기로 했어요, 소개팅. 체육과 이도훈이라는 분하고."

-후후. 잘하고 있군. 얘기는 해 봤어?

"네. 간단히 인사만 나눴어요."

-변태지?

"네?"

-그 새끼 존나 변태라고.

"글쎄요. 아직은 잘···."

-흥. 본색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하여간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수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사진은 분명 지워 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놈을 망가뜨리고 싶을 뿐.

"근데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지금 그 새낄 동정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너네 아빠 잘나가는 변호사더라? 하여간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네가 인스타에서 했던 짓 다 퍼뜨려 버릴 거야. 아주 볼만하겠어? 신문에도 나오는 유명한 변호사 딸이 노출증 환자라면?

"하, 할 테니까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한테 사진 있으니까 허튼 생각 꿈에도 하지마.

뚝-

전화가 끊어지고 알 수 없는 번호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것은 헐벗은 그녀의 사진이었다. 막 인스타를 시작하던 당시 무심코 올렸던 사진 속엔 그녀의 학번과 이름이 적힌 대학교재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 552.거자필반-1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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