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0. 교생 실습-84- >
불안은 대체로 상상의 산물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0%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진아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정말 우연히 같이 사라졌을까? 학교 안에 남녀가 둘이 숨을 곳이 있나?’
진아는 우선 교사 연구실부터 살폈다. 쉬는 시간 교생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 일종의 아지트와 같은 장소였다.
"도훈 오빠 있어요?"
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벌컥 문을 열었지만, 안에는 티 타임을 즐기는 교사들뿐이었다.
"5반 교생이잖아? 무슨 일이니?"
"도훈이 찾으러 왔니?"
도훈의 실습반 담임, 정현아가 진아에게 물었다.
진아는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하며 현아에게 변명했다.
"아, 아··· 그게, 대표 수업 때문에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도훈이 여기 없는데?"
"그나저나 너희들 연수시간 아니야?"
"맞아요. 잠깐 쉬는 시간이라서요."
"그랬구나. 온 김에 케잌 좀 먹고 갈래?"
현아가 간식을 권했으나 진아가 사양하며 물러섰다.
"말씀을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다이어트 중이라···. 그럼 가보겠습니다."
진아가 헐레벌떡 사라지자, 현아와 함께 있던 다른 여선생이 말했다.
"풉. 살은 뺄 때도 없어 보이는구만 무슨···. 요샌 있는 것들이 더 하다니까? 안 그래 정선생?"
현아는 진아가 닫은 문을 골똘히 쳐다보느라 대화를 흘려듣고 말았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예쁜 애들이 더 꾸민다고."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을 좀."
현아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왠지 수상한데···. 진아라는 애 표정도 그렇고. 왜 다급하게 도훈이를 찾는 걸까?’
그때 계속 커피를 홀짝이던 동료가 푸념하듯 말했다.
"나도 아가씨 땐 저렇게 늘씬할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후덕해진 몸매를 모습을 한탄하는 소리에 현아가 위로했다.
"에이, 김 선생님 정도면 지금도 훌륭하죠."
"아니야, 자기. 서른 꺾이니까 진짜 한 방에 훅 가더라. 여잔 한 살, 한 살이 얼마나 다른지 몰라."
"그래요?"
"현아 샘도 너무 재지 말고 예뿔때 얼른 시집이나 가. 남자들 별거 없어. 고놈이 고놈이지 뭐."
"네에."
현아는 유부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도훈과 같은 실습생인 진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아이가 이번 교생 중에서 제일 예쁘다는 걔구나···. 근데 어째서 도훈이를 찾는 걸까?’
수상한 눈치를 챈 진아가 커피잔을 놓고 일어섰다.
"정 샘, 갑자기 어디가게?"
"선생님 저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현아 역시 진아를 쫓아 복도로 나왔다.
한편, 허탕을 친 진아는 학교를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교무실, 체육관. 도훈이 갈만한 곳은 모두 찾았지만, 어디에도 도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함께 사라진 혜진 역시 종적을 감췄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분명 뭔가 있어.’
진아의 불안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도훈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보다, 그 대상이 하필 혜진이라는 데 더욱 분노했다.
‘하-. 진짜 기가 막혀서. 나한테 분명 혜진이는 가슴이 작아서 매력 없다고 해놓고선.’
진아의 머릿속으로 망측한 상상이 멋대로 춤을 췄다. 헐떡거리는 신음이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흐아아앙~."
그러다 문득 그것이 너무 리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이거 진짜··· 여자 신음아냐?"
진아가 쫑긋 귀를 기울였다. 분명 헐떡이는 여자의 숨소리였다. 집중해야 겨우 들릴 만큼 미약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닌 다른 층인 것 같았다.
진아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2층을 지나 3층에 이르자 소리는 더욱 분명해졌다.
"하읏, 하앙···."
진아의 눈이 질투로 얼룩졌다.
‘이, 이것들이 감히 학교에서!’
진아가 소리가 흘러나오는 남자 화장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자신의 방문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운 음소거 였다.
‘뭐지? 눈치챈 건가?’
그럴 리 없었다. 아마도 소리가 너무 크게 나는 것을 우려해 잠시 숨 고르기를 한 것이라 여겼다.
진아가 밤도둑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며 남자 화장실 입구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학생, 거기서 뭐해?"
불쑥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진아는 기척을 숨기고 살금살금 걷고 있던 터라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방금 전 교사 휴게실에 만났던 도훈의 반 담임, 정현아였다.
"거기 남자 화장실인데?"
"아, 아! 그, 그런가요? 너무 급해 가지고 저도 모르게···."
현아가 팔짱을 낀 채 진아를 감시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여자 화장실은 1층에 밖에 없는 거 모르니?"
대동중학교는 남중이다. 여자 화장실은 교직원용으로 설치된 1층이 전부. 실습 첫날도 아니고, 교생 실습이 절반이 지나간 지금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흐음, 설마··· 변태인가?’
진아가 뻘쭘해 하며 물러서려고 하자 현아가 그녀의 팔을 붙들어 세웠다.
"어딜 가니? 나랑 할 얘기가 좀 있을 것 같은데?"
"무, 무슨 얘기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여기가 여중이고, 남자 교생이 여자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면 현직 교사로서 어떤 생각이 들겠는지."
"지, 진짜 실수였어요."
"일단 가서 얘기하지?"
현아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진아를 다그쳤다. 안 그래도 도훈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차에 제대로 건수 잡았다 싶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통해 내려갔을 때 고요하던 남자 화장실 밖으로 머릴 내밀었다.
"갔지?"
"아, 아마도요?"
"휴-. 십 년 감수했네. 들키는 줄 알았잖아?"
혜진은 어깨를 으쓱하는 도훈에게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뭘?"
"아니···. 갑자기 오빠가 제 입을 틀어막았잖아요. 누가 오는 것 같다면서···. 전 두 사람이 말하기 전까진 전혀 낌새도 챘거든요."
모든 것이 어장관리 어플의 충돌방지 기능 덕분이었지만, 도훈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내가 좀 촉이 좋은 편이야. 운이 좋았군."
"촉이구나···."
"그나저나 놀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후딱 싸버렸네."
"너무 짓궂으셨어요. 밖에 사람이 있는 와중에도 그렇게 막···."
"왜? 싫었니?"
"아,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됐지 뭐. 이번엔 엉덩이에 뿌렸으니 거기도 빵빵해지는 거 아냐?"
"설마요."
"암튼 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나서 갈게. 정리하고 먼저 내려가 있어."
"담배요? 어디서요?"
"옥상에 흡연실이 있거든."
"아··· 네."
도훈은 혜진을 남겨두고 4층 옥상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진짜 죽다 살았네. 둘이 안 마주쳤음 완전 좆되는 거였잖아? 그야말로 이이제이랄까?'
***
[연수 중인데 얼른 내려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 변비라고 하지 뭐. 연수 그까짓 거, 연구부장이 내 편인데 누가 나를 혼낼 건데?’
[하여간 날림은 여전하시군요. 중간에 땡땡이나 치시고.]
‘그전에 다져놓은 게 있으니 지금 편한 거지. 이번 실습 중에 4명이나 공략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다고.’
나는 담배를 연달아 피었다.
스릴 넘치는 섹스를 즐겼더니 니코틴이 딸리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미션 축하드립니다. 마침내 교생 실습 기간 중 이룰 수 있는 모든 미션을 완수하셨군요.]
‘혜진이 조교 미션 보상이 뭐였지?’
[2,500포인트와 소환의 호루라기입니다.]
‘아, 그렇지. 전대 플레이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근데 이게 쓸데가 있으려나?’
나는 주머니를 통해 전송된 호루라기를 목에 걸어 보았다. 쇠로 만들어진 호루라기는 체육 교사들이 즐겨 차는 평범한 모양이었다.
[그거야 주인님이 활용하기 나름이죠. 어쨌든, 플레이어에 이르렀던 위인들의 능력을 사용케 해주니까요.]
‘능력?’
[네. 소환된 플레이어가 주로 사용하던 대표 스킬 역시 사용가능합니다.]
‘오옷! 대박인데? 지금 한 번 시험해 볼 수 있나?’
[디스플레이를 보시겠습니까?]
「소환의 호루라기」
-전대의 플레이어를 소환할 수 있는 장치.
-플레이어의 등급에 따라 소환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제한됩니다.
-소환된 플레이어의 주특기를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쿨 타임 : 이주일
-카테고리 열기
스킬 설명 맨 밑으로 카테고리라는 항목이 있었다.
플레이어의 직업에 따라 구분해 놓은 것 같았다.
‘무인, 상인, 학자···. 대체 몇 종류나 되는 거야?’
[현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클래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원하는 항목을 고르면 현재 주인님 등급에 맞게 소환 가능한 전대 플레이어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 보자, 그러면 무인으로···.’
‘무인’ 항목을 클릭하자 생전 본적도 없는 이름들이 죽 나열되었다. 대관절 알 수 없는 이름 중 그나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이종무?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설명 같은 건 없나?’
[간략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클릭하시면 주 활동이 짤막하게 나옵니다.]
<이종무(李從茂), 1360~1425 쓰시마섬을 정벌한 무신, 사용가능 스킬 : 궁술, 말타기
‘아하, 조선 초기의 장군이었구나. 이 사람도 플레이어였어?’
[네.]
‘근데 왜 이렇게 활약이 미미하지?’
[모든 플레이어들이 굵직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역사책에 기록되었고, 오랜 기간 벼슬을 지낸 분에게 미미하다니요.]
‘하긴, 내 주제에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네.’
역사에 기록되고 이름까지 알려졌다면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급이다. 오히려 이종무가 살아있다면 나와 동급 취급을 당한 것을 치욕스럽기 느꼈으리라.
나는 그대로 스킬 창을 종료했다.
[시험해 보신다지 않으셨나요?]
‘됐어. 지금 스킬을 사용해 봤자 당장 쓸데도 없을 거 같아서. 사용방식을 알았으니 언젠간 쓸데가 있겠지.’
[좋은 판단입니다.]
‘그나저나 D급이라 그런지 소환 가능한 플레이어가 좀 애매하군.’
[어쩔 수 없지요. C급은 되어야 그럭저럭 알려진 플레이어의 능력을 받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암튼 이거 잘만 사용하면 PK단인지 뭐시기랑도 해볼 만하겠는데?’
소환의 호루라기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분야는 바로 호신에 있었다.
PK단 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기껏 가진 스킬이라곤 좆방망이 휘두르는 것이 전부인 나로선 대처할 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아니지.
커져라 여의봉으로 1M까지 늘리면 그냥 좆으로 싹 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잠시 뻘 생각 좀 했어. 그나저나 마침내 4명의 공략이 모두 끝났군.’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간이 남아있는 데다 아까처럼 공략 대상끼리 충돌이 우려되는군요.]
‘남은 기간 적당히 잘라 내야지. 언제까지 계속되는 파티는 없으니까.’
나는 담배를 마저 끄고 시청각실로 내려갔다. 나중에 정현아에게 오해를 사 풀이 죽은 진아를 한참 동안 달래줘야 했다.
***
교생 실습 기간 걸려있던 미션과 업적을 모두 끝낸 도훈은 본격적인 마무리에 들어갔다.
결론만 정리하면 이렇다.
도훈에게 조교를 받았던 혜진은 이후 지유의 몸이 되었다.
붉은 실 가위로 인연이 정리된 그녀는 도훈과 있었던 일을 까마득한 추억처럼 남긴 채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도훈은 그녀와의 인연을 끊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했으나, 결국 그가 택한 것은 방생이었다.
'자신감을 찾았으니 이젠 예전처럼 끌러다니진 않을테지.'
현아는 상식 개변을 통해 생각을 개조시켰다.
실습 점수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던 도훈은,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에게 3가지 새로운 상식을 주입했다.
-첫째, 떠나간 남자에 집착하지 말 것.
-둘째, 연하보다 연상의 남자를 만날 것.
-마지막으로.
"제 상식으론 처녀가 유부남을 만나는 건 최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체육 선생의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버린 도훈은 그녀와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실습이 끝나던 날 아쉬워하는 현아를 힘껏 안아주며,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청첩장 꼭 보내달라는 안부까지 건넸다.
한편 의외로 질긴 인연을 끌게 된 사람도 있었다. 바로 수학과 진아였다.
진아에겐 프리섹스 사상을 주입하였기 때문에, 딱히 걸리적거릴 것은 없었으나 너무 눈이 높은 관계로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대학에 돌아가선 친한 선후배 사이로 지내자면 적당히 선을 긋는 게 전부. 어차피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타과 학생과 친분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 그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김한솔.
도훈에게 푹 빠진 그녀는, 공개 수업 발표날까지 전력으로 그를 도와주었다. 매일 야근을 하며 준비한 결과 도훈의 공개 수업은 대성공. 현직 교사들은 물론 교장, 교감에게까지 칭찬을 받으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실습 점수는 당연히 A+.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도훈은 한솔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종종 시간이 나면 연락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렇게 실습이 끝난 주말.
오랜만에 푹 쉬며 집에서 늦잠을 자던 도훈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오빠, 전 은성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몇 달 전 해외로 출국했던 고은성이었다. 도훈은 잠결에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눈을 비비며 재차 핸드폰을 확인했다.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으나, 확실한 건 절대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가 아니었다.
"저 지금 한국이에요."
그녀가 돌아왔다.
< 540. 교생 실습-84-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