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61화 (534/2,000)

< 543. 거자필반-3- >

***

모임 장소는 막창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초저녁부터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왔어?"

성수의 부름에 나는 그 옆에 자릴 잡았다.

남자 모임에 참석한 동기들은 모두 6명.

부학회장 성수의 주도하에 그를 따르는 2학년 남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안면은 있으나 대부분 데면데면한 사이고, 그나마 2학년 과대 정우선이 정도만 낯이 익었다.

"이모, 여기 잔이랑 앞 접시 하나만요."

맞은편에 앉은 우선이 센스 있게 늦게 온 나를 챙겼다.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네며 나에게 물었다.

"실습 엄청 잘하셨다던데요?"

"너가 어떻게 알고?"

우선은 부설고 실습이었다.

홀로 떨어진 나에 대한 소식을 누구에게 들었을까?

"현미가 알려줬어요. 도훈이 형이 교생대표로 실습하셨다고."

"아, 우현미."

같은 학교에 배치받았는데도, 학년이 다르다 보니 있는 줄도 몰랐다. 그 말을 들은 성수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등을 두들겼다. 아프다, 이 곰탱이야.

"이얼, 이도후니! 진짜 장학금 노리는 거였어? 대표 수업이라니, 엄청나 잖아?"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됐어요."

"그게 아니던데. 현미 말론 형님 엄청 칭찬받으셨다던데요? 진짜 현직 교사처럼 잘하셨다고."

"과찬이야."

"아무튼 혼자 떨어져서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는 대부분 부설로 배치받았는데."

"고생많았다. 한잔해."

이미 몇 순배 돌았는지 얼굴이 조금 불콰해진 성수가 소주병을 들었다. 나는 소주잔을 받쳐 잔을 받았다.

‘술이 약하니 조금만 마셔야지.’

"도훈이도 왔으니까 거국적으로 짠 한 번 하자."

"넵."

건배를 주도하는 성수의 권유에 다 같이 잔을 높이 들었다. 삼총사의 맹세처럼 한곳에 모인 소주잔들이, 일제히 흩어지더니 목구멍으로 꺾어졌다.

"캬-!"

"소주맛 지리네요잉!"

"으앗, 쓰다 써."

열심히 안주발을 새우는 후배들을 뒤로하고 성수가 물었다.

"다른 과 여자애들 괜찮은 애 없던? 실습 기간에 하나 후리라니까."

"···딱히요. 별일은 없었어요."

교사 둘에 교생 둘을 따먹긴 했지만.

그게 나에게 별일은 아니지.

"하여간 허우대만 멀쩡해 가지곤. 자슥이 실속이 없어."

성수가 혀를 끌끌 차며 잘 익은 막창을 입속에 넣는 사이, 이번엔 우선이 물었다.

"그래도 도훈이 형 과에서 인기 좋지 않아요? 팬클럽도 있고."

"팬클럽이라니?"

나도 모르는 내 팬클럽이 있었나?

"왜, 배구 연습 경기 때마다 응원 오는 애들 있잖아요. 나연이나 연두."

"걔들은 그냥 친한 동생들이야."

"원래 오빠 동생 사이로 시작하는 거죠."

이미 여보, 마누라 하고 있거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씁쓸해진 입안을 안주로 중화시켰다. 오랜만에 먹는 막창은 의외로 꿀맛이었다. 고기와는 다르게 쫀득한 식감도 좋았고, 특히 찍어 먹는 소스가 일품이었다.

"여기 맛있네요."

"어, 맛집이야. 값도 저렴하고 특히 서비스가 좋아서 손님들 항상 바글바글해."

"아, 어쩐지 사람 많아 보인더니···."

"아무튼 고생 많았어. 너네 학년은 연휴 끝나고 바로 실습으로 이어져서 거진 한 달 가까이 못 본 것 같다. 그래서 올만에 얼굴이나 볼라고 불렀어."

"하하, 아무튼 남자들 챙겨주는 선배는 형밖에 없네요."

"쨔사. 그니까 잘해라. 나중에 3학년 되면 너가 지금 1학년 애들 좀 챙기고."

"네."

"근데 1학년 남자애들은 좀 찌질하지 않나요?"

우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학년보다 숫자도 너무 적고···. 운동 잘하는 애들은 더 드물고···."

2학년 과대로서 이제껏 지켜본 후배들이 영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그 새터 때 누구였죠? 권투 배웠다던 애."

"강찬혁?"

"네, 걔도 깝죽거리다 반수 한다고 자퇴해 버리고···. 하여튼. 맘에 드는 애들이 별로 없다니까요."

"그래도 여자들은 학번 중에 제일 좋잖아."

"그건 맞아요."

체육과 1학년 여학생에 대한 소문은 이미 사범대 내에 자자할 정도. 특히 체육과 8선녀라는 비공식 별명이 붙을 만큼 몇몇 학생들의 유명세는 엄청났다.

1학년 여자애 얘기로 화제가 넘어가자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던 다른 2학년 남학생들까지 동참했다.

"육정음이 1티어지?"

"정음이 엄청나지. 요새 더 이뻐졌더라? 머리도 길러서."

"정음이도 괜찮은데 나연이가 좀 더 화려하지 않아? 무용 배워서 그런지 옷태도 잘 받고."

"갸는 화장빨이지."

"야, 니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몸매 갑은 희주야. 걔는 진짜 와꾸만 보면 사범대 원탑일걸."

"양희주?"

"희주는 얼굴이···."

"빻았다고? 빻은애 한테 왜 빻았다고 말을 못해."

"너도 거울이나 봐라, 짜식아."

"와하하하!"

역시 남자들끼리 모이니 여자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특히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애들이라 그런지 다들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았다. 저때는 뭐, 아침만 되면 텐트 치는 게 일상이니까. 아, 내 얘긴 아니고.

나는 조용히 술을 마시며 속으로 자부심을 즐겼다.

‘너희들 백날 떠들어 봐야, 위에 말한 여자들은 다 내 여자란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도훈이 형은 누가 젤 이쁜 거 같아요?"

"맞아요. 형이 얼른 고르셔야 우리도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죠."

"뭘 골라? 내가 왕이냐?"

"왕이죠. 간택을 기다리는 궁녀들이 줄을 서고 있는데···."

"형이 태도를 확실히 취해 주셔야 다른 여자애들도 미련을 저버리지 않겠어요?"

"맞아요."

"나참 무슨···. 말을 해도."

그때 성수가 구원투수를 자청했다.

"야야, 도훈이는 여자한테 별로 관심 없어."

"진짜요?"

"왜요?"

"도훈아, 이거 말해줘도 돼? 나름 흑역산데."

성수가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미 청산한 과거였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아는 애들도 있으니까."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도훈이 군대 가기 전에 과씨씨하다 깨졌거든."

"아."

"그런 일이!"

"그때 학을 떼 가지고 과씨씨엔 별로 생각 없을 거야."

"전혀 몰랐어요, 형."

"난 저번에 들었어."

"근데 설마 형이 차인 거?"

"누가 도훈이 형을 차겠냐? 형이 찼으면 몰라도."

"과씨씨 깨지고 나면 엄청 피곤한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어차피 졸업한 사람이야. 다 지난 일이고···."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표정을 굳히자 나머지 애들도 말을 아꼈다. 아무튼 이것으로 학과 내 바람둥이 이미지는 조금 불식시킨 것 같다. 일부러 재면서 어장관리하는 훈남이 아니라, 비극적인 흑역사를 지닌 순정남으로.

"야, 기분도 꿀꿀한데 한 대 빨러 가자."

성수가 담배를 챙기며 나를 끌었다. 우리 둘은 식당 앞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성수가 훅- 연기를 내뿜으로 물었다.

"내가 괜한 소리 한 건 아니지?"

"괜찮아요. 안 그래도 왕이니 뭐니 해서 곤란해하던 참인데."

"아까보니 2학년 애들이 너한테 열등감이 좀 심한 것 같더라."

"열등감이라뇨?"

"아무래도 그렇잖아. 같은 동기가 운동도 잘하지, 인기도 많아, 심지어 군대까지 끝내고 왔으니."

"뭘 또···. 형이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냐. 실은 너 도착하기 전에 잠깐 니 얘기가 나왔거든."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했다.

"무슨 얘기요? 뒷담화 했어요?"

"아니. 1학년 여자애들이 남자 안 사귀고 눈치 보는 이유가 너 때문이 아닌가 하고."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니가 여태껏 솔로로 있으니까 애들이 미련 남아서 다른 남자한테 눈길을 안 준다는 거야."

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다 따먹고 다니는 바람에 눈길을 돌리지도 않는 거지만.

"설마 그랬겠냐마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제 잘못은 아니죠."

"아니 네가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튼 그렇다네. 팔 선녀든, 삼천 궁녀든 과에 있어봐야 뭐하냐는 거지. 이대론 그림의 떡인데."

"알아서 잘들 하겠죠."

"그래서 말인데, 너 진짜 소개팅해볼 생각은 없냐?"

성수가 따로 부른 이유가 이것이었군.

"왜 저만 보면 맨날 소개팅 얘기에요?"

"팔아먹을 놈이 너밖에 없으니까 글치, 인마."

"우선이 시켜줘요. 요새 외로워 보이더만."

"곧 군대 갈 남자는 싫데. 오래 만나기 힘들다며."

"군필만 원하는 거예요?"

"기왕이면 잘생긴 남자로."

"누군데요?"

"내 여친, 친구."

"형수님 친구요?"

"형수는 좀 오바지. 아무튼 사범대는 아냐. 어때 생각있어?"

있는 여자 정리하기도 힘든 마당에 무슨···.

하지만 거절을 너무 해서 그런지 더 빼기도 미안했다. 내가 망설이자 성수가 계속 설득했다.

"이번 한 번만 내 체면 살려주라. 실은 지난번에 우리과 사진을 여친친구들 단톡방에 올렸나 보더라고."

"근데요?"

"하필 그 사진에 너도 같이 찍혀 나온 거야."

"형이 저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요?"

"왜, 저번에 MT가서 단체샷."

"아···."

"거기서 여친 친구라는 애가 너 보는 괜찮다면서 솔로냐고 물어봤데."

"그래서요?"

"솔로라고 했지. 너 솔로 맞지?"

여자가 많긴 하지만 사귀는 사이는 없긴 하지.

"솔로 맞아요."

"암튼 그 뒤론 계속 소개팅시켜달라고 조른다는데···. 여친도 좀 난감한가 보더라고."

으. 진짜로 날 팔아먹은 거잖아?

"형수님 친구면 몇 살이죠?"

"너보다 한 살 어리지. 어때? 딱 좋지 않냐?"

"뭐하는 여잔데요?"

"울학교 법대 다닐걸? 아무튼 공부도 되게 잘 한데. 고등학교 때 동창인데 내신 1등급이라나?"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닌데.

"아, 그리고 이뻐."

"이뻐요?"

"사진 달라 해볼까?"

이쁘다는 소리에 살짝 흥미가 돋았다.

물론 아직까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럼 수락하는 줄 알고 오해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오늘 우리 만나는 거 알거든. 소개팅 얘기 꺼내면서 슬쩍 보여준다고 하지 뭐. 한다고는 안 하고."

"알았어요."

"잠깐, 톡 좀 보내고."

성수가 자기 여친에게 깨톡을 보내는 사이, 나는 담배를 한 대 다시 물었다. 알콜이 들어가서 그런지 왠지 평소보다 담배가 더 땡기는 느낌이었다.

"좀 있음 답장 올거야."

"네."

"근데 진짜 실습가서 아무 일도 없었냐? 너 정도면 여고생들이 달려들고 난리 났을 거 같은데?"

"형, 저 남중이었어요."

"아, 남중! 씨바. 애도를 표한다. 너도 진짜 재수 좆도 없구나."

"괜찮아요. 같이 운동하고 노니까 재밌던데요."

"교생들도 별로든?"

"아까 애들도 그랬잖아요. 와꾸는 우리과 8선녀 따라올 애들이 없다고. 다 고만고만하더라고요."

"선생들은? 얼마 없긴 하지만 신규는 너랑 나이차이 별로 안날 건데? 나 2학년 교생 갔을 때 신규는 24살에 바로 임용되서 나랑 동갑이더라."

"거긴 신규도 없더라고요. 띠동갑이 제일 어렸을 걸요."

"휴, 불쌍한 놈. 그래서 실습만 열심히 한거구나.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드네."

"맞아요."

성수에게 구구절절 얘기를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는 학과에서 무척이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바쁜 학회장 마유미를 대신해 학과를 이끌어 가는 실세 중에 실세다.

즉, 내가 그에게 이야기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학과 전체에 소문이 퍼지게 되고 나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내가 여자에 별 관심이 없고, 과씨씨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도 반쯤은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에게 잘 보이는 게, 나로선 쉴더를 확보는 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수 부탁인데 한 번 들어줘 볼까?’

[여기서 더 여자를 늘리신겠다고요?]

‘그런 의미는 아니고 한번 만나만 보는 거지 뭐. 대학생들 원래 소개팅 많이 하잖아.’

[주인님도 그러셨나요?]

‘아니. 전혀.’

[역시···. 과거에 못 해본 것에 대한 보상 심리군요.]

‘없다곤 할 수 없지. 그땐 진짜 한 번도 못 받아봤거든. 단체미팅이나 몇 번 해봤나?’

[선은 많이 보셨다지 않았나요?]

‘선이 소개팅이냐. 그것도 업체에 돈주고 한거야. 결혼해주오라는 업체에 300만원 내니까 알아서 해주더라.’

[아···. 딱할 정도군요. 그렇게 만나 결혼한 여자가 하필.]

왠지 로시가 떠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놈의 인공지능은 가끔 사람처럼 교활한 데가 있다.

굳이 전 마누라를 들먹이는 모습에 나는 시치미를 떼며 모른 채 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야.’

[네, 지난 일에 미련을 갖는 건 현명한 태도는 아니죠. 게다가 엄밀히 말해 이도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고요.]

확실하군.

로시는 내가 전 마누라에 집착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일을 진행하더라도 속내를 감추는 편이 좋겠다.

[암튼 한번 해 보십시오. 업적과도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요.]

‘업적이라니?’

[소개팅과 관련된 업적이 하나 있긴 합니다.]

‘정말 그런 게 있어?’

[네. 디스플레이를 보시겠습니까?]

로시가 화면에 업적을 띄웠다.

★달성 가능 위업 리스트 (현재까지 22/108)

51. 소개팅에서 원나잇까지(지인의 소개로 만난 여자를 당일 공략하는 미션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지인과 의절할 각오도 불사하는 당신은, 진정한 먹튀입니다.

-정신 조작류의 스킬은 일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업적 보상 : 망부석이 되지마오(아이템), 문자, 전화 등을 활용 지정한 대상의 호감도 하락을 방지합니다. 인공지능 시스템이 당신의 수고를 덜어줍니다.

< 543. 거자필반-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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