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1. 교생 실습-65- >
도훈의 눈빛이 바뀌었다.
오버 클럭된 두뇌는 병목으로 정체되었던 비좁은 뉴런 길목을 왕복 16차선 도로처럼 확장 시켰다. 인지기능이 활성화되자 스파크가 튀듯 뇌 기능이 증폭되었다. 주변의 모든 정보가 해일처럼 밀려들며 뇌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 열감은 감기처럼 기분 나쁜 게 아닌, 도파민의 과도 분비로 인한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으으! 처음도 아닌데 현자 타임의 위력은 정말이지···.’
도훈이 뽕(?)맞은 것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리자 진아가 놀라 물었다.
"오, 오빠? 괜찮아요?"
"쉿-. 말 걸지 마. 생각하는 중이니까."
딱 잘라 말하는 도훈의 태도는 어딘가 차가웠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낯선 느낌이었다.
‘걱정해서 물어보는 데 왜 저래?’
도훈의 기세에 눌려 진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동시에 방 탈출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에 도훈을 속으로 원망했다.
‘그나저나 실망이네. 오빠 되게 똑똑한 줄 알았는데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가 봐.’
단서를 푸는 내내 도훈은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추론능력이나 분석력 등 무엇하나 특출난 모습이 없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살짝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긴, 체육교육과가 다 그렇지 뭐. 학점 관리하려면 손발이 많이 고생 하겠네.’
진아가 속으로 흉보는데, 갑자기 도훈이 방언이 들린 사람처럼 빠르게 중얼대기 시작했다.
"···영어로 다섯 글자. 자물쇠의 철자로 조합 가능한 단어는 모두 121개, 아니 라틴어까지 포함하면 154개인가."
"오, 오빠?"
"거 조용히 하라니까?"
다시 한번 일축하는 도훈의 모습에 진아가 끝내 입술이 삐죽 내밀었다.
‘다 끝났는데 굳이 이제 와 열심인 척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뭐 이런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거야?’
자물쇠를 빠르게 돌리던 도훈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문제를 풀어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포자기한 진아는 그런 도훈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실력은 진즉 뽀록 났는데, 바둥대는 꼴이 오히려 더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뭐, 어차피 사람이 다 잘할 순 없는 거니까. 머리가 좀 나쁘면 어때? 얼굴이 저렇게 훈남인데.’
그때 도훈이 말했다.
"오케이. 다 풀었다."
"네?"
"자물쇠 열었다고."
철컥-
놀랍게도 아무렇게나 비번을 돌리고 있던 도훈이 1분여를 남둔 시점에 마지막 상자를 풀어낸 것이다.
"아, 아니 어떻게?"
진아가 눈을 부릅떴다.
"아직 하나 더 있군."
상자에는 또 다른 퀴즈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퍼즐이었다. 도훈이 남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1분···. 충분하군."
"오빠, 방금 그건 어떻게 푼 거예요?"
진아의 질문에도 도훈을 아랑곳 않고 혼잣말을 했다.
"마지막 문제는 수식 풀인가."
"···오, 오빠?"
"아, 쫌!"
도훈은 자꾸 성가시게 구는 진아에게 빽 소리쳤다.
"자꾸 방해하지 말고 저기 구석에 가 있어!"
"······."
진아가 상처받은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혼자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빽 소리치는 도훈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뭐, 뭐야 진짜? 왜 나한테 소릴 지르고···.’
진아가 토라지거나 말거나 도훈은 마지막 퍼즐 풀이에 집중했다.
마지막은 수식이 포함된 십자 퍼즐이었는데 수학교육과인 진아가 보기에도 대학 수학 이상의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계산식이었다. 본래는 수식을 풀지 않고 다른 힌트를 이용해 풀어내는 게 포인트지만, 시간이 촉박한 도훈은 암산으로 복잡한 수식을 직접 계산하는 게 더 빠를것이라 판단했다.
그의 눈이 좌우로 정신없이 굴러갔다. 대각선으로 쓸어내리듯 긴 장문의 수식을 단숨에 머릿속에서 해체했다.
"오케이, 첫 번째 정답은 2."
"네?"
"그리고 두 번째는 3."
"혹시 그거 계산하고 계신 거예요?"
"세 번째는···."
도훈은 아예 진아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1초가 아까운 마당에 더 이상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오케이. 끝냈다. 비번은 2314."
"네?"
"다 풀었다고. 출구 비번 눌러."
진아는 다짜고짜 명령하는 도훈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문 옆에 서 있던 관계로 스크린 터치를 눌렀다. 시키는데로 하면서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오빠도 은근 고집 있구나. 어차피 끝난 걸 뭘 굳이···.’
띡띡띡띡-.
띠리링-
놀랍게도 도훈이 아무렇게 불러댄 숫자가 정말로 출구 비번이 맞았다. 문이 열린 순간 시계는 10초 정도 남아있었다. 진아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우, 우아! 방금 어떻게 풀었어요?"
도훈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건방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방금 봤잖아. 계산하는 거."
"지, 진짜로 그걸 암산해서 풀었다고요?"
"왜? 뭐 문제 있어?"
"아, 아니 그래도···."
진아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돼! 공학용 계산기로 풀어도 수식 옮겨 적는 데만 5분은 족히 걸릴 수준을···.’
도훈이 여전히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내가 말했지?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아니···."
"뭐해? 문 열렸으니 나가자."
도훈은 떨떠름해하는 진아는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오, 오빠 같이 가요."
밖으로 나가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직원 역시 놀라서 말했다. 그는 다른 방을 체크하느라 도훈의 방이 열린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 막 깨달은 것 같았다.
"얼레? 탈출 성공하셨네요?"
"네. 1시간 안에 끝났어요."
"잠시만요···힌트 3개 사용하시고 제한 시간 이전에 탈출하셨으니 사진 찍어 드릴게요."
"사진이요?"
"방금 그 방은 난이도가 제일 높아서 탈출하신 분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탈출하신 분들은 기념으로 즉석사진 남겨드리고 있어요."
"귀찮은데···."
도훈은 만사가 귀찮은 듯 마뜩잖아했지만, 진아가 그의 팔짱을 끼며 졸랐다.
"오빠, 그래도 찍어요. 기념인데."
일부러 가슴을 바짝 접촉해오는 진아의 스킨십에도 도훈은 불결한 것에 닿은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뭐야, 이 살덩어리는?’
[주인님. 정신 차리십시오. 현자 타임에 너무 도취하신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기록이 이게 뭐람. 이딴 문제를 한 시간 꼬박 채워 통과하다니···. 수치스럽군.’
"자! 그럼 포즈 취하시구요. 사진 찍겠습니다!"
직원이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목에 걸고 도훈과 진아를 찍었다. 사진 속의 진아는 활짝 웃고 있었지만, 도훈은 기록이 불만스러운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였다.
***
방 탈출 까페를 나오며 진아가 물었다.
"오빠 방금 그 게임 예전에 해본적 있죠?"
"응?"
"우리 방금 탈출한 거요."
"나 오늘 여기 처음 오는데?"
"에이···. 저한테는 거짓말할 필요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야?"
진아는 마지막에 보여준 도훈의 초인적인 문제 풀이 능력을 불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막바지에 이르러 정답을 풀었다고 굳게 믿었다.
‘틀림없어. 중간에 7474라는 비번도 알고 있었잖아. 그땐 운좋게 찍어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 방의 모든 정답을 알고 있었던 거야.’
특히 마지막 수식 풀이가 결정적.
‘그 수학 문제를 암산으로 풀었다는 게 말이 돼? 수학과인 나도 한참 봐야 알겠던데?’
진아는 다른 건 몰라도 수학만큼은 수재 소릴 듣고 자랐다. 체육교육과인 도훈보다 수학에서 밀릴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흐흐. 근데 오빠도 은근 귀엽잖아? 다 들켰는데 아닌 척 잡아떼는 거 봐. 나한테 잘 보이고 싶나 보지?’
진아가 멋대로 착각하는데 차량에 오른 도훈은 점점 진아가 귀찮아졌다. 자꾸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사사건건 참견하는 게 아주 질색이었다.
‘로시, 그냥 집에 갈까?’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나중에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마십시오.]
‘후회는 무슨.? 땍땍거리는 저 계집애 정말 밥 맛이구만.’
[방금 전까지 코박죽에 겨핥까지 생각하시지 않으셨나요?]
‘내가? 미쳤네. 더럽게 왜 거기다 코를 박냐? 땀나는 겨는 왜 핥고? 변태야?’
[허어···.]
"오빠,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
"집으로."
"네?"
진아가 뻥 진 표정이 되었다.
"에이, 농담 말고요."
"농담 아닌데?"
진아는 고개를 갸웃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 설마 바로 집으로 초대하는 거야? 이 오빠 응큼한 것 봐? 내가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진아는 도훈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고 착각했다.
그녀는 쉽게 수락하면 싸 보일 것 같은 기분에 한 번 튕겼다.
"저희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너희 집이 어딘데?"
"저희집요?"
‘오빠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었어? 집에는 엄마 계시는데···.’
"저기, 집에는 어머니가···."
"그래서?"
도훈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되묻자 진아는 더욱 놀랐다.
‘부모님이 계셔도 상관없다는 거야? 헐! 이 오빠 엄청 과감하네···. 가만, 엄마가 오후에 외출한다고 하셨던거 같은데 톡으로 한 번 물어볼까?’
진아가 핸드폰으로 빠르게 어머니에게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는 도훈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시간도 많은데 드라이브 좀 더 하다 가면 안 돼요?"
"드라이브?"
그때 도훈은 로시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있었다.
[주인님. 눈 딱 감고 바람 한 번만 쐬시죠.]
‘내가 왜?’
[오랜만에 차도 빌리셨잖습니까. 운전하는 거 좋아하지 않으시던가요?]
‘운전이라···.’
두뇌가 활성화된 도훈은 당장이라도 악셀을 끝까지 밟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예리하게 변한 감각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정보처리량이 증가한 두뇌는 더욱 강렬한 자극을 원했다.
‘한 번 때려 밟고 싶기도 한데···.’
부릉- 하고 울리는 엔진음이 심장을 뛰게 했다.
뇌에 차오른 압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었다.
"그럴까?"
"네, 좋아요."
도훈은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활성화된 뇌는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의 정보를 빠르게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실시간 입체지도가 3d리모델링 되었다. 세상이 메트릭스의 세계처럼 투영되며 수많은 정보들이 자동으로 해석되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속도만큼 더 많은 정보를 진공청소기처럼 흡수했다.
‘으으, 마약을 먹으면 이런 기분인가? 너무 신나는데. 이 즐거운 세상을 한낱 여자나 따먹으며 허송세월 했다니···.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구나.’
도훈은 프로 드라이버라도 되는 것처럼 시내부터 칼치기를 하며 빠르게 차를 몰고 갔다. 급출발, 급브레이크를 널뛰기 하는 거친 운전 스타일에 진아도 바짝 긴장했다.
‘뭐, 뭐야? 오빠 왜 이렇게 터프해졌지?’
그녀는 나르시스트 였으므로 뭐든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었다.
‘설마 그런 건가?’
진아는 언젠가 본 인터넷 기사를 떠올렸다.
차를 거칠게 몰았을 때의 긴장감이 시작되는 연인들에게 착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흔들 다리 위에서 고백하라, 혹은 공포영화를 같이 보라처럼 신체의 긴장 상태가 연인에 대한 설렘과 동일시 되며 자연스럽게 호감도가 상승한다나 뭐래나?
‘풉- 오빠가 나한테 잘 보이고 싶나 본데? 그럼 적당히 맞춰 줘야겠지?’
진아는 도훈의 거친 운전을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 착각하며 잠자코 물었다.
"우리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무 데나. 그냥 지금은 달리고 싶어."
"아···."
‘왠지 허세 부리는 모습도 멋있잖아?’
진아는 진아대로 도훈이 멋을 부린다고 착각했다.
도훈은 사실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복잡한 시내를 뚫고 자동차 전용도로위로 오르자 마침내 도훈이 풀악셀을 밟기 시작했다.
부아아앙!
RPM이 급격히 치솟으며 격한 엔진음이 났다.
진아도 덩달아 심장이 뛰었다.
‘으, 조, 조금 겁나는데?’
진아가 두려움에 보조석 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운전에 몰입한 도훈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뇌 내에서 폭탄이 터진것처럼 강렬한 희열감이 밀려들었다.
"이제야 좀 달리는 것 같네."
"오, 오빠. 근데 좀 빠른 것 같지 않아요?"
"이거 가지고? 아직 200도 안 됐는데?"
"아, 아니 과속 카메라도 있으니까···."
"걱정마. 알아서 피해가는 중이니까."
‘이, 이렇게까진 무리 안해도 되는데···.’
진아가 슬슬 겁을 내는데 도훈은 여전히 로시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주인님. 현자 타임의 부작용을 항상 염두 하셔야됩니다.]
‘무슨 부작용? 이제야 긴 어둠 끝에 눈을 뜬 기분인데. 항상 이렇게 머리가 맑았으면 좋겠어. 지금 아주 기분 좋아.’
[무, 물론 주인님이 지금 현자긴 하지만···. 사실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여러모로 피곤한 법이니까요.]
‘로시, 젊은 남자가 여색에 빠져선 절대 큰일 못하는 법이야. 계집은 그냥 애나 낳아주면 그만이라고.’
[그, 그렇긴 하죠. 그래도 진아양은 제법 귀엽지 않습니까?]
‘저 자뻑 계집애? 웃기지 말라 그래. 아둔한 머리로 커다란 가슴이나 흔들어 대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아? 여잔 정말 하등 쓸모없는 존재야. 종족 번식이 아니었다면, 진작 없어졌어야 할 적폐 덩어리라고.’
[주, 주인님 그 생각은 꼭 속으로만 삼키시길···.]
그때 도훈의 심정도 모르고 진아가 불쑥 물었다.
"아, 맞다. 오빠 아까 비번 어떻게 아셨어요?"
"무슨 비번? Happy?"
"아뇨, 그거 말고 2번째 출입문 숫자요. 74."
"아, 그거?"
도훈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진아를 쳐다보았다.
< 521. 교생 실습-6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