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8. 교생 실습-42- >
도훈이 혜진의 이름을 언급한 건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혜진을 라이벌로 의식하는 진아의 경쟁심을 부추기려는 의도.
"걔는 어디길래 학교 안에서 깨톡을 한데요? 원래 자주 연락하는 사이세요?"
"아니 처음인데."
"네?"
"깨톡 보낸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아, 근데 뭐라고 보냈어요?"
진아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다른 여자의 문자 내용을 궁금해하는 것은 본심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차 싶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도 도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담임 선생님 어디 계시는 지 아냐는데?"
"걔도 웃기네요? 교무실 찾아가서 직접 물어보면 될 걸 가지고."
"아까 나랑 같이 나간 걸 봐서 그랬나 보지."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오빠, 여자 맘을 너무 모르시는 거 아니에요?"
"여자 마음?"
한 길 물속보다, 열 길 사람 속을 더 잘 아는 도훈이었지만, 일부러 순진한 척 되물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정작 진아라면서.
"이번이 처음 이랬죠, 깨톡?"
"어."
"그거 구실 찾는 거잖아요."
"구실이라니?"
"오빠랑 연락하고 싶으니까. 아무 이유 없이 보내긴 민망하니까 적당히 핑곗거리 만들어 연락하는 거죠."
"혜진이가 대체 왜?"
"제가 봤을 땐 혜진이도 오빠한테 마음이 있는 거 같은데요?"
"진짜?"
"그쵸. 시작은 그런 식으로 하구선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 거죠. 그러다 가끔 약속도 잡고, 식사도 하다가···."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도훈의 질문에 한창 열을 올리던 진아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여, 여자잖아요. 같은 여자니까···, 당연히."
"혹시 경험담 아냐?"
"아니에요! 저 모쏠이거든요?"
"아항, 그렇구나."
‘모쏠 맞네.’
[정보창에서도 처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니. 처녀인 건 당연한데 남자 사귀어 본 경험도 없는 것 같다고.’
[그렇군요. 아무튼, 보는 것과 달리 재밌는 성격이네요. 도도하고 자존심만 센 여잔 줄 알았는데, 주인님 앞에서 엄청 허둥대네요.]
‘그러게. 게다가 자기 심정을 혜진이한테 투사하는 것 좀 봐. 자기라면 그리 했을 테니, 혜진이도 그러려니 하나 보지. 연애 안해본 티 너무 내는고만.’
"아, 아니 뭐 정확히 말하면 사귈 기회가 없던 건 아닌데, 그러니까···."
진아는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모쏠이라고 밝힌 것이 어딘지 결격사유가 있는 여자처럼 보일까 우려하는 것이었다.
"고백도 몇 번 받아봤고···."
"그랬니?"
도훈이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핸드폰을 연신 쳐다보며 깨톡 문자를 의식하는 인상을 풍겼다. 인상을 찌푸렸다가 핸드폰을 다시 뒤집는 등 골똘히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실은 네 말 듣기 전까진 혜진이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 줄 전혀 몰랐어. 한 번도 티를 안 내서."
‘우이씨, 괜히 얘기했나? 그냥 모른 척할걸.’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진아는 속이 상했다. 어떻게든 그의 관심을 돌리고 싶었지만, 도훈은 여전히 혜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관심 있던 여자가 뽕브라를 찼다는 사실만으로 돌아서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감정이란 본래 손바닥 뒤집듯 사라지는게 아니므로.
허나 그럴수록 진아는 도훈이 더욱 탐이 났다.
오히려 도훈이 먼저 관심을 가지고 대쉬했더라면, 이 정도로 마음이 끌리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남자들을 수없이 많았고 최근에도 더러 있었다.
한 번만 만나자, 맛있는 것 사주마, 주말엔 뭐하느냐. 등등.
그녀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남자들은 귀찮을 정도로 연락을 해왔다.
최대한 완곡히 거절 의사를 밝혀도, 열 번 찍으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끈기 있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진아는 백번을 찍어도 아닌 건 아니라는 주의였다.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기엔 스스로가 너무 아까웠으므로.
그런 진아가 도훈에게 욕심을 냈다.
‘···빼앗고 싶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진이 같은 흔녀한테 밀렸다는 게 너무 화가 나. 솔직히 내가 어디가 부족해서?’
자신이 금이면 혜진은 은이다.
자신이 화려한 장미라면, 혜진은 들판의 널린 풀꽃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도 모를 초라한 잡초말이다.
그런데도 도훈은 혜진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도훈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이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뽕이나 차고 다니는 슴기꾼에게 자연산 C컵이 밀릴 순 없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녀의 각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훈이 다시 진아에게 물었다.
"진아야."
"네, 말씀하세요."
"실은 아까 네가 했던 말 때문에 혜진이한테 조금 실망한 게 사실이야. 물론 오해는 마. 가슴이 작아서가 아니라, 사람을 속였다는 게 뭐랄까···. 좀 그렇잖아."
"그쵸. 어찌 보면 사기나 마찬가지니까요."
진아가 ‘사기’에 악센트를 강하게 넣으며 대꾸했다.
"근데 뭐···. 네 말대로 그쪽으로 콤플렉스가 심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단 생각은 들어. 오죽하면 그랬을까도 싶고."
‘어라, 이게 아닌데···.’
"너 아까 나 도와줄 수 있다고 했었지?"
"네?··· 아, 네. 뭐. 오빠가 원하신다면야···."
진아가 떨감을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꾀에 빠진 꼴이다.
괜히 혜진 또한 마음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흔들렸던 도훈의 마음이 다시 혜진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혜진일 화제로 올려선 안 됐다. 그녀와 비교하기 보다, 차라리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어야 했다.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았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속내를 감추다 자승자박이 되고 말았다.
평소 남자와 연애를 안 해본 것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연애의 주도권은 늘 자신에게 있었다. 만나주는 것도, 밥 한 끼 먹어주는 것도 늘 스스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끌려다니는 처지가 되자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을의 위치에 한 번도 서보지 않았던 그녀는 서툴고, 실수 연발이었다. 절대로 하지 말라는 짓만 연거푸 저질렀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까딱하면 남의 연애 들러리만 서게 생겼잖아?’
그때 도훈이 자연스레 진아의 손을 잡았다.
"내가 혹시라도 혜진이랑 잘 되면 너한테 꼭 밥 한 번 살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라."
"그, 그럴 필요까진···."
우연히 맞닿은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근대는 마음을 들킬까 봐 조심스럽게 손을 뺀 진아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궜다. 평소 도도한 그녀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다. 너 모쏠이랬지? 내가 그냥 소개팅시켜 줄까?"
"아···."
모쏠이라는 단어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능력이 부족해 여태껏 남자 한 번 못 만나본 여자라고 낙인찍히는 느낌이었다.
"우리 과가 사범대치곤 남자가 많거든. 혹시 어떤 스타일 좋아하니? 최대한 맞춰 줄 수 있는데."
‘오빠 같은 사람이면 돼요.’
"글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역시 키는 큰게 좋겠지?"
"작은 것 보단 낫죠."
"180? 아님 185? 내가 185야."
"그러시구나. 전 훨씬 더 큰 줄 알았어요."
"한 번 서볼래?"
"서요?"
도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진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스킨십이 점점 능숙해지는 도훈이었다.
"키 차이를 한 번 재보자. 이 정도면 되겠니?"
도훈이 키를 대기 위해 진아 앞에 바짝 붙었다. 훅- 풍기는 사내의 진한 냄새에 진아의 호흡이 가빠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야 보이는 얼굴은, 너무나도 잘 생겨 보였다.
‘아아···, 도훈 오빠가 내 남친이었음 얼마나 좋을까···.’
"괘, 괜찮은 거 같아요."
"오케이. 그럼 185 정도로."
도훈이 다시 의자에 앉자 진아도 따라 앉았다. 선키보다 앉은키 차이가 덜 나는 것으로 보아 다리가 유난히 긴 체형 같았다. 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자, 쩍 벌어진 가슴 또한 넓어 보였다.
키 크고 깡마른 모델 같은 남자보다 등 빨도 있고 밸런스가 꽉 잡힌 도훈에게선 수컷의 냄새가 났다. 검증된 운동능력 또한 허풍선이 패션 근육관 차원이 달랐다. 그는 진짜 남자였다.
진아는 문득 도훈의 품에 꼭 안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아아, 몸도 너무 멋있어. 어쩜 저렇게 셔츠가 잘 어울릴까?’
살짝 스판끼가 들어간 슬림형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도훈의 우람한 상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눈이 즐거운 진아였다.
"나이는 동갑이 좋겠니?"
"네?"
도훈의 몸매에 흠뻑 취해있던 진아가 질문을 놓치고 말았다.
도훈이 씩 웃으며 다시 친절하게 물었다.
"아니 소개팅 상대로 동갑은 어떻냐고."
"도, 동갑은 별로예요."
"그럼 연하는?"
"남자로 느껴지질 않아서. 그냥···. 도훈 오빠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키는 185 쯤, 스물 네 살 이상이라···."
도훈이 합당한 후보를 찾는지 눈을 한 쪽으로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진아는 소리치고 싶었다.
‘오빠 말하잖아요. 이 바보야.’
진아는 도훈이 자신의 속마음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도훈은 정말 진아의 속내를 속속들이 읽고 있었다.
[호오, 진아양이 주인님에게 완전히 빠져든 것 같은데요?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뭐 별거 없어. 밀당의 법칙을 응용했을 뿐.’
[밀당의 법칙이요?]
‘다른 여자들하고 달리 진아는 당긴다고 끌려온 성격이 아냐. 휘둘리는 걸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그런 쪽이랑 거리가 먼 성격이란 말씀.’
[그래서 밀어낸 건가요?]
‘그렇지. 계속 자존심을 건드리고, 잠깐 잘해줬다 또 무시하고. 그게 반복되니까 오기가 생긴 거지.’
[역시 주인님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군요.]
‘게다가 혜진이의 존재가 결정적이었어.’
[혜진양요?]
‘응. 아까 허둥대는 거 봤지? 내가 자신이 아니라 혜진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아니까 갑자기 승부욕이 발동한 거야. 본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거든.’
[과연 훌륭하십니다. 이제 거의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지금 속마음을 읽어보니 호감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아. 점점 내 외모에 끌리고 있거든.’
[외모는 처음부터 그대로 였는데요?]
‘그게 바로 감정의 힘이란 거야. 감정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면, 평소 그냥 스쳐지나던 걸 자세히 보게 되거든.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구나. 머리에 살짝 염색을 했구나. 핸드폰은 저 기종을 쓰는구나.’
[호오.]
‘사람의 감정들은 불쑥 생겨나는 거 같지만, 첫눈에 확 반하는 경우는 없어. 오히려 물에 젖듯이 조금씩 스며들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흠뻑 빠져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지. 지금 진아는 내가 엄청 잘생겨 보일 거야. 그녀에게 있어 나는 갖고 싶은 남자니까.’
[대단하십니다. 이젠 도사가 다 되신 것 같네요.]
‘그럼 슬슬 혜진이를 핑계로 진아를 벗겨먹어 볼까나?’
"듣고 보니까 딱 난데?"
"네?"
"아니 네가 말한 소개팅 후보 말이야. 내가 제일 가깝네."
"그, 그렇네요."
"아니야. 잘 찾아보면 몇 명 있을 거 같아. 서로 윈윈해야지, 안 그래?"
도훈의 말에 살짝 기대를 품었던 진아는 다시 김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알면서 놀리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휴. 오빠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도훈이 계속 물었다.
"일단 나부터 밀어줘. 그래야 나도 널 밀어주지."
"그래요."
"그러면 우리가 좀 더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니?"
"그, 그렇죠."
"자. 여기에 진아 네 번호 적어줘."
도훈이 핸드폰을 건네며 말을 덧붙였다.
"학교에서 못 하면 톡으로 얘기하게."
"네."
진아가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남겼다.
‘어쩌면···. 이렇게 도훈오빠랑 연락하다 보면 내게도 기회가···.’
진아가 우편 배달부 이야기를 떠올렸다.
3년간 내리 편지를 보냈더니, 정작 여자친구가 3년간 편지를 전달한 우편배달부와 바람났다는 스토리.
‘그래.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혜진이를 밀어주는 척 하면서 계속 도훈 오빠랑 친하게 지내다 보면, 오빠도 내 매력을 알아 줄거야.’
진아가 음흉한 속셈을 품고 전화번호를 남기는 중이었다. 그때 혜진에게서 깨톡이 도착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상단 바에 미리 보기 된 멘트가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진아는 화면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도훈에게 말했다.
"저 오빠, 혜진이한테 메시지가 왔는데요?"
"아, 그래? 잠깐만."
도훈이 폰을 도로 가져가더니 자기만 볼 수 있게 화면을 기울이며 뭐라고 답장을 남겼다. 진아는 속으로 궁금해졌다.
‘무슨 사진이었을까? 왜 학교에 있는데 사진을 보냈을까?’
"근데 무슨 사진 같던데···."
혼잣말로 중얼걸렸지만, 도훈이 못 들은 척 묵살했다.
"번호 이거 맞지? 그대로 저장한다?"
"아, 네···."
도훈이 통화를 걸며 자신의 번호를 남겼다.
"내 번호야 저장해둬."
"네."
"아무튼, 이제 우리 비밀 동맹인거다?"
"동맹 좋네요."
"근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난 체육관에서 수업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좀있다 연수 시간에 보자."
"네."
"오늘 일 혜진이한텐 절대 비밀이야. 알았지?"
"알겠어요."
도훈이 환하게 웃으며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진아는 도훈의 이름을 저장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사진이었을까?’
< 498. 교생 실습-4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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