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4. 교생 실습-38- >
연구부장은 2층 교무실에 있었다.
교무실은 항상 분주한 분위기다.
벽에 붙은 커다란 게시판엔 재적인원과 월중 행사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고, 파티션으로 구획된 책상에선 수업 없는 선생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들여 보고 있었다.
사람이 원체 들락날락하니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구석에 자리한 연구부장 자리로 이동했다.
"저, 선생님."
키보드를 두들기던 연구부장 김한솔이 고개를 돌려더니 동그란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렸다. 진하게 쌍꺼풀진 눈이 유난히 커 보였다.
‘스타일 귀여운데, 나름?’
연구부장은 나를 보고는 작업 중이던 창을 내리고 의자를 돌려 앉았다.
"왔니?"
그녀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도도한 인상이다.
"교감 선생님까지 통과됐어. 도훈이 네가 대표 수업하는 거로."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게 감사할 일인진 두고 봐야 할걸?"
"네?"
한솔은 살짝 겁을 주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거렸다. 유난히 새하얀 손목이 움켜쥐면 부러져 버릴 것처럼 가늘다. 왠지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여자다.
"일단 교과서랑 지도서 챙겨 줄게. 따라와."
한솔과 함께 교무실을 나섰다. 살이 살짝 비치는 하얀 블라우스에 A라인 스커트를 입은 뒷 태는 어지간한 오피스 걸보다 굴곡이 빼어났다.
‘늘씬늘씬한 게 참으로 박음직스럽구만.’
[역시 쉽지 않은 상대로 보이네요. 미션에 스킬 제한 걸린 걸 알고 계시죠?]
‘원래 공략은 어려워야 제맛이야. 높은 산일수록 오르고 나면 정복감은 더하는 법이니까.’
내가 뒤를 졸졸 따르는 동안 침묵이 불편했는지 한솔이 물었다.
"어제 회식은 재밌었니?"
"네. 선생님은요?"
학교에 사람이 원체 많다보니 학년별로 따로 회식을 진행했다. 한솔은 교무팀에 배속되어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다.
"난···, 뭐 남은 일이 있어서 못 갔어."
"직원 체육도 안 나오시지 않았나요?"
"응, 운동엔 딱히 취미가 없어서."
"아···."
몇 가지 정보를 파악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일을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워커 홀릭이다. 또 운동을 잘하는 것만으론 그녀에게 어필하긴 힘들어 보인다. 나의 장점을 원천봉쇄하는 철벽 앞에 왠지 모를 호승심이 들끓었다.
‘참. 시건방진 게 매력이란 말이야.’
[주인님, 이런 취향이셨습니까?]
‘아니. 본래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애들은 강아지처럼 귀엽잖아.’
[한솔 양은 강아지과 라기보단 고양이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렇게 도도한 애들은 콧대를 확 꺾어 버리고 싶어져서 말이야.’
[그럼 더 분발하셔야겠군요. 여전히 호감도는 평균선으로 밖에 안 보이니까요.]
‘기회가 올 거야, 분명.’
학습준비실은 모퉁이를 돌아 복도 끝에 위치했다. 창고로 쓰이는 곳이다 보니 인적이 전혀 없었다. 한솔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며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조용하고 음침한 게 딱 내 스타일이다. 일단 장소하나 섭외했고.
"이쪽은 교과서랑 지도서같은 학습 자료를 모아놓은 곳이야. 가운데 책장에 남은 교과서들이 있을 거야."
"네."
"어디 보자, 2학년 체육 교과서가 어딨더라?"
한솔이 책장을 훑으며 책을 찾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국영수를 위시한 주요 과목 뿐이다. 아무대로 예체능 과목이다 보니 배치된 위치 역시 구석으로 보였다.
"저깄다."
한솔이 맨 윗줄을 가리켰다. 위로 높은 책상은 내 키보다 커서 고개를 들어야 겨우 보일 정도였다. 한솔이 까치발을 들고 책을 꺼내는데 블라우스가 살짝 들리며 잘록한 허리가 드러났다. 우연히 드러난 속살은 군침을 삼킬만큼 매혹적이었다.
‘이야, 라인 보소?’
[주인님. 고개 돌리십시오. 변태로 오인받을 수 있습니다.]
‘괜찮아. 전혀 모르는 눈친데.’
좁은 책장에 교과서를 어찌나 욱여넣었던지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는데 책이 쉽게 빠지질 않았다. 한솔은 한참을 낑낑대며 안간힘을 썼다. 까치발을 들고 허리를 펴자 마치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굴곡진 바디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늘씬하면서도 탄력적인 몸이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로 봐선, 별다른 노력 없이 축복받은 유전자인 것 같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응, 책이 영 안 빠지네.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꽂아놨담?"
"그러게요."
나는 그녀의 뒤에서 팔을 들어 살짝 튀어나온 교과서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덮치는 포즈가 만들어지자 한솔이 움찔 놀라는 게 보였다.
‘후후, 스킨쉽 좋고.’
힘을 주면 바로 빠질 것 같았지만, 일부러 낑낑대며 시간을 끌었다. 책장과 나 사이에 낀 한솔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옴짝달싹 못 한 체 뻘쭘하게 서 있었다.
단정히 묶은 그녀의 머리에서 기분 좋은 샴푸 냄새가 피어올랐다.
‘캬, 여자 냄새.’
[너무 킁킁거리지 마십시오. 변태처럼 보이니까요.]
‘말 나온 김에 진짜 변태처럼 해줘?’
"와, 이거 진짜 안 빠지네요?"
나는 거짓말로 연기하며 손 끝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체를 한솔의 엉덩이에 바짝 밀착시켰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성숙한 여인과 살을 맞대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마도 한솔 역시 긴장될 것이다.
‘부비부비 좋고!’
[와, 진짜 주인님···.]
엉덩이에 뭐가 자꾸 닿는 걸 느꼈는지 한솔이 흠칫 놀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의심이 커지려는 순간, 나는 잽싸게 책을 끄집어냈다.
"됐다. 뺐어요."
"···으, 응. 잘했어. 그 옆에 지도서도."
"넵."
아무렇지 않은 척 곧바로 지도서를 빼내자 한솔도 살이 닿은 걸 우연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느낌이 왔으려나?
그녀는 살짝 땀이 나는지 귀밑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새침함이 몸에 밴 여자 같다.
"책 다 챙겼으니 이만 나갈까?"
"네."
그녀가 민망함에 서둘러 나가려고 하는데 내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저 연구부장님."
"응?"
"혹시 동영상 시디는 없을까요? 부록에 보니까 포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시디? 잠시만···."
그녀는 다시 돌아와 책장을 꼼꼼히 훑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시디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부록을 같이 모아놨을 텐데···."
윗 칸을 뒤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한솔은 쪼그려 앉아 밑 칸을 뒤졌다. 자연스레 내려다보는 각도가 만들어지며 벌어진 그녀의 블라우스 틈을 훔쳐보았다.
‘오, 슴골도 상당한데?’
늘씬한 몸에 비해 가슴도 제법이었다. 혜진이 몸도 마르고 가슴도 마른 전형적인 빈유 체형이라면, 한솔은 늘씬하게 빠진 몸에도 있을 곳은 다 있었다. 키만 좀 더 컸으면 모델을 해도 잘 어울렸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슴골을 감상하던 나는 한솔이 "찾았어."라고 외치는 소리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찾으셨어요?"
"어, 밑에 있었네. 근데 시디는 왜? 영상 자료를 틀려면 체육관에 프로젝터 설치해야 할걸?"
"수업 중 틀진 않고, 참조만 하려고요. 동작을 직접 봐야 이해하기 편하거든요."
"그래. 이제 나가자."
"넵."
학습준비실을 나오자 한솔이 손부채를 흔들었다.
"휴, 좀 덥구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죄송은 무슨. 당연히 찾아줘야지. 그나저나 날씨가 갈수록 더워지는 거 같아."
어느덧 5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아직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 학교는, 가만있어도 살짝 땀이 스며 나올 정도였다. 이 때문에 어제 밀폐된 체육교구실에서 혜진이와 한판 벌일 때 금세 땀에 절었었다. 그게 땀인지 애액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도 점점 봄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된 지 좀 됐지. 참, 너 지도안은 써 봤니?"
"수업에서 대충 배우긴 했어요."
한솔이 불쑥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심기를 건드렸을까?
"···대충?"
"예?"
"혹시나 수업도 대충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포기해. 다른 학생 구할 테니까."
완벽주의자인 그녀의 면모가 드러났다. 그녀에게 인정받으려면 외모보다는 실력이 우선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확실히 외모에 혹하지 않는 타입이나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나는 당황한 척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제 말뜻은 수업에서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스쳐 지나가면서 봤다는 뜻이었어요.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죠."
한솔이 팔짱을 꼈다. 블라우스가 눌리며 옹골찬 가슴이 도드라졌다.
"아무튼, 너 오늘부터 제때 집에 갈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네. 각오하고 있어요."
"오후에 1정 교사 연수 집에 나오는 우수 사례 줄 테니까, 그거 보고 약안부터 작성해봐. 아웃라인이 잡히면 하나씩 손봐줄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는 무슨···. 나중에 나 원망이나 하지 마. 난 얼렁뚱땅 좋게좋게 넘어가는 성격 아니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넵."
"그럼 나중에 보자."
한솔은 한껏 으름장을 놓더니 다시 교무실로 돌아갔다. 교재를 들고 선 나는 그녀의 매끈한 뒷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여자군.’
[김한솔 선생 정도면 대광중 최고 미녀라 부를만 하죠. 콧대 높을만 합니다.]
‘아니. 얼굴도 얼굴인데, 오늘 보니 바디라인이 더 작살나네. 어쩌다 저런 미인이 워커 홀릭이 되었을까? 능력 있는 남자 꼬셔서 시집갔음 편히 살수도 있을 텐데.’
[사람마다 추구하는 목표는 다른 법이니까요.]
‘내가 여자에 집착하듯이?’
[주인님이야 전생이 너무 불우했으니 일정 부분 이해는 됩니다.]
‘어쭈, 네가 웬일로?’
[물론 주인님의 사명을 처음 들었을 땐 놀랐습니다. 보통의 플레이어들은 그런 목표를 두지 않거든요.]
‘그럼?’
[대체로 인류에 공헌하는 공익적인 사명이 많죠. 전쟁영웅들은 나라를 구한다거나, 지도자들은 굶주린 백성을 긍휼히 여긴다거나 하는···.]
‘지금 시대에 전쟁이 웬 말이야? 그리고 요새 굶어 죽는 사람이 어딨다고.’
[확실히 과거와 달리 근래에 뽑힌 플레이어들은 다소 개인적인 소망을 바라더군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거나, 위대한 기업을 일궈내는 등.]
‘나는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평생 돈만 벌다가 비명에 갔으니. 젊은 시기엔 여자나 실컷 따먹는 게 최고지.’
[목표대로 잘하고 계십니다.]
‘그나저나 심심한데 혜진이나 괴롭히러 갈까?’
***
쉬는 시간이 되자 참관 수업을 마친 교생들이 하나둘 교사 연구실로 모여들었다. 1교시가 비어있던 도훈은 먼저 연구실에 자릴 잡고 혜진을 기다렸다.
‘크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킨다고 진짜 노팬티로 학교에 올 줄이야. 걔도 참···.’
도훈은 쉴 새 없이 치마를 끌어 내리던 혜진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때 혜진보다 먼저 도착한 진아가 도훈을 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오빠,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어. 진아 구나. 너도 잘 들어갔니?"
공주병에 걸린 그녀는 어제 배구 사건 이후로 도훈에게 유독 상냥하게 굴었다.
"네. 교무 부장 선생님께서 집 앞까지 태워다 주셨거든요."
"그래. 참, 나 대표 수업 확정됐어."
"축하드려요. 원하던 대로 되셨네요."
"운이 좋았어. 경쟁자도 딱히 없었으니까."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직은. 말이라도 고마워."
"동 학년에서 대표 수업하는 데 당연히 도와야죠. 필요한 거 있으심 언제든 부탁하세요."
"그래, 그럴게."
[진아양은 너무 잘 해줘선 안 됩니다.]
‘나도 알아. 이쯤 하고 슬슬 질투심 유발하려고.’
"그나저나 혜진이는 왜 안 오지?"
"혜진이요?"
"응. 수업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
"뭐···. 교실을 멀리 갔나 보죠."
혜진이 이름을 들먹이자 진아의 표정이 다소 우울해졌다. 호감을 주던 이성이 다른 여자를 언급하는 것이 당연히 기분 좋을리 없었다.
그때 혜진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도훈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지각이네."
"아, 아니에요. 잠깐 화장실 좀···."
"그래. 다음 수업도 있어?"
"아뇨. 빈 시간이에요."
"잘됐네. 나도 빈 시간인데."
도훈은 혜진이 등장하고부터는 더이상 진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낀 신세가 된 진아가 민망해하며 물러섰다.
‘뭐야. 혜진이 오고 나니 나는 안중에도 없네? 으. 자존심 상해. 내가 쟤보다는 훨 나은데.’
진아는 여자들 사이에서 한 번도 꿀린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의 원천은 옷을 입어도 티가 나는 커다란 가슴에 있었다.
‘혜진이 쟤는 딱 봐도 절벽···. 어? 뭐지?’
질투에 찬 시선으로 혜진을 바라보던 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지 모르지만 어제와 뭔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곧 그 위화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헐, 혜진이 쟤 뽕 넣은 거야?’
혜진의 가슴이 어제보다 커져 있었던 것이다. 어제 함께 체육관 샤워실을 이용하며 알몸까지 봤던 그녀로선 당연히 혜진의 가슴이 커진 원인을 뽕이라고 생각했다.
‘참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슴에 패드를 넣어 오다니. 대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진아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당연히 정답은 하나였다.
‘꼴에 같은 반 됐다고 도훈 오빠한테 눈독 들인다 이거지? 확 오빠한테 뽕이라고 말해 버릴까 보다.’
진아는 기회를 엿보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494. 교생 실습-3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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