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29화 (502/2,000)

< 511. 교생 실습-55- >

어느덧 금요일.

교생실습의 중간 분기점을 넘어서자, 대부분 교생은 심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늦잠에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 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정시 출근에 늘 긴장된 상태로 하루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다 보니 당연히 누적된 피로가 상당한 편이었다.

"아,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주말이닷!"

"불금, 불금! 오늘은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갈 거야."

"난 이틀간 집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지. 넘나 피곤해."

"도훈 오빤 주말에 뭐해요?"

점심을 먹고 짧은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데 진아가 불쑥 물었다. 왠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 같아서 딱 잘라 말했다.

"글쎄. 주말동안 대표수업 지도안 다듬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거 아직 안 끝났어요?"

"응. 연구부장 선생님이 여간 깐깐해야 말이지. 어제도 남아서 쓰다 갔는데 완성은 다 못 했어."

"저런···. 괜히 교생 대표 수업 맡았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네요. 제가 도와드릴건 없나요?"

"말로만이라도 고맙네. 근데 지도안 쓰는 단계라서 어차피 혼자 교재 보면서 해야 할 것 같아."

"아···."

"오늘도 연구부장 샘이 남으라더라고."

"휴, 오빠가 고생이 많네요. 근데 혜진이는 어디 갔어요? 오전에 있었는데 안 보이네요?"

"어, 몸이 많이 안 좋은 가봐. 오후에 병 조퇴 내고 병원 가본다더라고. 어차피 오후엔 연수밖에 없으니까."

혜진은 이틀 사이 급격히 가슴이 커지면서 쉽게 말해 젖몸살과 유사한 증상을 겪고 있었다. 로시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성장통이므로 굳이 병원을 안 가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했지만, 이틀 사이 컵 사이즈가 두 단계나 확대된 본인으로선 당연히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보니 유방암 초기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던데,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안심시켰다.

혜진이가 학교에 없다는 소리에 진아가 좀 더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혹시 주말에 혜진이는 안 보세요?"

"응?"

"아, 아니에요. 그냥 오빠가 관심 있다고 하시니까, 뭐···."

질투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눈치챌 만큼 팍팍 티를 내는 중이다.

"관심이야 뭐···. 근데 몸이 안 좋다니까 만나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지."

"확실히 안색이 안 좋긴 하더라고요. 자꾸 여길 만지던데···."

진아가 불쑥 자기 가슴을 부여잡았다. 큼직한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나보고 한 번 만져달라는 사인 같달까?

"그러게. 걱정이다, 참."

내가 눈치 못 챈 것처럼 시치미를 떼자, 진아도 민망했던지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내렸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 혜진이랑 잘되시고 싶음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가? 어떻게?"

"여자 맘은 여자가 잘 알죠. 저랑 혜진이는 또래잖아요. 어쩌면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딜 가면 좋아할지도···."

"그러니까 데이트 코칭을 해주겠다는 소리야?"

"말하자면요?"

"하하. 너 소개팅 엄청 받고 싶나 보구나?"

진아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해주시면 좋은 거고···. 암튼 제가 도와드릴게요. 실습 동기 좋다는 게 뭐에요? 이럴 때 활용하셔야죠."

[데이트 신청치고는 좀 독특하군요.]

‘그러게. 먼저 만나자고 하기엔 핑곗거리가 곤궁했나 보군. 하여간 자존심 하고는.’

"그럼 나야 땡큐지. 근데 어떻게 가르쳐 줄 건데?"

"일단 오빠가 시간이 되셔야죠."

"토요일은 모르겠지만, 일요일은 확실히 시간이 돼. 내일까진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테니까."

"그래요? 그럼 일요일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요?"

"그러자."

나는 쿨하게 응했다. 모처럼 진아가 용기를 냈는데 튕기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진아는 나의 수락에 들뜬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분명 약속했어요?"

"어, 그래."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알았다니까."

진아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그나저나 콧대 높은 그녀가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해올 줄이야···. 밀당 전략이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잘하면 주말 사이 진아까지 자빠뜨릴지도.

공략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

"도훈이 왔니?"

교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한솔이 도훈을 보고 먼저 인사했다. 항상 업무에 치여 가까이서 인기척을 내야지만 겨우 인사를 받아주던 모습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사실 한솔은 실습생들 연수가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이었다. 연수가 끝나는 오후 4시 반부터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쳐다보거나,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따라 시간은 어찌나 더딘지, 5분쯤 지났다 싶어 시간을 보면 겨우 1분 지나있곤 했다. 자꾸 콤펙트 화장품을 열어 손거울을 확인하는 그녀의 표정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늘따라 화장도 짙게 하고, 치마도 가장 짧은 것을 입었다. 교무실에 함께 있는 직원들은 혹시 오늘 선보러 가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내가 도훈이를 너무 의식하는 건 아닐까···?’

한솔은 스스로에게 거듭 자문했다.

평소보다 샤워를 더 꼼꼼히 하고, 안 쓰던 향수까지 뿌린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특히 중간에 복도에서 도훈을 마주쳤을 때 말을 더듬거린 것은 보통 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도, 도훈 학생. 오늘 남아서 지도안 마무리해야지?"

"네?"

"아니 어제 초안만 썼으니까··· 그···."

"아, 네.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 그래. 그럼 연수 끝나고 교무실로 오렴."

도훈이 싱긋 웃으며 돌아서는데,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심장을 정으로 찍은 것처럼 쿵- 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박 수가 급격히 빨라지는 것은 살면서 거의 겪어 보지 못했던 이상 징후였다.

비슷한 경험은 딱 한 번.

중학교 때 우연히 친구 따라간 교회에서 본 오빠.

딱히 종교를 믿는 편은 아니라 금방 관뒀지만, 순진했던 여중생 시절 만났던 잘생기고 자상한 교회 오빠는 그 뒤로 오랫동안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었다. 한솔은 그것을 첫사랑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그 뒤론 단 한 번도 없었던 설렘을, 교생인 도훈을 보고 또다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그날이 가까워져서···.’

한솔은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태어나 섹스를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으니, 그에 대한 갈증을 느낀 것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몸은 점점 무르익었고, 오히려 20대 시절보다 30대를 넘어선 지금이 욕구가 더 강해졌다.

오늘 아침에도 우연히 샤워 물줄기가 그곳에 닿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움찔 신음을 뱉고 말았다. 그때 하필 도훈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줄기의 수압이 마치 도훈의 거친 터치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정신 차려, 김한솔. 젊은 남자애를 보고 설레는 건 그냥 본능 같은 거야. 왜 친구들 보면 지금도 아이돌 좋아하고 몸 좋은 남자보고 수군거리는 애들 많잖아. 도훈이가 워낙 잘생겨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 걸 거야.’

한솔은 애써 합리화시키며 도훈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끊고자 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학교에 이 주간 교생실습을 온 남학생에게 남녀 사이의 연정을 느낀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착취이자, 하급자에 대한 상급자의 갑질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평소 그런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한솔은 자신이 바로 도훈에게 그런 행동을 한다고 자책했다.

‘맞아.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실습 담당자가 실습생을 이성으로 느껴서 야근을 시키다니, 이게 말이 돼? 난 그냥 교생 대표수업을 하는 도훈이를 지도편달하고 도와주려는 것 뿐이야. 사적인 감정따윈 전혀 없다고.’

그렇게 다짐했지만, 막상 도훈을 다시 보는 순간 한솔의 굳은 각오는 산산이 무너졌다. 도훈은 여느때처럼 상큼한 미소 한방으로 너무도 손쉽게 그녀를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연구부장 선생님, 다시 뵙네요."

"금요일인데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래도···. 오늘 그럼 일찍 끝내고 나가서 맛있는 거 사줄까?"

"맛있는 거 뭐요?"

도훈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묻자 한솔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너무도 빤히 그녀의 몸매를 훑고 있었다.

‘맛있는 거 주고 싶음, 한 번 대주시던지.’

그의 노골적인 눈빛에 한솔이 당황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그럼 치맥 어때요?"

"치맥?"

"치킨하고 맥주 말이에요."

"아니 그걸 모른다는 소리가 아니라···, 너 술 좋아하니?"

"그냥 치킨만 먹으면 목 막힐까 봐서요. 선생님 혹시 술 안 드세요?"

"못 마시진 않아."

"그럼 반주 삼아 가볍게 한잔하면 되죠. 요새 맥주가 술인가요, 음료수지."

"그, 그래."

[오, 한솔 양의 태도가 사뭇 다른데요? 왜 저렇게 주인님을 어려워하는 것 같죠?]

‘감정이 생겼기 때문이지.’

[감정요?]

‘원래 남녀 사이라는 게 그렇거든. 아무 사이가 아닐 땐 데면데면 굴다가도 어떤 계기로 확 꽂히는 순간 이성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그땐 나이나 직위 같은 건 아무 필요 없어. 그냥 순수하게 남자와 여자만 남는 거지.’

[어제 일로 한솔 양이 주인님께 깊은 호감을 느끼게 됐나 보군요.]

‘좀 더 비싸게 굴 줄 알았는데, 확실히 아직 처녀다 보니 이런 쪽으론 쑥맥이나 마찬가지군. 잘하면 오늘 밤 공략이 가능할지도.’

도훈이 자리에 앉자, 한솔이 어제 완성한 지도안 초안을 꺼내 들었다. 수기로 흘려 쓴 지도안에는 빨간팬으로 첨삭한 표시가 남아 있었다.

"솔직히, 너무 내용이 좋아서 뺄 부분은 하나도 없더라. 보강할 부분만 대충 표시해 뒀으니 오늘은 거기 살만 붙여서 컴퓨터에 옮기면 될 것 같아."

도훈이 눈으로 쭉 훑으니 한솔이 덧붙인 내용만 보태도 지도안 한 부가 완성될 수준이었다.

‘뭐야? 자기가 이미 다 해버렸는데?’

[주인님에게 잘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백퍼네 백퍼. 나한테 점수 따고 싶나 봐. 크크, 역시 여자는 남자하기 마련이라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조금 막막했는데 이렇게 신경 써 주시고···."

"네가 다 한 거야. 나는 지도서에서 관련 내용 찾아 준 것 밖에 없거든."

"그래도 선생님 아니었음 엄청 고생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뭘 이 정도로···. 컴퓨터는 저기 있는 거 써."

"네."

도훈은 자리를 옮기던 중 한솔에게 물었다.

"참, 선생님 혹시 지도안 틀 짜둔 양식 좀 참조할 수 있을까요?"

"틀?"

"네. 이걸 처음부터 짜면 시간이 너무 아까울 거 같은데···."

"응 있지. 가만있어봐 찾아줄게."

한솔이 폴더 몇 개를 뒤지더니 금새 지도안 양식을 찾아냈다.

"이거면 되겠니?"

"네. 제 USB에 담아갈게요."

도훈이 USB를 꺼내더니 데스크 위에 컴퓨터에 꽂았다.

"저 폴더가 복잡해서 제가 직접···."

"어, 그, 그래."

한솔이 마우스를 놓고 물러나자 도훈이 뒤에서 마우스를 잡으며 직접 파일을 복사했다. 자연스럽게 뒤에서 껴안은 형국이 되어 도훈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흐, 흐음. 도훈이 냄새···.’

도훈의 몸에서 땀 냄새가 살짝 섞인 스킨 냄새가 났다. 훅 들어온 남성의 향기에 한솔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빨개졌다.

‘아···. 남자 냄새가 이렇게 좋은 거였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한솔은 어깨에 살짝 닿는 도훈의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오므렸다. 민망함에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자 도훈의 USB 내부의 폴더들이 보였다.

‘직박구리? 저게 뭐지?’

도훈의 USB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폴더들로 가득했다. 도훈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영상자료들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요. 좀 지워야겠어요."

도훈이 폴더를 클릭해 열자 내부의 파일이 보였다.

일본어와 영어로 가득한 파일 가운데 문득 한국어 제목이 보였다.

[형부 이러시면 언니가.avi]

‘헛! 저, 저게 뭐람?’

한솔은 자기가 잘 못 봤나 싶어 그 아래 있는 파일명도 훑었다.

[과외 선생님의 비밀.MP4]

‘이, 이건!’

한솔은 마침내 확신했다.

도훈의 USB를 가득 채운 것은 음란한 동영상들이었다.

한솔은 일부러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지만, 계속 가슴이 콩딱거렸다.

‘세상에···. 도훈이가 야동매니아였다니···.’

한솔은 마치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엿본 느낌이었다. 멀쩡한 청년인 줄 알았던 도훈이 학교에 야동 담은 USB를 들고 다니는 변태였다니.

파일을 지워 공간을 확보한 도훈이 파일을 복사해 넣고 말했다.

"다 옮겼어요 선생님. 그럼 저쪽에서 작업할게요."

"으, 응 그래."

도훈이 자리에서 물러나 작업을 시작하는데도 한솔의 떨리는 마음은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원래 남자들은 저렇게 야동을 많이 보나?’

살면서 야동을 거의 본 적이 없던 한솔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는 도훈의 눈치를 살피며 검색창에 몰래 타자를 쳤다.

<남자들은 왜 야동을 보나요?

한편 자리를 옮겨 타이핑 작업을 시작하던 도훈은 슬쩍 한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파일 봤겠지?’

[네. 눈빛이 확 달라지더군요. 근데 왜 이런 걸 준비하셨습니까? 괜히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는데요.]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뭘 말입니까?]

‘여자들의 신념이란 굉장히 편의주의적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담배 피우는 남자는 절대 안 만나. 문신 있는 남자는 최악이야. 이랬던 여자들이 막상 매력을 느낀 남자가 담배를 피우거나 문신이 있으면 어떨 거 같아?’

[어떤데요?]

‘이해하려 들어.’

[이해요?]

‘그래. 사실 그런 신념이란 한낱 부질없는 거란 말이지. 상대에게 느낀 매력이 더 클 경우,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가치관을 바꾸는 게 여자들이야. 내가 야동을 즐겨보는 남자라는 인상을 남긴 이유는, 숫처녀인 한솔을 자극하기 위해서였어. 두고 봐. 오늘 술자리에서 분명 이걸로 연구부장을 자극할 수 있을 테니까.’

덫을 설치한 도훈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511. 교생 실습-55-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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