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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53화 (526/2,000)

< 535. 교생 실습-79- >

전생의 이정우는 부유한 삶을 살았다.

작은 키와 부족한 성 능력을 보상 받기라도 하려는 듯, 일에만 매진했고 그 결과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고 했던가? 아내인 최윤하는 물욕이 없는 그를 꼬드겨 상당수의 재산을 가로챘다.

주로 명의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방식이었는데, 집도 상가도, 유가증권도 어느새 그녀의 몫이 되어 있었다.

존속 살인 혐의로 나머지 상속분은 그녀에게 넘어가지 않고 딸 앞으로 승계되었다. 그리고 친권을 이어받은 이정우의 부모가 법정대리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그동안 빼돌린 재산만 십억은 너끈히 넘어갔다.

‘만약 그 돈으로 상간남을 매수했다면?’

도훈이 시나리오를 그리기 시작했다.

공범으로 몰린 윤하는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 봐야 살인교사와 사체 유기의 죄는 최소 징역 15년.

당시 윤하의 나이가 30대 초중반이었으니,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해도 젊음은 훌쩍 지나버린 후다.

그녀는 그 시간을 댓가로 상간남과 흥정했을 것이다.

공모자끼리 모의를 할 순 없으니 그녀의 대리인인 변호사를 통해 더러운 협잡이 이루어졌겠지.

독박의 댓가로 얼마를 건넸을까?

3억? 5억? 아니면 10억?

순간 도훈은 소름 끼치는 비약에 이르렀다.

‘가만···. 만약 모든 죄가 무혐의가 나온다면 남은 나의 유산도 다시 윤하에게 귀속되는 것인가?’

지저분한 법정 다툼.

상속을 건 친권 싸움.

그리고 무죄판결.

여러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최악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만약 자신의 몫으로 남겨졌던 모든 유산까지 그녀의 몫으로 넘어간다면?

그렇다면 그녀에게 주어진 탄알은 두 배 이상 급등한다.

최소 20억.

사망 보험금까지 포함할 시 그보다 훨씬 많은 금액.

배팅액은 충분했다. 자신이 현재 가진 전부를 건네도 상관없다. 10억이면 긴 수감생활과 등가교환을 하더라도 감내할 수 있는 금액이다.

아니지, 어쩌면 상간남의 출소는 더욱 빨라질지 모른다.

자백으로 인한 감형.

우발적인 범행 주장.

모범수 생활로 형기 단축.

그리고 최후엔 재결합.

자신이 평생을 갖춰 일궈놓은 집에서, 미국에서 공수한 최고급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 맘껏 뒹구는 두 남녀.

사이즈가 나왔다.

무척 지저분한 그림이었다.

"씨발, 이런 좆같은!"

도훈의 입에서 절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지나치게 올라간 뇌압으로 두 눈이 붉게 충혈되고 관자놀이에선 시퍼런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몹시 흥분했고, 현자타임의 냉철함도 작금의 뜨거운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아내의 불륜 현장을 덮친 이후로 최고조로 흥분하고 있었다.

[주, 주인님. 심박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부하로 이한 신경세포의 손상이 우려됩니다.]

도훈에게 만약 고혈압 증세가 있었다면, 분명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것이다. 로시의 조언을 받은 도훈은 심호흡을 통해 끓어 올랐던 화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후읍- 후읍- 생각, 생각하자.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는지···."

[주인님···.]

환생 이후 꿈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축했다.

잘생긴 얼굴.

조각 같은 몸매.

매력적이고 어린 여대생들을 실컷 후리고 다니는 난봉꾼 생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지난날을 보답이라도 받는 것처럼 너무도 행복한 생활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원하는 여자는 언제든 자빠뜨릴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이 세상이, 게임처럼 너무 쉬워 보였다.

그러나 우연히 전 부인의 판결 소식을 듣는 순간,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은 거짓 행복이었다.

지금의 삶은 남의 몸을 빌어 대신 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본체인 이정우는 죽어서까지 고통받고 있었다.

그를 죽이는 것을 방관하고, 심지어 사체까지 저수지에 유기해 얼굴 형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전 부인은, 이제 그가 남긴 유산을 가로채 떵떵거리며 살게 될 것이다.

돈으로 젊은 사내들을 사고, 더러운 몸뚱이를 굴리며 천박한 쾌락에 허우적 댈 것이다. 남자 없이 잠도 못 이루는 음탕한 계집애니까.

도훈은 그녀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꼴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그녀만은 불행하길 바랐다.

아니 자신이 불행해져야 그녀가 불행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도훈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어. 정녕 신이 있다면 이래선 안 되는 거야."

[신은 현생의 삶으로 누군가를 벌하지 않습니다. 죄는 사후에 판결될 뿐이지요.]

‘나는 인정 못 해.’

[주인님. 누구보다 냉정하신 분이 어째 그러십니까? 주인님은 분명 전생의 삶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기억을 갖고 환생하셨죠. 지금의 삶에 만족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만족하는 건 아무 상관 없어. 최윤하 그 찢어 죽일 년이 행복한 게 싫은 거야. 용납 못 해.’

[주인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도 잘 압니다. 그러니 원귀가 되어 구천을 떠도셨겠지요.]

‘난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어. 죗값을 받는 걸 똑똑히 보았으니까.’

[······.]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그 조건에 합의하지 않았을 거야. 이건 사기야.’

[그 말씀은 전생의 인연에 개입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로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 졌다.

‘만약 내가 개입하게 될 경우 어떻게 되지?’

[신께서 주인님의 능력을 거두실지 모릅니다.]

도훈이 주춤했다.

지금은 불같은 심장보다, 차가운 머리로 손익을 따질 시기였다.

‘가만···. 어째 가정형인데?’

[네?]

‘거두실지도 모른다니? 안 거둘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음···. 신의 깊은 뜻은 저로선 헤아리기 힘드니까요. 다만 높은 확률로 주인님의 플레이어 자격을 박탈 당할 겁니다.]

‘어째서 신께선···. 아니다.’

애초에 신이라는 작자는 인간사의 옳고 그름의 문제는 관여치 않는다고 했다.

악인이 평생의 악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착한 사람이 호구 취급당하며 불이익을 받는 것도 신은 상관치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피조물을 관조하며, 차후에 심판을 내릴 뿐.

자신이 플레이어로 선택된 것도, 원래는 죽었어야 할 이도훈의 몸에 혼백이 스며든 이유도 사실상 아무 근거가 없었다. 그저 신이 하고 싶은데로 한 것이다.

도훈은 좀 더 냉정해 지기로 했다.

플레이어의 능력과 전 마누라에 대한 사사로운 복수.

그것을 등가교환 한다면 뭐가 더 손해일까?

사실 답은 자명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이정우는 이미 죽은 사람.

지금의 자신은 이도훈이다.

이도훈과 최윤하는 아무 상관 없다.

그녀가 얼마나 악독한 짓을 저질렀든, 그리고 이정우의 유산을 가로채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든 무시하고 살면 그만이다.

어차피 나중엔 죗값을 받을 것이다.

저승에서도 가장 악독한 자들만 간다는 무간지옥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사사로운 복수보다, 어쩌면 그것이 더욱 치명적인 형벌이 되겠지.

머리로는 납득이 가지만, 도훈은 도저히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대로 두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옥상 문이 덜컹 열렸다.

도훈이 뒤를 돌아보자, 츄리닝 차림으로 출근한 체육 선생이 들어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해에 도훈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 벌써 출근했어?"

"안녕하세요."

"담배 피우고 있었나 보네."

"네, 좀 일찍 도착해서···."

도훈이 머쓱해 하자 체육 선생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계속 펴. 출근엔 역시 모닝 땡이지."

"네."

체육 선생이 도훈이 서 있던 난간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학교 운동장이 내려 보이는 경관에서 체육 선생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도훈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경직되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실습 많이 힘들지?"

"아예, 뭐···."

"원래 처음에는 누구나 힘든 법이지."

"그런 거 같아요."

당장 전 부인 일로 머리가 터질 것처럼 골치 아픈 상황이었지만, 마냥 체육 선생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안타까운 건 현자타임의 지속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었다.

‘젠장. 윤하 일로 신경 쓰여 죽겠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차라리 잘됐습니다. 어차피 답도 없는 문제로 고민하느니, 그냥 묻어 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체육 교사는 여전히 하고 싶은 거지?"

"네?"

뜬금없는 질문에 도훈이 되물었다.

"아니, 막상 실습 다녀오면 적성에 안 맞는 애들도 있다더라고. 애들 앞에 서는 것도 두렵고, 경직된 교직 사회도 성격에 안 맞고 뭐 그런···."

별 뜻 없는 질문이었지만, 도훈은 제법 진지해졌다.

‘하긴 체육 교사가 되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구나.’

이른 나이에 요절한 이도훈의 유일한 소원.

그의 몸을 이어받는 댓가로 주어진 단 하나의 의무.

플레이어로 다시 태어나면서 무척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미래의 꿈마저 어찌할 수 없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도훈은 문득 손에 찬 스마트 워치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묶어둔 수갑같았다.

‘대체 뭐야? 어마어마한 능력을 줘놓고,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게 하고. 이래서 PK단 이란 녀석들이 반발한 걸까?’

신에게 반기를 든 이단아들.

도훈은 조금이나마 그들의 심경이 이해가 되었다.

실상 플레이어는 신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만들어 놓고 관전만 하던 게임 속에 자신이 원하는 아바타를 투입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후원을 보내고, 응원하며, 때론 통제하고, 억압한다.

만약 플레이어들이 실제로 자유의지가 아닌, 신들의 농간에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플레이어란 정말 신의 힘을 빌려 인류를 발전시키는 존재 인 걸까? 아니면···.’

[주인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아냐. 아무것도.’

[저에게 직접 대화를 걸지 않더라도 불손한 생각은 뇌파의 파동으로 감지가 됩니다. 개인적인 사사로운 원한으로 신을 원망하지 않기를 부디 바라겠습니다.]

‘원망은 무슨···. 전혀 그렇지 않아.’

도훈은 일단 부정했다.

날카로운 이성은 해결책을 찾기 전까진 눈치를 보아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었다. 아직은 이빨을 드러낼 시기가 아니다.

도훈은 전 부인의 일을 신경쓰지 않는척 체육 선생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저는 의외로 적성인 것 같더라고요. 왜 학교에서 2학년 때 참관을 내보내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지. 다른 대학은 3학년 2학기, 늦으면 4학년 때 몰아서 보내잖아. 그러면 나중엔 돌이킬 수 없을 때도 많거든. 이건 마치, 의대에서 본과 올라가자마자 해부실습을 시켜보는 거랑 비슷한 거야."

"해부실습요?"

체육 선생은 자신의 비유가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는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메스로 사람 살을 찢을 수 있는 사람은 사실 타고나는 거거든. 의사가 되려고 의대에 진학했다가도, 막상 피를 보게 되면 기겁해서 중도 포기하는 애들도 있다잖아. 교사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분명 이번 실습을 통해 생각이 바뀐 애들도 있을 거란 얘기지. 어차피 그만둘 거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지."

"아하, 그렇군요. 다행히 전 적성에 맞나봐요. 애들하고 체육하는 게 정말 재밌더라고요. 교직 문화도 잘 맞는 거 같고."

"그래 보이네. 사실 적성만 맞으면 이렇게 편한 직장이 없거든. 요즘 같은 시대에 공무원이면 얼마나 좋아? 방학도 있지, 주변에 아가씨들도 많지."

"아가씨요?"

"막말로 여교사 만나기 제일 쉬운 직장이잖아. 1등 신붓감."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요."

"도훈이 넌 잘생겨서 여자 골라갈 수 있을 거야. 부럽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요. 저 인기 별로 없어요."

"아직은 대학생이라 그래. 임용 합격하고 현직으로 오기만 해. 반경 10Km 근방으로 처녀 선생들이 소개시켜 달라고 줄을 설 테니까. 내가 장담해."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최대한 빨리 합격하란 소리야. 엄한 데 신경 쓰지 말고."

"아, 네."

"학창 시절 여자 뻔질나게 만나봐야 나중에 남는 것도 없거든."

‘결국 저 얘기를 하려 했던건가? 현아와 나의 관계를 의식하나 보군.’

현아를 흠모하는 체육 선생은 어떻게든 도훈을 떼어놓고 싶어했다. 그가 동기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제는 아예 연애 자체를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렇죠."

"내가 너라면 진짜 독하게 3년만 딱 여자 끊고 임용에 올인하겠어."

"조언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부추겨도 외길만 보란 말이지."

도훈은 어이가 없었다

지난주만 해도 다른 실습생 꼬셔보라고 바람을 넣던 그가 태도를 싹 바꾸는 모습이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

'무슨 낌새라도 챈 걸까? 오늘따라 유난히 적극적이군.'

"네. 새겨 들을게요."

"그래그래, 그럼 난 아침 회의가 있어서."

"네. 먼저 들어가세요."

체육 선생이 옥상을 내려가는 동시에 현자타임도 끝이 났다. 고속으로 회전하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살짝 현기증이 밀려왔다.

도훈은 절반쯤 남은 담배를 마저 피우며 생각했다.

‘로시는 필시 나를 말리려 들 거야. 하지만 나는 절대 윤하가 잘 사는 꼴을 지켜볼 순 없어. 방법을 찾아야 해. 전생에 개입하지 않고 그년을 엿 먹일 방법을 말이야.’

도훈은 묵묵히 담배를 피우다 교실로 내려갔다.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 이었다.

< 535. 교생 실습-7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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