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52화 (525/2,000)

< 534. 교생 실습-78- >

***

"오빠, 나 이제 가요."

"으, 응?"

도훈이 새벽녘 일어났을 때 하린은 이미 나설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6시 반.

"벌써 가게?"

"네. 오전에 조모임 있는 걸 깜빡했어요."

"아···. 터미널까지 바래다 줄까?"

"아니에요. 푹 주무세요. 저 때문에 깨지말고."

캐리어를 들고 현관 앞에 선 하린은 우물쭈물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배웅을 나온 도훈에게 망설이다 말했다.

"오빠."

"응?"

"장거리 연애는 좀 별로죠?"

"······."

도훈은 비몽사몽 간이기도 했고, 너무 느닷없었기 때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하린은 잠깐의 침묵이 민망했던지 멋 쩍이듯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럼 갈게요."

하린이 꾸벅 인사를 숙이자 도훈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네?"

"일루와. 굿바이 키스는 하고 가야지."

도훈은 하린을 살포시 껴안으며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하린에게 말했다.

"다시 볼 때까지 몸 건강해. 남친한테 잘 하고."

"···치. 나 까인 거죠, 지금?"

"아니야. 언제든 마음 먹으면 서로 볼 수 있는 거니까."

"알겠어요. 그럼 진짜 가요."

하린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섰다. 도훈이 닫힌 문을 한동안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휴-. 쉽지 않구만."

[하린 양이 미련이 남아 보이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 어젯밤 3번이나 더 보내줬으니까.’

[단순히 육체적인 만족감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럴지도. 아무리 섹스가 잘 맞아도 사귀고 있던 사람을 갈아타는 건 쉬운 결심은 아니지. 그래도 하린이 미련을 접어서 다행이야.’

[나름 현실 순응이 빠른 학생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겼겠지.’

도훈은 섹스가 끝나고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떻게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귀냐?

-외로운 거 싫으니까.

-교대남들은 다 찌질이라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어차피 선택권도 없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충주는 지방 소도시에요. 교대 말고 제대로 된 4년제 대학교 하나 없거든요.

-아···.

-거기서 골라봐야, 다 어중이떠중이들이에요. 난 남자가 너무 무식해도 싫거든요.

-어차피 만나봐야 교대남 이라는 거구나.

-네. 그중에서 제일 좋은 사람 고른거구요.

-하필 섹스를 그렇게 못할 줄은 몰랐군.

-맞아요. 근데 오늘 보니까 비교 대상이 너무 잘못된 거 같아요.

-무슨 말이지?

-오빠랑 비교하면 어차피 다 부족할 것 같다구요. 누굴 만났더라도 아쉬웠을 걸요?

-나랑 한 게 그렇게 좋았어?

-네. 말이라고요. 오빠 여자친구가 될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정말 복 받은 걸 거에요.

"암, 그렇긴 하지. 내 여친이 누군지 몰라도 밤마다 무료 항공 티켓 발권받은 셈이지."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매일 홍콩 보내준단 소리야.’

[헐···. 자신감 대박.]

"아유, 잠 다 깼다. 시간도 애매한데 씻고 나갈 준비 해야겠다."

도훈은 연구부장의 차를 돌려주는 문제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할 요량이었다. 남들 다 같이 출근하는 시간에 했다간, 그녀의 꼼수에 놀아나는 것이었다.

‘오늘부턴 좀 피곤하겠어.’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해졌죠?]

‘현아도 진아도, 혜진이나 한솔이도···. 한 학교에 네 명을 따먹고 나니 안 걸리기도 힘들지.’

[주인님은 얼마든지 컨트롤 가능합니다.]

‘미션이 아직 남아 있는 혜진이 빼고는 싹 다 손절 해야지.’

[늘 아쉽군요. 열심히 공략해서 결국 하린양처럼 남 좋은 꼴만 시키는 결과니까 말입니다.]

‘감수해야지. 난봉꾼을 꿈꾸면서 동시에 하렘 왕이 될 순 없는 거니까. 지금이 무슨 중세 이슬람 사회도 아니고.’

우선적으로 정리할 대상은 연구부장 김한솔이었다.

지난주 아다를 떼 준 노처녀 부장은 노골적으로 도훈에게 들이댈 공산이 컸다.

‘김한솔은 상식 개변을 통해 개조하고···.’

두 번째는 담임인 정현아.

‘현아는 잠깐 지켜봐도 될 것 같기도.’

[주인님을 키잡하려고 벼르고 있던데요?]

‘아직은 괜찮아. 노골적으로 학교에서 들이대거나 할 것 같진 않으니까. 실습 점수 받을 때까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지.’

[그 다음에는요?]

‘붉은 실 가위로 싹둑.’

도훈이 손가락 두 개를 마주 붙이며 가위질 하는 시늉을 했다.

[아쉽군요. 다들 매력적인 여성들인데···.]

‘말했잖아. 난 하렘을 꿈꾸는 게 아냐. 봤던 영화 다시 보면 재밌냐? 엔딩 본 게임 또 하면 즐거워?’

[물론 대체론 그렇지만 보고 또 봐도 재밌는 영화도 있기 마련이죠. 2회차 플레이가 더 즐거운 게임도 있구요.]

‘그건 인정. 나도 무작정 다 내치고 끊을 생각은 아니야. 아까 하린이처럼 가끔 만나 회포나 풀 수 있는 쿨한 사이가 되면 얼마든지 곁에 둘 거야.’

[역시 주인님은 욕심쟁이 유후훗!]

평소보다 빨리 채비를 마친 도훈이 말끔한 차림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교생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세련된 정장에 구두까지 풀 세팅한 그는 회사에 첫 출근하는 신입사원 다운 느낌이었다.

부르릉-

차에 걸리는 시동음마저 상쾌했다.

오늘부로 반납해야 한다 생각하니, 다시 뚜벅이로 돌아갈 처지가 아쉬웠다.

‘그나저나 도쿄핫 그 대머리 아저씬 어째서 연락이 없지?’

[오카모토 상이요?]

‘어. 출연료 현금으로 정산해 준다고 했는데···. 설마 떼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럴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는걸요.]

‘사람 속 모르는 거야. 사실상 이중 계약이고 불법 취업이었잖아.’

도훈은 정식으로 취업 비자를 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약료 정산에 문제가 있었다. 액수가 거액이니만큼 해외 송금으로 받게 되었을 경우 국세청의 추적 같은 행정적인 절차를 피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계약서를 쓰되 엔화를 원화로 바꾸어 현금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협의를 했는데, 정작 일주일이 넘도록 담당에게서 연락이 없던 것이다.

[안도 미키가 프로덕션의 사장이잖습니까? 그녀가 주인님을 쉽게 내칠리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하긴···. 회사 회계상 현금을 확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구나. 뭐, 좀 더 기다려 봐야지.’

[근데 돈 받으시면 뭐하시게요?]

‘차사려고.’

[차요?]

‘응. 있다 없으니까 가장 불편하더라고. 차부터 구매해야겠어.’

[캬, 젊고 잘생긴 대학생이 차까지 갖추면···. 주인님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겠군요.]

‘언제까지 대학에만 머무를 순 없잖아. 나도 활동 반경을 넓혀야 하니까 말이야.’

서울 시내 출근길은 의외로 복잡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과 시간 면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거북이처럼 서행하는 상황이 루즈하던 도훈은 차량 라디오를 켜 뉴스를 청취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6개월 전 불륜남과 함께 남편을 살해 후 암매장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받은 최모 씨가 2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최모 씨는···.

무심결에 라디오를 듣고 있던 도훈은 순간적으로 등에 쫙-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잠깐."

도훈이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사체 유기는 불륜남의 협박과 강요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피의자 역시 진술을 번복하며 1심의 결과를···.

"이, 이거 설마···."

핸들을 잡은 도훈이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불구덩이에 던져진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고, 반대로 등에선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주인님. 당장 라디오를 끄십시오!]

‘이거 내 이야기 맞지?’

[주인님. 심신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졌습니다.]

"아 좀!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고!"

도훈이 히스테리컬하게 괴성을 질러댔다.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추자 주변 차들이 잇달아 멈추며 도로 상황이 혼잡해졌다.

"씨발, 지금 윤하가 무죄 받았다는 소리냐고!"

[주인님 일단 진정하시고···.]

빵-! 빵빵!

급정거한 도훈을 향해 주변에서 클락션과 야유가 쏟아졌다. 가까스로 추돌을 피한 뒤차가 도훈 옆으로 차를 대며 욕설을 퍼부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운전 똑바로 안 해?"

빵, 빵빵!

도훈이 패닉에 빠지자 로시가 다급히 외쳤다.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플레이어의 신변 보호를 위해 강제로 현자타임 스킬을 개방하겠습니다.]

‘뭐? 강제?’

순간 도훈의 머리에 급격한 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뜨거워지며 코에선 뜨거운 숨이 밀려나왔다.

"쓰웁- 후우- 후우-."

"야이 새끼야! 얼른 차 빼라고!"

여전히 밖에선 클락션 소리와 함께 다른 운전자들의 원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속 회전되는 그의 두뇌가 냉정하게 상황을 인식했다.

‘이래선 곤란해. 난 지금 연구부장에게 빌린 차를 끌고 있어. 문제가 커졌다간 분명 학교생활까지 영향을 미칠 거야.’

도훈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창을 내리더니 머쓱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래가 들려가지고 저도 모르게···."

말쑥한 차림의 도훈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불같이 화를 내던 운전자도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젊은 양반이···. 거 운전 조심하쇼. 아침부터 사고 날 뻔했네."

도훈은 비상 깜빡이를 켜 뒷차에 양해를 구한 후 인도 쪽으로 차량을 정차시켰다.

[주인님, 진정이 좀 되셨습니까?]

‘쉿-. 라디오 마저 듣고.’

-다음 소식입니다. 이틀 전 강서구 PC방 알바 살해사건이···.

"에이씨, 라디오 다 지나갔네."

도훈은 출근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한 뒤 생각했다.

‘학교 도착까지 12분. 더 늦어지면 다른 교직원들의 의심을 살 거야. 일단은 주차부터 시키고 생각하자.’

현자 타임 스킬로 극도로 냉정해진 두뇌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라디오의 기사가 맴돌았다.

‘지금 윤하가 무죄를 받았다는 말인가? 멀쩡한 사람을 암매장시킨 윤하가?’

윤하는 전 부인의 이름이었다.

최윤하.

자신의 전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여인.

도훈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저승으로 끌려가기 전 두 사람의 징역 판결을 보았다. 어찌나 원통했던지 저승사자를 피해 구천을 떠돌면서까지 그들의 최후를 목도했다.

이미 6개월 전에 종결된 사안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윤하는 항소를 통해 1심의 결과를 뒤집었다.

라디오 앵커에 따르면 공범자의 진술 번복이 있었다고 했다.

‘간통은 더 이상 죄가 아니야. 살인을 저지른 것도 상간남의 짓이었지. 그렇다면 남은 죄목은 사체유기. 윤하는 분명 구급차도 부르지 않고 살인범과 공모하여 사체를 저수지에 유기했어.’

1심에선 모든 증거가 공범으로 나왔다.

CCTV에 찍힌 화면에서도 사체를 옮기는 데 협조적이었고, 이후 실종 신고부터 형사에게 덜미를 잡히기 전까지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다.

‘그런데 무죄라고?’

도훈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학교 주차장에 일찍 차를 주차한 도훈은 그대로 옥상으로 향했다. 아직 정식 출근까진 30분이란 시간이 남아있었다. 현자타임이 발동하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도훈이 스마트폰을 켜 관련 기사를 찾으려 할 때였다.

[주인님. 누구보다 냉정하신 분이 어째 그러십니까?]

‘뭐가?’

[주인님은 분명 환생 이전의 일에 대해 관여치 않기로 약조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도훈은 삼도천에 기억을 씻기지 않았다. 대신 그 조건은 전생에 일에 대해 무슨 일이 있어도 연연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정우 시절의 부모와 자신의 딸조차(물론 친자는 아니었지만)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을 배신한 윤하는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관여하는 것도 부질없다고 여겼다.

분명 그랬다고 믿었다.

‘그냥 기사만 찾아 보는 거야.’

[주인님···.]

‘기사만 보는 것도 문제가 되나?’

[물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도훈은 로시를 일축시켰다.

방법을 찾는 것은 나중일이었다.

당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는 것도 중요했다. 현자타임으로 극도로 이성적으로 변한 지금에도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문 채 한참 스마트폰을 뒤져 관련 기사를 확인했다. 활자를 읽는 속도가 너무 빨라 4g 스마트 폰의 페이지뷰가 못 따라갈 지경이었다.

‘···이렇게 된 건가. 모종의 합의가 있었나 보군.’

기사를 훑자 대략 윤곽이 보였다.

2심은 전 마누라의 항소로 열렸다.

그녀의 변호사는 살인교사 및 사체유기에 대한 부분을, 상간남의 협박에 의한 강요에 의해서라고 주장했다.

이정우를 칼로 찔러 죽인 상간남이 칼로 위협하며 신고를 막고 사체 유기를 도울 것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CCTV의 증거는 사체를 유기하러 간 흔적만 있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사건 이후 두 사람의 빈번한 통화 기록에서도 어떤 식의 대화가 오갔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문자 등의 명백한 공모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상간남의 강요에 의한 부작위라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문제는 어째서 1심과 달리 상간남이 돌연 자백을 번복했냐는 부분이었다.

‘설마···.’

도훈의 차가워진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을 시작했다.

죄수의 딜레마.

두 사람이 동시에 혐의를 부인할 경우 먼저 자백하는 쪽이 감경을 받는다.

하지만 그래봐야 결론은 둘 다 구속이다.

‘만약 상간남이 독박을 쓰는 댓가로 윤하가 뒤를 봐주기로 했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정우가 알뜰히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은 윤하의 명의로 이전되어 있었으니까.

"최윤하. 이 씨발년이!"

도훈이 이빨을 으득 깨물었다.

< 534. 교생 실습-78-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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