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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523화 (496/2,000)

< 505. 교생 실습-49- >

"이, 이걸 10분 만에 완성했다고?"

"방금 직접 보셨잖아요?"

도훈의 목소리가 유난히 뾰족했다.

그는 현자 타임 직후 밀려온 탈력감에 살짝 짜증이 난 상태였다. 만사가 귀찮고, 눈앞의 미녀마저 사람 거죽을 쓴 살덩이처럼 느껴졌다.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묻지? 내가 속임수라도 썼다는 거야 뭐야? 나이 처먹고 히스테리나 부리는 주제에 사람 말을 무슨···.’

[주인님, 냉정하십시오. 주인님은 지금 현자 타임의 부작용을 겪고 계십니다.]

‘음, 내가 진짜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줄 모르겠군. 그냥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걸, 제기랄.’

[이번 공략에 들인 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더 짜증 난다고. 내가 무슨 보빨에 환장한 놈도 아니고 서른 넘는 노처녀 한번 자빠뜨려 보겠다고 며칠째 뭐 하는 짓이람? 아오, 병신같아. 불알을 확 떼버리든가 해야지.’

[주, 주인님 그건 좀···.]

현자 타임은 무척 강력한 스킬이지만, 부작용이 막심했다. 밀려오는 허무감은 도훈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번식 욕구마저 극도로 저하했다.

평소 성욕의 화신이던 도훈은, 이제 여성 혐오의 선봉장으로 분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폄훼하고 자책했다.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아, 로시. 여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존재라고 쇼팬하우어가 그랬잖아. 여자는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서만 창조된 존재라면서. 그 외에는 무가치한 생물이라 할 수 있지.’

[무, 무가치하다니요?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니체도 그랬어.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 번째 실수라고. 아, 그런 말까지 했던가? 여자에게 다가갈 때는 꼭 한 손에 채찍을 들라면서. 자고로 북어와 여자는 삼 일에 한 번···.’

[주인님은 지금 정상이 아니십니다. 제발 여성 혐오를 멈춰주세요!]

‘에이씨, 다 필요 없어! 여자고 뭐고 이젠 정말 신물이 나. 어차피 물만 빼면 그만인데 뭣 하러 그렇게 용을 쓰며 다녔는지 몰라? 그냥 혼자 딸딸이나 치면 될 것을.

도훈의 현자타임으로 파생된 내면적 갈등에 빠진 사이 한솔 역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럼 저 아이가 정말 천재였단 소리야? 운동밖에 모를 것 같은 저 아이가?’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도훈은 잘생긴 스포츠남에 가깝지 똑똑한 뇌섹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면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사실에 그녀는 인지 부조화마저 겪고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한솔은 문득 교생 실습 첫날을 기억을 떠올렸다.

밤새 준비한 PPT로 학교 소개를 하던 중, 도훈이 딴짓을 했다. 열심히 배워야 하는 교생의 태도로 부적격하다고 판단했던 한솔은, 그에게 창피를 주려고 일부러 그를 딱 꼬집어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맞아! 그때도 완벽하게 대답했잖아? 교목이나 교화 같은 전혀 생뚱맞은 질문이었는데···.’

당시엔 도훈이 그저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우연히 물어본 내용이 그가 하필 외운 것이었고,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보니 도훈은 진짜로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지도안을 휘갈겨 낸 후 삐뚜름해진 자세마저 오만한 천재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딴 걸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지 말라며.

시시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한 번 벌어진 사건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연거푸 벌어진 일들은 당연히 필연이다.

증거는 명백했고, 모든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이도훈, 그는 타고난 천재였다.

"너, 너! 정말 대단하구나!"

"네?"

도훈이 여전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처음의 싹싹한 태도는 사라져 있었다.

"이게 대학교 2학년이 써낸 거라고 하면 다들 놀라 자빠질걸?"

"그런가요?"

"당연하지! 난 임용 시험 채점 감독관까지 해봤어. 단언컨대,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공부한 임고생들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쓴 사례는 없었어!"

그의 천부적 재능에 흥분한 한솔이 호들갑을 떨며 도훈을 칭찬했다. 하지만 도훈은 시종일관 오만방자한 태도를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만사가 귀찮은 도훈은 한시라도 빨리 한솔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지도안 보고 비슷하게 따라 한 것뿐인데···."

마치 교과서 보고 공부했어요, 라며 말하는 전국 1등 같은 재수 없는 태도가, 한솔의 확신을 더 했다.

원래 잘하는 사람에겐 특별한 스킬이나 요령 따윈 필요치 않다. 그냥 잘하는 것이 진짜로 잘하는 것이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므로.

"너 혹시 공부도 잘하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학점 같은···."

"뭐 장학금 받을 정도는 돼죠."

"진짜?"

"네. 알바 할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장학금 노리거든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장학금을 꺼내올 수 있다는 말투.

한솔은 이제 완벽하게 도훈을 재평가하고 있었다.

‘내가 편견이 있었구나! 저렇게 몸도 좋고 잘생긴 학생이 머리까지 좋을 린 없다고 생각했어. 어쩌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한솔은 자신이 가진 오만과 편견을 수정했다.

예쁘고 몸매 좋고 똑똑하기까지 했던 자신이란 사례가 있는데, 잘생기고 몸도 좋고 똑똑한 도훈이라는 존재가 불가능할 건 뭔가?

그는 쉽게 말해 남자 김한솔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상위 호환인.

"선생님 저 다 했는데 이제 가봐도 되죠?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한솔에게 완전히 흥미가 식은 도훈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마저 어딘가 역겹게 느껴졌다.

‘뭐하러 쿨타임도 긴 현자 타임 스킬을 쓴 거람? 그냥 아꼈다가 필요할 때 써먹을 것을.’

남녀 관계는 미묘하다.

애타게 사랑을 갈구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아서기도 하며, 지독하게 미웠던 상대가 갑자기 천사처럼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지금의 한솔이 그랬다.

평소 건들거리고, 껄떡대던 도훈이 갑자기 새침해지자 한솔은 부쩍 갈증이 났다. 그는 보기 드문 천재가 분명했다. 자신보다 우월한 남자를 찾던 그녀에게 있어, 오랜만에 나타난 제대로 된 남자. 그에게 흥미가 돋았다.

"무슨 바쁜 일 있니?"

"아뇨? 그냥 시간이 늦어서요."

"나도 마침 일 끝냈는데 데려다줄까?"

"아니에요. 전 택시가 편해서."

도훈이 공략 기회마저 날려버리려고 하자 로시가 급히 나섰다.

[주인님! 지금 무슨 짓입니까?]

‘왜?’

[기껏 스킬까지 써서 관심을 끌어놓고서, 다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려 드시다니요!]

‘아 몰라. 그냥 싹 다 귀찮아. 여자랑은 얘기도 하기 싫어 지금.’

[나중에 필시 후회하실 겁니다. 부작용이 끝나고 나면요.]

‘과연 그럴까?’

[주인님. 잠시만 마음을 누그러뜨리시지요. 한솔 양은 그저 호의로 제안하는 것뿐입니다. 택시비는 굳히셔야죠.]

‘흠···.’

로시의 설득에 도훈이 마음을 돌렸다.

"가는 길이라면 뭐···."

"집이 어느 방향인데?"

"국성대 근처요."

"어, 마침 가는 길이네!"

한솔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 자신의 집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왠지 도훈이란 남자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지금과 같은 기회가 아니면 그와 편하게 얘기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서둘러 짐을 챙긴 한솔은 도훈과 함께 주차창으로 향했다.

여전히 도훈은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로시의 설득에 마지못해 따라나서긴 했지만, 지금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런 도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한솔이 도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혹시 고등학교 때도 공부 잘했니?"

"뭐, 그냥저냥요."

"···전교에서?"

"잘은 모르겠고 모의고사 전국 1등 한 적도 있었을걸요?"

도훈은 이정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도훈의 영혼이 이정우의 것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전국 1등이라고? 전교 1등이 아니라?"

"네."

너무도 태연스러운 대답에 허풍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눈앞의 건장한 청년은 당연한 걸 왜 자꾸 묻느냐는 듯이 시큰둥했다.

‘역시! 그 기억력이 진짜였어! 얘는 정말 한 번 보면 머릿속으로 복사해 버리는 거야!’

"와··· 그, 근데 왜 하필 체육교육과를?"

"왜요? 체육 선생님 되려면 체육교육과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 물론 그렇지만···."

자신이라면 의과대학에 갔을 것이다. 아니 과는 상관없으니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국대를 갔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국성대를···."

같은 과라도 왜 한국대를 가지 않았냐는 물음에 도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집이 가까워서요."

"아··· 지, 집이···."

그야말로 놀라움은 연속.

마치 왜 하버드를 안 갔냐는 말에 학교가 멀어서라는 대답 이랄까?

‘하긴 천재들은 가끔 괴팍한 선택을 하기도 하지.’

"어디를 가던 체육교육과 졸업하면 같은 선생 되는 거 아닌가요? 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마, 맞아. 어차피 임용만 붙으면 다 똑같지."

현직교사인 한솔은 그 말에 조금은 어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같은 임용 고사 합격자라도 인맥을 형성하는 건 학벌이다.

당연히 명문대를 나올수록 교육부 등의 요직에 선배들이 자릴 잡은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학연은 장차 교사 생활을 하는데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다못해 학벌 좋은 사범대 출신은 학원 강사로 전향하더라도 티어부터 달랐다. 실력보다 간판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병폐였지만,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맞아.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꺼낼 필욘 없겠지. 전국 1등의 천재라면 그런 걸 몰랐을 리도 없고.’

한솔은 문득 도훈이 잘생겨 보였다. 당연히 잘생겼다는 생각은 처음 봤을 때부터 했지만, 그땐 딱히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얼굴의 생김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스마트하고 지적인 타입에 끌리면 모를까, 우락부락한 근육 덩치들은 무식해 보여서 싫었다.

하지만 도훈은 달랐다.

예선을 통과하자 본선부턴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자꾸 한솔이 운전 중에 자신을 힐끔거리자 도훈이 불편한 듯 따졌다.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어? 아, 아니?"

"근데 왜 자꾸 쳐다보세요?"

"아냐. 저기 사이드미러 본 거야."

"···그러시구나."

도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이드미러가 자기 얼굴에 달린 것도 아닌데.

‘여자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전 주인님이 더 신기합니다. 아무리 부작용이 심해도 어떻게 이 정도로 사람에게 냉정해지실 수 있는지.]

‘너도 한 번 폭딸 치자마자 야동 다시 틀면 느끼게 될 거야. 화면의 살 색 덩어리들이 얼마나 역겨워 보이는 지 말이지.’

[저는 신체가 없는 걸요.]

‘그런가? 암튼 지금은 영 내키지 않네. 어떤 여자가 오더라도 다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도훈의 폰으로 깨톡이 도착했다.

깨톡-

소리로 바꾼 알림음에 도훈이 슬쩍 깨톡을 확인했다.

민주 : 주인니임~ 민주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요.

연이어 사진이 도착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민주는 메이드 복이라 불리는 서양식 하녀복을 입고 있었다. 특히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로 목에는 개처럼 목줄을 찬 모습이 제대로 컨셉을 잡고 찍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현자 타임으로 부쩍 짜증 나 있던 도훈은 민주의 사진을 보자마자 속이 미식거렸다.

‘더러운 암캐 같으니. 스스로를 격하시키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대해주지.’

도훈이 빠르게 답장을 날렸다.

도훈 : 좆물받이 주제에 너무 옷을 많이 걸쳤네. 위아래 속 옷만 입고 머리에 토끼 머리띠 쓰고 다시 찍어.

도훈은 흥분했다기 보다 그저 골탕먹이고 싶을 뿐이었다.

메이드 복 코스프레를 할 정도면, 분명 바니걸 소품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도훈이 보조석에 앉아 혼자 깨톡을 주고받자, 한솔은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차를 태웠는데 전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솔이 정지선에 걸렸을 때 넌지시 물었다.

"이 시간에 톡 하는 거 보니까 여자친구가 보네?"

"아닌데요. 저 여자친구 없는데."

"없어?"

"네.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

한솔은 괜히 안도감이 들면서도, 도훈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세상에, 저렇게 잘난 아이가 여자친구가 없다니? 눈이 엄청 높은 걸까?’

"그렇구나. 난 당연히 있는 줄 알았는데···."

"근데 선생님. 방금은 너무 개인적인 질문 같네요."

도훈은 아까 당한 그대로를 돌려줬다.

평소의 도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대답이지만, 여자에게 흥미가 식은 지금으로선 호감도 하락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주, 주인님 굳이···.]

‘왜? 한솔이도 아까 그랬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까칠하게 대하시면···.]

"그, 그러니?"

그러나 도훈이 강하게 나오자 오히려 한솔이 수그러들었다. 의외로 그녀는 까칠한 타입의 남성에겐 제대로 대응을 못 하는 스타일이었다.

‘많이 불쾌했었나 보구나. 괜히 민망하네.’

한솔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살짝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몸에 열감이 느껴지고, 창피를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이게 뭐람, 내가 고작 스물세 살짜리 남자애한테 쩔쩔맬 줄이야.’

어색해진 분위기에 그녀가 사과했다.

"아깐 좀 예민하게 굴었지? 미안. 내가 그런 질문에 좀 노이로제가 있어서···."

"노이로제라뇨?"

"응···. 자꾸 주변에서 시집가라고 보채니까. 그런 말에 염증이 나서."

그쯤 이르러 도훈도 슬슬 현자 타임의 부작용에서 풀려나기 시작했다.

< 505. 교생 실습-4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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