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 교생 실습-48- >
***
배달 음식이 도착했을 때 학교에 남은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중간에 숙직하는 직원이 찾아오더니 오늘 남은 사람은 연구부장 뿐이니 퇴근길에 꼭 숙직실을 들러 초과 근무 대장에 사인하라 일렀다.
‘좋아. 마침내 둘 뿐이군.’
둘밖에 없다는 생각에 들뜬 나와는 달리 연구부장은 전혀 괘념치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애초부터 나를 남자로 인식하는지부터가 의문이다.
그녀는 도회적인 외모와 달리 짬뽕을 그릇째 든 채 국물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상대를 이성으로 느낀다면 도무지 나올 수 없는 행동.
‘하긴. 거의 10살 가까이 차이 나는 데, 나를 애송이로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본래 일밖에 몰랐던 여자다. 평생 남자와 살을 섞어본 적도 없다. 아니, 연애는 해봤나 모르겠다. 저런 타입을 뭐라더라? 건어물녀?
[일전의 최수애양과 비슷하군요.]
‘그 부잣집 둘째 딸 말이지?’
[네. 수애 양도 주인님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를 만난 적이 거의 없지 않았던가요?]
‘비슷한데 좀 다르지.’
[어떤 점이요?]
‘수애는 일단 어렸잖아. 고작 대학생이었다고.’
[아···.]
‘게다가 지독한 자위 마니아였지. 집안에 딜도 세트를 숨겨놓고 밤마다 외로운 몸을 달래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렇긴 했죠.]
‘즉, 수애는 섹스의 즐거움을 아는 여자였어. 더 정확히 말하면 남녀의 행위를 하고 싶긴 했지만, 체면 때문에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혼자 외로움을 달랬던 거지.’
[그럼 연구부장은요?]
‘서른둘까지 아다. 섹스는 물론 자위조차 안 해봤을 것 같은 진성 건어물녀. 연애 세포가 몽땅 말라 비틀어진 미친 일 중독자.’
[캬, 혹시 성 취향이 다른 쪽이 아닐까요? 생물학적으로 남자에게 끌리지 않는다든지.]
‘그럴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지.’
어쩌면 연두처럼 레즈 취향일지도 모른다.
남자를 보고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 선천적 동성애자.
그녀는 정말 남자에게 관심조차 없는 걸까?
나는 짬뽕 맛을 칭찬하며 넌지시 연구부장에게 물었다.
"이 집 짬뽕 진짜 맛있네요. 특히 국물이 엄청 진해요."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
"참, 선생님은 근데 데이트는 안 하세요?"
"···응?"
"매일 남아서 야근하다 보면 남자친구 분이 심심하실 것 같은데."
갑자기 한솔이 정색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훈군. 그런 사적인 질문은 실례 아닌가? 나랑 그 정도로 친하진 않잖아?"
"아···,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예상대로 철벽이었다.
자신의 사적 영역에 대한 침범을 눈곱만큼도 허용치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 물론 그녀가 모태솔로라는 건 정보창으로 이미 숙지한 상태다.
내가 정작 궁금했던 건 그녀의 속내였다.
{뭐야, 얘는? 다른 선생들한테 내 소문 못 들었나? 사귀는 사람 없다는 거 뻔히 아는 줄 알았는데···.}
"저, 전 그냥 당연히 있으신 줄 알고···."
"그리고 내가 남자친구가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하지?"
{당연히 있기는 개뿔. 일만 하다 보니 좋은 시절 다 지나버렸는데. 그렇다고 이 나이 먹고 아무나 만날 수도 없고.}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됐어. 짬뽕이나 마저 먹어."
마음의 소리로 속마음을 읽은 결과 절대 레즈비언은 아니었다. 다만 여느 골드미스들처럼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 보니 연애할 시기를 놓쳤고, 어느 정도 자릴 잡은 뒤 주위를 둘러보니 성에 차는 남자가 없던 것뿐이었다.
[다행히 성 취향은 정상으로 보이네요.]
‘그러게. 근데 방금 본 것처럼 너무 히스테릭한 면이 없지 않네. 누가 노처녀 아니랄까 봐.’
[히스테리까진 모르겠지만, 좀 예민하긴 하네요.]
‘어쨌든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충분해. 저 꼬장꼬장한 성격에 동성애자이기 까지 했다면 이번 미션은 여기서 끝장났을 거야.]
[한데 아무나 만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음, 송 교수 기억나?’
[네. 미술과 교수 말이죠?]
‘그 경우랑 비슷해. 여자가 사회생활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면 혼기를 놓쳐버리기 십상이거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잘나가는 대가랄까?’
[아···.]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지만, 사실 나이가 찬 여자는 결혼 상대로 값어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자식 문제도 있고.’
[그렇다고 한솔 양이 또 나이가 엄청 많은 건 아니지 않나요?]
‘서른둘이라. 애매하지. 저 나이면 결혼할 남자를 만날 시기니까. 근데 결혼 적령기의 남자 중에서 한솔의 마음에 들만한 남자는 드물 수밖에 없지. 잘난 남자가 뭣 하러 서른 넘어가는 여잘 만나겠어? 어리고 예쁜 애들도 얼마나 널렸는데.’
[좀 안타깝군요.]
‘골드미스라면서 스스로를 위로해봐야, 저기서 더 꺾이고 40대 넘어가면 진짜 남자들이 쳐다보지도 않게 돼. 아, 뭐 제비 같은 놈들은 돈 뜯어 먹으려고 달라붙긴 하겠네.’
[지금 상황에선 주인님이 딱 제비 같지 않을까요?]
‘크, 뭐? 날 여자 갈취해 먹는 양아치에 비교하는 거야?
[아닙니까 그럼?]
‘난 단지 많은 여자를 동시에 만날 뿐이야. 절대 뭘 뜯어낼 생각 같은 거 없다고.’
[하긴 목적이 다르긴 하네요. 주인님은 오로지 섹스를 통해 레벨업을 하실 뿐이죠.]
‘암튼 밥도 다 먹었으니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해 봐야겠군.’
[대책은 세우셨습니까?]
‘한솔이 어떤 취향인지는 대충 감 잡았어.’
[어떤 취향요?]
‘아무리 봐도 한솔은 남성의 육체미에 혹하는 타입이 아냐. 본능보단 이성에 끌리는 스타일이랄까? 분명 자기보다 똑똑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낄 거야.’
[하지만 지금의 주인님은 빠가지 않습니까?]
‘글쎄? 내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오히려 로시 너인 것 같은데?’
[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선생님."
"뭘 이런 걸 가지고. 다 먹었으면 이제 시작해야지?"
"컴퓨터는 어떤 걸···."
"초안은 수기로 작성해. 어차피 수정하려면 그편이 나을 거야."
"네."
"그럼 난 내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 저기 옆자리 비어있으니 거기서 해."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한솔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했다. 정말 일밖에 모른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교과서와 지도서를 펴놓고 지도안 작성을 준비했다.
하지만 교육학에 대해 무지한 내가 우수 지도안 몇 개 봤다고 지도안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것은 긴 시간 훈련이 필요한 분야였고, 정식 임용된 교사들도 제대로 해내기 힘들었다. 백지를 쳐다보자 내 머릿속까지 덩달아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이번엔 힘들어 보이는군요.]
‘로시, 이번 미션에 걸린 제약이 정신조작이나 호감도 상승이었지?’
[네. 만일 해당 계통의 스킬을 쓰실 경우 자동으로 미션은 종료됩니다.]
‘그렇다면 그것만 아니면 된다는 거네?’
[네?]
‘간만에 현자타임 가볼까?’
[오오, 현자타임! 하지만 부작용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어차피 단기간에 공략 가능한 대상은 아니니까. 오늘은 한솔의 호감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해.’
한솔은 분명 자기보다 똑똑한 남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남자들은 그녀의 성에 차지 못 한다.
사범대를 수석 졸업한 우수한 재원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자 타임을 쓰는 나는 가능하다.
지금부터 두뇌 풀가동의 힘을 보여주지.
자를 대고 지도안 틀을 잡는 데만, 30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한솔은 이따금 내 쪽을 힐끔거리더니 피식 코웃음으로 치며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마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명백한 무시.
체육교육과 출신에 운동만 잘하는 내가,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작부터 계속 줄만 긋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한솔이 한마디 했다.
"도훈아, 그래서 오늘 중으로 한 글자라도 쓰겠니?"
"아, 이게 손으로 하려니까 시간이 제법 걸리네요."
"퇴근할 때까지 초안 제출 못 하면 대표 수업자 교체하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그, 금방 쓸게요."
"어느 세월에? 퇴근도 하지 말고 너만 기다릴까? 나 한 시간이면 마무리돼."
"이제 곧 시작해요."
"그래.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한 번 해봐."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존나 쿠사리주네.’
[30분 동안 줄만 긋고 있으니 당연히 한심해 보이지 않을까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시간 끈 거야. 자 그럼, 지금부터 현자타임 개방.’
[넵, 현자모드에 들어갑니다.]
***
피이이잉-!
스킬을 발휘한 도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안개 속에 갇혀 있던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
팽팽 돌아가는 머리는 순식간에 핵심을 파악해 냈다.
‘오호라, 이게 이렇게 되는 거였군?’
도훈의 손속이 빨라지자 키보드를 두들기던 한솔이 타자치기를 중단하고 그를 힐끔거렸다.
‘뭐지? 좀 갈궜다고 아무렇게나 막 쓰는 거 아냐?’
지도서를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거칠었다. 눈으로 보는 둥 마는 둥 휙휙 책을 훑어보는 그가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풉-. 웃겨. 고작 학부생이 뭘 안다고···.’
지도안 쓰기는 수업과는 별개의 스킬이 요구되는 분야였다. 수업을 제법 한다는 교사들조차, 틀에 맞추어 지도안 설계를 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연히 학부생 수준에선 기존의 모범답안을 조금씩 고치는 게 전부였고, 한솔이 도훈에게 기대하는 수준도 딱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을 주어 현장의 어려움을 느끼게만 해도 성공이라고 보는 실습.
‘물론 나라면 학부생 때도 완벽했겠지만.’
한솔은 지도안 쓰기의 달인이었다.
이른 나이에 연구부장이란 요직을 꿰찰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실력이 전국 급으로 정평이 났기 때문이었다. 작년 중등 임용 때는 시험 감독관까지 추천까지 받았다. 그녀의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흥, 어디 한번 용 써보라고. 교사 되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테니.’
한솔은 열심히 팬을 굴려대는 도훈을 보고는 다시 업무에 매달렸다.
만능만년필을 꺼내든 도훈은 일필휘지로 지도안을 휘갈기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써도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주는 마법의 아이템이 오랜만에 힘을 발휘했다. 그의 종합적인 사고력과 분석력은 가히 정점을 찍는 상황.
한순간에 핵심을 짚어낸 도훈은 능력이 발휘되는 동안 완벽한 지도안을 만들어 냈다. 놀라운 속도로 지도안을 완성한 그가 팬을 탁 소리 나게 놓으며 한솔에게 말했다.
"다 끝냈어요."
일에 열중하던 한솔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뭐라고?"
"지도안 초안, 방금 끝냈다고요."
두뇌를 순식간에 혹사한 탓에 도훈이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현자 타임이 끝나고 부작용이 시작되자 후회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젠장. 내가 서른둘씩이나 먹은 여자 따먹으려고 이 시간에 학교에서 뭘 하는 거야?’
[주, 주인님···.]
"벌써?"
"네. 선생님이 보내 주신 거랑 비슷하게 써봤어요."
"어디 그럼 볼까?"
한솔이 기대감이라곤 전혀 없는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줄 긋는 데만 30분을 허비했던 도훈이다. 짧은 시간 완성해낸 초안이라면 메모지에 휙휙 갈긴 낙서 수준일 거로 예상했다.
‘빨리 끝내라니까 진짜 대충 해버렸나 보네. 하긴 뭐, 애초에 무리긴 했지. 집에서 해오라고 했으면 어디서 퍼오기라도 했겠지만.’
한솔은 도훈이 테이블에 던져 놓은 지도안을 눈으로 쭉 훑었다. 조악한 글씨긴 했지만, 생각외로 양이 빼곡했다. 글씨만 내리갈겼다고 해도 상당한 양이었다.
"좀 썼네?"
"일단 초안이라고 하셔서 약안으로 작성해 봤어요."
"그래. 한 번 읽어 볼게."
여전히 기대감은 1도 들지 않았다.
빨간 펜을 손에 쥔 그녀는, 열등생 시험지에 빨간 비를 내릴 때처럼 잘못된 점을 지적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볼수록 한솔의 눈에 점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학부생 솜씨라곤 믿기지 않는 완벽한 지도안이었다.
아니, 교육 과정을 전체를 완벽히 이해한 베테랑 수준에서나 가능한 진술이었다.
동기유발부터 학습 목표의 제시, 경쟁과 협동을 통한 수업 진행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한솔의 입이 점점 벌어지는데 도훈이 한술 더 떴다.
"선생님께서 발문에 신경 쓰라 해서 최대한 교사의 발문 쪽에 힘을 줬어요."
"그, 그러니?"
한솔은 내용을 휙휙 건너뛰어 교사의 발문 부분에 주목했다.
학생과 상호교감하면서도 수업의 핵심 목표를 관통하는 발문은 가히 천재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 전공이 아니긴 했지만, 수많은 지도안을 검토했던 한솔은 도훈이 불과 10여분 사이 휘갈긴 지도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세, 세상에 이걸 방금 앉은 자리에서 작성한 거라고?’
믿기질 않았다. 지도안 쓰기의 대가라는 자신도 이 정도로 빠르게 초안을 잡을 수 없었다. 도훈의 그것은 오랜 시간 공들인 모범 정답에 가까웠다.
한솔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혹시··· 참조한 자료 있니?"
"네?"
"아니 내가 아까 나눠준 자료에서···."
"네 보긴 봤는데, 해당 차시는 없더라고요. 이게 선생님이 보내 준 자료에요."
도훈이 내미는 프린트물을 한솔이 낚아채듯 빼앗았다. 단원과 차시만 보고 빠르게 훑었지만, 도훈이 작성한 지도안과 관련된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한 결론은 두 가지뿐.
하나는 도훈이 우수 지도안을 암기해 와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베껴 썼거나···.
‘아, 아니면 설마 ···천재?’
도훈을 바라보는 한솔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 504. 교생 실습-48-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