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9. 교생 실습-73- >
일본에서 돌아온 창범과 미호, 그리고 한국에 있던 대근이 다시 모였다. 여느 때처럼 회의 장소는 대근의 피씨방이었다.
"사장님 여기 단무지 좀 더 갖다 주세요."
"아, 네 잠시만요."
인건비 절감을 위해 알바를 없앤 대근은 스스로 단무지를 챙겨다 자리에 배달한 뒤 궁시렁댔다.
"씨부럴, 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2,500원짜리 라면 처먹으면서 단무지를 두 개씩이나 달라고 지랄이야?"
"단무지 하나 갖고 너무 쪼잔하게 굴지 마쇼. 그거 얼마나 한다고."
창범의 핀잔에 대근이 열을 올렸다.
"너 PC방 사업이 우스워 보이냐? 컴터 가져다 놓고 애들 코 묻은 돈 먹기 쉬운 줄 알아? 주기적으로 부품 업그레이드 해야지, 다달이 라이센스비 내야지, 건물주 새낀 계약 끝날 때쯤 되니까 월세 올려달라 지랄이지···. 어휴, 내가 진짜 손발이 열개여도 모자란다."
"사업은 무슨···. 구멍가게 수준의 동네 PC방이 무슨 사업이요? 그냥 자영업이지."
"짜식아, 사장님 소리 들으면 다 사업인 거야. 내가 꿈이 원래 거대 PC방 프렌차이즈 회장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일본 갈 때 격려금으로 금일봉 10만원 쾌척하셨죠?"
"야! 그것도 없는 돈 쪼개 준거야. 진짜 사람 성의를 무시하긴."
"언제까지 재미도 없는 돈 얘기만 하실 거에요?"
풍선껌을 쫙쫙 소리 나게 씹던 미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짧은 가죽 치마에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무척 도발적으로 보였다. 푸른 펄이 들어간 아이 쉐도우와 붉은 립스틱을 칠한 얼굴에선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미호, 아니 세난가?"
"두나에요."
"아무튼, 원래 인간의 먹고사니즘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야.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대장은 걍 돈 안 되는 사업 후딱 접고 막노동이라 뛰라니까요? 타고난 신력이 있으면 뭐해? 맨날 모니터 위에 쌓인 먼지나 닦고 있는데. 그 왜 예전에 가난하게 살던 시간 정지 능력자 이야기 생각나네."
"시간 정지 능력자? 그거 엄청난 거 아냐?"
"그죠. 1티어 급 능력인데. 근데 그 빡대가리 본업이 뭐였는지 아쇼?"
"뭔데?"
"택배 상하차."
"풉-."
"시간은 멈췄는데 택배는 그대로라던가? 이건 뭐 써먹을 데가 있어야지."
"겁나 웃기네. 그런 능력이 있는데 왜 그딴 일을 해?"
"내가 보기엔 대장도 마찬가지라니까? 대장 요새 유튜버들 뜨는 거 알죠?"
"알지. 심심하면 보는 게 BJ니 유튜버 영상인데."
"대장은 거기에 차력 영상 몇 개만 올려도 금방 스타 될 걸? 아니 그냥 러시아에서 열리는 스트롱맨 대회를 나가버려요. 300Kg도 한 손으로 거뜬하게 드는 분이 뭐하러 여기서 라면 심부름이나 하고 있습니까?"
다시 시작된 창범과 대근의 만담에 두나가 크게 부풀린 풍선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씨뎅, 더럽게 재미없는 얘기만 하네. 누가 꼰대들 아니랄까 봐."
"어어, 너 말 조심해. 가만 보면 인격 바뀐 척하면서 막말하더라? 너 미호지?"
"너? 방금 너라고 했니? 이게 고추에 털도 안 난 좆만이가 확 눈깔을 뽑아버릴라!"
두나로 화한 미호의 동공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다혈질인 두나는 입이 거칠고 성격이 괴팍하기론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워워, 둘 다 그만해. 두 사람은 왜 맨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거야? 이래가지고 어떻게 일본엔 같이 갔다 왔대?"
"아씨, 그거야 대장이 플레이어 잡으라고 보낸 거 아뇨? 결국엔 실컷 삽질만 하고 왔지만."
"저 새끼 존나 고자야. 세상에 같은 방에서 자는데 한 번도 안 덮친 거 있지? 병신 새끼."
"미친, 내가 기 빨려서 생명 단축의 꿈 이룰 일 있냐?"
"좆까. 보나마나 실좆 새끼. 너 따위한텐 안 박히거든?"
"와, 들었죠 대장. 쟤 말하는 거. 저거 완전 또라이 라니까?"
"미호가 전해달래. 너 존나 찐따 같았다고."
"아, 좀 그만!"
결국, 보다 못한 대근이 역정을 내고서야 두 사람의 언쟁이 끝이 났다.
상급자 눈치 보기라기보단, 들고 있던 쇠 컵을 맨손으로 우그러뜨리는 위력시범 쪽이 아무래도 깊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아씨, 또 애먼 컵 하나 버렸네."
종잇장처럼 우그러진 컵을 쓰레기통에 넣은 대근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암튼, 말장난할 때가 아니야. 일본 가서 허탕 치긴 했지만 소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잖아. 오카모톤지 사카모톤지 하는 스카우터가 대물 남의 신원을 알고 있다며?"
"네. 근데 지금은 중국 가 있데요. 상해라던가, 북경이라던가?"
"칭따오랬어, 찐따 새끼야."
"뭐?"
두나의 시비에 창범이 눈을 부라렸으나 대근의 만류에 겨우 참았다.
"암튼 거기까진 못가요. 또 간다고 해도 오카모토 그 작자를 어떻게 찾을 건데요? 이번 달 연차도 다 썼고, 돈도 다 떨어졌다고요."
"흐음, 그럼 그건 접고. 우리가 알아낸 건 대물남의 출입국 날짜랑, 바토만 센세라는 예명뿐이지?"
"그죠. 근데 왜 하필 베토맨일까요? 클래식이랑 관련이 있다는 뜻인가?"
대근이 씨익 웃었다.
"베토만이 아니겠지."
"네?"
"바토만. 즉, 한국말로 배트맨이란 뜻이야."
"아! 마그도나르도(맥도날드) 같은 거구나!"
"그렇지. 일본 사람이 모음이 부족하니까 멋대로 바꿔 부르는 거지. 그리고 그걸로 일단 확실해졌어."
"뭐가요?"
"한국에서 활동했던 대물 배트맨이 일본 원정기에 출현한 대물 남과 동일인이라는 사실."
"그때 한 번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땐 긴가민가했거든. 인터넷에서 떠돌던 썰이었는데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해서."
"왜요?"
"목소리가 너무 다르니까."
"목소리요?"
"어. 가면을 쓰고 있으니 얼굴을 알 길이 없잖아. 체형이 근육질인 건 의심스럽긴 한데, 그것만 가지곤 동일인물이라고 판단하기도 어렵지. 가장 문제는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거야."
"그건 변조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 변조 수준이 아냐. 성대모사도 특징을 비슷하게 따라 하는 거지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목소리를 가질 순 없는 거거든."
"글킨하죠."
"목소리만 들어선 대물 배트맨이란 사람과 일본 원정남은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어. 그래서 엄청 시끄러웠던 거야. 쌍둥이설까지 돌았을 정도니까."
"아! 그럼 이번에 저희가 바토만 센세라는 걸 확인하고 왔으니···."
"그렇지. 두 사람이 진짜 동일인물이라는 게 밝혀진 거지. 그리고 일반인이 완전히 두 개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잠자코 듣고 있던 미호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플레이어 아이템이네."
"빙고!"
"그럼 대물남인지 뭔지가 플레이언지는 확실해진 거네요?"
"맞아. 이젠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지. 그리고 네 말마따나 그 놈이 토종 한국인이란 사실과 더불어 일본에는 일주일가량 들렀다가 다시 귀국했다는 말이지."
대근이 미리 준비한 탁상 달력을 가리켰다.
"잘 봐. 둘이서 출입국 날짜 확인했다고 했지?"
"네."
"한국에 있던 대물 남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어린이날이 껴있던 황금연휴였어."
"어, 그러네요?"
"그래서 생각했지. 연휴 기간엔 비행기 티켓 가격도 두 배 씩 뛴 단말이야. 근데 왜 하필 그 날짜를 택했을까?"
창범이 머리를 긁적였다.
"돈이 너무 많아서?"
"야이 씨."
"왜요?"
"그 날 밖에 몸을 뺄 시간이 없다는 소리잖아. 어딘가에 소속되서 정규적으로 출근하는 곳이 있다는 뜻이지."
"아하! 그럼 직장인이란 말인가요?"
미호도 의견을 냈다.
"아님 학생이거나."
"학생?"
"대학생일 수도 있지. 체형이나 목소릴 봐선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니까."
"오호, 그럴싸한데? 우리 막 탐정 된 기분인데요?"
창범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근이 피식 웃으며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단서는 이거야."
첫째, 성방에 출연한 배트맨 가면의 남자와, 일본 원정AV에 출연한 대물남은 동일인이다.
둘째, 그는 직장인 혹은 대학생이며, 정체를 숨긴 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셋째, 그를 찾기 위한 연결고리는 중국으로 가 있다는 오카모코라는 스카우터와···
"아니면 지금은 은퇴했다는 BJ 가영의 행방을 찾는 것 뿐이지."
"현재로선 합방을 찍었다는 여자 BJ를 찾는 게 급선무군요."
"맞아. 이제부턴 그 BJ를 찾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해."
"근데 가영이란 애는 어떻게 생겼는데요?"
"몰라."
"네?"
"걔도 가면 쓰고 나왔거든."
"하- 젠장, 무슨 가면무도회도 아니고. 여기서 또 막히네요."
대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들 일본 가 있을 동안 내가 마냥 놀고만 있던 건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BJ 가영은 제법 이름난 BJ였어. 팬도 많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을 그만둬 버렸지."
"근데요?"
"일부 극성 팬들이 BJ가영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제보하기 시작했거든."
"정말요?"
"물론 추정일뿐이야. 가영도 얼굴을 공개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에이, 그럼 어떻게 찾아요? 무슨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
"또 목소리요?"
"BJ 가영의 방송을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했어. 그 여자는 결코 플레이어가 아냐. 평범한 일반인일 뿐. 그렇다면 목소리 변조를 할수 없었을테니 목소리가 똑같은 사람이 곧 BJ가영이란 소리겠지."
"그러니까 극성팬들이 목소리가 유사한 사람을 찾아서 제보하기 시작했다고요?"
"그렇지. 물론 허수가 너무 많아. 자기가 BJ가영을 만났다는 사람도 얘기를 해봤는데 순 뻥쟁이더라고. 아무튼 추리고 추려서 그럴싸해 보이는 인물들을 정리해 보니까 5명 정도 나오더군."
대근이 미리 준비한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장소와 직업이 모두 다른 다섯 명의 여성이었다.
"···경기도 소재 어린이집 교사, 정모양. 부산의 치과 간호사 김모양. 계룡대 모 사단의 여군 부사관 이모양, 제주항공 스튜어디스인 최모양. 광주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하모양. 이게 다예요?"
"어. 원래 엄청 많았는데 외형 설명이 가장 근접한 인물들만 추려본 거야. 나름 근거도 타당했고. "
"대단하네, 네티즌 수사대. 이걸 또 어떻게 찾아냈데?"
"물론 모두 아닐 수도 있지. 아무리 체형이 비슷하고 목소리가 닮았어도 얼굴을 모르는 이상 확증은 어려우니까."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얼굴까지 가리고 나온 여자가 자신이 성방 BJ를 했다는 걸 밝히겠어요? 잡아떼면 그만인걸."
"그렇지. 하지만 적어도 창범이 네 앞에선 잡아떼진 못하니까."
독심술과 최면 등의 정신 조작 능력자인 창범은 누구든 진실을 실토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또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BJ가영이란 사람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소리군요. 신원도 불분명한 네티즌 수사대의 제보만 믿고요."
"이번만 부탁한다."
"와, 진짜 악덕 사장 같으니. 월급 한 푼 안 주면서 부려먹기는 무슨···."
"이번 건은 정식으로 본부에 출장비 요청할 게. 시일이 다소 걸리겠지만,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
"어휴. 몰라요. 또 고생길만 열렸네."
"난 쟤랑 안 가."
"미호는 이제 갈 필요 없어. 일본어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니까."
"두나거든?"
그때 창범이 쭈뼛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저 대장."
"왜?"
"저도 일단 목소리를 익혀야 하니까 그 BJ가영이 나왔던 방송 파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아, 물론 오해는 마시고.이건 사전 조사의 목적이니까."
듣고 있던 두나가 혀를 찼다.
"쪼다 새끼가 꼴에 밝히기는."
"야! 너 또 막말이야?"
"왜? 한 번 부러뜨려 줘? 안 그래도 요새 정기도 딸리는데."
"야. 니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아저씨 여기 단무지···."
"아 씨발 진짜 그놈의 단무지!"
***
진아아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나는 새로 받은 능력을 확인했다.
*상식 개변(3Lv)
-암시를 주어 어떠한 특정 생각이나 사상을 상대에게 주입하는 정신 조작 스킬입니다.
-한 명의 인물에게 레벨 숫자 만큼의 암시가 허용됩니다.
-상대를 위해 하거나,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사용될 경우 치명적인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재사용 대기 24시간.
-다음 스킬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400포인트 필요합니다.
-다음 스킬레벨에 도달하면 암시의 최대 가짓수가 4개로 늘어납니다.
-다음 스킬레벨에 도달하면 재사용 대기시간이 10% 감소합니다.
‘치명적인 패널티라고?’
[다른 스킬과 동일입니다. 불법적인 경우에 쓰일 경우 신께서 좌시하지 않겠다는 거죠.]
‘굳이 그걸 명시한 이유는?’
[상식 개변 스킬은 정신 조작류 스킬 중에서도 무척이나 위험한 종류입니다. 엄한 사람을 순식간에 싸이코패스로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아하, 그러니까 누군가를 해치거나 재산을 모두 바치라는 등의 암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거군?’
[그렇죠. 그래서 상식 개변 스킬을 사용하실 때는 그것이 미칠 파급효과까지 고려하셔야 합니다. 무척이나 위험한 스킬이니까요.]
아무튼 성적으로 개방적임 가치관을 심어주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그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아가 몸에 커다란 베스타올을 두르고 물었다.
"오빤 안 씻으세요?"
< 529. 교생 실습-73-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